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17 주일설교, 십자가의 도

강대식 2013. 2. 17. 15:48

본문: 고전 1:18-25

 

‘도’는 교리를 깊이 통하여 알게 되는 이치, 말씀 진리 교훈 메시지 복음을 뜻한다.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도’라고 한다.

신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여호와의 도는 지극히 거룩한 것이요, 의인이 가야 할 길이요,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는 자들이 힘써 지켜야 할 도리이다.

사무엘은 ‘선하고 의로운 도’로 이스라엘을 가르쳤다.(삼상12:33)

진실한 성도는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한다.(시119:14)

 

신약에서도 ‘주의 도’, ‘하나님의 도’라는 표현을 쓴다.

또한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 ‘이 도를 비방하거늘’, ‘이 도를 박해하여’,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일러주었다.(행18:26)

 

바울은 힘써 ‘십자가의 도’를 전했다.

십자가, 즉 예수의 십자가가 주는 ‘메시지’에 강조점이 있다.

십자가가 주는 진리 복음 메시지를 말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만왕의 왕이다.

그런데 그 왕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강도들이나 당하는 십자가의 극형에 처해졌다.

너무도 잔인해서 로마도 후에 폐지하고 만 그 십자가 극형에 처해진 그리스도를

기독교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전한다.

 

이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사람들을 이단의 도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해서

잔인하게 박해하고 살해하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회심하여 이 도를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기독교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이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자는 결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있어야 믿을 수 있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하나님 없이 세상 철학 세상의 지혜로 구원을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능력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도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도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의 대표이요,

헬라인은 세상 지혜로 인간을 구원할려고 하는 이방인들의 대표이다.

교회 역사와 현대 교회 안에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무리가 항상 지도적 자리를 차지했다.

 

천년 아성의 카톨릭은 바로 이러한 현대판 유대인들의 무리들이었다.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봉하는 사람들은 바로 신종 헬라인들의 무리들임에 틀림이 없다.

거리끼고 미련해 보이니까 거리끼지 않은 것으로 바꾸고, 지혜로운 것으로 바꾸는 작업을 한다.

십자가를 적당히 죽이고 가리고 화려하게 장식하여 먹을 만하게 믿을 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이 십자가의 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 없이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도, 확실한 체헒이 없이도, 얼마든지 교인이 될 수 있는 제도는

미국에서 청교도 1세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교회에 이식되었다.

유대인과 헬라인의 기세와 도도한 흐름은 소수의 청교도들이 막을 수 있는 것이 못되었다.

 

청교도들이 목숨 걸고 건너가서 세운 미국이 자유주의 신학 형통의 신학의 온상이 되었다.

십자가의 도가 처음 전해지고 그것으로 나라를 세우고 종교개혁을 이룬 유럽 나라들도

쓰나미처럼 교회와 신학교를 휩쓸어 버리고, 신종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무대가 되고 말았다.

 

18세기에 조나단 에드워드와 휫필드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19세기에 존 라일, 스펄전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20세기에 로이드 존스와 프란시스 쉐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경으로, 청교도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외쳐도, 듣는 사람들이 극히 소수일 뿐이다.

일본을 휩쓴 그 쓰나미가 남의 일이 아니다.

그보다 더한 쓰나미가 종교개혁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교회들을 휩쓸고 있다.

우리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깨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잠에 취해 있으면서도 ‘아니예요 난 잘 믿고 있어요 깨어 있어요’ 하는

신종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일어나 깨어 있는 그들의 책들을 통해서 성경을 다시 읽기를 바란다.

진정한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고, 깨닫게 해주고, 살게 해주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람들, 그분들을 스승으로 맞이하시기 바란다.

 

바울이 말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만 스승들에게 속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생명을 낳고 길러주는 스승을 더 늦기 전에 만나시기 바란다.

시간을, 열심을 내어 영생을 준비하고 나의 마지막과 주의 재림을 준비하시기 바란다.

 

세상에 인간들이 바벨탑으로 쌓아놓은 지혜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눈만 뜨면 대중 매체들이 그 지혜와 능력을 쏟아낸다.

그런데도 왜 세상은 날로 악해지고 더욱 죄악에 물든 세상이 되고 마는가?

 

십자가 없는 진리와 사상과 개혁을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살지 않고 남만 살도록 가르치고 외치는 진리는 아무 소용이 없다.

나부터 살고 남도 살게 하는 진리만이 우리를 살게 하고 구원할 수 있다.

 

나를 전혀 변화시켜 주지 못하는 진리가 누구를,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

내 귀를 즐겁게 해주는 스승들을 많이 두고

진리는 유행가처럼 읖즈려지는 가운데 세상은 악해져만 간다.

공자와 맹자왈 하는 가운데 이조 5백년은 썩었고,

나무아미타불 하는 가운데 신라 천년, 고려 5백년도 썩었다.

 

지금은 다른 진리와 다른 복음들이 세상과 교회를 그 능력과 지혜로 악에 물들게 하고 있다.

나도 일어나 깨어 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그 세속에 물들어 가고 있게 된다.

내 눈 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는 빼느라고 애쓰는 바리새인이 되고 만다.

 

십자가가 적용되지 않는 진리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배설물과 찌꺼기일 뿐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피흘리고 죽는 곳이다.

인간이 짓고 또 짓는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 피흘리지 않고는 처리할 수 없는 극악한 것이다.

 

히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도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벧전2:20-21)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 한 번 하고서 교회 다닌다고 천국행 티켇을 따놓은 줄로 착각하고

내 육체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고 악한 영의 역사에 끌려가는 것이다(엡2장).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 흐르는 곳이다.

죄 없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의 모든 죄의 형벌을 감당하시고

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며 죄의 값을 다 치루게 하셨다.

하나님의 이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렸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이기지 못하고 사탄의 노예가 되고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사탄의 머리를 박살낸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오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곳이 십자가이다.

 

사탄은 여인의 후손을 겨우 발꿈치를 상하게 한 곳이 십자가이다.

우리의 구원의 창시자인 그리스도께서 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이제 너희는 믿음으로 죄를 이길 수 있으니 죄와 싸워 승리하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도이고 그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셨다.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이를 믿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자녀 삼아 주셨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힘입어 죄와 싸우며 성화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죄와 싸우며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죄와 싸우지 않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과 믿음은 실로 의심스럽다.

 

십자가가 없고, 십자가의 도가 없는 복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난무하고 있다.

잘못된 전도들이 교인 수는 늘려도

교회를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는 섬기는 우상단지로 만들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내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고, 진정한 십자가의 도를 믿는 것이다.

 

십자가를, 내 죄가 피를 흘리는 것으로 한번 본 적도 없고, 체험한 적도 없고,

그래서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눈물 한 번 흘려본 적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회심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면 구원받은 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십자가가 적용되지 않는 사상들을 진리로 알고 섬기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다.

자기 죄를 처리하지 못하는 사상들은 복음이 아니라 저주받을 소리들이다.

공자왈, 나무아마티불, 평화와, 평등의 사상들이, 사람을 못바꾸는 것은

죄를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를 처리해야 내가 진정으로 변할 수 있고 성숙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죄로 인해 피흘리는 십자가의 도가 적용되지 않는 곳에는 진리도 복음도 있을 수가 없다.

죄 때문에 피흘리지 않는 진리는, 복음은, 다 가짜인 것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의 도보다는 표적을 구하고, 십자가의 도보다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의 무리들은

다 죄에 대해 피흘리지 않고 개혁과 구원을 이루겠다는 저주받을 복음의 무리들이다.

이들로 인하여 세상은 빛좋은 개살구처럼 말은 화려하면서 삶은 혼탁해지는 것이다.

 

죄를 처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는 곳,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구원의 능력이다.

세상 지혜는 이를 알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거리끼는 끔찍한 것이고,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일 뿐이다.

 

세상의 지혜와 능력들이 배설물이 되고 허깨비가 되고 마는 곳이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도를 통해 구원의 능력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이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로운 것이다.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전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그 도를 전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날 사랑한다’고, ‘믿기만 하면 복과 형통을 주신다’고 유혹하여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방인들이 우상을 믿게 하기 위해서 쓰는 전형적인 전도 수단들이다.

 

그러한 전도는 십자가의 원수들을 양산할 뿐이다.

빌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십자가의 도가 복음과 전도의 핵심인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2:2-3)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질그릇 안에 이 보배를 지니고 있음을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소유와 경력과 능력과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가 약할 때 강해지는 도이다.

질그릇이 깨져야 이 귀한 보배의 생명이 나타날 수 있다.

이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질그릇을 깨트리는 죽음의 고난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십자가 고난)을 몸에 짊어짐은(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11)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본받는 자기 십자가인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와 안식이 없다.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한 것이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약함을 통하여 능력을 보여 주셨고, 우리도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십자가는 부활을 위한 것이고,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다.

예수의 죽음, 십자가를 짊어져야 우리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약할 때 강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무엇을 자랑하는가 보라.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

 

십자가의 도를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전1:30)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계5:12)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주사 십자가의 도를 알게 하옵소서.(엡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