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브리지스

[스크랩] 찰스 브리지스, "청교도 목회학", 4부 목회사역의 공적 임무(강의안 2)

강대식 2016. 7. 7. 22:52

3장 율법 설교의 성경적 방법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로 인정받은” 목사의 표지는, 그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이다. 이것은 회심하지 않은 그의 청중에게 복음을 충분히 그리고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여러 계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시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목사의 설교체계는 성경적인 균형과 이해의 특징을 가질 것이다. 그 체계는 교리의 가르침과 체험이라는 특권과 실천적 결과로서,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포함한다.


이 계시는, 비록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서로 다른 두 부분, 즉 율법과 복음으로 나눠진다. 율법 설교는 우리가 다루는 주제의 주요 부분으로, 우리는 그것을 분리해서 생각해 보고, 또 복음과 연계해서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1. 율법 설교와 그 성격, 용도 그리고 임무


율법의 참된 성격과 그 연관성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을 형성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율법 설교를 율법적인 설교로 매우 부적절하게 동일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복음과 독립적으로 율법을 설교한다. 그러나 복음의 설교에 율법적인 형태가 있는 것과 같이 율법 설교에도 복음적인 형태가 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성격과 용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복음 진리에 대한 자신의 확대된 견해와 결합시키고 있다. 그는 그 성격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롬7:12)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율법의 용도는 우리에게 “유익하다”(딤전1:8)고 알려주고 있다.


율법의 용도는 다양하며 중요하다. 많은 건전한 좋은 결과들에 대해 세상은 율법의 신세를 지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성품을 발견하게 해주며,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알려주고, 그들이 율법을 행하도록 구속한다. 또한 율법은 죄를 확정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율법은 절대적이고도 중단되지 않는 순종을 요구한다. 영원한 형벌의 고통에 대해, 마음의 죄와 더러움과 비참함을 확인시켜, 거룩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찌푸린 얼굴 아래에서 죄인이 핑계대지 못하게 하며, 죄인은 구주를 반길 준비를 하게 한다. 율법의 언약적 형태는 복음의 필요성과 성격 그리고 탁월성에 대한 그의 이해를 확대시킨다.


또한 삶의 규칙으로서 율법은 그의 창조자, 그의 주권자, 그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의의 최고의 완전함으로” 그리스도인에게 다가 오는데,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자기 주인의 사랑의 멍에를 메고 즐겁게 순종하는 그의 길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의 최고의 특권이다. 이것은 또한 하늘나라에서는 즐거움의 절정이 될 것이다(마11:29-30; 계7:15; 22:3). 삶의 규칙으로 율법을 이용하는 것은 지속성과 일관성을 증진하기에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율법의 규정은 매일 자기 검증의 기준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율법은 속박을 야기하기는커녕, 복음을 수종드는 완벽한 자유이다. 우리가 구주를 사랑하는 증거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요14:15). 그것은 다름 아닌 도덕법의 가르침이다. 그 도덕법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매력적인 의무의 사슬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매여 있는 것이다. 각성한 죄인의 첫 번째 소원은, “주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행9:6)라는 것이다. 끊임없는 그의 기도는, 저의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게”(엡5:17) 해달라는 것이다.


율법의 면모와 유익을 잠시 살펴보면, 언약으로서의 율법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롬8:15)을 자극하여 두려움에 빠지게 한다. 우리를 낮추며, 경고하고, 설득하고, 절망으로 인도한다. 이와 달리 생활의 규칙으로서의 율법은 하나님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인 속에 “양자의 영”(롬8:15)이 일하게 한다. 그의 일상적인 소원과 율법에 따르는 기쁨은 하나님의 권속에 대해 관심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언약으로서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율법의 폭정으로부터 구원받게 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그들의 삶의 규칙으로서의 율법을 되돌려 보내고 있다. 그들이 율법의 다스림으로부터 구원받은 한 편, 그들을 “의문의 묵은 것으로가 아닌,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도록”(롬7:6)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언약의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신 것에 대하여, 그분을 섬김에 있어 삶의 한 규칙으로서의 율법에 순종함으로 그들은 그분께 감사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율법과 복음의 연결


뉴턴 목사는 이 주제의 중요성에 대해 놀라운 말을 하고 있다. 율법과 복음 사이의 구별과 연결 그리고 조화와 그리고 서로 예증하고 서로 세워주기 위한 그 둘의 상호 보완적 성격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보통이 아닌 특권이며, 영혼이 좌측 혹은 우측에 있는 오류들에 말려들지 않게 보호하는 기쁜 수단이 된다. 사도 바울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딤전1:7). 이것은 그리스도인 교사에게 있어 그 모든 복음과의 연결과 함께 율법의 분명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같이 보인다.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교에 입교한 교사들은 이 요지를 오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이 없는 말로 어둡게 하였다. 어리석은 자기들의 청중을 홀려서 복음의 단순함을 보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함으로 자유롭게 세워주기 보다는 그들에게 속박의 멍에를 다시 씌웠던 것이다(갈3:1; 5:1).


1) 이 주제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한 명백한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

본래의 계시에 있어서는 이 둘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율법은 인간 본성의 빛으로 발견할 수 있다(롬2:14-15). 반면에,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오직 계시의 빛으로만 알 수 있다(롬14:25). 율법은 죄인을 정죄한다. 따라서 그를 의롭다 할 수 없다. 복음은 예수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 하고 따라서 정죄할 수 없다. 율법에는 하나님이 영원한 사망의 무시무시한 위협자로 등장한다. 혹은 진노와 복수의 하나님으로 표현한다. 반면에 복음에는 영생의 은혜로운 약속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사랑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으로 표현한다. 성경에 있는 정죄의 문장들은 모두 율법에 속한 것이다. 의롭다 하심의 모든 문장들은 복음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2) 율법과 복음의 조화 문제는 또한 우리의 목회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비록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반대가 아니다. 동일한 출처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 둘은 궁극적으로 같은 계획 속에서 만나며 같은 목적을 섬긴다. 영광스러우신 그 둘의 저자가 보기에는 반대되는 완전함인 것 같이, 율법과 복음은 기독교 체계 안에서 서로를 섬기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복음의 의는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성취한다. 복음의 은혜는, 규칙으로서의 율법에 순종한다. 둘 다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결합시킨다. 몽학 선생으로서의 율법은 죄인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복음은 죄인의 필요에 그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복음과 율법은 둘 다 같은 계시의 두 부분이다. 비록 각각의 임무는 구체적으로는 다르기는 하지만, 둘을 분리해서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데, 이것 또한 복음의 큰 목적이다. 둘 다 하나님의 마음과 형상의 사본이므로, 양쪽 다 미워하거나 또는 둘 다 사랑하거나 해야 한다.


3) 복음을 위한 준비로서 율법은 또한 우리 사역의 일부분이다.

율법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하는 우리의 교사이다. 이것이 교회의 통일된 견해였던 것으로 보인다. 틴델(Tindal)은 죤 퍼스(John Firth)에게 말하였다.


율법을 진지하게 강해하라. 모든 육체를 정죄하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죄인임을 입증하라. 그리고 자비가 정죄를 가져가 버리기 전에는, 율법 아래서 모든 행위가 죄이며 저주받은 것임을 입증하라. 그 다음에 신실한 목사로서, 우리 주 예수의 자비를 널리 펼쳐 보여 상한 양심들이 생명수를 마시게 하라.


청교도 목사 볼튼(Bolton)은 말한다.


율법의 힘으로 먼저 부수고 상하게 하라. 이것은 은혜를 심기 위한 필수 준비이다. 그리고 가장 달콤한 복음의 위안의 가장 값진 기름에 풍덩 담그라.


4) 우리는 복음으로 율법이 세워진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복음의 가르침은 율법을 언약의 형태로 세운다. 의롭다하심을 얻을 대가로서 율법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보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두 가지를 구별하면서도 그 둘의 상호 의존성과 연관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4장 성경적인 복음 설교


이 주제는 목회의 효과성의 주근원지를 우리에게 열어 준다. 성경적인 설교 원칙은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4:11)는 것이다. 모든 설교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보는 자신만의 견해가 있어 무의식적으로 불균형의 복음을 설교하게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원칙의 틀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말한 사도 바울의 결심이 되어야 한다.


성경의 모든 부분은, 형태적으로는 아닐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복음을 포함하고 있다. 즉, 복음의 모든 원리와 의무들이 많게 혹은 적게 그분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관계에 근거에서 그 원칙과 의무들을 실행하는 것이 사도적 패턴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의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들어 올리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시며, 그리스도의 얼굴을 기쁘게 드러내시며, 얼마나 이 장대한 주제에 그의 활기찬 빛을 비춰 주시겠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께서 가르침을 마음에 적용시켜 주실 때 우리 성도들은 생명을 얻고, 빛나고, 번성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의 영과는 분리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특권들을 현재에 즐기게 되며,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골1:12)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큰 포고였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공로와 그의 영광을 선언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분에게로 올 수가 없다. 세커(Secker) 대감독은 자신의 교역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충분히 복음적으로 설교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우리 교인들을 분리주의자들에게 많이 잃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달려 들어간 그 곳으로부터 그들을 다시 되돌리지도 못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원리적으로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고전2:13)으로 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상당한 시간을 한 곳에서 설교하였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거나 적었다면, 분명히 당신의 청중 속뿐만 아니라 당신이나 당신의 설교 속에도 어떤 잘못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도 그랬던 것 같이 오늘날에도, 적절히 설교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게”(히4:12) 작용하기 때문이다.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조사해보라.


정확한 성경적 설교관은, 진술이 충분하고도 구별되어야 하며, 그 어조가 감동적이어야 하며, 그 전달 방법이 대중적이어야 하며, 체험적인 공감이 있어야 하며, 그 실행이 직접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요컨대, 성경의 바로 그 언어와 그 정신이 깊이 스며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보장된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여기게 하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 알게 하라(고전2:16; 4:1).


1. 복음 교리 설교


지금까지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정수에 해당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 교리에 대한 우리의 설교는 충분하고 분명하여야 한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


설교는 그 범위 내에서 그리스도의 비밀 전부를, 즉 그의 인격과 사명 그리고 공로, 특권과, 의무, 약속 그리고 소망에서 성부의 사랑과 성령의 역사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설교들이 설교자가 좋아하는 교리들에 국한되어 있고, 적어도 동등하게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다른 교리들은 소홀히 해버린다. 우리는 숨김없이 우리의 증거를 선포해야 한다. 우리 청중이 특정 교리들을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빠뜨리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타락으로 인해 인간이 죄를 짓고 부패하고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 구속자의 속죄하는 피와 순종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완전히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것, 믿음으로 하나님의 가족, 즉 양자가 된다는 것, 이 믿음의 거룩한 특징과 그 증거들이 있다는 것, 중생과 점진적인 성화과정의 사역 속에 그리고 거룩한 하늘나라의 위로를 주는 그의 모든 사역 속에 성령이 직접적으로 증개하신다는 것, 삼위 하나님이 각각 자기 분야에서 구속의 섭리 가운데 조화로운 사역을 하신다는 것,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자로서의 사역에서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이러한 견해들이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것들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영원의 깊은 곳에 있는, 즉 하나님의 가슴 속에 있는 무한한 이 자비의 강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마땅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딤후1:9).


영원하신 이 뜻은 구원 계획의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모든 샘들의 근원이기도 하며, 모든 것들이 놓여 있고 모든 것들이 돌아가는 토대이기도 하며, 모든 것이 확정되는 보증이기도 하다. 우리 주님께서도 자기 복음의 효과적인 적용을 자기 아버지의 주권과 관련시키셨다(요6:24-65; 10:24-30). 사도들도 교회론을 가르칠 때 아주 분명하게 같은 견해를 개진하였다.


그러므로 이 패턴을 따르고 또 이 진술들과 조화를 시키면서, 복음의 초대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선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유효적 소명의 토대를 숨겨서는 안 된다(요4:37). 은혜의 부요함을 설교할 때, 그것의 근원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엡1:3-6; 딤후1:9). 우리는 거룩함의 의무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연결되어 있고 또 그것으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해야 한다(롬8:29; 엡1:4; 살후2:13; 딤후1:9). 이러한 가르침의 경향이 건전하고 거룩할 때, 우리가 그 교리들을 정당한 자리와 정당한 순서로 설교할 때, 그리고 성경에 있는 것을 힘 있고 분명한 말로 설교할 때,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억지로 하는 반복, 그리고 불필요한 반복을 피하라. 그러나 성경이 결정해놓은 것을 담대한 어조로 선포하는 일에서는 움츠러들지 말라. 이 진리들을 구원의 사슬을 잇고 있는 모든 고리들과 연결시키라. 하나님의 마음을 그 출발점으로 하여 그 마지막 영원의 완성까지 하나님 자비의 모든 단계들과 연결시켜라. 그리하여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


과연 우리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우리에게 비추인 빛에 따라 우리 교인들에게 설명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성경은 회중을 가르치라고 쓰인 책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안수 받은 그 성경의 해석자들이기 때문이다. 안수식 때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 즉,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권위를 받으라”는 것은, 복음의 모든 교리를 다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현명한 설교는 성경에서 진술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그 비중에 따라,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하여, 그 진술과 순서에서 복음의 모든 교리를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넓은 분야의 지식에는 영원히 진보해야 할 끝없는 범위가 있다. 그러므로 “은혜와 그리스도의 지식에 자라가도록” 연구하고 기도하는 것을 우리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설교가 진실할 뿐 아니라, 우리의 설교가 진리가 되도록, 즉 예수 안에서 전체적인 진리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정확한 교리 체계는 우리로 하여금 설교의 모든 부분을 귀중한 목표와 잘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의 권위 있는 인이 찍힌 모든 진리를 선언하게 인도할 것이다. 결함이 있는 체계는 기독교 교리나 실천적인 권면에 제한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자기 개인의 생각을 과장되게 진술하거나 부당하게 한쪽으로 치우치는 설교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이것 또한 부당하게 숨기는 것이므로 비성경적이다. 추론은 겉으로 보기에는 합법적일지라도, 분명하게 성경의 선포의 지지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우 조심스럽게 수용하여야 한다. “계시가 멈추는 곳에 멈추고, 그 계시 이상으로는 단 1인치도 넘어가려 하지 말라”(캠벨 교수).


교리의 진술은 단순해야 한다. 우리 설교 재료들은 충분히 단순하다. ‘죄와 구원’이다.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는 것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의 보증에 근거하여 즉시로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있다고 하여야 한다. 복음의 초대는 값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구주께서는 기꺼이 받아 주시며, 또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을 다 받아주시는 그 확실성을 보증해 주어야 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회개하고 돌이키라”(행3:19), “믿고 구원 받으라”(행16:31). 이것이야말로 값없이 주는 복음, 죄인에게 적합한 복음이다.


교리적 설교는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어떤 한 편의 설교가 복음 전체를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그래서 설교가 다루는 주제는 서로 연결된 전체의 일부분을 다루게 되며, 전체의 구조와 뚜렷하게 관련성을 가지고 다루어야 한다. 분명한 연관 없이도 복음의 중요한 진리들을 많이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복음 그 자체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 있는 그 조화로움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설교할 수 없다. 복음의 값없이 주심과 그 거룩함에 연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제대로 전해질 수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교리를 제쳐 놓고서는, 죄의 권세와 더러움, 죄의식 그리고 정죄 등을 제대로 설교할 수 없다. 성령의 사역은 구속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전할 수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계짓지 않고서는, 거룩은 설교될 수 없다.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그가 나누어준 의와 분리해서는 설교될 수 없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믿음이 적극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설교할 수 없다. 약속을 보여 주는 것은, 의무들과 분리해서는 설교할 수 없고, 또 그 부과된 동기와 따로 설교할 수 없다.


이것들은 복음의 여러 부분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분들이 성경의 연관과 끊어져 있다면, 그것들은 복음 설교를 구성하지 못한다. 이 분리되어 있는 진리의 조각들은 기독교 교리의 든든한 기초를 만들 수 없으며, 또 그 위에 하나님의 전이 세워질 상부 구조를 만들 수 없다. 시계 장치의 구조에 혼란이 있는 것처럼, 복음의 진리를 제자리에 두지 못하면, 전체 시스템이 망가지게 된다. 복음의 계획을 그 원리들로부터 끊어버리면, 소생시키는 모든 힘이 마비된다.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로 언급함이 없이 설교하면, 아무리 중요한 실천적 진리의 진술도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를 거두기 보다는, 들포도나 죽은 행위만을 거둘 뿐이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 같이, 믿음이 없는 행위도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수적으로 복음에 속한 매우 귀중한 진리를 설교하는 것이 가능하면서도,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 전하면서, 그러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부분을 전체에 연결시켜주는 중대한 연결의 부족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결함을 가진 진술은 복음의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손상시키고, 하늘로부터 온 복음의 능력과 복음에 대한 논증을 약화시킨다. “교인들을 지식과 명철로 먹이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이 얼마나 적은가!(렘3:15).


레이놀즈(Reynolds) 감독의 놀라운 권면은 이 주제의 결론을 잘 내리고 있다.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이 신령한 설교의 하늘로부터 오는 기술에 전념하라.” 그래서 죄를 납득시키라. 즉 죄의식과 더러움과 죄의 오염, 저주와 비방을 확신시키라. 영혼이 그로 말미암아 노출되는 것이다. 그대의 청중이 깨어나 겸손하게 되어 “임박한 진노로부터 피하라”는 예고를 받게 될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리스도의 완전하게 충분한 의와 헤아릴 수 없는 그 부요함을 납득시키라. 그의 지식의 탁월함과 그의 사랑의 측량할 수 없음과 그의 약속들의 고귀함을 깨우쳐주라. “그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의 부활의 권능에 동참함”과 그의 거룩함의 아름다움과 그의 멍에의 쉬움과 그의 화평의 복과 그의 구원의 기쁨과 그의 영광의 소망을 이해시키라.


그대의 청중의 마음이 자기 속에서 불 타오르게 하여, 피난처와 성소를 찾아 구속자의 품 안으로 비둘기처럼 날아들게 하라. 그러면 청중이 모두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이 평화의 왕의 다스리심에 굴복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사신 그분의 것이다. 더 이상 우리 자신에 대해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다시 살아나신” 그분에 대해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하라”,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라.” 그분의 이름과 은혜, 그분의 영과 사랑이 모든 설교에서 승리를 얻게 하라. 당신의 위대한 목적이 마음속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그분의 사람들의 눈에 사랑스럽고 귀하게 보이게 하라.

청중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라. 사람들을 보호하는 성소로, 그들을 화목하게 하는 희생 제물로, 그들을 부요하게 하는 보물로, 그들을 치료하는 의사로, 그들과 그들의 섬김을 하나님께 드리는 옹호자로, 그들을 상담하는 지혜로, 의롭게 하는 의로, 다시 새롭게 하는 성화로, 구원하는 구속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알리라. 그리스도가 당신의 모든 설교의 가슴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되게 하라.


2. 체험적 복음 설교


“아마 사도 시대 이후로 현재(19세기)보다 복음의 이론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설교하지만 체험적이며 실제적인 영향력 즉 생명과 능력은 너무 적게 강조하는 것 같다.” 교리 체계를 마음의 공감을 얻도록 적용시키지 않으면, 단지 영향력 없는 차가운 지식을 나누어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원리들을 보여주지 않고서는, 마음과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그 실천을 일으킬 수 없다. 설교자의 마음에서 우러난 진리 진술은 자연스럽게 청중의 마음으로 체험적인 감동을 가지고 흘러들어간다.


3. 실천적 복음 설교


복음은 매우 정확한 교리로도 전할 수 있고, 체험적인 위로의 모든 부요함으로도 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겔33:32)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교리나 체험을 전혀 언급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불완전한 것처럼, 목사는 실천적인 의무를 직접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함이 없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 설교와 실천에 대한 설교 간의 상호 연관성과 상호 의존 그리고 상호 사용의 이 세가지 요소들을 설교 속에 나타내도록 하라. 그러면 머리와 가슴, 그리고 생활이 동시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실천 설교와 교리 설교를 연결시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홀슬리 감독의 증언을 들어보자.


교리들이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확고하게 받아들여진 그것에 비례하여 신앙의 실천도 항상 커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도록 사람들의 양심에 촉구하는 것은, 복음의 설교자가 해야 할 큰 의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실천을 특정한 방식으로, 즉 그 교리들을 가르침으로써 수행하는 것이 그의 의무라는 것도 동등하게 진실이다. 계시된 교리들이 공급하는 동기들은 그가 다루어야 할 유일한 동기들이며, 그리고 그 유일한 동기들에 의해 신앙적인 의무가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성경적인 설교는 교리들을 실천적으로 강해하며, 실천을 교리적으로 설교한다. 그 어느 쪽도 빠뜨리지 않는다. 또 체험적인 신앙과의 연결을 끊지도 않는다. 거짓 신앙 고백자들을 걸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을 활기 있게 하기 위해서도, 실천 설교는 필요하다.


4. 복음의 적용 설교


설교의 가르침은 지혜와 진지한 적용이 필요한 것이다. 전자는 뒤어난 머리가 필요하며, 후자는 따뜻한 가슴이 필요하다.


5. 명확히 구별하는 복음 설교


우리 설교의 한 가지 큰 목적은 교회와 세상 사이에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산상 설교를 하실 때 그 맺는말에서 분명히 이 구분선을 그으셨다(마7:24-29). 홀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사는 자기 양과 이리를 구분하여야 한다. 자기 양 중에는 건전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해야 하고, 건전하지 못한 것 중에서는 약한 것과 감염된 것을 구분하여야 하며, 감염된 것들 중에서는, 그 병과 감염의 성격과 특성, 그리고 정도를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목사는 말씀을 때에 따라 전할 줄을 알아야 한다. 목사는 모든 유혹에 대한 해독제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의심에는 말씀을, 모든 오류에는 쫓아낼 방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또 모든 무기력에 대해서는 격려의 말을 가지고 있다. 설교자는 그의 양들이 어떤 영적인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6. 단호한 복음 설교


미지근한 진술 방식 때문에 진리를 성경적으로 제시하는 힘이 심히 약화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복음의 교리들이 드러나 있고 설명이 된 것 같긴 한데, 너무 약하고 머뭇거리는 어조로 전한다는 것이다. 교리의 성격을 대충대충 설명하거나 그 교리의 진리를 의심하는 듯이 보이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그 교리의 가치와 효력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은 관심을 거의 일깨우지 못한다. 그리고 효과도 내지 못한다. 활기 없게 전달할 때, 우리 교인들은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게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를 거의 느끼지 않는다.


“율법과 증거”는 복음에 대한 분명하고 단호하게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율법과 증거”에 근거하여 강한 호소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성경 전체의 근거에 서 있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으로 전해야 한다. 의심 한 점 없는 담대함으로 우리의 직분을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갈1:11-12)이기 때문이다. 사도들도 복음의 신적 권위를 확신하고,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을 전했다(갈5:2-4). 사도 바울도 단호했다. 자신의 말이 변덕스러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증언은 일관성이 있었고, 흔들림이 없었다(고후1:17-20). 자기 자신이 증언한 진리에 대한 그의 단호한 확신이 그러했으므로, 심지어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9)라고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 자신 또는 천사까지라도 저주하려 햇던 것이다.


약한 형제들 앞에서는 온유하였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고전9:22) 하는 마음으로, 그들 앞에 걸림돌을 놓기보다는, 자기 사는 마지막 날까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로 젖먹이는 어머니가 자기 자녀들을 소중히 한 사도였다(고전8:13). 하지만 그들 중에 가르침을 왜곡시키거나 실천을 느슨하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매우 심각한 책망과 매우 무서운 경고를 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살전2:7-8; 갈5:2; 고전3:17).

단호함의 성격이 우리 자신의 기분대로 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맡은 자에게 주장하는 자세”(벧전5:3)를 하거나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고후1:24)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오히려 비록 모든 이의 종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권세 있는 자처럼 말씀하셨던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마11:29)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요3:11)하여야 한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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