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주일설교, 큰 두 계명
본문: 마 22:34-40
큰 두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의 두 돌판의 요약이다.
주님은 이 큰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다.
강령은 ‘일의 으뜸이 되는 줄거리’를 의미하고, 모든 것의 총괄과 기본을 의미한다.
강령의 원어는 ‘매달다, 매달리다’의 뜻을 갖고 있다.
다른 모든 계명들이 하나의 못에 매달리듯 이 큰 두 계명, 사랑의 법에 의존함을 말해 준다.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다(롬13:9).
이 큰 두 계명을 지키면 온 율법을 다 지킨 것이고, 그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사랑이 강령이고 완성이라는 것은 이 두 사랑이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고전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주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는 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셨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요 강령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온 율법과 복음의 정신이요, 생명이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도 사랑으로 역사할 때 살아 있는 믿음이다.
갈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모든 율법과 복음은 사랑으로 성취된다.
사랑으로 하지 않은 믿음과 순종은 생명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사람은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고, 그 사랑을 통해 휴식과 만족을 얻는다.
그 사랑으로 누구를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으로 그분에게 순종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마음, 목숨, 뜻을 우리의 의지와 감정과 이해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는 하나의 의미를 가진 똑같은 말들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의 말들이라고 한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는 사랑은 내 중심과 영혼을 다 바친 사랑을 말한다.
단지 말과 혀로만 나타내는 사랑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막7:6)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는 사랑은 분산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로 연합된 사랑을 말한다.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는 하나님 사랑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사랑이다.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그 사랑은, 세상과 그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사랑이다.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3회 반복)
시103: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정말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였다면,
그 구원의 사랑에 감격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연약하여 때론 넘어질지라도, 우리의 근본 마음은 여기서 떠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목숨을 뜻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자.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통해 삼위 하나님을 알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계명들 가운데 첫째 되는 큰 계명이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의 연결성을 말씀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을 근거로 하고 있고, 첫째 계명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첫째가 없으면 둘째가 있을 수 없고, 첫째가 있어야 둘째도 같이 있음을 말씀한다.
첫째 계명이 지켜지지 않으면, 둘째 계명도 지켜질 수가 없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다음으로 크고 둘째 되는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가 없다.
우리가 유행가나 영화 연극을 통해 온통 사랑 타령을 하면서도,
사랑이 없어, 세상이 메마르고 날로 악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다.
우울증과 자살과 폭력과 탐심들과 우상숭배들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의 불순종에서 연유한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지켜질 때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크고 둘째 되는 계명을 지킬 수 있다.
첫째 되는 하나님 사랑이 없는 사람은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다.
내가 중심에 있는데 어찌 이웃을 내 중심으로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의 이웃사랑은 중심에 있는 자기 사랑의 연장일 수밖에 없다.
그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충동적이고 폭력적인지 부부관계에서 부모자녀관계에서 나타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고 망가뜨리고 지옥불로 태우는 사랑인 것이다.
(이 폭력적인 자기 사랑에서 해방되는 길은 회개하고 거듭나는 길밖에 없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둘째 계명이다.
이 둘째 계명은 둘째 돌비에 새겨져 있는 모든 계명들을 총괄하고 있다.
이 둘째 계명 속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며 또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잘못된 자기중심적 사랑은 죄악이기에, 이런 사랑은 제거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적이며 가장 큰 의무가 되는 자기 사랑은 보존되고 성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내가 없으면, 사랑도 존재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 자체의 위엄을 적당히 존중하고
우리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복지에 적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개하고 회심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살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성화해가야 한다.
(성화는 주님을 닮아가고, 그 자취를 따라가고,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이다)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게으름과 죄악에 자신을 방치할 수 없다.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길로 갈 것이고 저주의 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
범사에 유익이 많은 기도와 말씀의 경건생활에 힘쓰게 될 것이다.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사랑하고,
그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큰 둘째 계명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부당하게 대하며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참되고 성실하게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에는 수고와 희생이 따른다.
수고와 희생 없이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할 수 없다.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역으로 나의 하나님 사랑을 입증하는 시금석이 된다.
둘째 계명을 지키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지키고 있음의 증거가 된다.
요일4:20-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여기서 형제는 꼭 믿는 형제일 뿐 아니라, 모든 이웃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0장에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고 사마리아인이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한 사람은 선한 사마리안인이었다.
지금 믿는다는 형제가 형제 아닐 수도 있고, 앞으로 믿게 될 이웃이 진짜 형제일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온전해진다고 하신다.
요일4:12-1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웃 사랑 또한 말과 혀로만 하지 말라고 하신다.
요일3:17-19)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야고보 사도도 동일한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우리 주님도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마25:34-36)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양의 무리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염소 무리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이웃사랑으로 천국과 지옥이 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