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마샬

[스크랩] 월터 마샬, "성화의 신비" 13강, 복음이 이끄는 믿음의 삶

강대식 2015. 12. 12. 22:02

 

열세 번째 원리

복음이 이끄는 믿음의 삶

거룩함에 자라가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통해 주신 은혜의 방편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 은혜의 방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 스스로를 돌아보고 죄를 회개하는 것, 세례와 성찬과 같은 성례에 참여하는 것, 기도, 금식, 예배, 지역교회에 소속되는 것 등이다.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일들에 힘써야 함을 더 잘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충만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만으로 충분하다. 칭의와 성화와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믿음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고 보존되고 자라게 하기 위한 몇 가지 방편을 주셨다. 그러므로 믿음을 발휘하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이 방편을 사용하라.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을 사용할 때 조심하지 않으면 방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수 있다. 방편을 주신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기 쉽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하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7-9). 은혜의 방편을 더 의지하여 그것이 오히려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하라. 은혜의 방편을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구원을 얻기 위한 공로로 여기지 말라. 은혜의 방편은 시은소를 향해 있는 영광의 그룹들과 같다. 은혜의 방편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수단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방편을 주신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주신 은혜의 방편을 어떻게 합당하게 누려야 할지 살펴보려고 한다.

첫 번째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다(딤후3:1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믿음의 실존과 직결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편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이 나고, 믿음으로 말씀을 통해 계시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때문이다. 복음에 계시된 성부와 성자의 신비를 알기 위해 힘쓰라. 그 속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 있다(골2:2-3).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갈수록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계명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계명을 준행하지 않는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안전한 그리스도께로 피하고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날마다 율법을 준행하며 살 힘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달려갈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이 얼마나 고상하지 배우라. 율법이 요구하는 영적인 순전함과 정밀함과 완전함이 어느 정도인지 절감하라. 이런 사실을 더 알아 갈수록 자신의 죄를 더 확신하고, 자신의 죄를 더 확신할수록 죄사함의 은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더 찾게 된다. 또한 순전한 마음과 깊은 영적 순종을 추구할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생각보다 훨씬 더 죄악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자신의 죄를 넉넉히 가리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예수님을 즐거워한다!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절감한 서기관을 기억하자.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고 하셨다(마12:34).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자신의 본성적 상태가 얼마나 죄악되고 비참한지와,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충분한가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게 된다.


자신의 죄악됨과 값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첫째 아담이 어떻게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는지 알아야 한다(롬5:14). 둘째,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참된 차이를 알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야 할 복음의 원리를 체득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거룩 가운데 살게 된다. 이 원리를 알고 싶은 사람은 로마서 6-8장을 연구해 보라.


성경을 연구할 때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그리스도를 모셔야 할 자리를 지식이 차지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잃게 된다. 성경을 아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임을 명심하라!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읽고 설교를 즐겨 듣는 것에 구원의 소망을 두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자들 중에 구원에 이르는 복음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마13:14-15).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믿음에서 나오는 회개와 순종에 이르도록 기도하자.


두 번째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생각과 행실을 점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이 일은 중요하다.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확신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을 확증해야 할 필요가 있다(요일3:19, 21). 악한 길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살필 때 아주 조심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자신을 살핌으로써 믿음의 삶이 더 든든히 세워져야지 오히려 방해받거나 파괴되어서는 안된다. 자신이 믿음으로 사는지 점검하고 확인하라. 이 사실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일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믿음이 있는지를 살피는 동시에 믿음의 열매가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야고보 선생이 말하는 대로, 자기에게 있는 믿음이 열매 맺는 믿음인지 시험하고 살펴야 한다(약2:18). 그리고 다음 물음에도 대답해 보라. “어떤 원리가 내 삶의 근본 방향을 지배하는가?” 또한 복음의 원리를 따라 사는지 자문해 보라.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사는가?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 사는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영생의 소망이 나를 이끌어 가는가? 약속하신 대로 성령으로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세 번째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말씀 묵상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을 영적인 양식으로 먹고, 잘게 씹고, 소화시키는 것이다. 말씀이 영양이 된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모든 선한 일에 힘쓸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갖게 된 새로운 본성을 성경은 마음이라고 부른다(롬7:25). 새로운 본성은 신령한 일을 생각하고 묵상함으로써 살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해진 시간뿐 아니라 하루 온종일 주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시119:97, 1:2). 말씀을 빈번하게 듣고 묵상하지 않으면,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유익이 없다.


이미 구원의 필요를 절감한 사람에게는 설교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을 보면, 말씀을 묵상할 때 신령한 삶이 보전되고 더 견고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거듭난 사람이 갓난아이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그것을 통해 자라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벧전2:21). 이런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이라도, 설교자들이 계속해서 상기시켜 주고 더 자세히 알려 주기를 바랄 것이다! 이미 말씀을 잘 알고 그 안에 견고히 섰다 할지라도, 묵상을 통해 그 말씀을 기억하고 누리기를 바랄 것이다(벧후1:12).


말씀을 묵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믿음의 삶을 돕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날마다 말씀 묵상을 잘 하면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것이라 여기고 그것을 의지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라. 또 단순히 성경에 대한 사변적인 지식을 더해 갈 목적으로 묵상하지 말라. 그 진리를 따라 살 마음을 얻기 위해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올무를 조심하라. 단순히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읽는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많은 사실들만 아는 것이고 그것은 곧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더 깊은 원리가 있다.


하나님의 모든 진리와 성품을 묵상할 때,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절감한다. 그리고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생명과 능력을 얻고자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능력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복음 교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말해 주는 유일한 가르침이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오신다. 그분만이 우리를 살리시고,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신다(롬1:16, 고후3:6, 행20:32).


믿음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믿음을 더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히4:2). 하나님의 인애하심을 자주 떠올리면서 묵상하는 사람은 진리 가운데 행할 능력을 얻는다(시36:3). 거울을 앞에 두고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동일한 형상으로 영광스럽게 변해 간다(고후3:18). 성령에 이끌리어 묵상을 하는 사람에게 묵상은 너무나 달콤하고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대한 묵상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네 번째 방편은, 세례를 받고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세례에 참여하고 누리면, 세례는 믿음의 성장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구약의 할례와 마찬가지로, 세례는 믿음으로 얻은 의를 인치는 것이다(롬4:11). 세례를 그리스도의 자리에 두어 우상시해서는 안된다. 세례를 받으면 저절로 은혜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믿는 사람들이 많다. 할례와 다른 외적인 규례들을 의지했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빌3:4-5). 구원받은 일에 있어서 세례를 믿음과 같은 자리에 두어서는 안된다.


세례를 오용하지 않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뜻대로 세례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나는 세례를 통해 유익을 얻고 있는가? 내가 받은 세례에 대해 나는 얼마나 자주 생각해 보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받은 세례를 거의 잊고 지내고, 거기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 세례는 비록 한 번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받은 세례를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틈틈이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내가 받은 세례는 어떤 세례인가?(행19:3). 세례를 통해 나에게 인쳐진 것은 무엇인가? 세례를 통해 내게 부여된 의무는 무엇인가? 받은 세례를 통해 더욱 분발하고 스스로를 강하게 해야 한다. 세례를 통해 인쳐진 은혜를 붙잡고, 세례를 통한 부르심의 삶-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부활한-을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 가야 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모세가 아닌 그리스도를 청종해야 할 의무를 받았고,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었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덧입은 것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과, 더 이상 초등교사인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인치는 것이다(갈3:25-27). 세례는 우리가 죄의 몸을 벗은 것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부활한 것과, 모든 죄를 용서받은 것과(골2:12-13), 한 성령을 마시게 된 것을 확증한다(고전12:12-13).


세례를 통해 우리는 복음의 중심 진리를 본다.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를 통해 누리는 모든 구원과 거룩과 죄 용서를 위해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세례를 통해 유익을 얻는 사람은 믿음의 삶에 큰 진전이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 방편은, 성찬을 누리는 것이다. 성찬은 우리 믿음을 살찌우는 신령한 잔치다. 우리 안에 거하시고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 거룩한 길로 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강건하게 한다.


성찬의 목적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은 물론, 성찬의 신비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그분의 몸은 우리를 위해 찢겨졌다. 그분은 죄사함을 위한 새 언약의 피로서 보혈을 흘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신자가 모든 새 언약의 약속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신다(히8:10-12). 성찬의 목적은, 우리 영혼을 영원한 삶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빵과 음료로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믿음으로 그분을 받아먹고 받아 마시라. 우리가 먹고 마시는 떡과 음료가 우리 몸과 하나가 되는 것처럼,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먹고 마실 때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찬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그리스도는 이 신비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성찬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신령한 복을 생각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참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을 공표하시는 방편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서, 적극적인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 먹도록 우리를 독려하고 강건하게 하기를 원하신다.


여섯 번째 방편은, 바르게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중요한 방식이다. 기도는 모든 신자가 누리는 근본적인 특권이다(고전1: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기도를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새 언약의 중보이시고, 이를 통해 우리의 거룩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성부께 드리는 우리 기도의 중보이시다(히4:15-16).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보여 주시는 성령은 기도의 영이시다(슥12:10, 갈4:6). 우리 영혼을 타오르게 하는 불이시고, 기도로 하나님을 향해 날아오르게 하는 분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다.


기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너무나 중요한 책무이다. 기도하는 모든 일은 선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될 수가 없다! 기도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향이요 제사다. 기도와 더불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사랑과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시141:2).


우리의 부요함도 기도를 통해 온다. 평강은 기도와 더불어 계속된다(빌4:6-7). 낙담한 영혼은 기도로 위로를 얻는다(시32:1-5). 기도는 또한 우리의 영적 병기다. 많은 병기 가운데 하나로서가 아니라, 모든 병기를 바로 사용하게 하여 악한 때를 지나가게 하는 것이 기도다(엡6:18).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기도해야 한다(행2:42, 10:30-31). 기도하기 위해 날마다 시간을 구별하라(마6:11). 특별한 필요가 있을 때도 기도하라(약5:13-15). 우리의 일상적인 일이 방해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루 종일 짧게 짧게 기도하라(시129:8, 삼하15:31, 느2:4). 한마디로, 어떤 제한도 두지 말고 열심으로 기도하라(시109:4, 119:164).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열심으로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정말 어려운 일은, 바르게 기도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거룩함을 일구어 내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뿐 아니라, 바르게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가지를 다 가르쳐 주셨다(일명 주기도문). 하지만 기도를 정말 이해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잘 살펴야 한다. 기도할 때 다음 지침을 잘 기억하자.


첫째, 온 마음과 영으로 기도하라(사26:9, 요4:24). 기도의 영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하신다(갈4:6, 엡1:17). 지각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전14:15-16). 자신이 간구하는 선한 일을 향한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사62:8).


둘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성령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요16:14). 성령은 아들을 통해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하신다(엡2:18). 기도도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그분의 명령이다(요14:13-14). 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복음을 근거로 기도한다는 말이다(롬7:6, 고후3:3). 자신의 무가치함을 절감하며, 큰 겸손으로 기도한다는 말이다(시51편). 상한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말이다.


셋째, 기도를 잘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받으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기도를 의로운 공로로 여기고 그것을 의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넷째, 신자는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한다. 모든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께 용납되었고,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미 받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약1:5-7, 5:15, 요일5:14, 막11:24, 히10:14, 시62:8, 86:7, 65:16, 67:1, 17:6).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고, 양자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도하는 것이다(롬8:15, 갈4:6).


다섯째,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시라고 기도하라. 먼저 성령을 구하고(눅11:13), 그다음에 모든 신령한 것을 구하라(마6:33). 믿음을 위해 기도하라(막9:24).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라(대상1:11-12).


여섯째, 죄책과 고통, 지나친 염려와 두려움으로 인해 아무리 힘들지라도 기도로 영혼을 잠잠하게 하라(빌4:6-7). 하지만 불신앙, 의심, 두려움, 염려, 육신의 연약함 등과 싸우며 기도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악한 정욕, 무정한 마음, 초조함, 영혼의 문제와도 씨름해야 할 것이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분발해야 한다(골2:1, 사64:7). 우리의 육체는 기도하기 싫어서 꾸물거린다. 그러나 여기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성령으로 그것들을 대적하라(마26:41).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롬8:26-27). 하나님께서 당장 그렇게 해주시지 않을지라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눅18:1-7). 고통이 더할수록 기도는 더 간절해야 한다(시22:1-2, 눅22:42). 항상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기도는 마음의 위대한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기도는 한눈팔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도는 가능한 모든 믿음의 능력과 감정적 에너지를 동원해야 하는 일이다. 이렇게 할 때 거룩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일곱째, 거룩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의 모든 방식과 내용을 다 동원해야 한다. 전력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절감하고 마음에 경건한 슬픔을 간직하라(시38:18, 51:3, 12). 하나님께 탄원해야 한다. 탄원은 하나님의 성품과(민14:17-18), 하나님의 약속과(삼하7:26, 28), 자기 기도의 정당성을(시17:2-3) 근거로 드리는 기도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이해에서 비롯된다(시115:1-2).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긴 기도는 많은 탄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덟째, 기도의 형태를 규정함으로 자신의 기도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우리의 모든 필요와 형편에 들어맞는 정해진 형태의 기도 같은 것은 없다. 그리고 특정한 형태의 기도로 자신의 기도를 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초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전체 성경을 자신의 공동기도서로 삼으라. 성경은 모든 상황, 모든 경우에 적절하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성령의 언어다.


기도의 원리를 알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정해진 기도의 형태가 없이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다. 기도하면서 사용하는 단어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다. 유창한 언사와 화려한 수사 따위는 하나님께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일곱 번째 방편은, 노래하는 것이다. 시편이나 찬송시나 찬양곡이나 영적인 주제를 다룬 신령한 곡조들을 노래하는 것이 또 다른 은혜의 방편이다. 우리는 성경에 드러난 주제를 노래해야 한다(시64:54). 초대 교인들 역시 찬송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했다(행16:25).


우리는 올바르게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자신이 내는 고운 선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노래는 선율이 아니라 마음이다. 둘째, 노래하는 주제에 걸맞게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고(대하20:21-22, 행16:25-26), 주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시104:33-34, 105:3, 144:1-2, 33:1-3) 한다. 노래하는 목적은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거룩한 기쁨으로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약5:13, 엡5:19). 노래를 통해 우리는 하늘의 신비를 배우고, 그 노래에 담긴 가르침과 권면을 통해서 행할 의무가 무엇인지 배운다(골3:16). 셋째, 시편을 노래하라. 시편을 노래할 때 우리는 일인칭으로 노래할 수 있다. 시편은 신자의 삶에 특히 유용하다. 시편은 우리를 교훈하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지혜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시편은 경쾌한 운율이 있어, 그것을 낭송하든 노래하든 쉽게 기억된다(신31:19, 21).


여덟 번째 방편은, 금식하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에 금식의 예가 나온다. 사람들은 주로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금식했다. 금식은 믿음으로 거룩을 증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몇 가지 지침을 기억하도록 하자.


첫째, 금식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눅18:11). 금식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두었다. 은혜를 얻고 정욕을 죽이기 위한 직접적인 방편으로 금식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자신의 정욕을 죽이기도 전에 자신의 몸이 먼저 죽을 것이다! 또한 금식을 했기 때문에 더 정결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금식 그 자체를 하나님이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딤전4:8, 히12:9). 금식했기 때문에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반하는 생각일 뿐이다.


둘째, 기도하고 회개하는 특별한 시기에 금식이 도움이 된다. 금식은 영혼을 돕는다. 금식은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금식은 세례자 요한의 경우처럼(마3:4) 마음에서 땅에 속한 즐거움이 사라지고, 영혼이 천국과 거룩한 슬픔에 사로잡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슥12:10-14).


셋째, 금식을 주신 원래의 목적대로 금식을 사용하라. 금식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홉 번째 방편은, 서원을 지키는 것이다.


열 번째 방편은, 다른 성도들과 사귐을 갖는 것이다. 우리 믿음이 자라는 또 다른 방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사귐과 교제다(행2:42).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지역교회에 속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사귐이 있어야 한다.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마음 속으로 계속 열망해야 한다. 때때로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제와 의식 때문에 오히려 방해를 받기도 하고 고통의 광야를 지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려고 애를 쓴다.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를 계속 이어 가는 것이다(행2:42-47).


하나님께서는 가급적이면 악한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하신다(고후6:17). 악한 자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면, 그들의 영적, 육체적 필요에 부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고전5:9).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사귐은 사적인 관계와 공적인 모임 모두를 통해 지속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거룩에 자라가는 데 여러모로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교회를 통해 사람을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람을 이끄실 때는 보통 한 교회 안으로 이끄셔서 사귐을 갖게 하신다. 아니면 교회를 통해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추게 하심으로 사람들을 이끄신다.


우리 몸의 지체들이 서로에게 머리의 충만한 것을 전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지체를 통해 은혜와 충만함을 공급하신다(엡4:16). 죄에 빠지려는 사람이 있을 때, 선한 일을 독려하고자 할 때, 우리는 서로를 권면하고 교훈하고 위로한다(살전5:14). 홀로 있는 사람은 넘어짐을 피할 수 없다(전4:9-12).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성도의 사귐은 서로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잠27:17). 그리스도인들과는 계속 대화해야 한다(말3:16). 신자들과 나누는 경건한 대화는 거룩을 증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잠11:25).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을 서로 돌보고 섬겨야 한다. 교회의 사귐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처럼, 동일한 지체인 다른 이들도 선대해야 한다. 그리스도께 하듯 하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것은 크나큰 특권이다(마23:35-49, 시16:2-3).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에 자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도의 사귐을 바로 누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원리가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이상으로 교회나 그 지체를 추종해서는 안된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교회에서 사귐을 누려야 한다. 교회의 사귐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사귐을 통해 그리스도와 사귀게 되기 때문이다(요일1:3, 슥8:23). 아무리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교회는 따르지 말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인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전4:1). 그러나 우선 그리스도께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뜻 안에서 교회에 복종하라(고후8:5). 스스로 어떤 권위를 내세우든지 간에 사람들의 가르침은 반드시 성경으로 검증해 봐야 한다(행17:11).


교회는 그리스도께 속한 연약한 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거룩해져 갈 수 있도록 그들을 기꺼이 맞이해야 한다. 교회는 울타리 안에 있는 다 자란 양뿐 아니라 어린양도 먹여야 한다. 자신에게 거슬리는 사람이라고 해서 교회의 교제로 들이기를 꺼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도 감당해야 한다. 기억하자. 교회의 교제에 있어서 인내와 오래 참음처럼 중요한 요소도 없다(엡4:2-3, 롬14:1). 가장 연약한 지체야말로 교회의 교제를 통해 강건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이런 사람들을 받아야 한다(롬15:7). 우리 몸의 가장 연약한 지체를 거부하거나 떼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전12:23-24).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큰 관심과 사랑을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사귐을 위해서는 교회와의 교제와 사귐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요일1:3, 슥8:23). 오직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순전한 방식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계속해 가야 한다. 이 순전한 방식을 따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찾으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위대한 복을 누릴 때, 우리는 그분을 더욱 충만히 받아 누리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교회에서의 교제를 위해서는 가장 성경적인 가르침과 경건한 사귐이 있는 교회를 택하라. 새 창조의 원리에 따라 교회와 성도들을 잘 살펴보고(고후5:16-17) 시험하라(계2:2, 3:9). 그러면 교회나 성도들 때문에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사는 경건한 사람들과 사귀라. 더 자주 그들과 만나고 교제하라. 근처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서로를 돌아보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세워 주기에 가장 적합하다. 이것이 바로 교제를 통해 누리는 유익이다.


마지막으로, 핍박이 있다는 이유로 교회를 등지지 말라. 핍박당하는 때야말로 교회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때다. 가장 혹독한 시험 가운데 있을 때 교회를 더 절실히 붙잡아야 한다. 감옥에 갇히고, 심지어 죽게 된다 할지라도 한몸인 교회 지체들과의 결속을 공고히 해야 한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이다. 방편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로 이끌고, 이런 깊은 교제를 통해 우리는 거룩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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