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성경적 성화의 특징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세상은 항상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복음 전도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영위하는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믿는다. 사도는 이 두 구절 속에서 다음 대목 전체의 서론을 말하고 있으며, 실천적 난제들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교훈을 설정하고 있다.
첫째, 사도가 로마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에게 말하는 방식은
‘형제들아’ - 사도는 비상한 능력을 부여받았던 위대한 사람이었다. 그의 겸손을 주목하라. 로마 교회의 지체들 거의 대부분이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종들과 군인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빌4:21, 고전1:26) 그러나 사도는 그들을 보고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그 로마교회 지체들과 같은 수준에 자신을 놓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고위 성직자, 성직자 계급에 대해서 대단히 많은 말들을 듣고 있다. 성직자 계급은 신약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도 베드로를 계승하는 자들이 아니다.(벧전5:3)
교회가 본래의 양식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 방황하여 왔는지! 위대한 사도는 가장 비천한 그리스도인과 함께 벤치에 앉아서 ‘우리는 다 같은 형제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에 불과하며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 점을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에 이 겸손의 요소가 항상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 그는 형제들에게 명령하지 않고 그들에게 간청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특징적인 율조이다. 모세는 명령했으나 사도는 권한다. 교회를 주장하거나, 교회에
명령하거나, 교회에 억제를 가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둘째,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선한 삶을 사는 것에 관한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소위 ‘휴머니스트’들의 논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도 선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사람들이 자라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난센스를 버린 시점에 이르렀다. 그러니 성육신, 구속, 그 따위 일들에 대한 모든 대화를 더 이상 수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선한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 중 선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또 중요한 것은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들로 자처하는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사람들이 선한 생활을 영위하는 한 그들이 무엇을 믿느냐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도의 교훈은 “우리가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what we do)가 아니라, “왜 우리가 그것을 행하느냐?(why we do it)이다.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본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휴머니스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전혀 관심도 없고 믿지도 않는다. 그들은 선한 삶을 사는 이유는 상식이라고 말한다. 행복해지기 원하면 술을 마시지 마라. 도덕적으로 난잡하지 마라. 그렇게 도덕적인 규례를 따라서 사는 것이 전체 인류를 위해서 좋은 것이다. 또 나아가 선한 삶을 영위하면서 그 선한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시켜 말하는 전통 유대인과 이슬람 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높은 윤리적 표준을 가지고 자기들의 삶의 기초로서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으나 그들은 기독교인들과 같은 동기와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을 따라 선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으나 곧 그 모든 것이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요소는 그들이 행하는 바가 아니다. 어째서 그것을 행하는지 그 이유가 바로 그들의 그리스도인 됨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이 두 구절 속에서 성화에 대한 참된 성경적 교리의 원리들과 요약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도록 설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동기의 문제이다.
첫째, 의지, 또는 이해에 호소하는 것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기계적으로 순종한다고 해서 그것이 선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순종하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세상에서 하던 행동양식에서 또 다른 행동양식으로 자리를 바꾼 것이다. ‘그러므로’ 라고 말한 것은 우리의 행동이 이유를 가져야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또 다른 수동적인 국면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이제 믿음으로 성화도 받으라’라고 말하며. 한 체험 속에서 성화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체험은 성화를 촉진 시킬 수 있으나 성화 그 자체는 아니다. 성화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또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수동적으로 거하는 것이라고 표현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권하노니’라는 단어가 그러한 교훈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면 적극적인 의미의 성화는 무엇인가?
‘그러므로’라는 말 속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1;16 이후에서부터 11장까지 숙고해본 위대한 교리적인 교훈 전체를 두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이 위대한 교리의 결과일 뿐이다.
1장 타락의 교리,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타락하였고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범했다는 교리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어째서 죄를 지었는지, 어째서 세상에 속한 삶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그 이유를 인식해야 한다. 이제 사람들이 율법으로 깨우침을 받고 자기들이 정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선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임을 이해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 의가’(3:21)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사람들이 칭의교리를 이해하지 않는 한 결단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이 사도의 주장이다.
5,6장에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교리로 나아가, 우리가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고, 아담과 함께 죽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산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예정, 부르심, 성화의 위대한 교리들을 제시한다.
8장은 성화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아들의 자격을 얻은 그리스도인의 권리에 대해서 계속 말해 나간다.(8:14, 15)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 마음에 두셨고, 거듭난 새사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선한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하며. 바로 그러한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계속 선한 삶을 영위해 나갈지에 대하여 ‘성도의 궁극적 견인’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8:30, 39) 우리는 영광을 위해서 예비하게 된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 안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라는 말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요약하면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행실은 항상 우리의 교리에서 영위되는 것이다.(빌 1:27)
둘째, 행실과 교리는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 전도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점은 정말 중요하다. 참된 복음 전도는 항상 교리 전체를 제시하는 것이다. 참된 교리 전도에는 율법과 정죄의 요소가 항상 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 전도는 항상 하나님을 가리킨다. 인간 존재의 차원에서만 복음을 제시하는 것은 피상적인 복음 전도이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필연적으로 교리에 비추어 항상 존재해야 한다. 복음에 대해서 지성적인 이해만 하고서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나는 진리를 안다. 믿었고 구원 받았다. 내가 무엇을 행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러한 사람에 있어서 문제거리는 교리를 진심으로 이해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교리를 아는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훈련을 소용없는 것으로 걷어차는 경향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히려 딱딱하고 좁은 삶이라는 느낌인가? “나는 그리스도인이기를 원한다. 나는 천국에 가고 싶다. 그러나 왜 내가 이것을 하지 말고 저것은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무겁다고 여기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같이 살아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결코 따지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의 계명들이 무겁다고 여겨지면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 참된 교리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사는 방식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넷째, 교리는 항상 상세하게 우리의 행실의 정확한 본질을 결정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기들이 어째서 그 주어진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다섯째, 교리는 먼저 어째서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보여준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그에게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교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방식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산상수훈으로 표준을 삼고 지키며 살려고 애를 쓴다면 금방 자신은 그렇게 살 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8: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우리 속에 존재한다.
알고 있는 교리가 ‘그러므로’로 연결되지 못하면 그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룩한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동기와 통제하는 세력이 되는 것이다.
- 본서, pp 3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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