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11/26 주일설교, `마음에 주로 삼아`, 벧전 3:15-18a

강대식 2017. 11. 27. 02:05

2017-11-26 주일예배

본문: 벧전 3:15-18a

제목: 마음에 주로 삼아

 

1.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벧전3:15)

 

성경에서 마음은 영혼의 중심이요, 생명의 근원이다.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마음 중심에서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말한다.

 

입술로만 하는 고백은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도 마음은 멀었기에 이스라엘은 멸망 당했다.

율법을 줄줄 외면서도 그 뜻을 바로 알지 못하고 왜곡하고 탐욕과 방탕의 길을 갔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면 하나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것이다.

철학과 속임수에 사로잡히고,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따르고 세상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행태가 그대로 현대 교회에 재현되고 있는데도 놀라지도 않는다.

교회는 순전한 말씀과 거룩한 영으로 가르치고 예배해야 한다.

그럴려면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야 한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순전한 진리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그분은 우리 마음에 주로 들어오실 수 없다.

마음에 모신 온갖 다른 주들을 내쫓지 않으면 그분은 들어오실 수 없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처럼,

세상과 그리스도를 나란히 주로 섬길 수 없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로 삼을려면,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중심에서 내몰아야 한다.

마음에 주는 둘이 될 수 없다.

우리 마음을 돌아 보자. 무엇이 주를 차지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달라 하신다. 마음 가죽을 베고 내게 속하라 하신다.

껍데기만 드리고 속은 세상으로 사람으로 채우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것이 십계명의 제1계명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둘째 계명이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다.

이 두 계명이 성경 전체의 기본이고 요약이라는 것이다.

 

마음을 드리는 자가 목숨을 드릴 수 있고 뜻을 드릴 수 있다.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은 자가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고,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생애를 드리고 헌신할 수 있다.

 

골로새서는 말씀한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2:6-7)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는가?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았는가?

그러면, 내 안에서가 아니라, 그분 안에서, 온통 그분이 나를 차지하여 행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믿음과 삶의 건물을 세워가야 한다.

바른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박혀 있는지,

그 위에다가 어떤 건물과 바벨탑을 세워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땅에 쌓은 보물들은 좀과 동록이 해하고 도둑이 구멍을 뚫고 가져가고 만다.

 

하늘에 쌓은 보물들만이 온전히 보존되고 영광과 축복을 낳는다.

우리의 믿음과 삶의 건물은, 우리가 생애 동안 세워가야 할 건물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중심이 되어야 한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하나님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 돌은 부딪치는 돌이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게 하셨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사탄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더 좋아하면 하나님은 심판하셔서

미혹의 역사를 보내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신다.

사탄의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을 보낸다고 하셨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0-22)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

세상 철학과 사람의 전통, 세상의 초등학문이 섞이지 않은,

순전한 진리의 말씀 위에 세워지는 성전 건물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세워지는 건물 성전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요 성전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시는 건물 성전이요,

이 건물들이 서로 연결하여 한 성전으로 세워진다. 새 예루살렘 성전이 되는 것이다.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은 성전은 거룩할 수밖에 없다.

거룩하고 흠이 없고 티나 주름잡힌 것도 없도록 마음과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았으니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과 상속이 우리의 것이다.

 

그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해 줄 말씀들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

온유하게 대답해 주면서도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해야 한다.

그 소망을 이루는 것은, 내가 아니고, 크고 두려우신 주님이 하시기 때문이다.

 

2. 선한 양심을 가지라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양심은 하나님의 율법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은 하나님의 법이 그 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죄를 지을려고 하면 양심이 작동하여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이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2:14-15)

 

양심이 그 증거가 된다고 하였다.

그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혹은 변명하기도 하면서

그 마음에 새겨져 있는 율법을 행위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악하고 병든 양심들은 율법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다.

짐승보다 더 잔인하고 악한 짓을 서슴치 않는 것은 그 양심이 죽어 있기 때문이다.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가 그래도 아직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의 모습이다.

 

선한 양심을 가질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성화의 길을 가야 한다.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행실을 할 때 기독교를 비방하는 자들도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무슨 사회 정화 운동 정치적 운동을 하는 것은 오히려 비방을 자초하고 키울 뿐이다.

 

착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행실을 할 때

그 선한 행실을 보고 비로소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3.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7-18)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죄악으로 인한 고난에는 회개가 있을 뿐이다. 합리화하는 것은 문제이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죄를 범하지도 않으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신 분이,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셨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않으셨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선을 행하는데 고난이 온다.

선을 행하되 고난으로 인해 낙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된다.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할 때, 오는 고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며 살 때, 오는 고난을 말한다.

땅 위에 보물을 쌓지 않고 하늘에 보물을 쌓을 때, 오는 고난을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이 받은 고난이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순교당하고 핍받 받은 이들이 받은 고난이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다.

그들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였고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의 고난을 받았다.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는 고난을 받았다.

그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고난은 그들이 받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았다.

그들은 약속하신 기업을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자기 기업으로 받았다.

 

그들을 구원하신 구원의 창시자가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시고 본을 보이셨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 주님은 친히 우리 죄와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지셨고,

우리도 선을 행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십자가 없는 부활, 고난 없는 영광, 광야 없는 가나안!

그것은 성경의 진리가 아니고, 잡신들이 을퍼대는 중독성 마약일 뿐이다.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본받으며 믿음과 인내로 우리 십자가를 잘 지고 가자.

영광의 그 날, 상급의 그 날을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자.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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