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칼빈의 성례전 이해 / 존 멕네일

강대식 2013. 1. 30. 00:04

 

칼빈은 “불가시적 은총의 가시적 형태”라고 규정한 어거스틴의 성례전 정의를 인정하지만 그보다도 “성례전이란 외적 표징에 의해 확증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입증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은유들을 사용하여 그는 말씀과 성례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표출하였다. 이 관계에 의하면, 성례전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는 인(印)이며,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교환되는 서약이며, 우리의 제자됨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징표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믿음이고 성령께서 공급하는 불가시적 은총이 없으면 공허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세례를 다룸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유아세례를 옹호하는 점이다. 유아세례와 관련하여 구약성서의 합법적인 입회 성례전으로서의 할례의 역할이 특별히 강조된다. 이 외에도 칼빈은 가장 타당성 있는 신약성서의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린 아이들을 불러 팔에 안으시고 “천국은 이와 같은 자의 것”(마19:13-14)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신도의 자녀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곧 “죄”다.

 

세례가 구원의 경륜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구원의식이 아니다. 그는 쯔빙글리처럼 유아기에 죽은 유아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세례받지 않은 자를 그 때문에 정죄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음을 지적한다. 전통적 견해인 세례 중생론을 폐기시키면서, 칼빈은 어린 아이가 자신을 교회가 용납하고 교회에 입회할 것의 의미를 점차 배우고 교회의 보호와 가르침에 영향을 받을 때 은밀한 영향력이 그 아이의 마음 안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세례를 받고 미래의 회개와 믿음을 성취한다.

 

‘주의 만찬’을 논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현존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지만, 루터파에서 발전된 그리스도의 부활성체 편재설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례전용 빵과 포도주를 통해 현재화된다는 것은 거부한다. 다른 구절들에서 유추하여 “이는 내 몸”이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일종의 환유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로 들리워 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 그러므로 그 몸은 현재까지도 하늘에 계시고 빵과 포도주에 갇힐 수는 없다.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성례전에 참예하는 자는 영적으로 하늘로 들리워 올라가 그 몸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피에 영적으로 참여한다는 이 교의는 칼빈주의 교회의 특징이다. “나는 그 신비를 이해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경험 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Communion)은 성령의 은밀한 역사를 통해 가능해진다. 교회의 공동체적 삶에서 이 성례전이 중요함을 평가하는데 칼빈을 능가하는 사람이 아직 없다. 그는 성례전이 자주 행해져야 한다고 역설하며 경건한 참예자의 종교적 경험을 열렬하게 묘사하고, 성례전에 참예함으로써 생겨나는 “사랑의 띠”를 그것이 갖는 사회적 의무라는 의미와 아울러 강조한다.

 

- 존 칼빈, 『영한 기독교 강요』(존 멕네일 편집) 1권, pp 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