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12 주일설교, '열심과 하나님의 의', 롬 10:2-3

강대식 2023. 2. 12. 14:22

2023-02-12

본문: 롬 10:2-3

제목: 열심과 하나님의 의

 

1. 열심이 있으나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롬10:2)

하나님께 열심만 가지고서는 종교인은 될 수 있어도 참된 그리스도인은 되지 못한다.

종교적 열심이 유대교회 로마교회 개혁교회 현대교회를 만들어 왔다.

세력을 만들고 제도권 종교를 장악하고 세상의 권력과 부를 누려왔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리새인의 열심이 특심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나는 ---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

 

바울의 그 유대교회 열심이 그를 초대교회의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가 되게 하였다.

유대교회는 지금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로마교회의 열심이 참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학살하고 불에 태워죽이고 이단으로 처단하였다.

 

개혁교회는 그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5백년 동안 방대한 기독교 서적들과 신학들을 만들어 왔다.

어찌나 교묘하게 치밀하게 논리를 전개하는지 개신교 5백년 동안 대부분이 속고 있다.

저도 목사되고 26년이 되어서야, 내 나이 76세인 2022년이 되어서야, 그 진실을 알게 되었다.

 

발도인들 바울인들 알비인들 위그노들이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참 교회인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역사적인 새로운 발견들을 접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대교단들과 유명신학교들이 그 높고 높은 지식과 방대한 책들로

‘개혁’교회라는 이름으로 압도적으로 현실 교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교회들 중에서도 청교도들은 가장 깨끗하고 초대교회에 충실한 줄 알았다.

그래서 햇수로 16년동안이나 로이드 존스 목사를 스승으로 모시는 가운데 살았다.

그런데 그도 청교도가 아닌 성경도를 분별하지 못하였기에

성경도에게 돌려야 할 실체와 영광을 청교도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가 청교도와 성경도의 구별을 알았다면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청교도의 에베레스트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성경도의 에베레스트였다.

왜냐? 그가 쓴 모든 책에서 청교도 대신에 성경도를 대입해 읽으면 거의 맞기 때문이다.

 

종교적 열심에, 방대한 책과 신학들에, 지배적인 세력들에, 우리는 쉽게 속아 넘어가고 있다.

로마교회에 속듯 우리는 개혁교회와 현대교회에 속고 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요, 사람의 지혜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쓴 신학들일 뿐이다.

 

현대교회는 그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사회참여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만들었다.

모교단을 지배하고 있는 신정통주의도 그 자유주의 신학의 아류일 뿐이고,

신정통이 아니라 신이단일 뿐이고, 참교회를 오히려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사람의 계명(신학과 철학)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면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할 뿐이다.

입으로 머리로 하나님을 아무리 열심히 가까이 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한없이 멀 뿐이다. 세상을 더욱 썩게 만들고 있다.

 

나의 종교적 열심도, 그 많은 종교적 행위들도, 과연,

초대교회의 순수하고도 단순한 가르침의 전통에 충실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도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자꾸만 지식 수준만을 열심히 높이는 것은 그들이 교회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수작인 것이다.

지식 수준을 높여서 과외 없이는 학원 없이는 좋은 대학에 고시에 합격할 수 없게 만들어서

돈 있고 부유한 자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지배할려는 수작일 뿐이다.

 

고시 낭인들이 많다고 사법고시를 없애고 로스쿨을 만들었다.

장학제도는 있다고 해도 부실하여 돈 있는 자들만 들어가서 쉽게 판검사 변호사 되고 있다.

돈 없고 빽 없는 자들은 판검사 변호사 꿈도 못꾸게 만들었다.

이제는 로스쿨 낭인들을 양산하고 있다고도 한다.

 

쪽집게 과외 귀족 과외 없이도, 과외 코리아 없이도, 유명 학원 유명 강사 없이도,

참된 열심만 있으면, 누구나 대학에 가고 누구나 취업의 길 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교회는 정말 빛을 발하고 소금 역할을 할려면 그 점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참 교회는 그러한 헛되고 못된 열심에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히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갈4:17-18))

 

그러나 참된 열심은 어느 분야에서나 있어야 할 필수 요건이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올바른 지식을 따라 열심을 내야 한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향방 없이 달려가는 것이고 허공을 치는 싸움일 뿐이다.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고 버림을 당할 뿐이다.

열심을 내고 멸망 당하는 이스라엘 꼴이 되지 말아야 한다.

 

2.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 열심도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바리새인 율법에 충실하고 열심을 내어 교회를 이단으로 몰아 처단한 것이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올바른 지식은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살후2:15)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들의 지혜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아 그 성령의 지혜로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지식이다.

성경은 세상의 영과 지혜가 아닌, 성령의 지혜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

 

“내 말과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기독교라는 악세사리를 하나 얻어 차고 열심을 낸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종교적으로 유익하던 것 그리고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아는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없고 그리스도를 얻을 수 없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

 

영접기도 따라서 하고 교회만 다니면 직급만 얻어 꿰차면 구원 받고 천국 가는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이다.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배설물로 여기고 버리지 않으면 구원도 천국도 없다.

 

내 마음과 생활을 차지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 좋은 것을 얻을 수 없다.

버리지 않으면, 악세사리 하나 얻어 차고 아편 주사나 계속 맞는 것 이상일 수 없다.

내 마음 속 그 많은 우상들을 버리지 않으면 야곱처럼 엘엘로헤 이스라엘 제사만 드릴 뿐이다.

 

엘벧엘의 제사를 드릴려면 우상들을 다 모아서 땅에 파묻고 벧엘로 올라가야 한다.

야곱도 딸 디나가 수욕을 당하고 할례를 방편삼아 하몰 족을 죽이고 두려움 속에서 깨달았다.

엘엘로헤 이스라엘 예배는 아무리 드려봐야 자기만족이고 수욕과 두려움을 가져올 뿐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지식을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판 바래새인의 누룩이 개혁파와 청교파의 교리신학들이요,

원조는 유대파들의 율법주의요 지성주의이다.

현대판 사두개인의 누룩이 자유파 신정통파들의 자유신학들이다.

로마교회가 참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발도파 바울파라 부르고,

개혁교회와 현대교회들이 그대로 따르고 있기에, 되갚아 주는 의미에서,

그들을 유대파 로마파 개혁파 청교파 신정통파 자유파로 불렀다.

 

아마 천국에서는 진짜 이단들, ‘나라의 본 자손들’을 그렇게 부르며 구별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이론들, 신학들, 교리들을 만들려고, 열심을 낼 것이 아니라,

성경이 완성되었으니 그 말씀대로 지키고 행하며 순수하고 단순하게 순종하면 된다.

 

사도들 선지자들, 어렵게 교리 책을 만들어 전하고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렇게 어렵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행함이 없는 것들이, 행해야 할 시간에, 이론이나 펴고 만들고 인쇄하여,

로마교회가 면죄부 판 것처럼, 두꺼운 책들이나 학위들이나 팔아 모세의 자리 차지하여 왔다.

 

그러면 그들은 대뜸 ‘반지성주의냐?’ 반문한다.

그러면 예수님 한테도, 사도와 선지자들 한테도 반지성주의냐고 물어야 할 것이다.

지성은 있어야 하되 올바른 지식을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헛된 믿음이라고 야고보 사도는 가르친다.

야고보 사도가 더러움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경건을 무어라고 하는가?

우리가 정말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선한 행위의 열매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다.

그 당시에는 가장 삶의 고난이 많은 사람들의 대표가 고아와 과부들이었다.

오늘날에는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도처에 너무 많이 있다.

이들을 힘을 다해 돕는 것이 정결한 경건이요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다.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다.

자기를 지키기는커녕 온통 세속에 물들어, 세상 가치관과 사고방식으로 살면서,

교리 책들을 크고 방대하게 많이 만들어서 면죄부 팔 듯이 파는 사람들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믿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알프스 계곡에 살면서 초대교회의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을 계승하고 가르치고 실천한,

발도인들 바울인들 알비인들 위그노들은 변화된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로마교회의 학살과 화형과 고문들을 겪으면서도, 굳건하게,

전 유럽에 참다운 종교개혁을 이루었고,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우리 교회도 단순하고 순수한 말씀의 가르침과 실천과 모범으로

참다운 교회개혁과 르네상스를 함께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3.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10:3)

 

그 많은 지성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하나님의 의를 몰랐기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 많은 지성과 지식들은 결국 자기들의 의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도 그 잘난 자기 의들이 뭉쳐서 암흑의 땅으로 만들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가 왕이었다는 말씀이다.

소견에 틀린 대로도 아니고 옳은 대로 행한 것이 멸망을 불러왔다.

그것이 자기 의이고 하나님의 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리 옳아도 육신의 생각 그 이상일 수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하나님의 의는 성령의 지혜로 가르친 것으로만, 영의 생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는 다른 의인 것을 구약성경도 내내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것,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하나님의 의였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0-22)

 

하나님의 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이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9)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도 살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모르면,

율법을 아무리 지성과 지식으로 많이 알아도 그것은 사람의 지혜일 뿐이고,

자기 소견에 옳은, ‘자기 의’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어도,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