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바라보는’ 이 복의 불길로 당신의 마음을 뜨겁게 하라 / 아이작 암브로스
여러 가지 영적 의무가 있지만, 가장 주되고 중요한 의무가 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것을 주요한 영적 의무로 보게 된 계기를 밝히려고 한다. 1653년 봄, 나는 중한 병에 걸렸다. 그런데 주님이 건강을 회복시키기 시작했을 때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내 영혼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에 관한 깊은 묵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내 영혼의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이 선한 행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행위가 온 세상이 창조되기 전인 영원 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분의 이 선한 행위가 끝나는 것도 오직 온 세상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뒤, 영원함 속에서 마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직 이 양극단의 사이에서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 현재, 미래의 여러 다양한 사역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내 안에 깃들인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 속에서 내 영혼은 기쁨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쁨은 내 안에서 다른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켰다(어떤 감정도 홀로 찾아 오지 않는 법이다). 나는 성경 속에서 그에 관한 본문들을 찾아 읽으며 묵상하기 시작했다. 그 본문들은 복음에 대한 합당한 의무로써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강렬히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나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을 찾고 몇몇 저자의 글을 읽으며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기로 했다. 마침내 건강이 회복되었고 그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이 일을 시작할 마음을 주셨으니 이 일을 잘 마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구했다. 이 일을 해나가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분에 대한 내 영적 의무로써의 행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에서도 깊은 영적 위로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1. 예수님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더 특별히 설교를 해야 하는 주제였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골1:27~28).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 목회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할 더 많은 의무가 있다. 십스는 그것에 대해 디음과 같이 명확히 말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 가운데 특별한 일은 그리스도를 펼쳐 보여 주는 것이다. 벽걸이 융단처럼 내걸고 그리스도의 숨겨진 신비를 하나하나 풀어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늘 그리스도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애써야한다. 적어도 그 길을 향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율법에 대해 말할 때는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가게 해야 한다. 도덕적 의무에 대해 말할 때는 그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가치대로 삶을 살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무언가가 우리의 주제요, 목표가 되어야 한다”.
2. 예수님을 바라보는 행위는 알고 갈망하며 소망하고 믿으며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내가 이 바라보는 행위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며, 특별히 계속해서 바라보는 행위를 하는 동안 어떻게 내 영혼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팡스런 기쁨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이 땅 위의 성도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천국 성도들의 의무와 닮은 영적 행위가 있다면, 나는 그것이야말로 바라보는 행위라고 감히 말할 것이다. 러더퍼드는 임종을 맞이할 때 그리스도에게 바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누리고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사랑하고 그분께 의지하는 가운데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삶을 사는 행위는 한낮의 신학이며 지복 직관(하나님을 경험하고 보는 경험)의 신학이다. 밤낮 그리스도를 연구하고 강의하며 설교하고 찬양하는 자들로 보좌 주변에서 즉시 깨달음을 얻는 신학자들의 무리가 있다. 오! 그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누리며 그분 안에서 삶을 살아갈 때 깨닫게 하는 열매의 빛과 사랑의 열정이 얼마나 찬란하고 눈부시게 그분의 얼굴에서 나온단 말인가! 그 얼굴은 주 하나님, 전능자의 얼굴, 그들의 한 가운데 계시는 어린 양의 얼굴이다. 오, 그분을 끌어안고 사랑하며 경이로움 속에 거하는 가운데 깨닫게 하는 묵상이 얼마나 경이롭게 영팡의 원을 그리며 다시 그분에게 돌아가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온전히 영화롭게 된 성도들의 의무라면 우리도 그들을 따라서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을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볼 때 하늘의 무언가를 느끼게 되지 않겠는가! 나는 내가 느꼈던 것을 조금이나마 여기에 기록한다. 그리고 내가 더 많이 느끼기들 소망하는 것에 대해 대해서도 기록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누구이든 간절히 부탁한다. 와서 이 복의 불길로 당신의 마음을 뜨겁게 하라. 오! 오라.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향유를 맡으라!’ 오! 오라. ‘그 그늘에 앉아 심히 기뻐하라.’ 오! 모든 사람(특별히 이 책을 손에 들고 읽을 자들)이 즉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복음의 행위를 실천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당신이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분에게서 아름다운 미덕이 흘러 나와 당신의 영혼을 가득 채우기를 기도하라.”
독자여, 당신이 아침과 저녁 기도를 드리듯이 어떻게 하면 이 의무를 계속 실천할 수 있을지를 알고 싶다면 한 가지만 더 말하겠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매일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당신은 어느 때든 시간의 일부를 따로 떼어 이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골3:11).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생각하며 갈망하고 소망하며 믿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간구하고 따르기 위해’ 당신의 구속을 계획하고 약속하며 성취하신 것에 대해 그분의 탄생과 삶, 죽으심, 부활, 승천, 중보, 재림 속에서 그분을 묵상한다면 당신은 결코 지치거나 지루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것들 가운데 한 가지라도 당신이 매일의 일과로 삼아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나아간다면 당신은 결코 지치거나 지루해 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오! 그 대상에는 바라보아야 할 것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다양함이 어떻게 기쁨을 주지 않겠는가? 다음은 골로새서 l장 16절에 대한 로키어의 말이다. “거룩한 영혼은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결코 싫증을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와서 이 의무를 시도해 보라 그리고 끊임없이 그 의무 가운데 거하라. 적어도 일 년에 한 차례는 그렇게 시도해 보라. 그래서 평생 매년 한 번씩은 그 일을 시도하라. 다른 주제에 대해 묵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일 년 기운데 다른 날들 동안에는 다른 일들을 생각하라. 당신이 굳게 결심했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오직 주님이 당신과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이 그 일을 통해 유익을 얻게 되면 그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라.
- 아이작 암브로스, 『예수를 바라보라』, 1권, 머리말, pp 2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