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비키

오직 은혜(SOLA GRATIA) / 조엘 비키

강대식 2012. 12. 19. 10:06

인간이 자신의 죄사함과 구원을 처음으로 주도하고 그것에 참여하는 것인가? 아니면 구원의 전체 사역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sola gratia)에 기인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주도하시고 완성시키는 것인가? 에라스무스의『디아트리베』에 대한 대답으로 루터는 『노예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에서 분명하게 주권적인 은혜를 지지한다.

 

루터는 죄인이 구원의 방법을 제공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취하는 일조차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주장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죄부와 순례 여행, 고행, 금식, 연옥과 성모 마리아 숭배 체계를 공격했다. 로마 가톨릭의 행위에 기초한 체계를 무너뜨리는 유일한 길이 이 논쟁의 뿌리를 쳐서 알리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조건적인 은혜와 자유의지의 싸움이다.

 

영어로 ’은혜‘라는 단어는 흠정역 성경에서 169번, 그러고 파생어까지 포함한다면 204번이나 나온다. 은혜는 가장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과분한 호의. 또는 은총으로 정의된다. 19세기 칼빈주의 침례교도인 윌리엄 뉴먼, “은혜란 -- 무가치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호의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단순히 받을 자격이 없는 절망적인 죄인들이 아니라 나쁜 마음과 행실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적대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는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자비를 베푸실 의무가 전혀 없다. 그들은 죄인이며 오직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본성에 따라 하나님은 정말로 그들에게 전적으로 과분한 사랑을 베푸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그들의 삶이 영원히 바뀐다.

 

에베소서 2장4,5절이 선언하듯이, 긍휼과 위대하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을 구원하고 살리고 자유케 하며 해방시키신다. 그들이 비록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사랑스럽지 않고 혐오스럽기까지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심어 주시며, 하나님의 은혜에 신실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이고도 주권적인 은혜가 의미하는 바는, 하늘과 땅의 가장 높으신 하나님, 주권적이고도 구원의 삼위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징계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이 변하여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적용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특별히 강조하는 신약성경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도 바울의 로마서이다. 바울은 이 은혜를 가리켜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하나님의 왕국의 공동 상속자로 만드는 은혜라고 말한다(롬1:16). 이 은혜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 사이에 화평을 수립해 준다(롬5:2). 또한 이 은혜는 죄의 권세보다 훨씬 더 강해서 죄의 지배로부터 참된 자유와 영속하는 해방을 가져다 준다(롬5:20,21, 6:14), 하나님의 신적 은혜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많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나누어 준다(롬12:6).

 

이 은혜가 궁극적으로 사망을 정복할 것이며, 은혜를 받는 모든 자들을 영생으로 이끌 것이다(롬5:20,21). 왜냐하면 이것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 인간의 아무런 공로 없이 그들을 구원하기로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롬11:5,6).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사상은 로마서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에서 중요하게 제시된다. 예를 들연, 바울은 빌립보서를 시작하면서 교회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사무엘 루터포드는 “하나님의 씨앗은 반드시 하나님이 거두실 것”이라고 말한다.

 

은혜는 우리를 부르고(갈1:15), 우리를 중생시키며(딛3:5), 우리를 의롭다 하며(롬3:24), 거룩케 하며(히13:20,21), 우리를 보호한다(벧전1:3-5). 우리는 용서받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 우리의 상한 마음을 고치기 위해, 고난과 영적 전투의 때에 강해지기 위해 은혜가 필요하다. 오직 하나님의 자유롭고도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구원적 관계를 소유할 수 있다. 오직 은혜로만 우리는 회심과 거룩과 봉사와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엡2:8-10, 벧후3:18, 빌2:12,13, 고후1:12 참고).

 

주권적 은혜는 우리의 교만을 부숴뜨린다. 은혜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선택으로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은혜는 홀로 화려하게 통치한다. 요한복음 l장 16절은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은혜를 향하는’ 또는 ‘은혜 위에 은혜를 조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파도가 해안에 연이어 몰려오는 것처럼 은혜 위에 은혜가 계속해서 넘치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원리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신적인 공급이다. 그것은 선택과 부르심과 거듭남을 통하여 표현되는 하나님의 대권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고난받으며 심지어 죽을 수 있도록 만들고, 그 안에서 영원히 보존되게 하기 위하여 무조건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주권적인 은혜가 없이는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바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철저하게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죄인이 무덤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와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무조건적인 은혜가 선포되어야만 한다. 인간적인 결정들과 대중들의 조작, 그리고 인위적으로 강단에 초청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진정한 회심자를 낳을 수 없다. 오직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옛 복음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사로잡고 변화시킬 수 있다. ‘놀라우신 주 은혜(Amazing Grace)’를 노래하는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정말 진심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입에 발린 말로만 주권적인 은혜를 노래한다. 그리고는 실제로는 은혜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풍성한가!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244-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