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어떻게 각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가? 신약성경의 대답은 명백하다. 그리스도의 일은 성령에 의해서 각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된다. 그리고 성령의 이 일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일부다. 그것은 일반적인 수단에 의해 성취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 속에 이미 존재하는 선을 통해 성취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삶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가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라는 말이다.
오늘날은 이 말이 비웃음을 사고 있다. 중생은 초자연적인 일이다. 그런데 현대인은 역사의 영역에서 그러한 것처럼, 개인의 경험에서도 초자연적인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핵심 교리는 세상의 악이 세상의 선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바깥에서 오는 어떤 도움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이 현대의 원리는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와 동일한 이야기가 성경에서 발견된다. 성경은 악을 제어하기 위해 사람 속에 이미 있는 선이 장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참되고 순결하고 칭찬받을 만한 모든 것, 우리는 이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이미 있는 선으로 세상의 악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위대한 원리임이 확실하다. 옛 신학자들은 “일반 은혜”의 교리 속에서 그것을 충분히 인정했다. 세상에는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최악의 상태가 나타나는 것을 억제하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활용되어야 한다.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은 위대한 원리다. 그것이 많은 유용한 일을 성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취하지 못하는 하나가 있다. 바로 죄라는 질병을 제거하는 것이다. 물론 죄의 증상을 완화하거나 그 질병의 형태를 바꾸기는 할 것이다. 때로 질병이 감춰져 있어서, 그것이 치료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가 1914년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 질병이 새로운 형태로 터져 나와 세상을 놀라게 한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죄의 증상을 완화시킬 연고가 아니라, 질병의 뿌리를 공격할 치료약이다.
사실 질병의 비유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유일하게 참된 비유는 성경에서 사용된 것이다. 사람은 단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어 있으며, 정말로 필요한 것은 새 생명이다. 그 생명이 “중생” 혹은 신생이 발생할 때에 성령에 의해 주어진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신생이라는 중심 교리는 많은 구절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이야기된다. 그중에서 가장 엄청난 것 하나가 갈라디아서 2:20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벵겔은 이 구절을 기독교의 정수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정당한 평가였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속에 있는 기독교의 객관적 근거를 가리키며, 기독교적 실존의 초자연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것은 극히 이례적인 말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하면 거기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렇게도 많이 드러나는 것을 볼 것이다”라고 사도가 말하는 셈이다.
만약 갈라디아서 2:20이 홀로 있다면 그 의미는 분명 신비주의적으로 혹은 범신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마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합쳐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오해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전체 교훈을 통해 그런 오해를 충분히 방지했기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맺는 새로운 관계에서 자신의 독립적 인격을 상실하는 일은 없다. 도리어 그것은 어디서나 극히 인격적이다.
그것은 모든 자 혹은 절대자의 단순히 신비하기만 한 관계가 아니라, 한 인격과 다른 인격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관계다. 바울은 오해를 이미 충분히 방지했기 때문에 아무 걱정 없이 극단적으로 과감한 언어를 사용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말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의 삶에서 일어나는 단절에 대한 엄청난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거의 새 사람이 된 것과 같다. 그 변화는 너무나 거대하다. 이 말들은 기독교란 단지 삶 속에 새로운 동기가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 사람이 쓴 말이 아니다. 바울은 그의 온 마음과 심장으로 새로운 창조, 곧 신생의 교리를 믿었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고 성령에 의해 적용되는 구원의 한 측면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동일한 구원에는 다른 측면도 있다. 중생은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갖는 새로운 관계가 있다. 새로운 관계가 “칭의”에 의해 성립된다. 칭의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행동이다. 칭의가 중생 전에 오느냐 후에 오느냐를 질문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는 그것이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이다. 그리고 이 둘은 그리스도인 삶의 시작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의롭다 함을 얻고 중생한 정확한 순간을 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그들이 회심한 날과 시간을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의 경험을 비웃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들이 어느 날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을 때는 아직 죄 가운데 있었으나,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설 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어서, 자신이 다시는 그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런 경험은 매우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모두가 그런 경험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정확한 순간을 알지 못한다. 그 행동의 효과는 명백하지만, 행동 그 자체는 하나님의 고요함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자란 자녀들에게 흔한 경험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전에 영혼의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가정의 양육을 통해 믿음이 평화롭고 쉽게 온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든지,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의 행동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인의 삶이 시작될 때 하나님이 마치 막대기나 돌을 다루듯이 우리를 다루고, 우리는 어떤 일이 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이다. 도리어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루신다. 구원은 사람의 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우리의 구원에서 하나님은 인간 영혼의 의식적 행동을 사용하신다. 비록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지만, 동시에 사람의 행동이기도 하다. 구원에서 하나님이 일으키고 사용하는 인간의 행동은 믿음이다. 기독교의 중심에 “믿음에 의한 칭의”가 있다.
믿음이 오늘날 너무나 높게 칭송되는 까닭에, 사람들은 그저 모든 종류의 믿음으로 만족한다. 단지 믿음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복된 태도가 있기만 하면, 무엇을 믿는가는 어떤 차이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 비교리적인 믿음이 교리적인 믿음보다 낫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순수한– 지식이라는 불순물에 의해 덜 약화된- 믿음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종종 오류에 기반할 때가 있지만, 진리에 근거하는 경우가 전혀 없다면 믿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이 진리에 근거한다면, 그리스도인을 구원해 주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그리고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다. 기독교적 견해에 의하면, 믿음이란 단순히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성품에 의해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내려는 노력을 그만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바친 희생 제사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믿음의 결과가 새로운 생명이요 모든 선행이지만, 구원 자체는 절대적으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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