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주일설교, 생수의 강
본문: 요 7:37-39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초막절은 이스라엘 남자라면 누구나 예루살렘으로 모여야 하는 삼대 민족 제전의 하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았던 은덕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명절 끝날은 절기에 모여든 큰 회중이 뿔뿔히 흩어지는 때였다.
끝나는 순간은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다.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이다.
이 때를 놓치면 영원히 구원받을 길이 없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그분의 진지함과 간절함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들이 이 외침을 받아들여서, 초대에 응하기를 원하서였다.
이방종교의 신탁은 혼자에게나 소수에게, 그리고 은밀한 소리로 전달되었으나
복음의 계시는 '서서 외치는' 이에 의하여 선포되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초대의 대상은 목마른 모든 사람 누구나이다.
우리 육체가 겪는 고통 중 가장 끔찍한 고통중 하나가 목마름이다.
사막에서 목마름으로 타서 죽어가는 모습을 연상하면 잘 알 수 있는 고통이다.
사실은, 육신의 목마름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 최고의 고통이 영혼의 목마름이다.
이 영혼의 목마름을 우리 주님께서 육신의 목마름에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참으로 깨어난 양심이 갖게 되는 갈망이다.
영혼은 이렇게 목말라하는데
정작 본인은 돈, 권력, 쾌락, 명예와 지위, 출세와 성공에 대한 갈망으로만 목말라한다.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썩어질 면류관을 위해서는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영생에 목말라 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오셔야 우리는 비로소 이 영혼의 목마름을 감지하게 된다.
이 타는 영혼의 목마름은 성령의 생수만이 채워줄 수 있다.
이 영혼이 목마를 자는 누구든지 주님께로 와서 마시라는 것이다.
수가성 우물 가에서 여인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 우리의 본문을 통해 주님은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참된 영적 목마름을 느끼는 것이 바로 구원받는 믿음의 시작이다.
단순히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이 목마름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이런 물을 마시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받는 사람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그런데, 왜, 우리는 “솟아나는 샘물”,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이 되지 못하는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역사와 주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말했다.
막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마3:11, 눅3:16, 요1:33)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참되게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크고도 넘치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솟아나는 샘물,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이 될 수 있다.
세례 요한의 세례와 주님의 성령 세례는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요,
그리스도의 초보(히6:1)에 만족하는 것과 더 완전한 것에 나아가는 것의 차이이다.
(확신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성령 세례에 대해서는, 반대도 많고 오해도 많고 말도 많은 것이 기독교 역사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경험을 성경 위에 놓는 다면, 그것은 광신주의이다.
그것은 성경을 넘어가거나 혹은 성경에 배치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또한 천주교나 이단들처럼 전통이나 자기들의 가르침을 성경 위에 놓아서도 안 된다.
성경에 제시된 것보다 더 낮은 수준에 아주 만족하는 위험이 있다.
광신주의를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를 다 경계해야 한다.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판단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명백한 단계와 계단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이들, 청년들, 아비들의 단계가 있다.(요한1서 2장)
은혜와 주를 아는 가운데서 자라 가라고 한다.
요한은 세례 요한을 포함한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성령의 세례라고 말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고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을 떠나서는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을 모시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죄를 깨달을 수 없으며 성령이 아니고는 참으로 믿을 수 없다.
성령은 절대적이다.
바울은 로마서 8:7에서 자연인과 신령한 사람과의 위대한 구분선을 긋고 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사람이며,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에 속한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은 성령이 그 안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0,12)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믿을 수가 없다.
모든 신자 안에는 성령께서 필연적으로 내주하신다. 성경의 기본적 진술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이다. 그는 성령으로 난 사람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중생은 성령의 은밀한 사역이다.
그것은 체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사역이다.
사람은 그에게 그 일이 발생한 후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이고 성령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성령으로 세례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성령의 세례란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행해지는 어떤 것이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특수하게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이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고전12:13)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주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고 하셨다.
비록 세례 요한이 최종 선지자요, 특이한 하나님의 종이며,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실 성령의 세례와 그 은총들을 누리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런 방식으로는 성령이 주어진 것은 오순절 날이었다.
사도들은 오순절 이전에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도 주님은 제자들과 세상을 분명하게 구분지었다.
부활하신 후에도 요한복음 20장에서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하셨다.
그렇지만 아직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는 못했다.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오순절 날이었다.
제자들의 오순절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비교해 보면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이유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성령의 세례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다.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에 의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하니 성령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이미 주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로 믿는 참된 신자들이었고 그래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는 못했다.
바울의 경우도 예수님을 보았고 믿었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안수하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였을 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 가정은 성령의 세례가 그들이 믿을 때에 거의 동시에 임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너희가 믿을 때(흠정역은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한다.
이것은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도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확증된 진리이다.
행19:4)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그들은 참 신자,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러나 이어서 6절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한다.
이것은 참 신자이면서도 아직 성령으로 세례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대적인 증거이다.
중요한 요점은 믿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선이 있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13-14도 말씀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믿은 후에:흠정역)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신자만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며,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
“믿어 -- 인치심을 받았으니--.” 같은 순서가 반복되고 있다.
믿는 일이 먼저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받는 일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같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양자는 분명하게 구별되고 분리된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날 때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는 분명하고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을 피상적으로 스쳐가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성령 세례』, 1장, pp 15-31)
토마스 구드윈,“갑자기 아버지가 멈춰서 그 어린 아이를 들어 올려
자기 팔로 껴안고 그에게 입맞추고 그를 업어준다.”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경험은 오순절 날로 시작하여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시대마다 이어져 왔다.
이 성령 세례의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에게 하신” 약속이었다.(행2:39)
이 성령 세례는 고행을 하거나 기다리는 집회를 하거나 안수를 받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전체 역사가 안수가 성령 세례의 통상적인 방식이 아님을 보여준다.
성령 세례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를 위한 갈망과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 축복을 베풀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고 간절히 갈망하는 것이다.
탄식하고 탄원하며 울부짖는 것이다.
“구하라 구하는 자에게 성령(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마7:7)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42:1)
또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순종의 삶, 성결한 삶을 삶으로써
이 성령의 세례를 사모함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행5:32)이라고 했다.
그러나, 교회 가서 밤새워 기도한다거나, 산에 가서 열심히 부르짖는다고 하면서도,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전혀 순종의 삶, 성결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
성령 세례의 체험을 가진 사람도 한 동안은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다가도
말씀과 묵상과 기도의 경건생활을 게을리하다 보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물들다 보면,
극심한 고난(감옥속의 세례 요한)과, 변화 없는 오랜 광야생활을 겪노라면,
그 샘물과 생수의 강이 돌맹이와 진흙으로 막혀서 침체의 시기가 온다.
그래서 에베소서 5:18은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한다.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 성령으로 늘 충만해 있으라는 것이다.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건생활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고 난 후, 그 충만함을 유지하는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성령 세례로 성령에 취했다가도 다시 술에, 육체에 취할 수 있다.
그래서 마귀를 대적하고 그 궤계를 물리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신다.
우리가 불이 꺼져서 낙심과 침체에 빠질수록 더욱더 성령 세례와 말씀 사랑으로 돌아와야 한다.
존스 목사님은 그것을 ‘칼빈주의 메쏘디즘’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말씀과 성령의 균형을 이루는 확실한 방법이다.
영국 웨일즈 지역에 부흥이 많았던 것은 이 균형을 갈망하고 구하고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말씀 가운데서,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내가 변하고 가정과 사회가 변화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부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