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앙

성경이 우리의 권위인가? 영적 체험이 우리의 권위인가? / 에룰 헐스

강대식 2013. 1. 15. 13:42

 

1960년대의 마약과 성의 혁명 뒤에는 체험하고 싶어히는 강렬한 욕망이 깔려 있다. 세속의 정신이 교회 속으로 홍수처럼 밀려왔다. 이 세속 사상은 사람들의 느낌을 가장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이다. 느낌이 좋으면 옳다는 것이다! 1970년부터 카리스마 운동이 가속되었다. 199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이라는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오순절 교회들을 포함해서 여러 교회들이 토론토 축복을 광신적이고 비성경적인 체험으로 배격하였다. 토론토 축복은 온갖 종류의 괴상한 행동들을 드러내었다. 의사들은 이런 극단들을 진단하고 그들을 전염성 히스테리라고 설명했다.

 

오늘날 영적 체험은 전세계적으로 복음주의가 생각하는 첫 번째 주제이다. 선명히 선을 그을 수 있는 두 종류의 진영이 있다. 한 쪽에서는 모든 영적 체험들이 성경으로 시험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체험을 최우선시하면서 성경의 시험을 저지한다. 성경 말씀이 우리의 권위인가 아니면 영적 체험이 우리의 권위 인가?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가슴의 체험으로 아는 문제에서 강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든 것을 성경으로 시험하였다. 우리도 이들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체험이란 무엇인가? 체험은 내 영혼이 느끼는 것이다. 체험은 나의 감정 생활과 관계된 것이다 기독교는 지성과 가슴과 실천의 종교이다. 체험은 정당한 자리가 있다. 기독교는 ‘느끼는’ 종교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라고 하였다. 오순절은 깊은 영적 체험의 시간이었다. 제자들은 성령으로 채워졌다. 그들의 마음과 정신이 큰 능력을 받았다.

 

청교도들은 체험을 비상한 경우에 한정시키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영적 체험을 성령 세례 라고 부르는 제이의 의무적 체험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영적 체험을 시편의 여러 체험들의 문맥에서 이해하였다. 시편은 산정과 계곡, 영혼의 희열과 절박한 침체를 모두 포함하는 전반적인 체험들을 기술한다.

 

청교도의 전통을 따른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 종교는 대부분 거룩한 체험으로 짜여졌다”고 하였다. 참 종교는 마음의 체험, 즉 느끼는 종교라는 의미이다. 청교도 저지들은 기쁨, 사랑, 침체, 버림 받음, 환난, 투쟁, 자족, 징계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영적 체험들을 언급하였다. 모든 체험의 받침대는 신자가 하나님과 갖는 연합과 교제의 체험이다. 존 오웬은 교제는 하나님의 성삼위와 각각 갖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도가 아버지와 갖는 주된 교제의 길은 사랑이다. 즉 자유롭고 아낌없는 영원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탁월함은 계시 되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의 체험을 심화시켜야 한다. 오웬은 우리가 성령과 갖는 교제의 방법들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매우 실제적이다. 성삼위와의 뜻 깊고 풍성한 교제에 대한 주제는 청교도들의 강해에서 멀리 떨어진 적이 없다.

 

체험의 주제는 구원의 확신과 밀착된 것이다. 토마스 브룩스는 말한다. “확신이 당신에게 천국을 소유케 한다. 확신이 있는 신자는 낙원에서 살고, 낙원에서 걸으며, 낙원에서 일하고, 낙원에서 안식한다. 그는 자기 속에 천국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천국이 그의 둘레와 그의 머리 위에 있다”.

 

- 에룰 헐스,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pp 20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