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지혜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지혜의 내용과 목표는 영원한 형상에 대한 이론적 관조도 아니고, 현세적 성공(즉, 좋은 삶)을 위한 실천적 규칙도 아니다. 그와 달리 하나님은 언약 관계 속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다.
언약적 인식론은 이론과 실천의 이원론에 대항한다. 신학이 산출하는 지식은 -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와- 올바른 관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이는 올바른 관계가 있을 수 없다. 성경적 지혜는 단순히 일종의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다. 성경은 자기 자신을 지혜인 동시에 지식으로 표현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시111:10). 교리적 가르침과 실천적 가르침 사이에는 ‘토라’라는 일반적인 용어의 용법에 있어서와 같이 아무런 확고한 구분이 없다. 지혜는 정보나 지식 그이상이지만 그 이하는 아니다.
성경적 지혜는 기독교 신앙을 이론적 관조나 기술적 노하우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에 저항한다. 신학이 추구하는 지혜는 포괄적인 ‘실천적 삶’이나 일종의 ‘노하우’가 아니다. 이는 성경을 우리 자신을 구원하고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이용하며 믿음을 도덕주의와 기술로 환원시킬 것이다. 헬라인들이 바로 그와 같이 종교를 이용하려 했다. 기독교마저도 일반적인 자기 계발 식의 지혜에 안주하려 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인 이유는 바로 이교적 지혜 추구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향상을 위한 자율적인 탐색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상호 관련될 수가 없다. 사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와 분별력이 어리석음에 불과함을 폭로하셨다(19-20절).
신학이 분명 적절한 인간적 실천을 정의하기는 하지만 신학은 주로 그리스도에 관한 지혜다. 신학은 ‘학문의 여왕’이 아니다. 신학이 다루는 주제들은 다른 학문들과 중첩되는 관심사를 공유하지만 신학은 실재와 지식에 대한 남김 없는 설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신학은 이 시대의 현자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가장 높은 지혜와 관련되어 있다. 성경이 모든 질문이나 주제를 다루지는 않지만 성경의 지혜는 실재의 모든 측면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형성한다.
바울은 특히 다른 모든 형태의 지혜와는 다른 성경적 지혜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로워지라는 요청은 그리스도의 도덕적 가르침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인도하게 하라는 식의 별 뜻 없이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철학에서 이해한 지혜의 목적인 좋은 삶을 사는 법에 대한 비결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복음적인 지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다(고전1:30). 이 지혜는 철학자들에게는 숨겨졌으나 이 마지막 날에 세상에 계시된 신비이다(고전4:1, 엡1:19, 골1:26-27, 딛3:9).
신학은 실천적인 지혜(sapientia)인 동시에 신비에 대한 지식(scientia)이며 그 둘은 모두 성경에 의존한다. 열정이 무지, 특히 복음에 대한 무지를 보상할 수는 없다. 이 지식을 얻으려면 올바른 성경 해석을 해야 하는데 이 일은 학문이면서 그에 못지 않게 예술이다. 더 나아가 이 일은 성경에 비추어 성경을 해석하고 너무 성급하게 결론으로 비약하지 않고 더 분명한 본문에 비추어 어려운 본문을 숙고하는 신중함을 필요로 한다. 신중함은 교회사 속의 성경 해석을 그 해석의 형성 과정과 논쟁들에 대한 지식을 통해 평가하는 일에도 포함된다.
데카르트의 경우 확실성은 앎에 의존했다. 칸트의 경우에는 행함의 의존했고, 슐라이어마허의 경우에는 느낌에 의존했다. 최근의 대부분의 신학은 “실천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라는 해방신학의 정의에서와 같이 앎보다 행함을, 하나님의 실천보다 우리의 실천을 중시하는 신학이었다. 이런 인간 중심적인 접근 방식들을 비판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실천의 근거를 교리에 두는 것의 중요성이 이론에 대한 선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보다 하나님의 행동이 우선이라는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말하기는 하나의 행동이다. 그것은 단순히 내적인 사고의 외면화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실천-하나님의 실천-이다. 하나님이 창조의 말씀을 발하시자 세상이 존재한다. 심판의 말씀을 발하시자 생명이 시들어 간다. 구속의 말씀을 발하시자 믿음이 태어난다. 용서의 말씀을 발하시자 죄인들이 용서받는다. 새 생명의 말씀을 발하시자 죽은 자가 되살아난다. 하나님의 발화-하나님의 말씀-는 단순히 관념들의 모음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세상에 가장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효과를 지닌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힘이다. 말씀은 지식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삶-실로, 자연과 역사의 전 과정-도 변화시킨다.
신학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 명령과 약속을 모두 포함하며 위험과 기쁨, 두려움과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능동적이시고 창조 세계에 관여하시는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하나님이시므로 믿음은 결코 영원한 개념에 대한 상아탑에서의 숙고에서 나오는 그런 식의 자기만족적인 확신이 결코 아니다.
칼빈은 루터와 더불어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은 ‘살아 있는 존재’ 안에서 발견된다는 이 요점을 강조했다. 그것은 “헛된 사변에 만족하며 단지 머릿속에서만 스쳐 지나가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다면, 건전한 열매를 맺을 지식이다.”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는 눈으로보다는 귀로 더 많이 이루어진다. 루터는 도발적으로 이렇게 썼다.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일은 알거나 읽거나 사색함으로써가 아니라 삶으로써, 아니, 그보다는 죽고 지옥의 저주를 받음으로써 이루어진다.”
- 마이클 호튼, 『개혁주의 조직신학(언약 관점)』, pp 1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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