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의 성취로서의 루터, 후스의 사상적 계승자/ 권현익
위클리프의 사상적 후계자가 후스였다면, 후스의 사상적 계승자는 루터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이다. 후스의 「교회에 관하여」를 읽은 루터는 1520년 이 책을 게르만어로 번역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후스인들과 더욱 활발하게 교류하게 되었다. 1523년 후스인들이 루터와 성찬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보내오면서 루터는 그들에게 더욱 호의적 입장으로 바뀌었고, 1533년 루터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형제회 신앙 고백서를 출판해서 후스인들을 다시 한 번 역사 가운데로 불러냈다.
후스는 「교회에 관하여」에서 교황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교황과 악한 고위직 사제들을 ‘적그리스도’로 지명하였고, 예배 중 교인들이 이해를 못하는 라틴어 사용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후스는 강력하게 교황의 권력 남용에 ‘저항’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부도덕한 사제가 집례하는 예전은 무시해도 됨을 선언하는 등 로마 교회 전체 제도와 교황권을 공격하면서, 교회란 지구상의 모든 거룩한 신자들의 교통의 장소이며 교회의 머리는 지상의 어떤 대리자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강조하였다.
1520년 루터는 그의 동역자 슈파라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요한 폰 슈타우피츠(루터의 영적 지도자)가 그러했듯이 지금까지 나도 후스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후스의 사상을 가르쳐 왔다. 즉 우리는 그를 인식하지 못한 채 사실은 모두 후스인들이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도 진실한 후스인들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 보헤미안 교사나 지도자의 도움 없이도 그들이 닿았던 바로 이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며 이전 개혁자들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었음을 고백하였다.
로마 교회는 후스인들을 사탄의 지상 왕국을 인정하는 마니교적 이원론자들이라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과거 보고밀인들과 카타르인들, 롤라드인들에게도 퍼부었던 비난의 이유, 방법과도 완전히 일치한다. 그들에게도 같은 이유로 마니교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이 방법으로 끈질기게 압박을 가했던 것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1521년 루터는 “보헤미아의 개혁자 후스가 종교개혁의 급진적 선구자였다면, 나는 그 후스보다 다섯 배나 더 급진적이다”라며 후스와의 역사적 연속성을 공표하였다. 그리고 루터는 1536년 비텐베르크에서 4편의 후스 편지를 번역한 「후스 서간집」을 출판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콘스탄츠 공의회 때 이미 진리가 드러났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진리가 승리하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후스는 화형당할지언정 결코 설득당하지 않았다”는 에라스무스의 말을 인용했다. 공의회의 불의와 폭력성에 대하여 분노를 표출하면서 동시에 후스의 꿋꿋한 자세로 인하여 진리는 그 머리를 높이 들고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며 후스의 순교를 높이 칭송하였다.
1537년에 후스의 설교 중 하나에 큰 감동을 받아 그 설교를 출판하면서 “선한 열매를 맺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이 개혁자는 부도덕한 교황이 보편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으며 단지 특정한 로마 교회만의 머리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비판하였는데, 면벌부가 최고로 남용되고 있던 그 시대에 그는 과감하게 불의를 비판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로마 교회의 강한 반발에도 개혁운동을 결코 멈추지 않았던 인물이었다”며 후스의 용기를 칭찬하였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이 출판된 이후 1535년에 루터는 「보헤미아의 형제회의 신앙 고백」을 라틴어로 출판하면서 직접 서문을 썼다.
1537년에 루터는 후스의 설교를 발췌해서 발표하였으며, 1541년에는 다니엘 주석의 서문에서 “당신들은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우지만 한 세기 안에 검은 백조가 나타나 더 이상 굽지도 끓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고 말하였던 얀 후스의 예언을 상기시켰다. 나아가 자신도 교황주의와 세속주의에 투쟁했던 후스의 연속선상에 서 있음을 다시 한 번 밝혔다.
1540년대에는 위클리프, 후스 및 루터와 관련된 주제들이 많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세 사람이 수행한 종교개혁의 연속성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1546년 2월 19일 루터의 장례식에서 행한 유스투스 요나스의 설교, 즉 거위와 백조와 관련된 설교가 알려진 이후 백조와 함께 서 있는 루터의 그림들이 북부 게르만 교회들에서 나타났고, 이를 통해 후스는 루터 이전 종교개혁자로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174-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