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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늘 청교도 신앙을 재발견해야 하는가? (청교도 저작물 소개1)

강대식 2013. 8. 29. 10:24

왜 오늘 청교도 신앙을 재발견해야 하는가?/ 김응국

 

로이드 존스는 “이삭처럼 옛 우물을 다시 파야 부흥이 온다”라고 늘 역설했다. 그런데 그가 염두에 둔 ‘옛 우물’이란 바로 청교도 신앙이었다. 그는 평생 청교도 신앙 강좌를 인도했으며, 청교도 글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청교도’라는 평판을 얻었다.

‘설교의 황제’라고 칭송을 받는 찰스 스펄전도 청교도 설교의 전통에 굳게 선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존 번연과 리처드 백스터의 책들을 끼고 살았다. 그는 청교도 지도자들의 글에 달통한 자였다.

 

이렇게 복음 제시에 능통하고 뜨거운 부흥의 영을 간직한 인물들은 청교도 신앙의 감화를 흠뻑 받은 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청교도 신앙이 복음에 강하고 심령 부흥에 강한 것인가? 왜 오늘 우리는 청교도 신앙을 재발견해야 하는가?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제도의 종교로 고착되어 가고 있다. 심령의 변화 없이 습관과 문화와 조직과 프로그램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청교도들이 반대하고 타협을 거부한 영국국교회 체제를 떠올리게 한다. 영국국교회는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은 자동적으로 거듭난 자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청교도는 형식적인 성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것을 역설했다. 또한 구원 얻는 믿음에 따르는 회개를 강조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교회의 형식과 프로그램에 잘 따르면 거듭난 자라고 쉽게 생각하지는 않는가? 거듭냐야 할 필요성조차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거듭남과 (교회라는) 조직에 충성을 맞바꾸지는 않았는가? 성령 없이 조직과 프로그램으로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회개 없는 값싼 영접주의만이 도처에서 활개치고 잊지 않은가? 그 결과, 교회는 나오되 심령의 변화가 없고 인격과 삶의 변화가 없는 ‘죽은 신앙’을 가지게 되고 말았다.

 

나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신앙을 누구에게 전하려고 하는가? 그런 무기력한 신앙을 ‘선교’라는 이름으로 해외로 수출하려고 하는가? 아서라. 불량식품 수출하면 안 되듯이 ‘불량복음’ 수출하면 안 된다. 지금 누구에게 독초를 먹이려고 하는가?

 

청교도들이 특별히 강조한 것은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에게는 거룩하고 정결한 생활의 열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자’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청교도를 율법주의자로 매도한다면,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반법주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참된 칭의에서 나오는 참된 성화를 회복해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가 말년에 암에 시달리면서도 미국의 기독교 대학에서 강연하면서 피를 토하듯이 외친 말은 “미국의 크리스천들은 행복은 추구하나 거룩함은 추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오늘 이 외침을 한국의 물화(物化)된 크리스천들도 들어야 한다. 한국 기독교를 향해 안티가 많은 것은 우리에게 세상과 다른, ‘구별된 거룩한 생활’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회개의 열매, 거룩한 생활의 열매 없이 기독교는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청교도 신앙의 후예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의 신앙은 그 청교도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세속화된 신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규장 퓨리탄 북스’가 우리의 냉랭해진 신앙에 하늘의 거룩한 불을 붙여줄 것이다.

 

첫 번째로 선택한 책이 토마스 왓슨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토마스 왓슨은 영국국교회의 가톨릭적 신앙에 타협하기를 거부해 목사직에서 쫓겨나 숲속, 헛간, 외양간을 전전하며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피와 눈물로 복음을 사수한 사람이었다. 그의 설교에는 피와 살이 튀는 메시지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었다.

 

찰스 스펄전은 토마스 왓슨을 설교의 스승으로 삼았다. 17세기 청교도 신앙의 사자후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왓슨이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 경외함’에 대해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다. 오늘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듬뿍 바른 모습으로 한국에 수입된 최신 유행의 미국제 복음주의가 하나님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말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9:10)

이 책을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알자, 힘써 하나님을 경외하자!

이 일은 우리의 사활이 걸린 일이다!

 

- 토마스 왓슨,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pp 4-9, 규장 편집국장 김응국목사의 글

 

 

 

 악한 시대를 능히 이겨내는 믿음이 있다/ 토마스 왓슨

 

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 말하던 시대

 

‘진리의 글’은 믿음의 토대이다. 말라기서 3장16,17절 말씀은 참으로 거룩하고 고결하고 영광스럽다. 말라기 선지자는 제2성전이 건축된 이후에 살았으며, 그와 동시대 인물로는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있다. 그는 구약시대에 진리의 나팔을 울린 마지막 선지자였다.

 

말 3:16,17의 내용

경건한 사람의 성품

- 하나님을 경외한다.

- 서로 피차 말한다.

-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긴다.

경건한 사람이 누리는 복

-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귀 기울여 들어주신다.

- 하나님께서 기념책에 기록하신다.

- 하나님의 보상이 있다.

*하나님께서 소유하신다.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끼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용광로와 같은 시련을 겪고서도 전보다 더욱 악해졌다(말3:13,14). 칼빈은 <말라기서주석>에서 “제사장들이나 일반 백성들이나 한 가지로 치우쳐 부패했다. 그들은 고삐가 풀린 듯이 오랫동안 온갖 사악한 행위를 저질렀다”라고 말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 말하던” 시대는 바로 그런 시대였다.

신앙에 대한 열정은 악할 때 오히려 더욱 강해져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방탕할수록 성도는 더욱 순전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했고,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 편에서 말했다.

 

2 시대가 악할수록 강해져야 하는 믿음

 

우리는 시대가 악할수록 더 거룩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하라”(마5:48), “주의하라”(엡5:15), “우상숭배자들을 멀리하라”(고후6:17), “세상에 빛을 발하라”(빌2:15)라고 명령하신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신다(출23:2). 진리가 박해와 비방과 모욕을 당할 때는 그 진리를 사랑할 수 있어야만 참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죽은 물고기는 강물 아래로 떠내려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간다. 마찬가지로 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악한 시류를 거슬러 올라간다. 죄에 순응하며 시대의 유행과 형식에 따라 믿음을 재단해 맞추면서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사람들은 최선의 길을 찾기보다 가장 안전한 길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대중의 의견을 숭배하며 순결한 양심보다 안전한 삶을 선택한다. 뱀은 사람들의 부패한 심성을 부추겨 진리가 아닌 권력을 지향하는 종교를 선택하게 만든다.

 

우리는 부패한 시대에 믿음의 열정을 더욱 뜨겁게 불태워야 한다.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은 시대에 거룩한 열정을 불어넣어 시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세상과 정반대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 모두 무성한 가시덤불 속에 피어 있는 백합과 장미처럼 살아가자. 더러운 오물 속에서도 순수함을 유지하자. 짠 바닷물에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는 물고기처럼, 연기 나는 풀무 속에서 환한 빛을 드리우는 횃불처럼 살아가자.

 

3 성도의 명예를 지켜라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시고 크게 기뻐하신다. 말라기서 3장에 언급된 성도들의 거룩한 모임과 대화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셨다. 음란한 시대에 거룩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명예다. 시대의 불신앙이 깊어질수록 은혜는 더욱 선명히 빛을 발해야 한다. 암브로스, “기독교인은 겨울철에도 푸르름과 신성함을 잃지 않는 침엽수 같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방탕한 시대에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아직 믿음이 연약한 새 신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고 그들의 떨리는 무릎을 굳건하게 만들어준다(사35:3). 경건한 사람의 열정은 횃불처럼 타올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불을 붙여준다.

 

순교자들의 신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사랑하는 열정을 심어주었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순교자들의 피는 사람들의 믿음을 굳세게 해준다. 기독교인이 신앙을 버리고 거짓 종교를 떠받드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의의 열매를 맺을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불신앙의 열매를 맺는 것은 파멸을 알리는 불길한 징조다.

 

우리는 부패한 시대에 거룩한 삶의 능력을 아낌없이 보여주어야 한다. 다수와 함께 지옥에 가는 것보다 소수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4 은혜의 열정과 생명력을 유지하는 비결

 

1) 마음이 세상을 향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타오르는 불에 흙을 뿌리면 불길이 꺼지듯이 세상은 신앙의 불길을 꺼뜨린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2:15). 세상은 온갖 유혹으로 우리를 현혹하며, 은빛 창날로 우리를 찔러 죽인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돈 몇 푼에 의와 양심을 저버린다.

 

2) 자원하는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자신이 성실한 길을 택했다고 말하는 시편 기자처럼(시119:30)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선택하라. 계산속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패한 시대에 거룩한 삶을 살고 싶다면 사심 없이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순수한 동기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거룩함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며, 안락과 번영을 약속하는 것들이 모두 사라질 때도 복음을 굳게 붙잡는다.

 

3) 진리에 충실한 성품을 지녀야 한다.

나무가 구부러지는 이유는 재질이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실함은 굳건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악한 시대에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굳건히 서야 한다. 진리의 띠는 진리에 충실한 성품을 가리킨다.

 

4)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를 거룩한 삶을 이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거룩한 마음과 용기를 북돋워주며 세상에 대한 사랑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분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죄악을 택하지 말고 도리어 “생명과 돈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라고 외치자.

 

5) 악한 자들의 조롱과 비난에 굴하지 않아야 한다.

하늘의 별들은 ‘곰자리’, ‘용자리’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불려도 그 찬란한 빛이 조금도 퇴색하지 않는다. 비난은 십자가의 작은 파편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비난 하나 견디지 못한다면 어떻게 십자가의 고난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비난은 영광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징표이다(벧전4:14). 절름발이가 똑바로 걷는 우리를 보고 비웃는다고 해서 발을 절뚝거린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6)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구해야 한다.

습관화된 은혜는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지탱하고 활기차게 만드는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 안에 거하는 은혜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전15:10). 새롭게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으로 날마다 은혜가 더해져야만 거친 세상의 풍랑을 용기 있게 헤쳐 나갈 수 있다. 부패한 세상에서 뜨거운 신앙 열정을 유지하려면 시온산처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 토마스 왓슨,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pp 16-27

 

 

  거듭남은 위대한 영적 변화이다 / 제임스 뷰케넌

 

우리는 개인적 성품과 공적 권위에 있어서 우리의 지성에 가장 확실하고도 무오한 진리를 강력하게 확신시키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로부터 말미암은 매우 엄숙한 선언 앞에 서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또는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이 변화는 “영적인 변화”이다.

이 변화의 대상과 주체, 이 변화가 성취되는 수단 등이 모두 완전히 영적이다.

이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영혼 내부에서 발생되는 영적 변화’이다. 이것은 내적이며 영적인 혁명을 뜻한다. 지성을 비춰주고 양심을 각성시키며, 그 의지를 복종케 하고 그 감정을 정련하고 정화하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롭게 지으심’을 받게 하는 지성과 마음의 온전한 변화를 뜻한다. 이 변화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곧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제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된 것이다.

 

또한 성령님이 이 변화의 주체, 즉 주인이시다. 영혼은 오직 ‘영으로 거듭날 때’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여전히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이다. 어두워진 우리의 지성에 빛을 비추어 밝혀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게 하시는 일이 바로 성령님께 속한 일이다.

 

성령께서는 죄를 생각나게 하심으로써 잠자고 있는 우리의 양심을 깨우시며, 그 능력의 날에 우리를 친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우리의 패역한 뜻을 복종시키신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강퍅하고 패역한 마음을 제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그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믿음으로 역사하신다.

 

이러한 영적 변화는 영적인 수단으로 말미암아 발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또는 말씀 안에 포함된 진리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벧전1:23)으로 되었으며,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성령의 거룩케 하심과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종종 교훈과 확신 후에 뒤따르며, 점진적인 거룩의 과정을 양산한다. 이 변화는 실상 그리스도의 계시된 뜻에 따라 복음으로의 초청에 기꺼이 순응하고 동의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에게 교훈을 받고 죄사함을 얻으며, 통치를 받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복종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죄인이 이것을 경험하기만 하면, 하나님과 자신의 전인적인 관계, 영원에 대한 태도, 죄인 자신의 견해와 감정들, 자신의 만연된 기질과 습관들은 완전히 변화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전혀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정말 엄청나게 위대한 변화가 될 것이다. 전에는 전혀 경험하거나 맛보지 못했던 삶으로 진입은 정말 위대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성경에는 이러한 영적인 변화에 대한 많은 비유들의 여러 독특한 특징이 제시되어 있다. 이 모든 비유들은 우리에게 이 영적 변화의 위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준다. 이는 영혼의 ‘갱신’이라 불리며, 전혀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의 새롭게 됨’, 즉 영혼이 다른 모양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영혼의 ‘이행(移行)’, 즉 영혼이 한 위치 또는 한 장소로부터 다른 위치와 다른 장소로 옮겨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영혼의 ‘회복’, 즉 새 삶을 입는 것을 뜻한다. 이는 영혼의 ‘부활’, 즉 죽음으로부터 일어서는 것이다. 영혼의 ‘새 창조’, 즉 그것을 만드시 분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영혼의 ‘씻음’, 즉 오염으로부터의 영혼의 정화와 영혼의 ‘치유’, 즉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영혼의 ‘자유’인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 영혼의 ‘각성’, 즉 죄의 잠으로부터 깨어남을 뜻한다.

 

이렇게 엄청나게 위대하고, 정말로 영적이며 완전히 전인적인 이 변화에 대하여 우리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여기서의 하나님 나라는 가견적 교회가 아니다. 영적이며 불가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단코 이 지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승리하는 천상교회에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종을 울리는 경고의 말씀이다.

 

이 거듭남은 모든 인간에게 전 우주적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회심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정죄를 당하며 저주를 선고받게 될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죄인의 마음에 하나님의 보좌를 설치하는 것과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시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사랑과 모든 감정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동원하는 것에 있다.

 

- 제임스 뷰케넌,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 pp 19-33

 

* 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성령과 그 사역에 관해 1860년 이전에 쓰여진 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임스 뷰케넌이 쓴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과 같은 책입니다”라고 했다.

 

* 박순용목사는 “제임스 뷰케넌(1804-1870)의 이 책은 성령에 관한 책 중에서 안심하고 추천할 만한 최고의 책으로 꼽힌다. 이 책의 장점은 성경에 충실하다는 것과 종교개혁적인 신학에 그 뿌리를 둔다는 것, 그리고 교리와 적용에 있어 그 양 날개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존 플라벨의 <하나님의 섭리>

 

찬송, “세상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는 우리가 시련을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복을 상기하면 넉넉히 이길 용기와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존 플라벨(John Flavel, 1628-1691)은 <하나님의 섭리>(The Mystery of Providence)에 대해 자신의 피와 살로써 증거할 수 있었던 최고의 적임자였다. 그는 청교도로서 한때는 목사직에서 파면당하여 교회 강단에 설 수 없어서 숲속에서, 벌판에서 소수의 무리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핍박을 받는 가운데, 고난 중에 임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섭리를 맛볼 수 있었다.

 

플라벨과 동시대인인 영국의 왕당파 역사가인 우드조차도 “플라벨은 존 오웬이나 리처드 백스터보다도 더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플라벨의 친구였던 존 겔핀은 자신의 플라벨 회고록에서 그의 세 가지 특성, 즉 근면성, 복음전도의 열정, 자상한 성품에 주목했다.

 

플라벨은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1820년, 그의 글들을 모아 모두 여섯 권으로 된 전집이 간행되기도 했다. 그는 이론보다 실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실천을 강조한 그의 책은 영혼을 고치는 의사로서 그가 지닌 탁월한 역량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섭리>는 1678년 초판 발행됐다. 발행된 지 300여년이나 흘렀지만 ‘섭리’에 대해서, 이 책 이상 탁월한 책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종합적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적용에 뛰어나다. 가히 '섭리에 대한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안겨줄 것이다.

 

플라벨은 하나님의 섭리를 다루면서 이론적인 강론을 늘어 놓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온 마음을 기울여 감동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역설했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는 섭리를 체험한 자신의 경험과 교회사에서 발견되는 구체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한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적용하는 방법에 정통하다. 그는 성도 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분별해낼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신앙에서 비롯되는 의심이나 과도한 신비주의에 조금도 치우치지 않았다. 그의 설명은 인간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성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믿음의 열정을 활활 불타오르게 한다.

 

우리는 먼저 만사가 우리의 뜻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고, 또 지금은 무엇을 행하고 계시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 다음 주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시는 일에 열심히 협력해야 한다.

 

이 책 <하나님의 섭리>는 일기 쉽지만 깊은 생각을 자극하고, 성경적인 초점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현재 역사하심에 대한 면밀한 의식을 갖게 한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격변의 세대에 씌어졌던 이 책은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무게감으로 전달될 것이다.

 

여호수아 시대에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 바닥의 열두 돌을 길갈에 세워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을 잊지 않도록 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인생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함으로써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잊지 않게 될 것이며, 현재의 고난도 넉넉히 이길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존 플라벨의 <하나님의 섭리>가 당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복을 세어보게 하여 세상을 살아갈 힘과 용기를 더해줄 것이라 확신한다. 이 책을 통해 당신을 응원하시는 하늘 하나님의 응원가를 들어보라 !

 

- 존 플라벨, 『하나님의 섭리』, pp 4-9, 규장 편집국장 김응국목사의 서문

 

 

  섭리의 은혜를 기억하여 주를 영화롭게 하라 /존 플라벨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축복이나 은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과거의 경험을 올바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면,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겸손한 태도로 섭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크고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섭리의 경험을 신앙일지에 기록하는 것도 그러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모든 신자가 시간을 내어 신앙일지를 기록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신앙일지는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유익을 끼친다.

 

신자들이 서로 성경을 읽는 가운데 앞으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섭리의 말씀들을 모아서 기록해두고, 또 직접 경험한 섭리까지 더해둔다면 참으로 보물과 같은 귀한 자산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매순간 우리의 삶과 자유와 관심사에 영향을 미친다. 일용할 양식도, 필요한 물질도, 안전한 삶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섭리를 통해 받은 은혜를 기록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수없이 경험해왔다. 이러한 경험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형편없는 기억력을 의지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이 찾아오면 이전의 경험은 쉽게 파묻히는 것이 보통이다.

 

문자화된 기억력은 이런 위험에서우리를 보호할 뿐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 세상에 사는 동안 경험했던 하나님의 섭리의 추억을 잃는 것에 비하면, 금은이나 토지나 가재도구를 잃는 것은 그다지 큰 손실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 귀한 보물을 신앙일지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잘 간수하라. 그리고 새로운 문제나 두려움이나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칠 때마다 “전에도 이런 고통을 겪어본 적이 있나? 이것이 처음 있는 시련인가? 아삽이 그랬던 것처럼(시77:5) 옛날 일들을 떠올려보자”라고 생각하며 다시 신앙일지를 들춰보라.

 

현재의 시련과 위험만 크게 보고, 과거의 시련과 위험을 경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항상 다음에 닥치는 시련이 가장 크게 보이는 법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축복이나 은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에게 육지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오래된 경험일수록 그런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위험이나 두려움도 현재의 그것들만큼 심각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과거의 경험을 올바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 존 플라벨, 『하나님의 섭리』, pp 372-375

 

 

부흥과 부흥주의를 분별하자 /이안 머레이

 

부흥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과 관계 있다. 첫째, 성령님의 영향력이 모든 건전한 회심에 관여하시는 것이다. 둘째, 이 영향력이 다른 때와는 달리 어떤 특별한 경우에 더욱 풍성한 방법과 위대한 능력으로 임하시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동시에 발생할 때 항상 참된 종교와 신앙의 부흥이 임한다. - 조엘 호스

 

첫 번째 엄청난 성령의 부으심을 위해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와 오순절이라는 계절이 선택된 것은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때, 그 곳에서 단 한 번의 성령의 역사로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역시 성령님께서 실제로 몇몇 대도시들과 작은 도시들 뿐만 아니라, 배움의 전당인 대학들과 신학교에도 능력으로 임하심을 보는 것은 아주 특별히 하늘에서 임한 신호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 결과 부유한 자들과 큰 영향력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며’, 따라서 진리의 챔피언들과 구원의 전도자들은 더욱 많아지게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거의 매일 발생하는 선교 사역의 폭발과 수천 수만권 유포되는 종교적 출판물들과, 가능한 전도 수단들이 모두 함께 역사상 유례없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확장시켜 줄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보다 사탄이 더욱 무서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에 드는 그럴 듯한 부흥으로

겉치레하여 참된 부흥을 위조하는 방법을 택했다.

부흥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고 사람이 고안하고 계획한 인본주의의 옷을 입을 때,

그 부흥은 언제나 겉만 그럴싸한 위조된 부흥이 되는 것이다. - 가드터 스프링

 

나는 단지 사람이 부흥이 아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부흥을 바랄 뿐이다.

나는 소위 부흥사나 부흥설교자를 원하지 않는다. - 존 에인절 제임스

 

부흥의 계절에는 그 누구도 증명하거나 변호할 수 없는 사건들과 말들이 발생한다.

만일 우리의 기술이 옛 복음보다 더 큰 결과들을 양산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우후죽순처럼 자라는 독버섯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나무에서 참되게 자라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 찰스 스펄전

 

나는 우리가 정말 성령 하나님의 교리를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령님의 적용을

믿는다면, 수많은 기교와 방법론으로 무장한 복음주의의 현대적 접근법들이 전혀 불필요

하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지난 수세기 동안 교회가 해 왔듯이 성경에 묘사된 참된 부흥이 우리 시대에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과, 부흥을 위해 기독교 교리 교육의 기초를 쌓아 가는 일에 좀더 큰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믿는다. - 마틴 로이드 존스

 

- 이안 머레이, 『부흥과 부흥주의』, pp 15-18

 

 

부흥, 성령의 부어주심 / 이안 머레이

 

성령의 사역은 그 안에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있다(요3:34).

성령께서 교회와 교통하시고 성령의 ‘실제적 영향’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알려지는 것은

중보자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시는 그리스도 때문이다.

 

성령이 계속 주어지는 정도는 매우 다양하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교회 내의 소생하는 영적 번영과 성장은 성령 하나님이 새롭고 광대한 부어 주심의 영향으로 확인될 수 있는 사건들이다(행4:31-34;11:5-16;13:52-14:1). 기독교 역사를 통해 조망해 볼 때, 하나님의 교회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자비의 계절에 비범한 하나님의 영의 교통하심에 따라’ 새로운 활력과 성공으로 고양되어 왔던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더욱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시기에 하나님의 사역은 엄청난 속도로 수행되었고 종종 갑작스러운 회심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기이한 방법으로 성령의 부어 주심이 강력하게 임했던 사도시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시대에 회심들은 얼마나 생생하고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기이한 부어주심이 발생하는 때는 언제든지 그 부어 주심의 결과로

위대한 성공이 나타나는 때다.

 

휫필드는 ‘이 지역들에 임한 하나님의 영의 열렬한 미래를 예감’했으며 ‘광대한 부어 주심’을 목격했는데 그것은 ‘1739년부터 1740년의 겨울에 미국에서 시작된 위대한 변화’였다. 새뮤얼 블레어는 조지 휫필드가 목격한 같은 변화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구원의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영을 비범한 방법으로 복스럽게 부어주시면서 우리를 방문하신 것은 1740년 봄이었다.’ 이와 똑같이 조나단 디킨슨도 그 시기를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그들은 또 한 번 하나님의 영이 특별하고 명백하게 부어지고 흘러넘치는 것을 경험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흘러넘침’, ‘세례’ 그리고 ‘영이 부어짐’이란 단어들은 모두

‘신앙의 부흥’이란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복음적 지도자들은 부흥의 시기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언급할 때

교회 내에서의 성령 하나님의 정상적이며 정규적인 사역을 무시하거나 홀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참된 기독교가 오직 1740년에 임한 방식과 같이 획일적으로 전파되는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들은 단지 역사 안에 성령이 예외적으로 주어지는 매우 갑작스러운

시기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심지어 이 성령의 부어 주심은 일반적으로 교회가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을 때,

그리고 성경적 신앙에 대한 무관심이 사회일반에 만연해 있을 때 종종 발생하는 것이었다.

새뮤얼 데이비스는 성령의 광대한 부어 주심 혹은 교통하심만이 ‘무기력한 교회에 종교개혁을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성령의 부어 주심의 복된 결과’에 대한 이사야서 32장 13-19의 설교에서 그는 ‘성령의 부어주심은 황폐해진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위대하고도 유일한 방법이며, 국가적 재앙과 비참함을 효과적이고도 최종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수단이며 평화를 확립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근거’라고 주장했다.

- 이안 머레이, 『부흥과 부흥주의』, pp 56-58

 

 

자유주의 신학은 영적 간음이다. 성적 난잡을 불러온다/ 프란시스 쉐퍼

 

영적 간음과 육체적 간음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간음을 범하고 딴 길로 가면 그 다음 세대는 곧 육체적 간음을 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세대는 넘치는 힘으로 이것을 증명한다.

영적 간음을 방치하면 얼마가지 않아서 그 땅에 육체적 간음이 독버섯처럼 솟아 오른다.

 

1930년대에는 자유주의가 미국의 전 교회를 거의 장악했고 1960년대의 우리 세대는 난잡한 성행위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 난잡한 성행위는 영국에도 그러했고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적 간음과 육체적 간음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적 그리스도로부터 떠나면 하나님의 눈에는 그것이 불신자의 극악한 혼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가증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의 탈선은 신랑과 신부의 가장 중심된 관계의 사실을 망쳐버리기 때문이다.

 

영적 간음인 배도는 그것보다 훨씬 더 악하다. 그런데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 입장에 처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분명히 보아야 된다고 제안한다. 오늘날의 자유신학을 생각해 보라.

 

자유신학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또 신성하신 역사적 그리스도를 부인한다. 자유신학은 성경이 언어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인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도 부인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인도주의이론(人道主義理論)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내신 말씀보다 더 높인다. 그들은 신(神)이 아닌 그들 자신들의 관념을 신으로 만든다.

 

우리는 우리와 대화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애써야 하고 예의 발라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는 이론이 영적 간음이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타협해서는 안된다. 이 영적 간음은 악하다. 육체적 간음보다 훨씬 악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우상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악하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훨씬 더 위대한 광명과 축복을 저버리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옛 몰록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하다.

 

몰록에 관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힌놈의 골짜기에 있던 몰록은 유대인들이 섬겨서는 안된다고 계속 경계를 받은 이방 신이었다. 그는 초산아(初産兒)를 제물로 받는 신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동우상(銅偶像)의 등에는 구멍이 있는데 거기에 불을 피워놓고 모든 부모들은 벌겋게 달아서 펴진 몰록의 팔에 그들의 초산아를 바친다고 한다. 부모는 감정을 표현해서는 안되고 아이가 몰록의 손에서 죽을 때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북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오늘날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 서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게 오는 많은 사람들, 나와 같이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몰록보다 더 악한 것에 파멸된 자녀들이다. 소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녀가 현대신학에 삼키우고 있는데도 그들은 우두커니 곁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다.

 

우리도 지나온 배경에서 이 일들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 세대의 후기 기독교는 이 자유신학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현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흔적, 흘린 모든 눈물, 여러분들이 고의로 유산시킨 모든 아이, 여러분들이 체험한 모든 마약 여행 등은 교회가 탈선하여 불성실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문화권 내에는 그 몸에 몰록에게 화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대는 몰록의 손에 있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단순히 예술애호가로서 곁에 서서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도 무익한 공론의 장구를 크게 쳐서 귀를 막아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는 통분하며 행동을 해야 한다.

 

자유주의신학을 무엇에 비교하면 좋을까? 그것은 잠언 30장20절에 하나님께서 간음하는 여자에 대하여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 하느니라”한 말과 비교할 수 있다. 얼마나 적적한 비유인가?

 

그들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에 다소 침륜된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자유주의 신학자(구식 자유주의 신학자이건 새로운 실존주의 신학자이건 간에)는 이 입장에 서 있다. 교회 뿐만 아니라 후기 기독교의 전 문화도 그들의 불성실에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영적 간음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선물을 받고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떠나 몰록에게 미혹되어 아이를 바치는 부모들보다, 더 파괴적인 것을 경배하는 자유주의 신학보다 더 더러운 음녀도 없다.

 

우리는 현대의 배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하며 서로 권고하여 아무도 현대 배도에 동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도 우리의 구주와 주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의 영적 간음 가운데서라도 매일매일 본질에 있어서나 생실생활에 있어서 신성하신 신랑의 다정하고 참된 신부가 되어야 한다.

 

신랑은 우리에게 교리적 충실성을 원하실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의 우리의 사랑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교리적 충실성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날마다의 사랑이다. 논리에서가 아니라 실천 생활에서의 사랑을 원하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 프란시스 쉐퍼, 『20세기말의 교회』, pp 161-183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하나의 자연종교이다/ 그레샴 메이첸

 

현재 자유주의가 기독교의 전통적 용어를 자유롭게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는 상위한 일개 종교일 뿐만 아니라 전혀 별개 종류의 종교에 속하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가 기독교의 교리를 하나씩 순차로 그의 적에게 양도한 후에 남아 있는 잔여물은 결코 기독교가 아니고 별종의 범주에 속하여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하나의 종교이다. 그 근원은 자연주의이다.

 

기독교와 현대과학을 타협시키려는 자유주의의 기도(企圖)는 실제에 있어서 기독교의 모든 특징을 포기함으로써 그 남아 있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기독교가 아직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세상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그 막연한 종교적 갈망에 불과한 것이다. pp14-19

 

현대는 안일과 환락의 시대가 아니고 열성과 기도로써 역사할 시대다. 무서운 위기가 확실히 교회 중에서 발생하고 있다. 복음적 교회의 교직자 중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대군(大軍)이 있다. 전통적 용어의 이중적 사용에 의하여 또한 견해의 상위를 단순히 성경해석상의 상위에 불과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에 의하여 신앙의 토대 바로 그것에 대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침입하였다.

 

교회는 성경의 속박이 거의 공공연하게 포기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리가 무용한 번쇠사의 유치장으로 퇴락할 수 있는 정도의 지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에는 절망을 용납할 여지가 없다. 다만 우리의 희망을 모래 위에 세워서는 안된다. 우리의 희망은 위기에 대한 맹목적 무지 위에 세워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고귀한 약속 위에 홀로 세워야 한다. 교직자나 성도가 다같이 이 시련의 날에 있어서는 새로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경주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사랑과 충성으로 감행될 것이며 당파적 열정이나 개인적 원한은 제거될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그가 만일 십자가의 복음과는 상이한 복음을 전한다면 배척을 받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결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이여, 원하옵시는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결정을 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시련을 당하고 있는 학대보다 더 암흑한 시대에 있어서도 교회를 인도하였다. 우리는 이교주의가 기독교의 명칭하에 교회 중에 침입하였음을 보고 있다.

 

그러나 제2세기에 있어서도 동일한 싸움이 있었고 또한 그것은 승리로써 종결하였다. 다른 일면에서 현대 자유주의는 인간의 공적에 의존한 중세의 율법주의에 흡사하다. 그러나 가장 적당한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또 하나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의 영혼은 시련을 받고 있다. 우리는 다만 그의 피로써 우리를 대속하신 구주를 신뢰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미래는 하나님의 수중에 들어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어떠한 방법으로 그의 뜻을 성취할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현존의 교회가 자유주의에게 완전히 정복을 당하여 사람들이 영혼의 근본적 요구의 만족을 현존교회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 외부에서 발견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기독교 단체가 형성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딘가에 반드시 구속함을 받은 남녀성도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겸손하게 단합하여 그의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선물로 인하여 그리스도에게 감사하여 그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에게 경배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 단체만이 홀로 영혼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오늘날 인간의 마음 속에 왕왕히 망각하고 있는 한 가지 갈망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그의 형제들과 교제하려는 심각하고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갈망이다. 그러나 현재의 연합들은 주에게 반항하는 세상과의 연합을 의미할 때가 많다. 평화의 매는 줄로 이루어진 성령의 참된 연합과는 얼마나 상이한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대한 갈망이 진실로 이루어진 때가 있다. 현재와 같은 투쟁의 시대에 있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식탁의 주위에 충심에서 집합하는 회중이 있다. 진실로 목사다운 목사가 있다. 그러나 많은 도성에 있어서 이러한 회중은 발견하기 어렵다.

 

세상의 투쟁에 피로한 나머지 사람들은 영혼의 안식처를 구하여 교회로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는가? 슬프다. 그들은 거기에서도 역시 너무나 빈번히 이 세상의 요소를 발견한다. 설교자는 명상과 능력의 은밀한 장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의 설교를 풍부케 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도 없이 인간의 지혜와 심대한 죄의 문제에 대한 안일한 해결책으로 그의 설교를 채운다. 세상의 싸움이 하나님의 전당에까지 침입하였다. 그리하여 평화를 구하려 교회를 찾아 나온 사람들의 마음은 진실로 비참한 것이다.

 

투쟁으로부터 피할 곳은 없는가? 사람이 영생의 싸움을 준비할 수 있는 휴식처는 없는가? 세상의 투쟁들을 다 망각하고, 십자가의 발 아래 차고 넘치는 감사의 희열 속에서 연합하기 위하여 2인이나 3인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는 곳은 없는가? 만일 이러한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이다. 그리고 그 집의 문지방 아래서는 피로한 세계를 소생시킬 강물이 흘러 나올 것이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pp 229-233끝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영혼을 보여준다!/ 존 칼빈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은혜의 반갑고 기쁜 메시지를 뜻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세상과 및 세상의 덧없는 부와 쾌락을 멸시하라고 가르치며, 이 비교할 수 없는 복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을 온 마음으로 바라고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경건치 못한 자들은 세상에서 무절제하게 헛된 쾌락을 즐기면서 영적인 복을 거의, 아니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류를 교정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관해 메시지를 선포하라고 명하셨는데, 이 메시지를 특별히 ‘복음’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참되고 실제적인 행복을 얻을 수 없으며 하나님 안에서만 복된 삶에 필요한 모든 부분을 완전하게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복음’이라는 단어를 심지어 율법과 선지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에까지 확장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늘 말씀하시듯이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야 비로소 복음이 선포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을 ‘복음’이라고 표현하는 방식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은혜의 장엄한 선포”라고 정의한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복음은 ‘대사’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하나님 자신과 화목케 하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아버지의 사랑을 보증해 주셨으므로 그분은 복음의 주제로 가장 적합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마침내 승천하셨음을 서술하는 기사들이 특별히 ‘복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처음 세 복음서의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데 반해, 요한복음 기자는 그리스도의 직분에 대해,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이 갖는 능력에 대해서 설명하는 교리를 좀 더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발생한 능력과 열매를 알려주는 교리는 여느 세 복음서보다 요한복음에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처음 세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주는 반면, 요한은 그분의 영혼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를 이해하는 문을 여는 열쇠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교회를 위하여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네 명의 복음서 기자들에게 그들이 써야 할 내용을 각각 받아쓰게 하셨고, 그들은 작자 자신의 분량을 기록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복음서 전체는 하나의 완전한 작품을 이루었다. 마치 하나의 입에서 나오는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이 네 복음서를 서로 연관시켜 통합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사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은 순서상 네 번째로 기록되었지만, 읽을 때는 처음에 읽는 것이 더 낫다. 먼저 요한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 존 칼빈, 『칼빈주석 요한복음Ⅰ』'요한복음의 주제', pp16-19

 

 

진리가 있는 곳에 승리가 있다 In Veritate Victoria! / 스펄젼

 

“우리는 무서운 속도로 하락하고 있다.”

“나는 다음 50년을 위하여 기꺼이 개들의 밥이 되겠다.

그러나 먼 미래는 나의 정당성을 입증해 줄 것이다.”

 

“승리는 진리 안에 있다. 결국 진리는 정책을 이길 것이고, 미신을 타파할 것이며,

오류를 극복할 것이다.”- 진리가 있는 곳에 승리가 있다. In Veritate Victoria!

 

학창시절에 그릇된 영향을 받은 자들이 올바른 목사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만약 그가 1세기 전의 신학대학들이 그 목적에 있어서

잘못되었다고 느꼈다면, 지금의 신학대학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능력있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1857년4월13일 타임스는 스펄젼의 특별한 성공을 실례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으로 하여금 외치게 하기 위해서는 강한 감정과 분명한 진리가 있어야 한다.

큰 음성은 그것을 뒷받침해 줄 ‘강력한’ 교리를 필요로 한다.”

 

스펄젼은 “교회가 앞장서서 대학을 세워야 한다는 것은 거룩한 상식이다. 대학이 교회의

첫번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854년 런던에서 많은 대중을 상대로

사역하던 그의 목회 초두부터, 강한 복음주의적 견해를 지닌 설교자들이 더 많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5세기 초에 칸 가까이에 있는 작은 섬에서 은둔하고 있던 중에도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던 호노라투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아일랜의의 전도자 패트릭,

또한 그 옛날의 호노라투스와 콜룸바가 그랬듯이 종교 개혁 시대의 위클리크, 루터,

칼빈 등이 전도를 위하여 주의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종교의 영향력이 계속되고

이 땅에 전파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선지 학교이다.”

 

“우리는 종교 개혁 당시의 루터와 칼빈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사람들은 그들이 접촉했던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인상과 우수한 글로 감명을

줌으로써 당시의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여러분들이 비텐베르크에

간다면 루터뿐 아니라 루터의 대학과 루터에게 영향을 받은 모든 학생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제네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스코틀랜드는 칼빈이 존 낙스를 가르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늘리고 또한

젊고 진지한 사람들의 마음 판에 자기의 견해를 써서 그것을 널리 알리지 않고는

어떤 민족에게도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칼빈의 명백한 상식 때문에

그 작은 스위스로부터 다른 국가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었는가?

교회들은 이 사실을 잊은 것 같다.”

 

그는 대학을 설립하였으며, 800명이 넘는 학생들의 훈련을 맡아 관리하였고

(최초 1명부터 시작하였다), 목회자들의 연례수양회를 인도하였으며, 이러한 모든 것들을

그의 “인생의 일과 기쁨”으로 생각하여, “다른 모든 일은 이 일을 위한 발판에 불과하며

이 일에서 얻는 기쁨이 나의 목회 성공으로 주어지는 기쁨보다 크다”고 했는데,

이런 사실은 오늘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스펄젼은 성경 신학이 가장 중요한 과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 대학은 청교도적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모리스보다 맨턴을,

로버트슨보다 차녹을, 보이지보다 오웬을 좋아할 만큼 구식이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해석은 낡은 은혜의 교리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해준다. 이 당당한 초석 위에서,

우리 가운데 불확실한 잡음이란 있을 수 없다.”

 

스펄젼은 학생들이 훈련받는 방법에 대하여 당시의 많은 사람들(그리고 우리들)과 그

의견을 달리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가르침은 명확하게, 교조적인 형태로 주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교수들은 여러 사람들의 “견해”를 제시하고 최종적인 선택은 학생들에게

맡기는 폭 넓고 자유로운 방법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강하고 명확하게 선포하고 그 신학에 흠뻑 잠기어 그것을 위해 죽을 각오도 되어 있을

정도로 전통적인 신학에 대한 단호한 지지를 보여야 한다!”

 

스펄젼이 세운 목회자 대학의 교장 조지 로저스도 스펄젼을 대변하여 말했다.

“칼빈주의 신학은 교조적으로 가르쳐진다. 이 말은 공격적인 의미에서 교조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 우리는 위대한

복음적 진리의 곡해나 현대적인 은폐에 대하여 조금도 공감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대 신학보다 청교도 사상을 더 선호한다.”

 

“성공적인 목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 있다. 그것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학의 학위나 고전적인 명예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능력 있는 설교를 하고,

청중들의 마음에 호소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대학의 야망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 목회자 대학의 계획은 처음부터 설교자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지

학자들을 배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 목적을 위하여

자기 사람들을 교육하게 놓아두고,

교회는 교회가 해야 할 특별한 봉사를 위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하자.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고, 성경을 해석하며, 죄인들을 구하고,

성도들을 교화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스펄젼, 『목회자들을 위하여』, pp 7-21, 이안 머리의 ‘서문’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영적 기갈에서 벗어나라/ 마이클 호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예언서를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된 주제가 있다.

그것은 곧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들려주고,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그런 말을 외치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최근에 들려주신 말씀인 것처럼 전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사사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의 시대는 물론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온 땅에 만연하다.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를 약속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도처에 우글거리고,

목회자가 메니저나 심리치료사나 코치나 연예인으로 바뀌어 버렸다.

 

중세 시대의 교회도 이스라엘처럼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 탓에

참된 예배보다는 우상 숭배를 선호했다.

우리 시대 역시 말씀을 중시하기는커녕 더욱 냉소적으로 대하면서

시각적인 문화에 깊이 빠져들어 있다.

1980년대의 어느 팝 그룹은 마치 학술계와 대중문화 속에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반영하기라도 하듯이,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노래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곧 성경의 종교이다.

마케팅의 성공을 도모하기 위해 시각과 감각의 경험을 추구하는 문화를 수용하기보다는,

설령 현대 사회와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 하더라도 종교개혁자들처럼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에 힘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절대권을 지닐 뿐만 아니라

교리와 행위에 관해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규범을 제시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형성하고 구성한다.

성경은, 심리학이나 경영학, 사회학, 정치학 등과 같은 분야에서 빌려 온

세속적인 관점으로 현실을 정의하려는 태도를 소극적으로 묵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의 가설과 전제를 뒤집어 엎는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구분했다.

과학과 예술과 철학을 비롯하여 ’세상의 것‘에 해당하는 학문 문야에서는

불신자들도 지식과 경험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과 명령, 구원 사역과 같은 초자연적 진리는

철학이나 과학, 예술이나 심리치료와 같은 지식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세속적인 지혜는 행성들의 공전에 관한 진실을 알려 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과 죄와 구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설교는 이른바 ‘문화적 적절성’을 지향한다.

이 말은 소비자 중심의 접근 방식을 따르는 예배를 묘사하는 말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율법의 두려움, 죄인과 그들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대리 속죄의 필요성을 전제로 한다.

즉, 십자가의 도는 인간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가

스트레스나 열등감, 또는 주어진 잠재력의 미숙한 발현이 아니라,

원죄와 자범죄로 구성되는 죄,

곧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태도임을 분명히 가르친다.

 

시각적인 것을 중시하는 소비자 중심의 사회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또 다른 기갈을 초래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들면 심판을 받는다는

경고와 명령으로 이루어진 율법이

오늘날에는 한갓 개인의 행복에 도움을 주는 원리 정도로 축소되어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의식을 가지기는커녕 기껏 불만족을 느끼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주요 교단의 교회들만이 아니라 복음주의 운동의 주체 세력 안에서조차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창조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성장과 성숙한 신앙생활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다.

 

이제 우리는 성경의 충족성을 확신하는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말씀을 대언하는 막중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성경만을 전해야 한다.

오늘날 개신교의 상황은 성벽을 공격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침략자들에게 성문 열쇠를 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개신교가 교리적 노선을 맥없이 포기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우리 모두 추수의 주님께 이 영적 기근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다가올 시대에 영적 풍요를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자.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9:11,12).

 

그의 예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지만,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 조엘 비키 외, 『오직 성경으로』, pp 14-20

 

 

영적 고전을 읽고 청교도들을 영적 스승과 친구로 삼으라/ 조엘 비키

 

경건한 삶을 자극하는 책들은 경험적 삶을 돕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영적 고전을 읽고, 위대한 저자들을 초청하여 여러분의 영적 스승과 친구로 삼으라.

청교도들은 이런 작품들을 쓰는 데 탁월한 사람들이다.

 

모리스 로버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청교도의 펜에서 나온 설교, 논문, 소책자, 일기, 역사 또는 전기 가운데

어떤 식으로든 영적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다양한 주제에 따라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경험적 책들을 읽으라.

죄에 대해 민감해지도록 경험적 삶을 길러주는 책으로서

랄프 베닝의 <역병 중의 역병>을 읽으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아이작 암브로우스의 <예수를 바라보라>를 읽으라.

 

고통 속에서 평안을 찾기 위해서는 새뮤얼 러더퍼드의 <서한집>을 읽으라.

 

시험에서부터 위안을 얻기 위해서는 존 오웬의 <죄와 시험>을 읽으라.

 

거룩함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존 플라벨의 <마음을 지키는 법>을 읽으라.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읽으라.

성령과 진리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로 고양되기 위해 읽으라.

 

그러나 무엇을 읽을 것인지 선택하라.

여러분의 모든 독서를 성경의 시금석에 따라 판단해 보라.

오늘날 너무 많은 기독교 문헌이

아르미니우스 신학이나 세속적 사고로 크게 얼룩져 있는 잡담에 불과하다.

이런 잡담에 낭비해 버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시간보다는 영원, 전문적 업적보다는 영적 성장에 유익한 책을 읽으라.

 

존 트랩의 경고를 유념하라.

“물이 통과하는 토양의 맛을 보는 것처럼, 영혼도 읽는 책의 저자들의 맛을 본다.”

어떤 책을 집어 들기 전에 이와 같이 자문해 보라.

 

“그리스도는 이 책을 인정하실까?

이 책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사랑을 증진시키고,

죄를 정복하고 영속적인 지혜를 제공하며

다가올 세상을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되겠는가?

아니면 다른 책을 읽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이 더 나을까?”

 

여러분이 읽은 좋은 책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주라.

경험적 독서에 대한 대화는 경험적 삶을 촉진한다.

 

청교도들은 확신의 핵심 근거가 하나님의 약속들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이 약속들은 은혜의 주관적 증거와 성령의 내적 증언을 통해

신자에게 점점 실제적인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성령의 적용이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은 자기기만과 육욕적인 오만으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자기 검토는 단순한 내성과 속박과 율법주의로 나아가고 말 것이다.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기독교는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객관적 영역과 주관적 영역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라.

 

- 조엘 비키, <개혁주의 청교도영성> 737-739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1)

 

이 서신은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서 복음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인이 시간을 들여서 한 단어 한 단어를

마음 속에 새겨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묵상할 가치도 있다.

 

이 서신은 영혼의 일용할 양식이며

아무리 자주 읽거나 많이 연구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칠 수 없다.

당신이 이 서신을 더 많이 탐구하면 할수록

이 서신은 보다 더 귀하게 되며 그 향기가 더 좋아질 것이다.

 

이 서신은 그 핵심에 있어서

성경 전체를 조명하기에 거의 충분할 정도로 밝게 빛나는 등불이다.

먼저 용어를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

율법, 죄, 은혜, 믿음, 의, 육, 영과 같은 단어들을 통해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1) “율법”은 믿음으로 성령으로 성취하고 굳게 세운다.

 

“율법”이라는 용어를 일상적인 의미로, 즉 어떤 행위들이 허용되어 있거나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그 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내면의 확신들을 따라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당신의 마음 속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2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을 모두 죄인이라고 단언한다.

아무도 율법을 “행위”를 통하여 지키지 못한다.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22).

 

당신이 형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바라고 율법을 지킨다고 한다면

당신은 자유로운 선택과 율법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서 그리고 강제 아래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 되고

만약 율법이 없다면 당신은 다른 식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논리적 결론은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당신은 율법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당신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가르치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며

율법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7장(:14)에서 바울이 율법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율법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라면

우리의 행위는 그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에 영적이다.

하지만 율법이 영적이기 때문에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당신의 내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그러한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며,

이 영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들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진정한 소원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은 두려움이나 강제 아래에서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행해진다.

 

그러므로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것과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요구사항들을 기쁘고 사랑스럽게 충족시켜야 한다.

마치 율법이나 그 형벌들이 존재하지 않는 양

율법에 대한 속박감을 느끼지 않고 덕스럽고 올바른 삶을 살아라.

 

그러나 이 기쁨, 이 속박받지 않는 사랑은

바울이 5장(:5)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 속에 주어진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믿음 자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통해서만 온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한다.

 

우리는 믿음 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얻어진 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영은 우리에게 율법이 목표로 하고 있는 행복과 자유를 준다.

그리고 이것은 선행이 진실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이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정죄한 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성취한다고 말하고 있는 3장(:31)의 의미이다.

 

- 『루터의 로마서 주석』, pp 15-18 

 

 

토마스 빈센트, 「성경 소요리문답 해설」, 홍병창역, 여수룬, 2004(10쇄), 484면,

 

역자서문

한국의 장로교회는 칼빈주의 신앙원리에 입각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 요리문답에 기초하고 있다. 1917년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적당히 수정 채용한 이래 이 헌법의 신조 서언에서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도계요서와 성경 대소 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 소요리 문답은 더욱 우리 교회 문답책으로 채용하는 것이다”라고 소요리 문답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종래에 나온 소요리 문답 해설집들은 문답이 완성된지 3세기 이후에 미국 교회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그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느낌이 든다. 이 해설집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완성된 이후 30년이 채 못되는 1674년에 청교도 신학자 T. Vincent에 의해서 저작 출간 되었다. 이 책의 특징은 문답을 다시 세부적으로 조목조목 나누어 가장 상세하게 성경의 예증을 들어 설명하고 있기에 교육하기 좋도록 했다는 점이다.

역사상 최초의 신조는 사도신경이다. 이후 니케아 신경, 아다나시우스 신경 등 훌륭한 신조가 작성되었다. 그후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의 ‘이탈된 신조’로 인하여 역사는 근 1000년간을 암흑기에 헤매이게 된다. 그후 하나님은 루터와 칼빈을 보내셔서 종교개혁을 하게 하시고 복음적 교회로 하여금 바른 신조를 작성케 하셨다. 이 신조가 바로 오늘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이다. 이 요리문답은 기독교 진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문답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하나님은 일찍이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문답형식으로 가르치셨다(출24:7).

이 신앙고백은 정통성과 전통성을 갖고 있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잠23:10). 오늘날 구미를 비롯한 한국의 어떠한 교회들은 이 신앙의 원리를 약화, 변질 혹은 떠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현상이다. 미국 연합장로교회에서는 1924년 이미 성경무오,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이적, 속죄, 부활 등을 무시한 ‘어반 선언’에 서명한 자가 1,300명이나 있었다. 1967년에 이르러서는 범교단적으로 한 걸음 진일보한 ‘67신앙고백’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고백에는 빈부, 정의, 인종, 평화, 성 문제를 ‘화해’라는 명목하에 집중적으로 다룬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경’ ‘교회’--등에 대해 실재성을 잃어버리고 상징으로 전락하였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67신앙고백’은 구조적으로 발트신학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낮아지심만 가지고 그리고 이 세상 것만 가지고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는 숨은 음모가 거기에 내포되어 있다. 하늘에 빛나는 그 영광스런 소망과 구원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말해 이런 것은 기독교가 될 수 없다. 그것을 실재가 아니기에 권위를 나타낼 수도 없다.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렘31:21)

 

** 존 오웬, 왓슨을 위시한 청교도 신학자와 목회자 40명이 추천하는 서명을 하였다.

 

이 해설집을 자주 자주 읽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말미암아 짧은 시간에 놀라운 유익과 역사를 일으킬 것이고 체험케 할 것이고 증명할 것이고 보여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다운 지식으로 써 무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주석 전집(전 21권),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7

 

소개의 글

 

매튜 헨리 주석은 전설적이다. 이것은 주석의 고전이요, 경건의 고전이다. 이것은 단순히 필요할 때 참고하기 위한 주석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야 하는 경건서적이기도 하다. 이것이 타 주석과 구별되는 큰 특징이다. 매튜 헨리 주석은 설교자를 위한 책일 뿐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영적 성장과 큐티를 위해서 대단히 유용한 책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주석을 사용해 왔으며, 시간의 시험을 이기고 오늘날에도 우뚝 서 있다. 이미 300년(1704년 첫 출간)이 지났으나, 주석학의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영적이고 영원한 진리에 대한 이 책의 통찰력과 교훈들은 오늘날에도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은 모든 주석 중에서 매튜 헨리 주석을 첫째로 손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매튜 헨리는 가장 경건하고 명쾌하며, 건전하고 분별력있고, 시사적이고 진지하며, 군더더기가 없고 신뢰할 만하다. 은유와 유비가 번득이며, 예화와 묵상이 아주 풍부하다. 모든 목사는 최소한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을 정독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신학교를 졸업한 후 열 두달 안에 매튜 헨리 주석 전체를 독파하기를 강력히 권고한다. 만약 당신이 방금 읽은 구절을 강해한다면, 회중들은 당신의 설교의 신선함과 사상의 깊이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매튜 헨리가 얼마나 보물인지 말하게 될 것이다.”

 

조지 휫필드는 이 주석을 네 번이나 정독하고 항상 위대한 매튜 헨리를 극찬했으며, 로버트 홀, 윌리엄 쿠퍼(찬송가 작사자)등도 이 주석을 정독하고 그들의 설교와 찬송에 큰 영향을 받았다. 또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도 이 주석에서 나온 것이 있다. 경구와 뛰어난 구절들은 영어권 국민들에게 격언이 되었다.

 

그동안 영어 원문이 난해하여, 매튜 헨리의 원 의도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하여 한국독자들에게 사장되어 온 감이 없지 않다. 이제 이 새 번역본은 매튜 헨리의 원 의도를 정교하게 재현하게 될 것이다. 본 주석에서는 개역개정판 성경을 사용하였다.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제 2 권

 

제1장 5~8장의 분석

 

롬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장은 새로운 대목의 도입/ 로마서 나머지 부분을 이해하는 열쇠.

4장에서 이신칭의의 교리에 대한 위대한 진술을 끝마쳤다.

롬 4:23-25,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5~8장은 특히 6~8장은 오랫동안 많은 논쟁과 오해를 불러일으켜 왔다.

일반론적 분해; 5:1~11/ 이신칭의의 결과, 12절~8장/위대한 성화/ 궁극적 영화와 궁극적 승리. 혼란은, ‘7장에 있는 사람’에 대한 억측과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사람’의 교훈에 의해 야기된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분해. 5장 첫 단락(1-11절)의 진정한 의미를 놓쳐버린 데 그 원인이 있다. 12절부터 나타나는 엄청난 교리에 대해 전혀 대처를 못한다.

 

사도는 6~7장은 이 교리에 대한 두 가지의 반대의견들과 난제들을 처리하는 삽입구적인 말씀. 6장에서는, 첫 번째 반론을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물음으로 거론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원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면 모든 정성을 다해 스스로 완전해지려고 할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7장에서는 율법의 참된 기능과 목적에 관련하여 제기되는 또 다른 반론을 거론한다.

 

8장에서는 5장 말미에서 멈춘 위대한 주제로 다시 돌아간다.

 

8장의 대요지는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과 최종성을 더욱 더 분명한 어조로 말해주는 데 있다. 6~7장에서 다루어지는 성화교리도 다르게 해석하여야 한다.

 

5~8장의 요지는 이신칭의의 결과 구원의 절대적 성격 즉 구원의 완전성과 구원의 최후 보장성을 보여줌.

 

12~21절에서도 성화를 먼저 다루지 않고 여전히 같은 구원의 확실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20-21절에서 율법에 관련된 교훈에 대한 반대 의견을 취급한다.

 

1절과 2절에서 이신칭의가 한꺼번에 세 가지 일을 해냈다고 말해 준다.

하나님과의 화평, 은혜에 들어감(축복의 자리),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함(소망).

 

1절에서 칭의의 결과를 다룬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저 ‘예수’가 아님에 유의하자.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 첫째로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바울은 다른 축복들은 다음의 문제다.

 

우리가 최초로 강조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축복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바보다.

첫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다음의 문제이고 그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첫째 결과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화평을 누리자’가 아니다.

권면이 아니고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깨달으라고 명하고 있는 것 뿐이다.

 

‘하나님과의 평화’의 의미. ‘하나님의 평화’(빌4:6-7)는 사람이 문제들과 고통과 시련으로 에워싸임을 당했을 때 필요한 것.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평화’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어떻게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신칭의를 방편으로 하여,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화평을 누린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신칭의에 의해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존재하는 장애물이 제거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5장에서 8장까지 계속되는 이 커다란 대목의 출발점에 있다.

그 주제는 우리 구원과 영화의 절대적 확실성이다.

 

   

우리 교회는 이런 교회이고 싶어요.

 

 

우리 교회는 기존 교회들에 실망한 이들의 피난처요

새롭게 순수한 신앙을 찾는 이들의 안식처가 되고 싶어요.

 

우리 교회는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절대 유일한 최고 권위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요.

 

우리 교회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신앙을 본받고 싶어요.

그들은 성경과 성령, 교리와 삶,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이루었지요.

 

특히 청교도들은 영국을 개혁하고 미국을 건설하였고,

기독교 역사상 예수를 가장 잘 믿은 사람들이었지요.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누룩으로 혼잡하지 않아요.

‘철학과 헛된 속임수’(자유주의, 신정통주의)나

‘미혹의 영’(상담학, 신비주의)으로 혼잡하지 않아요.

 

우리 교회는 형통신학도, 지나친 율법주의도 싫어 해요.

바벨탑에 갇힌 복음도, 세상의 포로가 된 교회도 싫어 해요.

우리 교회는 오직 순전한 말씀으로, 충만한 성령으로, 성결한 삶으로,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세워가고 싶어요.

 

우리 교회는 대교단 소속인 것을 자랑하지 않는 교회이고 싶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교회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