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라일

싸움이 없는 거룩은 없다 /존 라일

강대식 2012. 1. 9. 22:07

싸움이 없는 거룩은 없다 /존 라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6:12)

 

구원받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영혼과 관련해서 반드시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전쟁은 세상이 이제까지 보아 온 여느 전쟁보다 실제적인 전쟁이다. 승리도 있고 패배도 있다. 무엇보다 이 전쟁의 결과는 가공할 만한 분명한 결과가 따른다. 영적 전쟁의 결과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참된 거룩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전쟁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삼상16:18,출15:3).

 

1. 참된 기독교는 싸움이다

 

세상에는 참되고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아닌 많은 것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검열도 통과하고 나태한 양심을 만족스럽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양화는 아니다. 1800년 전에 기독교 신앙이라고 불렸던 것은 이런 것과는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 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어떤 “싸움”도 없다. 그들은 영적 분투, 노력, 갈등, 자기부인, 깨어 있음, 긴장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을 매우 경직되고 완고한 사람이라 여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예수께서 세우시고 사도들이 전파한 신앙이 아니다. 진정한 거룩을 이루는 종교도 아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싸움”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용사라고 불린다. 처음 회심하는 날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용사로 살아야만 한다. 편하고 느슨하고 나태한 신앙으로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 용사가 싸우는 대상은 무엇인가? 다른 그리스도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다른 그리스도인과 끝없이 논쟁하고 다투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주된 싸움의 대상은 세상과 육체와 마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적이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싸워야 하는 원수이다.

 

육체와 싸워야 한다. 회심한 후라도 우리 속에는 악을 향해 치닫는 본성이 있다. 마음은 연약하고 물과 같이 불안정하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14:38). 우리는 기도 가운데 매일 씨름하고 분투해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9:27).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3-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세상과 싸워야 한다. 날마다 세상이라는 강력한 원수의 교묘한 영향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세상의 좋은 것들에 대한 모든 애착, 세상의 조롱과 비난에 대한 두려움, 세상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은밀한 욕구,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것처럼 하고 싶은 은근한 바람, 차지도 덥지도 않으려는 생각 등은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인을 에워싸고 있는 영적 원수들이다. 우리는 이 원수들과 싸워 반드시 이겨야 한다.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4:4).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해 그러하니라”(갈6:1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5:4).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12:2).

 

마귀와 싸워야 한다. 우리의 옛 원수는 죽지 않았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로, 마귀는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니며(욥1:7), 사람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한 가지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항상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다닌다(벧전5:8). 우리가 다니는 길과 침실을 어슬렁거리며 우리의 모든 행실을 엿본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쟁이”인 그는 우리를 지옥에 보내기 위해 밤낮으로 애쓴다(요8:44). 때로는 미신에 빠지게 하고, 때로는 반역을 일으키게 하고, 때로는 이런 계략 저런 계책으로 항상 우리 영혼을 공격한다.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했으나”(눅22:31).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날마다 원수와 맞서야 한다. 깨어 기도하고, 금식하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싸울 때 원수가 떠나간다(엡6:11). 매일 싸우지 않으면 무장한 강한 원수 마귀는 결코 우리 마음에서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

 

영국에 살았던 가장 지혜로운 사람 웰링턴공작의 금언을 기억하라. “전쟁 중에 적을 과소평가하고, 전쟁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최악의 실수다.” 성경은 말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6:12).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2:3).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해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1-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24).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6:2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딤전1:18-19).

이 말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면, 여기에 위대한 교훈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참된 기독교 신앙은 분투와 싸움과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싸움”을 터부시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다.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성공회 예배에서 세례를 베풀 때 하는 말이다.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 아이가 앞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서 죄와 세상과 마귀를 대적하여 용감하게 싸우고, 그 목숨이 다하기까지 그리스도의 신실한 군사와 종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표시로, 내가 이 아이에게 십자가의 성호로서 축복하노라”

 

성공회 교인이든 아니든 간에 분명한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엄청난 실재이며, 매우 중요한 주제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반드시 싸워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쓰신 편지를 보면, “이기는 자”외에 그 누구도 약속을 받지 못한다. 은혜가 있는 곳에 싸움이 따른다. 신자는 용사이다. 싸움이 없는 거룩은 없다. 싸우는 영혼만이 구원받은 영혼으로 항상 드러날 것이다.

 

이 싸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싸움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병사로서의 의무를 회피할 수 없다. 세상과 마귀와 육체와 평화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다. 파멸로 이어지는 대로를 가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싸우든가, 아니면 잃어버리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느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분명히 사탄과 동류가 아니다. 세상 나라의 왕들처럼, 사탄은 자기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과는 싸우지 않는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한다면, 이는 오히려 우리가 희망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는 두 가지 위대한 표지 가운데 하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내면의 평화뿐 아니라 내면의 싸움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지가 된다.

 

2. 참된 기독교 신앙은 믿음의 싸움이다.

 

그리스도인의 전쟁은 영적인 무기로 싸우는 전쟁이다. 믿음이라는 경첩에 승리가 여닫힌다. 전쟁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믿음에 달려 있다.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전반적인 믿음은, 그리스도인 용사의 성품을 형성하는 주요한 기초이다. 지금 나의 모습, 행동, 사고, 희망, 행위는 단순한 한 가지 사실, 성경에서 분명하게 계시되고 드러난 명제를 내가 믿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교리가 없는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뼈와 힘줄이 없는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것을 믿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이신론자들의 비참하고 불편한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무언가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교의학과 그리스도인의 고지식함을 비웃는 사람들조차 일종의 믿음을 갖고 있다. 믿음은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가진 영적 존재의 중추이다. 자신이 구체적으로 믿는 위대한 원리를 마음 깊이 새기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 대해 치열하게 싸울 수 없다. 의식하든 않든 그것은 그들 마음에 분명히 자리하고 신앙의 뿌리를 형성한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배운 자이든 못 배운 자든, 죄와 용감하게 싸우고 그 죄를 넘어서려고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마음에 자기가 믿는 분명하고도 위대한 원리가 있다고 확신해도 된다. ‘삶이 바른 사람은 그릇될 수가 없다’고 하지만, 믿음이나 신앙하는 바가 없이 바른 삶과 같은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 용사가 가지는 특징의 핵심과 원천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직분에 대한 특별한 믿음이다. 그리스도인 용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기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달리시고, 자기를 대신해 빚을 갚아 주시고, 죄를 다 담당하시고, 범과를 짊어지시고, 자신을 위해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자기를 위한 중보자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구주를 믿음으로 바라본다. 이런 예수님을 보고 그분께 의지하고 매달린다. 평화와 희망을 맛보고 기꺼이 그 영혼이 원수와 대적하여 싸운다. 그리스도의 임재와 기꺼운 도우심을 항상 생생하게 믿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용사가 성공적으로 싸우는 비결이다.

 

믿음에는 분량이 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도로 믿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 해도 믿음에 기복이 있다. 깨어 죄를 대적하고 죄와의 싸움에서 오는 피곤함을 이기는 데는, 그리스도가 자기 편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믿음의 방패”는 악한 자의 화전을 물리친다(엡6:16).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한 사람이 같은 펜으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이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도 썼다(고후4:16-18). 믿음이 클수록 더 큰 승리가 있다! 믿음이 클수록 더 큰 내면의 평화가 있다!

 

믿음의 가치와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한다(밷후1:1). 히브리서 11장을 주의깊이 읽어 보라. 아벨로부터 모세에 이르는 위대한 인물의 긴 목록을 보라. 그들이 어떻게 세상과 육체와 마귀와 싸워 이겼는지 보라. 이들은 모두 믿음을 통해 승리를 얻었다. 초대교회사를 펼쳐 보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죽기까지 믿음에 견고히 서서, 이교 황제들의 맹렬한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았는지 보라. 세상의 지배자였던 로마 전체의 힘으로도 팔레스타인에서 몇몇 어부와 세리로부터 시작된 신앙을 없애지 못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는 신앙이 바로 교회의 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믿음으로 이겼다. 개신교 종교개혁 이야기를 살펴 보라.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르틴 루터, 니콜라스 리들리, 라티머, 존 후퍼의 삶을 연구해 보라. 지난 수백 년 동안 교회사에 큰 자취를 남겼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웨슬리와 윗필드, 헨리 벤, 그리고 로매인과 같은 사람들이, 유력한 사람들과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오는 반대와 핍박과 조롱과 비난에 어떻게 맞섰는지, 어떻게 이 땅에 기독교 신앙을 다시 불러일으켰는지 보라.

 

그리스도인의 용사로 살고 싶은가? 믿음을 위해 기도하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선물을 구한 사람은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기도하기 전에 반드시 믿어야 한다. 신앙대로 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은 천국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그리스도인 용사로서 성공적이고 순조로운 싸움을 싸우고 싶은가? 항상 믿음이 자라도록 기도하라.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지고, 그리스도를 더 굳게 붙잡으라. 제자들이 드렸던 기도를 날마다 드리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17:5).

 

3. 참된 기독교는 선한 싸움이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악하다.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엄청난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전혀 악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선한” 전쟁이 있다. 그 전쟁은 그리스도인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닌 영혼의 싸움이다. 거룩하여 주님을 보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싸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비록 영적이기는 하지만 실제적이고 치열한 싸움이다. 이 싸움은 용기와 담대함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거기에는 넘치는 위로가 있다는 사실을 꼭 알기 바란다.

 

1) 그리스도인 싸움이 선한 이유는, 가장 선한 대장의 지휘 아래 싸우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를 이끄는 사령관이요 지도자는,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완전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 전능한 능력의 구주이시다. 우리 구원의 대장은 자기를 따르는 용사들을 항상 승리로 이끄신다. 자신의 보혈로 구속한 영혼들을 너무나 소중히 여겨 결코 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선한 싸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가장 선한 도움을 힘입어 싸우기 때문이다. 신자 개인은 본질적으로 약한 자이기 때문에,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고, 그 몸은 성령의 전이 된다. 성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성자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성령으로 새롭게 된 신자는 자기 힘으로만 전투에 나가지 않는다. 성령 하나님이 날마다 그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신다. 성부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를 보호하신다. 성자 하나님은 모세가 그리심 골짜기에서 싸우는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한 것처럼, 매 순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이 삼겹줄은 결코 끊어질 수 없다!

 

3)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가장 선한 약속과 더불어 싸우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는 지극히 위대하고 소중한 약속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예”와 “아멘”인 그 약속은 분명히 성취될 약속이다. 식언치 않을 뿐 아니라, 능히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분이 주신 약속이기 때문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롬6:14).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롬16:20).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 현재 일이나 미래 일이나--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4)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가장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싸움에는 엄청난 사투와 고통스러운 갈등이 있다 상처와 부상이 있고, 불침번과 굶주림, 피로 등이 따른다. 하지만 모든 신자는 하나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롬8:37). 한 명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18:9). 이것이 선한 싸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그 싸움에 참여한 영혼에게 선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인의 싸움만이 사람에게 남아 있는 가장 선한 것들을 불러일으킨다. 겸손과 박애를 일깨우고, 이기심과 세속성을 가라앉힌다. 위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도록 한다. 임종을 앞둔 필립 헨리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를 섬기며 보낸 삶이야말로 이 땅에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6)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세상에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전쟁은 세상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하고, 해를 끼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용사들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이와 전혀 다르다. 어디에 있든 사람들에게 복이 된다. 그들이 머무는 곳마다 신앙과 도덕의 표준이 고양된다. 적들조차도 그들을 주목하고 존중하게 된다. 어디를 가든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그 이웃에게 복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한 싸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7)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이 싸움을 싸우는 모든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상급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그 일부만을 볼 뿐이다. 싸움은 보지만, 아직 그 종국을 보지는 못한다. 전투는 보지만, 상급은 보지 못한다. 십자가는 보지만, 면류관은 보지 못한다. 세상에서 멸시를 받으면서도 어려움을 감내하고 상한 마음으로 겸손히 기도하는 사람은 보지만, 그들에게 미소 지으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이들을 위해 예비된 영광의 나라는 보지 못한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말자.

 

몇 가지 적용점

 

1) 아마도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보상을 얻기 위해 열심히 분투하고 있는지 모른다. 돈을 얻기 위해, 또는 지위와 군세와 쾌락을 얻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조심하라. 여러분은 지금 쓰디쓴 절망의 씨를 뿌리고 있다. 여러분은 슬픔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길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길이다. 비참함과 영원한 파멸로 난 길이라는 것을 결국 알게 되겠지만, 그때는 너무 늦다. 그들 역시 부와 명예와 지위와 출세를 위해 싸우느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천국과 도래하는 세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싸우고 또 싸웠지만, 승리는 우리를 떠났구나”하고 임종 시에 크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한 정치인의 쓰라린 마음을 그들도 틀림없이 느낄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오늘 주님의 편에 서기로 결심하라. 지난날의 부주의함과 불신은 털어버리라. 정신없고, 부조리한 세상의 길에서 벗어나라.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그래서 안전함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라. 노예로 사로잡히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잊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으라. 생명과 행복과 자유를 위해 일어나 싸우라.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로 모여 그의 군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아둘람 동굴에서의 다윗처럼, 아무리 스스로 합당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라도 자기에게 모여드는 자들을 기꺼이 받으신다. 회개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너무 악해서 그리스도의 군대에 입대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일단 그리스도의 군대로 등록했다면,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용사로서 더 철저하고 더 온전한 마음을 가질수록, 더 편안 마음으로 싸울 수 있다. 여러분을 대적하는 모든 것보다, 여러분을 위하시는 그분이 더 크시다. 영원한 자유냐 아니면 영원한 소각이냐는 여러분의 선택이다. 자유를 택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라.

 

2)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고, 연단을 통해 이미 그의 용사로 증명된 사람일 수도 있다. 싸움에 이기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죽을 때까지 무장을 풀어서는 안된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희망의 투구와 같은 무기는 하나같이 다 필요한 것들이다(엡6:14-17). 단 하루도 이 무기 가운데 하나라도 빠뜨리고 살아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있다가 200년 전에 숨을 거둔 한 늙은 용사의 말을 잘 기억하자. “천국에서는 무장을 하는 대신 영광의 옷을 입고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밤낮 없이 전신갑주를 입고 있어야 한다. 무장한 채로 걷고, 일하고, 자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용사가 아니다.” 1,800년 전에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간 용사가 영감을 받아서 한 말을 기억하자.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 이 말을 절대 잊지 말자!

 

얼마 동안은 좋은 군사처럼 보이고 자기가 어떻게 싸웠는지 크게 떠벌리다가, 막상 싸움이 시작되면 수치스럽게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다. 발람과 유다와 데마와 롯의 처를 기억하자. 참되고 성실하고 진정한 실제 용사가 되자. 아침이든, 낮이든, 밤이든, 우리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항상 보고 계신다. 그분은 감당할 수 없는 시험 가운데 있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가졌으니, 우리의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히4:14).

 

우리 앞서 싸웠던 수많은 용사들이 우리가 싸우는 것과 동일한 싸움을 치렀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자 덕분에 넉넉히 이겼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이겼다. 우리도 그렇다. 그분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7:25). 그러니 의심과 두려움을 벗어 버리자.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따라가자.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고, 우리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기억하자. 조금만 더 싸우면 마지막 나팔이 울리고, 평화의 왕이 새 땅을 다스리러 오실 것이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7).

싸우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거룩하게 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죽었을 때도 영광의 관을 얻지 못한다. 절대 잊지 말라!

 

 

- 존 라일, 『거룩』, 4장 싸움, pp 135-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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