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익(참교회,종교개혁이전)

1) 개혁 교회가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을 자신들의 영적 선조로 확인, 이를 공표하다!/ 권현익

강대식 2022. 10. 3. 22:36

개혁 교회가 발도인들과 알비인들을 자신들의 영적 선조로 확인, 이를 공표하다!/ 권현익

 

칼뱅의 말년이던 1560년 이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교회에는 카타르인들 혹은 알비인들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위그노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왕성해지면서

로마 교회가 이단 척결의 필연성을 알리는 소책자들을 속속 내놓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서 이들 카타르인들과 알비인들도 개혁 교회의 관심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559년 파리 고등법원 의장인 질 르 메트르는

과거 로마 교회를 허물었던 알비인들과 리옹의 발도 이단들을 하루에 600명이나 화형시켰던

필리프 2세를 예로 들면서, 위그노들에게도 극형 판결을 내리는 것이 온당함을 변호하였다.

 

1561년 툴루즈 고등법원의 장 가이는

세르네 수도사 피에르의 알비인들의 역사를 발췌한 편집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단은 반드시 척결되어야 하는 죄악 그 자체이며, 알비인들을 일소한 것은 역사의 웅변적인 본보기이다.

툴루즈의 위그노들도 알비인들과 동일한 운명을 맞도록 완벽히 제거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 이단이 알비인들을 계승하고 있으며, 심지어 루터교도 알비인들 이단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격적인 언동이 시사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 선구 개혁자들의 정체성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들은 동일한 신앙을 가진 선배와 후배요, 선조와 자손이요,

동일한 공동체의 다른 시대 새 버전일 따름이었다라는 증언이 되는 셈이다.

 

이런 소책자들이 등장하면서 프랑스 개혁 교회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적 조상, 즉 자신들의 선구자들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개혁 교회의 선조는 루터가 중심이 된 독일 교회일 수가 있을까?

아니면 프랑스 왕국 내 다른 선조들이 존재했을까?

위그노들의 주 활동 지역인 랑그독에서 오래전에 활동하였던 알비인들은

과연 자기네 위그노와 어떤 신앙적인 연관성과 영속성을 갖고 있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과 결론을 얻는 일은 루터교회보다 프랑스 개혁 교회 자신에게 더 시급하였으므로,

1572년 님므 총회는 알비인들에 관한 본격적인 역사 연구를 결의하였고,

1595년에 이르러 몽토방과 몽펠리에의 목사 장 샤사니용은 알비인들 역사를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알비인들은 알비 지역에 정착하여 위그노를 배출하게 되는 발도인들이었다고 분명히 밝혔다.

 

니콜라 비니에는 세 권으로 된 적그리스도의 현장에서

알비인들’,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보헤미아  형제단

적그리스도인 교황의 전횡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헌신적인 노력을 한 개혁자들이었다고 소개하였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 로마 교회에 항거하여 투쟁한 마르틴 루터보다

400년이나 먼저 우리와 동일한 교리로 신앙 고백을 하던 선조들로서,

우리와 동일한 신앙을 이유로 박해 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는데,

어떻게 그 선조들을 우리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지되어 오늘 우리의 시대까지 계속된 것이 아닌가?”

 

루터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인 마티아스는

이 카타르인들, 즉 알비인들을 발도인들과 동일한 증인으로

개신교회의 진정한 영적 계통에 속했다고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최근에 발견된 13세기의 문서들은

1300년경에 카타르인들이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발도인들)’의 교리를 충돌 없이 수용하면서

순순히 발도인들 공동체로 유입되고 동화되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라우르센은 다음과 같이 썻다.

알비인들은 오늘날의 개신교를 낳은 개혁 계보의 기원에 위치하면서

당대 신앙 전파에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박해자들이 분개하며 잔혹하게 핍박하였음에도

그들은 신앙과 교리를 언제 어디에서든지 용감하게 전파하였다.

그 결과 잉글랜드의 위클리프인들, 보혜미아의 후스인들,

그리고 14세기와 15세기에 알어난 각 처의 개신교회들의 출현에 불쏘시개갸 되었다.

 

피에르 발도의 한 추종자인 올리비에는 발도의 종교적 신념을 알비 도시로 전달하였고,

발도의 성경 번역을 통하여 성경을 읽기 원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에

독서와 이성적 사고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결국 이것은 루터의 메시지였고, 바로 발도인들과 후스인들의 메시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알비인들과 발도인들의 가르침은 후스인들을 통해 루터에게 전승되었다.

그러므로 발도인들과 후스인들의 가르침이

루터를 통해 역사 위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고 타당하다.”

 

윌리암 존스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발도인들, 카타르인들, 알비인들, 심지어 바울인들조차도

그들이 적들에 의해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뿐 사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신앙의 그룹들이었다.”

 

발도인들의 역사를 기록한 페랭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발도인들은 매우 오래된 언어, 즉 그들이 거주하는 계곡 언어로 양피지에 쓴 신약 성경을 갖고 있었으며,

피에르 발도의 출생 20년 전인 1120년경에 이미 그들의 언어로 된

무엇이 적그리스도인가?’라는 제목의 책을 갖고 있었다.

예수회의 존 글레처조차도 1177년과 1178년에 툴루즈인들과 알비인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교리, 규율, 생활, 교리적 오류는 모두 발도인들의 그것들과 동일한 것으로

그들은 발도인들에게서 유래되었다고 말하였다.

또한 독일의 카타르인들이나 밀라노의 파타린인들도

같은 시대의 신앙인들로서 발도인들과 동일한 신앙과 교리를 갖고 있었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참 교회의 역사>, PP 504-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