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차녹

[스크랩] 스테판 차녹, 바로 알아야 할 거듭남의 본질 9

강대식 2016. 11. 28. 16:20

14장, 자기 점검을 위한 시금석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의 절대적인 필요성과 최상의 탁월성을 지금까지 살펴 보았는데 이를 감안할 때, 스스로를 점검하기 위하여 엄격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자신을 아는 것은 가능하며,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자신의 마음의 활동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바로 어제의 당신인 것을 알지 못합니까? 이전에 미워하였던 것을 지금은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 그리고 이전에 사랑하였던 것을 이제는 미워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습니까? 영혼은 자신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께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21:17).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난 것은 바로 이 반성적인 능력에 있습니다.


2. 새창조의 효과와 작용에 대해 깊이 탐구해야 합니다

  영적인 생명이 있는 곳에는 영적인 작용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나의 활동과 의미가 자연의 생명보다 더 뛰어난 것을 지니고 있는지를 탐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새창조는 이전의 뼈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뼈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옛 피조물의 뼈대는 더욱 비활동적으로 바뀌게 되고, 새 피조물의 형태는 더욱 활기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반드시 어떠한 효과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어둠은 머물러 있을 수 없듯이 어둠의 역사와 그 능력은, 새로운 피조물의 특성과 함께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 원리들과 목적들, 관습들 친구들, 또한 감정들이 지나갔는지, 아닌지를 잘 살펴보십시오. 새로운 감정들, 원리들, 목적들이 새롭게 자리잡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그 겉모양과 실제 능력 사이에, 그림과 생명 사이에 있는 차이를 잘 분간해 보십시오.

당신의 내적인 움직임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새로운 피조물의 움직임은 그 적절한 좌소들 속에 있습니다. 곧, 정신과 심정, 의지, 양심, 그리고 감정들 속에 있습니다.

또한 새로운 피조물에게 있어서 죄의 능력과 은혜의 능력은 모두 마음에 있습니다. 쓴물과 단물은 모두 그 근원지에서는 가장 쓰고, 또한 가장 답니다. 그러나 지류를 따라서 흘러 내려오면서 다른 것들이 뒤섞이게 되어 그 성질을 어느 정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3. 당신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를 살피십시오

  당신의 예전의 모습과 반대되는 어떠한 모습이 있는지, 어떠한 부분에 이 반대되는 모습이 존재하는지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것은 영적인 습관이며 신적인 성품이고, 하나님의 법이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이전에 기뻐하였던 일들을 이제는 혐오하게 되

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자기가 속한 집단의 뜻을 따라서 행하였습니

다. 그러나 이제는 “주여,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전에는 무례한 자였지만, 이제는 경외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반대하였지만, 이제는 그의 수고와 열정, 마음이 모두 그분에게로 집중되었습니다. 그에게 십자가의 도는 더 이상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지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의 즐거움이고,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귀한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반대가 되는 혈통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불신앙 대신에 믿음이 들어와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 대신에 참된 지식이 있습니까? 적대감이나 냉랭함 대신에 타오르는 사랑이 있습니까?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갖는 것입니다.


4. 구체적으로 변화의 상태를 살피십시오


1) 하나님과 닮아 가기를 바라는 뜨거운 열망이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닮는 것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있습니까? 이 형상의 첫 번째 설계도는 더욱 완전함을 위한 강렬한 열망을 낳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기 위한 탄식과 신음이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그 첫 번째 윤곽선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즐거움에서 나옵니다.

영혼의 호흡은 다윗처럼 바로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향합니다(시42:2). 자기 안에 있는 생명과 영의 원리가 되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그 영혼 안에 이미 그 의가 있다는 표시이며, 앞으로 더욱 채워질 것이라는 보증입니다. 이렇게 그것을 맛본 사람만이, 열정적이면서도 지치지 않고 신적인 성품을 바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딘가가 막히게 되면, 병든 사람이 일부분만을 치료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듯이, 새로운 피조물도 불완전한 윤곽선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청사진 전체의 모습대로 이루어지기를 열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그는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자신이 아직 완전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절한 소망과 열정으로 계속 전진하려고 합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1-14)

그는 단지 죄에서 해방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천사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순결하고 고상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떠한 귀감도 자신을 위하여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통치의 기쁨을 느끼십니까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참된 권위를 인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의 통치가 당신의 영혼 속에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통치하신다, 주님 외에는 나를 통치하는 자가 없다‘라는 시실을 참된 기쁨으로 외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들어오게 된 새로운 피조물은 그 통치에 적합한 틀을 갖추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최상의 통치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죄에 굴복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더 큰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당신의 영혼의 활동이 하나님께 지도를 받고 있습니까? 그러하다면 당신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롬6:4)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쉽게 지켜지고 있습니까? 그분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며 그분의 방식을 따라서 행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고 여기고 있습니까? 당신은 은혜의 사슬에 매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죄를 짓는 것을 강철 족쇄에 매이는 것으로 여깁니까?

하나님의 뜻이 당신의 뜻보다 위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당신의 뜻을 버립니까? 하나님의 뜻이 당신의 뜻과 반대가 될 때에도 그 하나님의 뜻을 신성한 것으로 여깁니까? 아니면 그 뜻이 당신의 이익에 맞을 때에만 그렇게 합니까? 만일 당신의 이익에 맞을 때에만 그렇게 한다면, 당신을 지배하는 주된 동력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니라, 다름 외부적인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당신 속에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표시가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당신의 감정을 이끄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지속됩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당신의 즐거움입니까? 하나님과 닮지 않은 부분이 당신에게 남아 있는 것 때문에 슬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닮지 않은 부분이 당신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슬퍼하고 있습니까? 아직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단지 그분의 형상이라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합니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모든 것을 당신도 미워하고 있습니까? 잡동사니 속에 은밀히 숨겨 둔 정욕을 하나라도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마음가짐은 새로운 피조물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하나라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분을 닮으려면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타고난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부모에 대한 사랑보다도 더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더 뛰어나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열망을, 당신은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거워하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열렬하게 그분을 사랑합니까? 당신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당신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이 친구들이나 신용, 생명보다 더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양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길을 마치게 된다면, 베개 위가 아니라 처형대 위에도 자기 목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관심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과의 닮음도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닮음이야말로 참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새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본성을 사랑하지 않

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본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영적인 애정이 없이 신적인 본성을 가지는 것, 또한 그 원형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어떠한 것이 하나님보다 더 가까이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십시오. 어떠한 죄에 대한 증오심이 폭발하고 있습니까? 죄에 대한 슬픔이 얼마나 쏟아지고 있습니까?


4) 내적이며 영적인 의무들에 대한 자세는 어떠합니까

  기도를 통해 지속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하나님과 매일같이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까? 기도와 묵상은 가장 내밀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져다 줍니다. 그분과 대화를 하거나 그분을 묵상하는 것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가 분리되지 않도록 우리 안에 주어지는 마음속의 그 법이, 그분을 전혀 찾지도 않고 찾는다 하더라도 냉랭하게 찾는 그런 모습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의 모든 사랑은 그분을 향하며, 그분을 중심으로 삼습니다.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는 일입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성령께서 처음으로 주시는 각인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혼의 눈 위에,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부르짖는 영혼의 목소리에 찍힙니다.

옛 본성은 하나님을 향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본성이 내뱉는 말은, ‘우리에게서 떠나소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새 본성은 하나님에 대한 이끌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본성에 적합한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우리에게 선도하다’라는 말입니다.


5) 말씀에 대한 반응이 달라졌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가 제정하신 것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평가하며 어떠한 흥미를 가집니까? 생명과 음식이 이러한 면에서 서로 비슷합니다. 영적인 양식에 대한 영적인 식욕은 새롭게 된 본성이 위로를 얻을 수 있는 표시입니다.

마음에 있는 법은 말씀의 각인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대해 최상의 애정을 가지고 반응하게 됩니다. 마음이 처음으로 깨끗하게 되고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은 모두 말씀에 의해서입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활동을 사랑하게 되며, 그래서 그 활동의 방법들과 그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 있는 진리의 성령은, 새로운 피조물을 말씀 속에 있는 진리들에 대한 강한 사랑으로 채울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진리와 말씀에 있는 진리는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거나 서로에게 낯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영적 성장을 더욱 촉진시키기 위하여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당신 안에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기를 바랍니까? 최상의 상상력을 말씀의 발 앞에 내려놓습니까? 말씀이 명하실 때,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이삭(Isaacs)을 바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규례들 속에서 그분의 얼굴을 뵙는 것이 당신의 기쁨이 됩니까?


6) 당신의 마음과 생활에 어떠한 거룩함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지 않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신적인 본성에 영원토록 동반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거룩은 성령님께서 심으신 것이 들어난 결과입니다. 그 거룩으로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께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뜻에 가장 합당한 길들을 보여 주시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의 마음의 평범한 상태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당신은 어떠합니까? 거룩이 당신에게 적합한 요소입니까? 거룩과 반대되는 것이 당신의 마음 속에 싹트게 되면, 그것이 당신에게 사망이 됩니까? 마음의 청결함이 선한 일에 대한 열심과 결합되어 있습니까? 그것들은 언제나 함께 합니다. 둘 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신 목적이며, 둘 다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죄의 불결함에 대한 강한 혐오감이 있습니까? 또한 은혜의 순결함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있습니까? 새창조가 일어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왜내하면, 원죄 속에 있는 모든 악의 뿌리 때문에, 이전에는 거룩한 모든 것에 강하게 저항을 하면서 죄악을 저질렀지만, 이제는 은혜의 습관 속에 있는 모든 은혜의 뿌리 때문에 모든 죄를 싫어하게 되고 모든 거룩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7) 신적인 성품에 반대하는 것들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합니까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 본성에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 적대 감정을 가지겠지만, 거듭난 자가 신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 가지는 적대감보다는 크지 않습니다. 새사람과 옛사람 사이에 화목한 관계가 불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로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1) 죄의 활동에 대한 저항감이 생겼습니까?

  화해 불가능한 전쟁이 은혜와 부패 사이에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숨겨진 육신이 방해하려고 무장해 있고, 성령은 그 입지를 확보하려고 무장해 있습니다. 그 싸움은 사람의 전체 속에서 진행됩니다. 마음에 자리잡은 은혜는 명령을 하달하고, 그 원수에 대항하기 위하여 구석구석에 부대를 배치합니다. 이처럼 빛과 어둠은 화해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하나가 강해지면 다른 것은 약해져야 합니다.

이런 대립이 새로운 피조물로 하여금 자기 몰래 파고 들어온 지극히 작은 죄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매우 고통스럽게 여깁니다. 또한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시119:128)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당신의 용기와 힘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까? 어떤 정욕이 일어나려고 할 때, 이전보다 더욱 잘 무장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다가 올 때 두러움 없이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죄의 티끌이 조금이라도 당신의 눈에 들어와 괴롭힐 때에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까?


(2) 영적인 죄들에 대하여 얼마나 마음의 상함을 느낍니까?

  새로운 피조물의 마음 속에는 영적인 사악함에 대항하는 전쟁이 진행 중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사탄은 마음 속에 있는 죄들을 가장 잘 촉발시킵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양심은 그러한 죄들에 대하여 저항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어둠을 느끼고 혐오하는 일은 새로 태어난 양심만이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인은 몇 개의 죄와 싸울 수는 있겠지만, 모든 죄와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된 사람은 모든 죄와 싸웁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과 마음 속에 있는 은혜의 생명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를 분쇄하기 위하여 그 손에 언제나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3) 죄의 유혹들과 발생 때문에 마음이 상하십니까?

  거듭난 상태에서는, 유혹들의 공격에 대하여, 영혼이 이전보다 더욱 취약하게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가지게 된 행복을 질투하는 사탄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어떠한 유혹이 뚫고 들어와서 그것을 지배하게 되면, 그 유혹에서 벗아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해 하늘의 도움을 구하고 탄식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가 뚫고 들어온 그 틈새를 메우고, 앞으로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요새를 강화시키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4) 하나님과 그분의 일들에 대하여 어떠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까?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40:8).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에 즐거워하는 것은 새 본성의 분명한 표지입니다. 죄와 쾌락으로 인하여 기뻐하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그분과 교제하는 것에 위로를 얻게 됩니다.

어떤 피조물의 가장 내적인 활동이 그 본성에 일치하는 것처럼, 거룩한 봉사가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열정적인 기질을 가지고, 날이 세워진 것같이 강렬하게 긴장해서 수행될 것입니다.

어떠한 봉사를 하다가 우리가 지친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옛 본성과 율법적인 기질로써 그것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사랑과 즐거움을 누린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새로운 피조물과 새로운 언약적 은혜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는 일 외에는 어떠한 일에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자연인의 즐거움은 육신의 것으로 끝나지만, 새롭게 된 영혼이 진보하는 것은 너무나도 영적입니다.

그러하다면 당신은 어떠합니까? 신앙의 의무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당신에게 즐거움을 줍니까? 교만한 본성에 아부하는 것이나 탐욕스러운 기질에 이익을 줄 때 쾌감이 있는 것처럼, 당신이 하나님께 사랑의 도피를 하는 것,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이 수고하는 것이 유쾌합니까? 당신의 하는 일에 평안이 없으면서도 더 나은 성품을 이루기 위하여 호흡하며 힘씁니까? 영혼의 최상의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꼭 붙잡을 때까지 쉴 수가 없습니까? 오, 행복한 그대여! 신적인 성품 외에 그 어떠한 것도 당신을 이러한 즐거운 황홀함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조정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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