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교리적 근거를 견지함에 있어서 특별히 오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교리가 건전하기만 하면 생활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리는 온갖 것에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삶의 길이었다. 기독교가 제공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으며, 죄로부터의 구원은 복된 소망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도덕적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들이 낯설고 새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직하고 순결하고 비이기적인 삶이었다. 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다른 모습의 삶은 엄격하게 배제되었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분명히 삶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런 삶이 나왔는가? 도덕적 권면에 의해서인가? 그리스도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친 순회 설교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권면은 힘이 없었다. 견유학파와 스토아학파 사람들의 이상이 높긴 했지만, 그 설교자들은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기독교의 이상한 점은 그것이 전혀 다른 방법을 취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여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 것아 아니라,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변화시켰다. 권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였다. 그런데 어떤 종교적 지도자의 죽음에 관련된 사건을 반복해서 이야기하여 행동에 영향을 주려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일이 어디 있는가? 이것을 가리켜 바울은 “메시지의 어리석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이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 효과는 지금 세상에서도 나타난다. 가장 유창한 권면이 실패하는 곳에서 어떤 사건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가 성공한다. 사람들의 삶이 뉴스 하나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것이다.
언제나 동일하게 오늘날에도 기독교 메시지가 특별히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런 삶의 변화다. 만약 우리의 교리가 바르고 우리 삶이 틀렸다면 우리의 죄는 얼마나 큰가! 이런 경우 진리 그 자체를 멸시하는 일이 되고 만다. 또한 사교적 예의와 도덕적 탄력에 기반하여 거짓된 메시지를 추천한다면, 매우 슬픈 일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진리의 자리를 대신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기독교가 교리적 기초를 가진다는 사실을 주장한다고 하여 교리의 모든 요소가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견해의 치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안에서 교제를 유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견해의 차이 중에서 최근 중요해지고 있는 것 하나가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사건들의 순서에 관한 문제다. 많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과 같이 믿는다. 세상에서 악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주 예수께서 몸으로 이 세상에 다시 와서 의의 통치를 이루며, 그것이 천년 동안 지속된 후에 비로소 세상의 종말이 임한다는 것이다. 본 저자의 생각에 그 신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릇된 해석에 의해서 초래된 오류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이 미래 사건에 대한 그런 분명한 청사진을 제공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에서 “천년왕국” 혹은 “전천년주의”가 다시 살아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심각하게 우려한다. 그것은 잘못된 성경 해석방법과 함께 결합하여 결국에는 해악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전천년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우리가 일치하는 게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우리와 똑같이 존중하며, 성경의 해석에서만 차이가 있다. 그들의 오류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 따라서 성경과 교회의 위대한 신조에 대한 충성과 함께 우리는 기독교적인 교제 속에서 연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견해 사이의 문제로 말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독교와- 그것이 전천년주의든 반대 견해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자연주의와의 대립이다.
기독교적 교제 안에서 유지될 수 있는 또 다른 견해 차이는 성례의 효력에 대한 차이다. 그 차이는 실로 심각한 것이다. 이 심각성을 부인하는 것은 이에 관한 논쟁에서 잘못된 편을 드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오류다. 기독교계의 분열 상태는 악이라고 한다. 그것은 실제로 그렇다. 분열을 일으키는 오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악이지, 일단 오류가 존재할 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악이 아니다. 루터와 스위스 종교개혁 대표자들이 마부르그 회합에서 만났을 때, 루터가 주의 만찬에 관하여 책상위에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쓰고서 쯔빙글리와 이코람파디우스에게 “당신들은 다른 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은 큰 재앙이었다.
이 견해 차이로 인해 루터파와 개혁파 교회는 갈라졌으며, 확보할 수도 있었던 더 큰 공동기반을 개신교는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재앙은 루터가 주의 만찬에 대해 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반대자들에게 “형제들이여, 이것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주의 만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실은 별로 큰 차이가 아닙니다”라고 말했을 경우보다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런 무관심은 교파들 사이의 모든 분열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다. 주의 만찬에 관해 타협했을 루터라면 보름스 회의에서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달리는 할 수 없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리에 대한 무관심은 신앙의 영웅을 만들지 못한다.
목회의 성격과 특권에 관한 또 다른 견해 차이가 있다. 성공회는 “사도적 계승” 교리를 주장한다. 다른 교회들은 이를 부인하며, 목회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차이가 뿌리에까지 미치지는 않는다. 양심적인 성공회 교인도 개개인이 다른 교파에 속한 개인들과 기독교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또한 목회에 대한 성공회의 견해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도 성공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참되고 매우 고귀한 자체로 간주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또 다른 견해 차이는 칼빈주의 신학 곧 개혁신학과, 감리교 안에서 나타나는 알미니안주의 신학의 차이다. 그러나 여기, 극히 중요한 어떤 문제들에 대한 정반대의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참된 복음적 교제가 가능하다.
이보다 훨씬 심각한 분열이 로마 교회와 복음적 개신교 사이에 온갖 형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엄청나다 하더라도 오늘날 장로교회에 소속한 많은 목사들과 우리 사이에 놓인 심연에 비하며 정말 사소하게 보인다. 로마 교회를 기독교의 왜곡이라 한다면, 자연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은 전혀 기독교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보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서로를 적대시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혈연, 시민이라는 같은 신분, 윤리적 목적, 인도주의적 노력 등의 많은 끈들이 우리를 복음을 포기한 사람들과 묶고 있다. 이 끈들이 결코 약화되지 않을 것을 믿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전파에 있어서 어떤 부분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봉사는 일차적으로 메시지 전파에 있으며, 특히 기독교적인 교제는 그 메시지를 모든 삶의 근거로 삼은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한다.
메시지 위에 세워진 종교라는 기독교의 특징은 사도행전 1:8에 잘 나타난다. “너희가 ---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실을 적절하게 요약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처음부터 기독교는 증거하는 운동이었다. 바울의 서신들 그리고 모든 자료들은 그들의 증언이 일차적으로 내적인 영적 사실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단번에 영원히 이룬 일들에 대한 것임을 너무나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발생한 어떤 일에 대한 설명에 근거해 있으며, 기독교 사역자는 일차적으로 증인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증인석에 앉았을 때 중요한 것은 그가 진리를, 전체 진리를, 오직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내며, 기독교의 가르침을 주요 대적이 되는 현대의 가르침과 대비해서 제시하는 것은 결코 요점을 벗어난 일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주요 대적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가르침들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이 두 운동이 모든 면에서 정반대의 위치에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8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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