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원리
복음이 이끄는 순종
본성적으로 인간은 율법적인 구원의 방법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우리 마음은 여전히 행위 구원에 집착한다. 구원은 우리 자신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행위에 따라 복음의 위로와 복락이 좌우되는 것처럼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이와 다르다. 복음이 주는 위로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기도 전에 주어진다. 새롭고 거룩한 본성을 받은 사람만이 복음이 주는 복을 받는다. 성령으로 거듭나 새롭게 된 사람만이 이 복을 받는다. 이렇게 새롭고 거룩한 본성을 받은 사람은 즉시 거룩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새로운 본성은 가장 먼저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온다. 구속으로 받은 복-칭의, 양자됨, 성령의 은사 등-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복은 우리가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을 없애 버린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순종하는 데 필요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율법을 진정으로 준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복음이 주는 위로를 누려야 한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지금까지 거룩에 대해서 내가 언급한 모든 것이 이 진리에 담겨 있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과, 자기에게는 영원한 복된 소망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싶은 갈망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과, 그분의 모든 충만함을 통해 이 확신을 누린다는 것도 함께 보았다.
다음 질문들을 잘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복락과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을 확신하면서도 위로를 누리지 못할 수 있겠는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믿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을 모신 후에도 여전히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에 빠져 지낼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구원이 자신을 위로하는가? 신령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생명의 떡과 음료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이 즐거운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이런 것을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신다! 이런 복을 받을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용기와 힘을 얻는다.
둘째, 성경은 평강, 희락, 소망이야말로 신자의 순종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라고 한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이러한 신령한 위로를 누리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
셋째, 성경이 복음 진리를 선포하는 방식은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 마음을 위로하셔서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신다(살후2:17). 사도들의 서신을 보면 한결같이 이런 방식을 취한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교회에 선포하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받아 누리는 신령하고 위대한 복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사도들은 은혜의 복음으로 신자들을 먼저 위로하고 나서, 그들이 가진 위대한 복음의 특권을 근거로 거룩한 삶을 살라고 촉구한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 백성에게 거룩한 삶을 독려하셨다. 거룩하게 사는 은혜를 이미 주셨다. 먼저 마음으로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을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순종의 동기로 삼는 몇몇 구절들을 살펴보자.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기 때문이다(롬6:11).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롬6:14).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롬8:9,11).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기 때문이다(고전 6:15, 1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고후5:21).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 약 속하셨기 때문이다(고후6:16-1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고,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골3:1, 4).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고후7:1).
넷째, 율법에 대한 순종의 본질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이 먼저 복음의 위로를 얻어야 한다는 데 있다. 한 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사랑스러운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분에 대한 생각으로 기쁠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화평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의 소망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이 고난 중에 인내하고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겠는가?(롬5:1-3). 지옥의 영원한 고통과 멸망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겠는가? 복음의 위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복음의 확신을 풍성히 받아야 한다. 불신자들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 그들은 죄 가운데 죽어 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그뿐 아니라 온갖 거짓 복음에 목숨을 건다! 우리는 탁월한 “영혼의 의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앞에 있는 회심하지 않은 환자의 상태를 생각해 보자. 그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생명도 능력도 없다! 사지가 마비되어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누워 있지만 말고 일어나 운동도 좀 하라고 다그치겠는가? 그렇게 하는 사람은 결코 좋은 의사가 아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다그칠 수 있겠는가?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하나님과 원수라는 사실뿐이다. 일할 기력도 없는 사람에게 일을 다 마치면 힘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확신과 기쁨이 있어야 일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느8:10).
율법은 사람들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율법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정죄를 당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죄인이 절대 율법을 통해 구원받지 못할 것을 아시고, 율법 아래서 종 노릇하게 하는 절망과 두려움에서 먼저 그들을 건져내야 한다는 것도 아신다.
여섯째,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먼저 확신하게 하신 후에 사람들을 거룩한 삶으로 독려하신다. 복음을 통해 얻은 확신은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사는 원동력이다. 다윗은 자신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원천을 이렇게 말한다. “주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바라보면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시26:3, 새번역). 각자의 경험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적어도 거듭난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일곱째, 순종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자. 이들은 맹목적이 강압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노력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 확신과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경건을 미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율법은 위로가 아닌 진노를 가져다 줄 뿐이다(롬4:14-15).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은 괴로움과 고통만 준다고 생각하고, 죄가 주는 쾌락에 자신을 맡긴다. 위로를 전혀 얻지 못할 바에는 죄가 주는 쾌락이라도 누리자는 것이다.
이렇게 짓눌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자신의 상태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쌓여서 점점 더 지쳐 간다. 더 나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로서는 결국 율법을 따라 살고자 하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런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나를 원망하지 마라.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이들이 전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는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전한 것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복음과는 본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자녀들을 위로하지 못하는 강압적인 복음일 수 없다(고후1:3). “이스라엘 위로”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전한 복음이 위로를 주지 못하는 복음일 리 없다. “위로자” 되시는 성령께서 이런 것을 복음이라고 전하셨을 리 없다(요14:16-17).
하나님은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는 분이다(사64:5). 하나님은 백성들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분을 섬기기를 바라신다. 이런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말씀하신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신앙은 위로와 확신이 넘치는 것이라는 말이 거슬리는 사람은 아직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모든 길에는 평안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잠3:17,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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