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찌름으로 이 땅에서 고통 당하는 영혼에게는 소망이 있다. 복음은 소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들의 소망이다. 그러나 지옥에는 어떠한 소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주받은 자들은 절망 속에서 영원토록 양심이 찢기는 고통을 당할 것이다. 이 저주 받은 자들이 영원히 느낄 고통을 무슨 마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 땅에서 죄의 짐에 짓눌려 양심의 지금으로 고통 당하는 자가 용서받는 일을 생각해 보라. 그것은 사슬에 묶여 사형만을 기다리고 있는 죄수가 어느날 갑자기 풀려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빚진 자가 그 모든 빚을 탕감받고 그 채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일과도 같은 일이다.
무거운 죄짐으로 괴로워하던 영혼이 그 두려워 떠는 양심 속에서 용서와 평안의 음성을 듣게 되다니요! 이는 공포스러운 밤을 보낸 사람이 여명을 보는 상쾌함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혹독한 추위가 지나고 새해의 봄을 맞이하는 유쾌함도 이와 같진 않을 것이다.
양심의 고통과 두려움 아래 살아가던 영혼이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과 용서를 알게 될 때처럼 달콤한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위험천만한 구덩이에 빠졌던 아찔한 일과 함께 거기서 구원받아 도피할 수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일은 어떠하겠는가!
오, 용서의 달콤함은 정말 상상할 수 없다! 누가 기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양심의 송사와 정죄에서 자유롭게 되다니요! 죄에 대한 고뇌를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에게 대체 무슨 방법으로 이 기쁨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긴 밤을 지새우며 쉬지 못하고 안타까워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서글픔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리둥절한 영혼’이다. ‘무거운 짐을 진 양심’은 그로 말미암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이 ‘어리둥절한 영혼’은 엄청난 ‘위험’을 수반한다.
이들은 더 무서운 처지에 있는 자들이다. 자신들의 처지를 바라보며 누구보다 서글픔을 느껴야 할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 무감각함이 그리스도로 향해야 할 영혼의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웃으며 자기 자신이 괜찮을 거라고 말한다. 오늘날 수천, 수만의 영혼들이 그런 서글픈 처지에 놓여 있다. 긍휼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란다.
- 존 플라벨, 『은혜의 방식』, pp 21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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