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장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기질은 앞에서 살펴 본 모든 것의 결과에 의한 것이다. 이 복은 바로 앞서 나온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와 매우 선명하고 잘 정의된 논리적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얼마나 탐사성 있는 진술인가? 여기서 우리 각자의 위치와 신앙고백에 대하여 놀라운 시금석을 갖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들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팔복을 전체로서 취급한다면 이것이 우리가 복종해야 할 일반적인 시금석이 됨을 인식해야 한다.
먼저, 팔복은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대한 원초적이며 중심되는 진리들을 상기시켜 준다. 복음은 우리의 행동보다 우리의 자세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복음의 중요한 강조점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인가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무언가를 행하기에 앞서 어떤 존재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존재(being)는 행위(doing)보다 중요하며 자세가 행위보다 더 의의가 있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려 애쓰도록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성품을 소유하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어떤 유형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의 행동은 그 결과가 된다.
나의 기독교가 나를 통제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바른 자세이다. 내가 진리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은 내가 내 속의 성령의 사역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를 지배하시는 것이지 내가 주님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주의 영이 나의 삶의 중심에서 나를 통제하고 있으며 나의 존재의 근원에서 나의 모든 활동의 원천에서 나를 조종한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의 삶의 표면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일종의 도금이나 합판 장식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인격 바로 중심에서 발생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그의 모든 생각과 모든 전망과 모든 상상을 통제하며 그 결과로써 그의 모든 행동까지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활동은 이 새로운 창조의 결과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새 성품의 결과이다. 우리 생활 전체는 실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표현이며 선언이다.
- 우리는 긍휼히 여기고 있는가?
주님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살펴본 그런 인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다. 이것은 ‘안이하고 적당주의식’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을 지배하는 관념은 절대 자유사상을 가져야 하며,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행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범죄와 법률 위반에 대하여 미소짓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인은 말하기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안이하고 맥없는 사람이요, 적당히 사귀기 쉬운 사람이라 생각한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생래적 기질이 아니다. 생래적 기질은 팔복의 어느 하나를 해석하는 데도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 안이하고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더 큰 이유는 특별히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형용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긍휼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공의로우시며 긍휼하시다. 긍휼과 진리는 서로 조화된다. 만일 진리와 율법을 희생시켜야만 긍휼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긍휼은 참된 긍휼이 아니며 이 용어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 긍휼은 무엇인가?
긍휼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긍휼을 은혜와 비교하는 방법이다. 은혜가 죄를 전체로서(총괄적으로) 내려다보는 반면, 긍휼은 특히 죄의 비참한 결과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긍휼은 측은감과 행동이 합쳐진 것이다. 긍휼의 영을 가진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에게 죄지은 사람을 여러분의 권세하에 두고 있는 위치에 있음을 발견할 때에 나타나는 그러한 영을 의미한다. 여러분이 긍휼한가를 아는 길은 여러분이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에 희생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고 그 사람에게 양식과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 긍휼이다. 측은감만 느끼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 사태를 제거하려는 하나의 노력을 의미한다.
완벽하고 으뜸가는 긍휼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일이며, 아들의 오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련한 상태를 보셨고 고통을 보셨으며, 그래서 우리 상태를 해결하신 것이다. 공의와 긍휼 사이, 긍휼과 진리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둘은 서로 조화된다. 일반적으로 죄와 관련되어 있는 은혜가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를 내려다보시게 되면 일반적인 것에서 떠나 특별한 긍휼이 된다.
-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이 본문처럼 자주 오해를 받아온 팔복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해야만 하나님도 내게 긍휼이 될 것이다. 내가 용서해야만 나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내가 용서 받는 조건은 내가 용서하는 데 달려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주기도문)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그들은 이 비유들을 들어 말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성구를 모순되게 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첫째, 이 어구가 이처럼 법적으로 엄격히 풀이된다면 누구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고 아무도 천국을 보지 못할 것이다. 용서는 불가능 하게 된다. 둘째, 그러면 우리는 신약성경으로부터 은혜론을 전부 말소해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다음 원칙을 본문에 적용하면, 본문의 해석은 단순해진다. 주님은 내가 참으로 회개할 때에 한해서 참으로 용서를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나는 처벌 이외에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으며 내가 용서를 받는다면 그것을 전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돌려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서 내 위치를 인식하고 내가 이런 식으로만 용서를 받게 됨을 알게 되면 내게 죄를 범한 사람들을 반드시 용서하게 될 것이다.
“나는 심령이 가난하다. 내게 의가 없음을 안다. 나는 철저하게 무능함을 안다. 그뿐만 아니다. 나는 속에 있는 죄 때문에 애통한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이 외침이 무엇인지를 알며, 내 속에 있는 이 타락성을 제거하고자 의욕한다. 내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이 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았다. 나는 채움을 받았다. 나는 이 의를 모두 거저 주시는 선물로 받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 때는 나도 그러했던 것처럼 이 세상 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이 때문에 내가 그들에 대하여 긍휼할 수 있고 또 긍휼해야 한다”
죄를 결코 지으신 일이 없고, 누구에게도 해를 주지 않으시고, 오셔서 진리를 설교했고,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하려 오신 분,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보라.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보며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이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아니라 사탄이었고, 그들은 사탄의 희생물이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한 순교자 스데반을 바라보라. 스데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고 그들을 긍휼히 여겼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이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
죄의 노예된 무능한 모든 사람에 대하여 비애를 느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악용하고 헐뜯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들에 대하여 큰 비애감을 느껴야 한다. 그들은 무슨 일로 그렇게 성내는가를 보라. 그들은 영이 온통 잘못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이 여기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여러분이 긍휼하다면 이렇게 긍휼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이미 긍휼을 갖고 있더라도 죄를 다시 지을 때마다 다시 긍휼을 받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형제를 용서하지 않고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기도에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이 복이 말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주님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다.
용서의 한 가지 조건은 회개이다. 회개는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께 조금도 권리를 주장할 것이 없으며, 용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대면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위치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반드시 긍휼해야 한다는 귀결이 오는 것이다. 여러분 속에 용서의 영이 없다면 여러분은 용서를 받았을 리가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엄숙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긍휼함과 함께 마음속에 임할 때 우리는 긍휼하게 된다. 내가 용서를 받았다면 용서를 할 것이다. 이미 긍휼을 얻었기 때문에 긍휼하다.
또한 우리는 최후의 날에 긍휼이 필요할 것이다. 종말의 날에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직고할 때 이 긍휼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들 속에 있다면, 우리가 긍휼하다면, 그 날에 긍휼을 받을 것이다. 긍휼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거나, 그리스도 밖에 있어 아직 죄 속에 있거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긍휼한가? 죄인들이 여러분에게 죄를 지어도 그 모든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가? 여러분은 세상과 혈육과 마귀의 희생물이요 속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가? 이것이 시금석이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긍휼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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