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주일설교, 누구라 하느냐?
본문: 마 16:13-20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생활의 가르침과 기적을 보며 이런 정도로 생각을 하였다.
구약의 예언과 관련하여 오리라고 한 선지자 중의 하나쯤으로 여겼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3년 반 동안 교육을 받은 제자들에게 묻는 말씀이다.
수제자 답게 베드로가 대뜸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이 이 대답에 대해 크게 기뻐하시며 하시는 말씀이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베드로와 같이 복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을 알게 한 이는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 고백을 깨달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고전12: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예수님께 대한 이 고백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이 고백 위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세우기 때문이다(행20:28).
이 고백 위에 천국 열쇠를 맡기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대헌장이라고도 한다.
브렌티우스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다.
이 고백은 “전 기독교의 축도(縮圖)이며 믿음에 대한 참된 교리의 대요(大要)이다.”
이 고백에 대해 주님이 “바요나(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고 말씀하신 이유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사들은
그 권위있는 가르침과 기사와 표적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결국은 그 모든 것을 신성모독으로 몰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고 말았다.
(이 시대 상황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이 ‘종의 형체’로 오셔서 초라하고 재산도 없고 왕으로서의 권세와 외양도 없는 가운데
베드로가 이 위대한 고백을 했다는 것은 단호하고도 큰 믿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예수 믿는다는 것은 출교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오늘날에도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좀 쎈 사람들 옆에 가서는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믿음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을 보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신앙고백이 왜, 기독교의 대헌장이고 대강령인가?
그것은 우리의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형상과 왕권의 회복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 형상을 회복하여 주시기 위해 우리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고후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아담은 하나님이 형상과 함께 주신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 왕권을 잃어버렸다.
이 왕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분은 그리스도로 오셨다.(왕같은 제사장,생명 안에서 왕노릇)
복이 있다는 것은 이 모든 참복을 받았으며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엡1:3-5)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어떤 복인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복을 주셨다.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복을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는 복을 주셨다.
그 아들들이 받는 복과 고난의 훈련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한다.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받아 누리는 상속자들이다.
그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예정하신 대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고난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 고난이 연단을 이루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의 영광을 누리게 한다.
(성취가 아니라, 성결이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위대하고 복이 있는 이유를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우리 믿음도 세워지고 주님의 교회도 세워지는 것이다.
이 신앙고백이 불확실하고 희미한 교인들이나 교회는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라 할 수 없다.
말세에 거짓 선지자도 많고, 거짓 교인도, 거짓 교회도 많은 것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그들을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이 신앙고백인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동시에 인성을 가지신 분임을 확실히 믿는가,
그분이 그 형상으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분임을 확실히 믿는가를 봐야 한다.
그분이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신령한 모든 복을 주시는 분으로 확실히 믿는가를 봐야 한다.
(신비주의는 신성 쪽으로 기울어지고, 자유주의는 인성 쪽으로 기울어진다?)
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이 아니라, 자꾸만 지상의 모든 복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회개한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회칠한 무덤처럼 외양과 외식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고난으로 인하여 겉은 낡아질지라도 날로 속이 새로워지는 사람들이다.
그 위에 땅위의 기름진 복과 함께 하늘의 신령한 복들이, 영생의 복들이 임하는 것이다.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고, 성령을 통해, 죄를 진정으로 회개한 적 없고,
그리스도 예수를 주 하나님으로 마음 중심에 모시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과 영광이 임할 수는 없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이 반석이, 잘 잘못을 둘 다 잘하는 베드로가 아닌 것은 그 다음 구절의 책망을 보아도 안다.
마16:23) 예수께서 --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주님은 베드로, ‘네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로마 카톨릭은 그렇게 해석해서 베드로를 초대 교황이라는 근거를 삼고 있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운 천주교는 천년 동안 세상을 암흑시대로, 사사시대로 만들고 말았다.
주님이 ‘내 교회’를 세우시고, 그 터도 주님이신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고전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주님이 교회의 반석이시지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일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반석이시고 요새이심을 구약의 선지자는 누누이 찬송해 왔다.
사도들은 그 터, 그 반석 위에 집은 짓는 건축자들이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믿음의 반석 위에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확실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약속하신다.
이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로마의 폭정과 핍박에도, 카톨릭의 암흑시대에도,
고난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넉넉히 이겨 왔다.
롬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베드로의 손에 영혼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권리가 주어졌다는 의미인가?
이것은 터무니 없는 생각이다. 그 임무는 바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계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보다 어떤 특권이나 위계를 가졌다는 것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다.
이는, 그에게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에게 가장 처음으로
구원의 문을 열어주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오순절 날 유대인들에게 설교했을 때, 그리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루어졌다.
“천국의 열쇠들”을 사용하여 믿음의 문을 활짝 연 사람이 베드로였다.
행15:7)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
이 말씀은 죄인을 용서하고 사면해 줄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주어졌다는 뜻인가?
그것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특별한 임무를 손상시키는 생각이다.
이 능력은 어떤 사도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뿐이다.
이 약속은 사도들이 구원의 길을 권위 있게 가르치도록 특별히 위탁받았음을 의미한다.
사도들이 죄인이 용서 받았음을 권위 있게 “선언하고 공포하도록” 위임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특별히 영감을 받아 몇 가지 규정들을 “매고”, 즉 금하고,
몇 가지 규정들을 “풀고”, 즉 허락해야 했다.
그 예로,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회의에서 사도들이 모여
이방인들이 할례 받을 필요가 없다고 결정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힘은 사도들에게만 맡겨진 것이어서,
사도들과 함께 시작되었고, 사도들과 함께 소멸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요즘 ‘신사도운동’을 한다는 자들이 이 말씀을 자기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망령된 짓이다.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세우겠다고 약속하신 교회는
“모든 믿는 자들로 이루어진 축복받은 무리”를 말한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나이와 언어와 민족을 초월해서, 믿는 자들로만 이루어진, 전체 몸이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지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워진다.
그 교회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생활로써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거기에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의 믿음과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진리들을 믿고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될 똑같은 교리를 믿는다.
그리고 몸인 교회는 하나의 머리를 가졌는데, 이 머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골1:18).
이 교회는 고난으로 인해 외적으로 쇠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에베소 교회와 같이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결코 죽지 않는다.
모세가 본 가시덤불처럼 불에 탈 수는 있으나 타서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진정한 교회 지체들은 안전하게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복을 상속 받을 것이다.
고난 중에 넘어지고 실패하고 낙심하는 일은 있더라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이들은,
한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서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히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