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권8장, 성경의 신빙성, 순교자들은 성경의 교리를 위해 죽었다

강대식 2014. 9. 1. 19:06

8장 성경의 신빙성은 인간의 이성의 범주 내에서도 충분히 입증됨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성경의 위엄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인 후에 면밀히 성경을 공부해 나가면서, 신적 지혜의 경륜이 성경 속에 그렇게도 잘 정렬되고 배열되어 있는 것이나, 그 가르침에 속된 것이 하나도 없고 완전히 하늘의 성경으로 가득한 것이나, 각 부분이 모두 다른 부분들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나, 그 밖에 그 책들에 대해 위엄을 느끼게 하는 갖가지 다른 특성들을 생각해보면,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과연 참이라는 것이 정말로 놀랍게 확증되는 것이다.

 

사도는 고린도 사람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고전2:5)고 올바르게 선언하며, 또한 그가 그들 가운데서 전한 설교도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고전2:4) 된 것이라고 말하는 있는 것이다.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자체로서 충족하게 스스로를 드러낼 때에 비로소 진리가 모든 의혹을 물리치고 진리로서 든든히 서게 되는 것이다.

 

언어가 아니라 사상이 중요함

 

유려하고 명쾌한 언어를 사용하는 다윗이나 이사야 같은 이들의 글을 읽든지, 다소 거칠지만 소박한 맛을 풍기는 목자 아모스, 예레미야, 스가랴 등의 글들을 읽든지 간에, 성령의 위엄이 어디서나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거기에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품을 수 없었을 그런 사상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성경의 고대성

 

희랍의 저자들이 애굽의 신화에 대해서 아무리 이야기하다 해도, 현존하는 종교적 문서들 가운데서 모세의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속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모세도 새로운 신을 소개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이미 오래 전부터 시대시대마다 족장들을 통해서 전수되어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아들인 영원하신 하나님에 관한 교의를 명확히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세 자신의 교의가 그렇게 머나먼 근원에서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것이라면, 고대성에 있어서도 성경이 여타 다른 저작들을 완전히 능가한다는 것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존하신 하나님의 이적적인 역사

 

주께서 그의 말씀을 얼마나 면밀하게 보존해 오셨는가를 살펴 보자.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연 달리, 주님은 마치 맹렬한 불길 속에서 건져내듯 가장 악독하고 야만적인 폭군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놓으신 것이다. 주께서는 경건한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을 위대한 신앙의 정절로 무장시키셔서 필요할 경우 자기들의 목숨을 버려서까지 이 보배를 후손들에게 전수하기를 주저하지 않도록 하셨고, 그리하여 그 책들을 찾아 없애려 애쓴 그 통치자들과 그 졸개들의 집요한 노력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 어찌 하나님의 놀랍고도 특별하신 역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헬라어 번역 성경이 뒤따라 나와서, 그것이 온 세계에 널리 퍼졌으니 말이다.

 

놀라운 이적은 비단 하나님께서 안티오쿠스의 그 피비린내 나는 칙령에서 그의 언약의 돌비들을 건져내셨다는 데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거듭되는 불행을 통해서 짓밟히고 황폐해져서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는데도 그 책들은 여전히 전혀 손상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안전하게 보존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이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종교를 돌아보지 않으셨다면, 히브리어는 완전히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신약 성경의 신빙성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 그 진리를 뒷받침하는 기둥들이 얼마나 견고한지 모른다! 세 복음서 기자들은 미천하고 평범한 문체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어서, 교만한 자들은 이 단순함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그 중심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복음서 기자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늘의 신비들을 다루고 있다. 우리 주님의 강화들이 세 복음서에 짧게 요약되어 있는데, 이것들을 보면 그 복음서들을 멸시하던 자세가 곧바로 사라지게 된다.

 

요한은 위엄 속에서 우레를 발하며,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그 완고함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것보다도 강력한 벼락으로 내리친다. 콧대 높은 자들이여, 모두 앞으로 나오라. 요한복음을 읽어라. 그러면 저 무딘 마음을 일깨워줄 말씀들을, 아니 그 양심들을 달군 쇄로 태워서 그들의 조소를 사라지게 해줄 말씀들을 일천 개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의 위엄이 그 속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을 끌리게 하고, 거기에 스스로 메이도록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정황만으로도 그들의 가르침을 온 세상 위에 드높이 올리고도 남을 것이다. 마태는 백성들의 돈을 취하던 세리였고,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배를 타던 어부들이었으므로 모두 교양도 없고 무식한 자들로서 사람의 학교에서 배운 일이 없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것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철천지 원수로서 살기가 등등하던 바울이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로써, 그가 이처럼 전혀 예기치 않던 갑작스런 변화를 통해서 하늘의 능력에 압도되어 과거에 자신이 파괴하려 했던 바로 그 교리를 전파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일반 대중 가운데서도 비천한 자들이던 그 사람들이 갑자가 일어나 하늘의 신비들을 그렇게 영광스럽게 강론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성령께서 그들을 가르치신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진리가 소리 높여 외칠 것이다.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교회의 동의

 

교회의 동의에 대해서도 그 의의를 인정해야 한다. 성경이 공포된 이후 시대시대마다 한결같이 성경에 순종하여 왔다. 사탄은 온 세상과 더불어 놀라운 수단들을 통해서 무수하게 성경을 억압하고 파괴시키고 혹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고 애썼으나, 성경은 여전히 마치 종려나무처럼 번성하여 왔고, 전혀 요동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비범한 능력을 지닌 궤변가나 웅변가들 치고 성경을 대적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나, 그들의 모든 수고가 다 허사였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권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하여 무장하여 일어났으나, 그들의 모든 시도들이 다 연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만일 인간의 보호에만 의존했다면 성경이 과연 어떻게 그렇게 견뎌낼 수가 있었겠는가?

성경이 그 자체의 능력으로 지금까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성경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을 받아들이고 믿기로 동의한 것이 비단 한 도시나 한 국가의 일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온 세계 끝까지 이르러, 다른 면에서는 서로 전혀 공통점이 없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데에 서로 거룩하게 합의해 온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일치는 하나님의 섭리 이외에 그 어떠한 것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주께서 그의 교회 내에서 등불들로서 빛을 발하도록 하신 그런 사람들의 경건함을 볼 때에, 그 사실에 적지 않은 무게가 실려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성경의 교리를 위하여 죽었다

 

그렇게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피를 흘려서 확증하고 증언하고 있으니 과연 얼마나 큰 확신을 갖고서 그 교리를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그들은 일단 그 교리를 받아들인 후에는 용감하고도 대담하게, 심지어 큰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확고한 보증과 더불어 우리에게 전수된 것이니 만큼 확실하고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도 많은 증인들의 피로써 인쳐졌다는 사실은 성경의 권위를 입증하는 것으로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특히 광신적인 과도한 처신(그릇된 정신을 소유한 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처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확고하고도 견실하며 진지한 열심을 갖고서, 죽음을 무릅쓰고 믿음을 증언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 밖에도, 성경의 위엄과 권위가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무시하고 비방하는 자들의 간계들을 이기고 완전히 입증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결코 작지도 미약하지도 않은 여러 가지 사실들이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경 속에서 그의 위엄을 드러내시고 그리하여 성경을 높이는 확고한 마음을 주시기 전에는, 이 사람들 스스로는 성경에 대해서 그렇게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확신에 기초하여 성경의 확실성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을 아는 구원 얻는 지식을 주기에 충족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확증하기 위한 인간의 증언들도 전혀 효과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 확신이라는 최고의 증거를 따라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제 이차적인 증거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해 주려고 하는 행위는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성경이 그렇다는 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이 그렇게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경건과 마음의 평안이 있어야 한다고 적절히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94-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