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예수님을 바라봄의 의미
1. 바라보는 행위와 그 대상에 대한 설명
행위에 대해
1.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해.
천국에서는 실제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3:2).
2. 마음으로 보는 것 혹은 내면의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해.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것이 바로 이것이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8-19). 마음으로 보는 것은 실제 눈으로 보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육신의 눈으로 피조물의 한 단편만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마음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까지 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해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히11:27)라고 말한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에 빛과 생명력을 주는 것은 바로 마음의 눈이다. 현존하는 모든 것의 가치와 쓸모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마음의 눈이다.
마음으로 보는 것은 개념적이고 이론적이며 실제적이고 경험적이다. 전자는 사색적인 눈을 통해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다. 후자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으로 보는 것을 통해 영향을 받아 영적인 것들을 갈망하고 사랑하며 믿고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취지로 “지식의 말은 때로 마음속에 그 영향력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로 인한 영향력은 우리 삶 속에 나타난다”라는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이 갈망했던 바라봄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빌3:10). 다시 말하면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길 원했고 그것이 자신에게 전달되어 그 모든 목적에 이르도록 자신에게 역사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분명히 예수를 바라볼 때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서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행하시는 내면의 역사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내면으로 바라보는 것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요, 이 본문 말씀이 목표로 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해
예수님은 마음의 눈을 고정시키고 볼 수 있는 가장 큰 복의 대상이다. 그분은 우리의 묵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 우선권을 지녀야 할 분이다. 우리가 그분을 소유할 때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실 분이다.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면 기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예수는 히브리 이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름이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의 사역과 성품을 내포하고 있다. 그분만이 유일한 인간의 구주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한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그것은 명백한 진리다. 그러나 구원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공동의 사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하시는 방식에 있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별해야 한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신다. 성자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값을 지불하심으로써 구원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그 지불된 값으로 인간에게 죄의식을 심어 주심으로써 구원하신다.
예수라는 이름 안에 담겨 있는 의미는 매우 포괄적이다. 오, 얼마나 다양한 달콤함이 예수 안에 들어 있단 말인가! 그분은 자신안에 ‘상인의 여러 가지 향품’을 지니고 계신다(아3:6). 거룩한 영혼은 예수님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결코 지치지 않는다. 우리는 한 가지만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금세 지치게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탁월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묵상을 하면 영혼이 재창조되며 그것을 통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2. 바라봄에 관한 주된 교리와 확증
교리. 마음속에서 감정을 뒤흔드는 것과 같은 내면의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그로 인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선택, 복음의 높은 명령이다.
예수님이 바라보는 대상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고,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일을 담당하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민21:8, 사45:1, 22, 미7:7, 슥12:10, 마1:21, 요3:15, 고후3:18, 히12:2). 바라보는 것은 행위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바라보는 것인가? 그것은 다음의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행위다. 예수님을 알고 생각하고 갈망하고 소망하고 믿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누리며 그분을 닮아 가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우리의 감정을 뒤흔들고 그로 인해 우리 삶에 영향력을 미치는 바라봄이다. 우리의 심령을 소생시키고 생명력을 갖게 하는 바라봄이다. 따뜻한 감정과 고양된 결단력, 거룩하고 올바른 대화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빚어가는 바라봄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예수님을 내적으로 경험하는 바라봄이다.
확증.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셨다. “땅 끝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45:22, 65:1). 그리고 이 명령에 따라 그들은 실천했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25:15, 34:5). 복음 안에는 이 명령에 따라 예수님을 바라본 뒤에는 다음의 단계가 따라온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3). 그리고 이 명령에 따라 복음을 믿는 자들의 실천이 나온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모세의 얼굴을 가렸던 수건 대신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에 복음이라는 선명한 거울을 주셨다. 그래서 이제 복음 아래 있는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 진리, 선하심과 그분의 신적인 다른 속성들의 영광스런 빛 속에서 묵상하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수단들을 통해 모든 믿는 자는 거룩한 영광과 새로운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된다.
3. 훈계의 적용
1. 외적으로는 주님을 따르고 형식을 지키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사는 불신자들에게 말한다. 당신이 아무리 이런저런 영적 의무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도 그 의무를 다음과 같이 행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여기실 것이다.
(1)아무리 그리스도를 바라보아도 본래의 목적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눈길이 그 사람의 마음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는 그것을 그분을 향해 전혀 눈길을 주지 않은 것으로 여기신다.
(2)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마지못해 한다면, 그리고 하루 종일 두 눈을 하늘을 향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3)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규칙에 따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헛되고 부질없이 세속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바라본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4)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을 마땅히 해야 할 자신의 일로 삼지 않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고 할 수 없다.
이제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스도가 마태복음 7장 22-23절에서 말씀하셨던 자들이 잘못되었듯이 당신도 잘못된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지막 날에 그들이 아무리 탄원하고 부르짖는다고 해도 결국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분명히 그리스도는 당신에게도 언젠가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너를 모른다. 이 땅 위에서도 너는 나를 몰랐다. 너의 게으른 심령이 만족함을 얻을 때 외에는 너는 나를 바라본 적이 없었다. 이제 다시는 네 얼굴을 보이지 마라. 나는 너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이다.’
2.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어떤가?
(1)그들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벧후3:1). 다윗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보라. “내 영광아 깰지어다”(시57:8). ‘깰지어다’라는 것은 ‘일깨우다, 눈을 뜨게 하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일깨우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가!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한탄이기도 했다.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사64:7). 오, 이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의 이해력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인가! 우리의 생각(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보화로 가득 채우라고 주신 황금 장식장)이 텅 비어 있거나 헛된 것들, 아무것도 아닌, 무가치한 것들로만 가득한 것이 옳은 일인가! 오! 그리스도를 섬기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는 천사들과 같아야 할 우리의 영혼이, 그토록 영광스런 창조물이 다른 피조물을 섬겨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그분을 향해 우리의 생각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생각을 그분을 향해 달려가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2)우리의 마음이 그분을 바라보는 일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마음이 위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마치 약하게 구부린 활에서 쏜 화살처럼 너무나 힘이 없어 과녁을 맞추지 못할 수도 있다. 전도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전9:10). 오, 하나님의 백성이 이와 같은 영적인 일에서 얼마나 게으르고 둔하고 태만한지! 예수님도 요한에 대해 말씀하실 때 많은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나”(마11:7). 믿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당신은 무엇을 보러 나가는가? 당신이 마음도, 심령도 없는 사람처럼 기어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를 보러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영광의 주님이신가? 그토록 무겁고 게으른 모습이 그토록 영광스런 분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가?
(3)마음을 그리스도에게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고정시키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흘깃 곁눈질로 본다. 그러나 즉시 다른 것에 시선을 돌려 버린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혼이 거하고 묵상할 만한 가치가 없는 분인가?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우리를 예수님께 붙잡아 둘 것이다. 자석이 철을 잡아당기고 단단히 붙어 있게 하듯,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끈다면 그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사랑하는 이에게 단단히 붙어 있게 할 것이다. 예수님은 시선을 자기 백성에게서 잠시도 떼실 수가 없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그리스도가 너무나 자애로운 사랑으로 우리를 향해 마음을 기울이시는데 어떻게 그분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흔들리고 덧없이 순간적일 수 있단 말인가?
(4)이 복받은 의무를 매일 실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끔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예수님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 생각해 보라. 가끔 수건을 쓴 채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주님과 친구로서의 삶을 누리며 사는 것인가! 그것이 자녀로서 사는 삶인가! 집이 얼마나 낯설게 느껴지겠는가! 이따금씩? 한 달에 한번, 일 년에 한 번? 우리가 늘 머물러 있어야 할 곳에 거의 가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가끔 방문하는 것으로 만족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토록 보잘것없는 분인가? 오! 형제, 자매들이여, 지금까지 우리가 찬양받으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마음을 보내고 그분과 사랑의 끈으로 묶는 일에 부주의했다면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우리가 그 일을 매일의 일로 삼지 않았다면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져야 한다. 다윗은 찬양받으실 그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2). 그렇다면 주님의 법도, 그 법을 만드신 주님에 대해서도 밤낮 묵상하지 않는 자들은 얼마나 많은 책망을 들어야 하겠는가?
4. 권면의 적용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내 간곡한 부탁이 마음에 울리지 않는다면 나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는 것’(고후5:20)으로 여기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당신의 영혼에게 전하라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메시지다. 따라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신32:46-47).
당신의 생각을 왜 그분에게 더 쏟지 않는가? 왜 당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그분에게 두지 않는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주님은 그렇게 간곡히 외치시지 않는가? 두 번씩이나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아, 추악한 마음이여, 우리가 헛된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는 얼마나 즐거워하고 얼마나 지칠 줄 모르는가? 어거스틴은 키케로의 글을 던져 버렸다. 그 안에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믿는 자들이여! 그 안에 더 이상 그리스도가 없는 마음을 기꺼이 낮추고 던져 버리겠는가? 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일부러 회피했던 마음을, 아는 것에 지극히 약했던 마음을 꾸짖으라. 오, 당신의 생각을 이 땅의 모든 헛된 것에서 돌이키고 당신의 영혼을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향하게 하라.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일을 습관으로 삼으라.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피상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라. 오히려 묵상속에 깊이 거하며 당신의 영혼을 그 기쁨 속에 깊이 담그라. 당신의 감정을 그 즐거움의 강물 속에, 위로의 바다 속에 흠뻑 적시라. 오, 당신의 영혼을 하늘에 묶어 두라. 당신의 눈을 끊임없이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라! 믿는 자들이여! 당신의 영혼이 건전하고 올바르다면 그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생각하고 믿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 속에서 많은 기쁨과 달콤함을 느낄 것이다.
5. 무관심할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결핍을 통해 깨닫는 동기
우리의 결핍에 대해
그리스도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오직 결핍만이 있다. 먼저 그리스도가 없는 영혼을 생각해 보라. 나는 그런 영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1) 그는 빛이 없는 자다. 그의 영혼 안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의 기름도, 영적인 빛을 발하는 별도 없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엡5:8). 그들은 어두울 뿐만 아니라 어둠 그 자체인 것이다.
(2) 그런 사람에게는 은혜도, 거룩함도 없다. 그리스도가 없는 곳에는 영적 지혜도, 거룩함의 길도, 거룩함의 길을 가려는 열망도 없다.
(3) 그런 사람에게는 만족함이 없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영혼은 가장 큰 부요함 속에서도 모든 것이 공허하고 헛되다고 느낄 뿐이다.
(4)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영적인 아름다움도 없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사1:6).
(5) 그런 사람에게는 평안이 없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참되고 영적인 하늘의 평안이 없다. 평강의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다. 평화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할 수 없는 자다.
(6) 그런 사람은 성부 하나님이 받아들일 수 없는 자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지극히 가증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7) 그런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에게 전혀 관심도 없고 무관하게 삶을 살아 가는 자,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자의 상황 또한 얼마나 악하단 말인가! 다음의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그런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지혜, 그분에 대한 지식과 분별력이 전혀 없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진지하게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위대한 은혜의 신비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2) 그들은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에게 전혀 달콤하지 않다. 말씀 안에서 기쁨도, 마음을 새롭게 하는 능력도, 위로도 만족도 발견하지 못한다.
(3)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이 소유한 그분에 대한 사랑이 없다. 그들은 연인들이 사랑을 묵상하듯이 그리스도를 묵상하지 않는다.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를 보며 기뻐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타오르는 사랑도 없다.
(4) 그들은 이 의무를 실천하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5) 그들은 이 의무를 실천할 때 갖게 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죄악의 요새를 무너뜨리는 곳,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곳, 양심을 청결하게 하는 곳에 있다. 이 의무를 무시하고 게을리하면 그런 능력은 기대할 수 없다.
(6) 이 의무를 행하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가치와 탁월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지도,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갈망도 품고 있지 않은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는다.
(7) 이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결핍도, 세상의 헛됨도 깨닫지 못한다. 그들에게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선하심에 대해서도 전혀 보지도,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6. 예수님을 바라보는 의무 안에 즐거이 거할 때 누리게 되는 부요함이 주는 동기
(1) 그리스도가 빛을 비춰 주신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하늘의 평안한 영적 빛을 받는다.
(2) 그리스도가 은혜와 거룩함을 주신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3)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만족을 주신다. 보물의 대한 비유에서 진주가 상인을 만족시켰듯이, 그리스도는 명철 속에서는 지혜로, 마음속에서는 그분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확신에 찬 복의 평안으로 영혼을 만족시키신다.
(4) 그리스도는 영광을 주신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영광의 주인이고 본질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칭의의 영광, 구속의 영광, 성화의 영광이다.
(5)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평강을 주신다. 그분만이 모든 자녀들 안에서 평안으로 일하시는 분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2:14).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 주실 수 있도록 일하신다. 그분은 하나님과 믿는 자들 사이에 서신다. 사탄의 참소와 비난에 대응하시며 그들을 대신해 성부께 기도하신다.
(7)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은혜의 생명, 영광의 가장 뜨거운 생명을 소유한 자다.
(8)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지혜를 주신다.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바라보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다른 모든 빛은 소유했지만 정작 태양은 갖지 못한 자보다 태양을 소유한 자가 더 밝은 빛을 갖고 있듯이 말이다.
(9) 그리스도는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신다. 그분을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이 그분의 영을 느끼며 기뻐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들이 찬송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엡5:19).
(10) 그리스도는 진실하고 내면적인 사랑을 그들의 마음속에 부어 주신다. 믿음의 눈이 예수님을 바라보자마자 즉시 마음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11) 그리스도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하신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분이 겸손한 영혼을 사랑하고 안아 주신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12) 그리스도는 그분의 능력을 그들이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신다.
(13) 그리스도는 그분의 가치와 탁월함을 그들에게 느끼게 하신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태양의 눈부신 빛을 뛰어넘는 지혜를, 모든 지혜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탁월한 지혜를 본다.
(14) 그리스도는 그들이 결핍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세상의 헛됨과 그분이 그들에게 얼마나 선하신 분인지를 알게 하신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보게 된다.
(15)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1-23). ①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자가 당신을 섬기는 사역자다. 그들은 당신의 구원을 위해 살피는 자들이다. ②세상이 너희 것이다. 세상은 단지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③생명이 너희 것이다. ④죽음이 네 것이다. 죽음이 당신에게 최선인 순간에 당신이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⑤주님 자신이 당신의 것이다. 하나님을 취하라. 그리고 그분의 위대하심 안에서, 그분의 강력한 능력 안에서 그분을 바라보라. 하늘과 땅의 위대한 주 하나님이 당신의 소유다. 그분이 당신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분이 소유하신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부요함이 있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라. 그래서 모든 것을 소유하라. 오, 누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누리며 소유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유일하게 행복한 자요, 진정으로 행복한 자요, 온전히 행복한 자다.
7.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격려하는 다른 많은 동기
(1)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과의 교제를 유지시켜 준다는 것을 생각하라. 아,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가 천국을 미리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 그렇게 그리스도와 우리 영혼 사이에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유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2) 매일매일의 필요가 당신에게 예수님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하라. 당신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당신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은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다. 배고픈 사람이 양식을 잊을 수 있겠는가? 목이 말라 헐떡이는 사슴이 물을 잊을 수 있겠는가? 오, 당신의 필요가 당신을 그리스도에게 달려가게 하라. 그분이 모든 결핍을 채우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원천이 아닌가! 그런데 왜 당신은 늘 그분을 바라보지 않는가?
(3)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당신의 진지함을 보여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임을 생각하라. 그리스도가 당신의 보물이라면 당신의 마음은 그리스도에게 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고정된 마음이야말로 구원하는 은혜의 참된 증거다. 그리스도인들이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간증과 영광스런 지위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고정시키기 위해 애쓰라. 그리스도는 당신의 마음이 그분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실 때 당신이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고 인정해 주실 것이다.
(4)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을 생각하라.
(5) 그리스도를 철저히 바라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누리는 외적인 기쁨이 커진다는 것을 생각하라.
(6) 예수님을 바라볼 때 모든 은혜가 당신 안에서 활기를 잃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라. 따사로운 빛과 온기를 누리고 싶다면 왜 햇살 속에 좀 더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은혜를 더 받고 싶다면 왜 그것을 위해 그리스도와 더 있지 않는가?
(7) 그리스도의 마음이 당신에게 온통 기울여져 있다면 당신의 마음도 그리스도에게 온통 집중되어 있어야 공평하지 않은지를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이요! 당신은 그리스도가 마음을 당신에게 온통 쏟고 계신 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심지어 당신이 당신 자신과 그분을 잊어버릴 때조차도 그분이 여전히 자애로운 사랑으로 당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 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매일 매일 긍휼을 베푸시며 당신의 영혼에 가까이 다가오시는 그분을 발견하지 못하는가?
(8)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명령이라는 것을 생각하라.
(9)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인 동시에 우리가 받는 보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라.
(10) 천사들이 얼마나 지극한 사모함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하라.
(11)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천국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라. 만일 우리가 이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국에서 살 수 있겠는가? 이 일을 싫어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만일 우리가 이 일에서 기쁨을 취하지 못한다면 천국은 결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닐 것이다.
(12)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비교한다면 다른 어떤 것도 마음을 쏟거나 추구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라. 그리스도가 당신의 마음을 소유하지 못하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누가, 무엇이 소유해야 하는가?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볼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무가치하다!
8. 지침의 적용
적용.
(1)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적 경험을 통해 알고 갈망하고 소망하고 믿으며 사랑하고 기도하며 닮아가는 것을 뜻한다.
(2) 바라보는 행위의 대상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성취하신 구세주를 뜻한다.
이제 당신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라.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모든 세상적인 일과 생각에 말하라.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마26:36).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갔을 때 종들과 나귀를 산 아래에 남겨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마찬가지로 당신도 모든 세상적인 생각에게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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