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주일설교,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본문: 골 2:6-10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아야 한다.
주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다. 하나님만이 주이시다.
초대 교회 사도와 성도들은 로마 황제 외에 예수를 주라 한다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유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며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여긴다고, 신성모독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그리스도인은 내 마음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이다.
믿음은 입술로만 관념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다.
영접기도 한번 따라서 함으로, 지적인 동의만으로, 결단한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세례는 믿음에 대한 표징이고 인침이지, 믿음의 보증이나 담보가 아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8-29)
골로새서도 (성령)세례가 그리스도의 할례이며, 함께 죽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1-12)
우리 주님도 복음서에서 입술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천국 가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2)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우리 주님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였다.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행해야 한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그분 안에서 행할려면, 그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아야 한다.
안을 깨끗이 해야 겉도 깨끗해지고,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도 튼튼하게 세울 수 있다.
주추를 반석 위에 세워야 창수와 폭풍도 견딜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다.
주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을려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교훈은 교리이다.
성경은 교리를 말씀하고 있고 말씀은 교리로 정리되지 않으면 확실하게 알거나 살 수 없다.
성경은 좋은 말씀의 나열이거나, 큐티의 도구, 신비주의 묵상의 도구 정도가 아니다.
성경은 교리로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으면 공자왈 맹자왈 수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기독교 역사가 피로 쌓아 놓은 경건 서적들을, 교리 서적들을, 가까이 해야 한다.
주일 예배 한 번 드리고 온통 세상 따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그분이 나의 주가 되고, 그분의 말씀이 교리적으로 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모이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
묵상도 기도도, 말씀이 앞서지 않고, 그 말씀에 우리의 지성과 전 인격이 동원되지 않고서는
신비주의 명상과 바리새인의 기도로 전락하기가 쉽다.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과 기도의 경건생활에 헌신하지 않고서는, 믿음에 굳게 설 수 없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이 없이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을 수가 없다.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설 수 없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교리와 교훈을 따라 믿음에 굳게 설 때, 어떤 환경에서도,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함이 넘칠 수 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고난은 교리로 해석이 되어질 때 마음의 평안과 감사함으로 대할 수 있다)
우리가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할 때
밀려 들어오는 것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들이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들이다.
주와 말씀의 진리 없이 사람과 교회와 사회를 세울려고 하는 것이 철학이고 초등학문들이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딱 맞게 만들어 낸 것이 사람들의 전통들이요,
그것을 교훈과 철학으로 삼아 가르치는데 그것은 속임수요 초등학문 수준이다.
신학보다 철학이 고등학문인 줄 알고 믿음도 팽개치고 철학과 심리학 휴메니즘으로 간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까먹고서야 그 진실을 알고 다시 믿음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고등학문이 아니고 초등학문이고 속임수이고 사람의 고안품(전통)인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방황과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필요하다.
주와 말씀의 진리를 무시하고 세운 바벨탑들이 교회에 순전한 말씀을 갈아 엎고 세워지고 있다. 사람들의 전통인 철학과 초등학문들은 그 속임수가 얼마나 교묘한지 완전 사로잡히고도 모른다.
마이클 호튼이라는 현대의 선지자는 세속주의가 세상 뿐 아니라 교회까지도 포획했다고 한다.
그는 교회의 세속주의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책, 「세상의 포로된 교회」에서 인용한다.
(그는 「미국제 영성에 속지 마라」,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도 썼다.
고전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호머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절반은 여자이고 절반은 새인
이 여신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공들을 꾀어서 죽였다) 섬을 지나서 귀향해야 했다.
거부할 수 없는 멜로디로 선원들에게 최면을 걸어,
사이렌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자기들의 소굴로 유혹해 들였다.
그들이 위험에 처했다고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고 오디세우스는 자기 선원들에게 자기를 그 배의 뱃기둥에 묶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 선원들의 귀를 왁스로 막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배는 무사히 그 섬을 지나면서도
사이렌들의 노래에 저항하고 다음 무대로 전진해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사이렌의 노랫소리는 세속주의다.
오늘날의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은 20세기의 주류 교단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 충분히 있다고 과신한다.
즉 자기들은 교회도 잘 다니고 있고,
자체적인 음악과 예술과 행사와 각종 회의와 책들과 방송들의 복음주의 문화가 있기 때문에, 사이렌들이 노래하고 있는 섬을 안전하게 지나 항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의 교회와 복음주의적인 문화에 더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세속주의의 최면의 힘에 이미 정복당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세속주의에 대한 우리의 위기에 대한 구제책은
땅에 근거를 두고 있는 운동(비록 기독교적인 것이라 할지라도)을 부흥시킴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오늘날 기독교 베스트 셀러로 팔리는 책들이 거의 다 철학과 속임수들이요,
세상의 초등학문들과 뉴에이지의 신비주의 책들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윗 스승 한 단계만 올라가 봐도, 교제하는 친구들의 면면만 봐도,
그들의 사상 족보가 어떠한지 놀라게 된다.
(그들은 대부분 뉴에이지의 대가들이거나, 힌두교의 구루들이다.
그들은 서로 책들을 추천하고 강연도 함께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올바른 지식이 없어 망하고 있다.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아 자기들의 의로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의 초등학문과 철학의 홍수 속에 말씀의 기갈이 들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세속주의에 물든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재앙으로 말씀의 기갈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 재앙이 오늘날 교회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깨우침을 받으시기 바란다.
피를 흘리며 고난과 핍박 가운데 성경을 사랑하고 올바른 지식과 삶의 실천을 깨우치던
참으로 존경해야 할 믿음의 선진들의 책들은 외면을 당하고 있다.
당장 내 심령에 편안함을 주고 정욕적인 용기를 자극하고 쉽게 성장하고 클 수 있다는
유혹의 책들과 매체들만이 교회와 성도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것도 복음주의란 이름으로 기독교적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올바른 지식과 진리로 우리의 지성이 깨어나고
그 지성이 우리의 감정과 의지를 통제하며 함께 할 때
우리의 전 인격과 삶이 새로워지고 성숙해지고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과 실천의 삶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올바른 지성과 영성이 균형을 이루고, 말씀과 성령이 믿음 안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외면하고 있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올바른 성경 해석과 적용들의 책들을 우리가 가까이 해야 한다.
여러분, 생활에 바쁜 중에도 한 달에 한 두 권의 경건서적은 꼭 사서 보시기 바란다.
성경을 항상 지니고 다니고 항상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시라.
우리의 인생은 여기서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올바른 지성과 영성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후회할 날이 오고야 만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일생을 결산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았는지 결산하고 응분의 댓가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 의식 가운데 만연되어 있는 세속주의, 세상 사랑, 철학과 속임수, 전통과 초등학문이
화를 불러올 날이 오고야 한다.
그런 것들에 알게 모르게 따르고 있는 한, 젖어 있는 한,
그 싸이렌의 세속주의 노랫가락에 취해 있는 한,
우리는 교회 마당만 밟을 뿐,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세속주의의 포로)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분은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이시다.
그분이 만유안에 계시고 만유를 통치하시지 세상의 권력자들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충만함으로 충만하여진 사람들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세상만 보지 말고,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항상 바라보자.
그분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이 그러므로 그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무릎과 모든 입이 주로 시인하게 하셨다.
올바른 지식과 거룩한 삶이 축복과 형통을 가져온다.
정욕과 탐심은 일을 이룬 것 같다가도 재앙과 비극으로 끝맺음을 한다.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성도답게 땅만 보지 말고 하늘을 보고 사시기 바란다.
정욕과 세상과 육체와 사탄을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른 지식과 거룩한 삶으로 따르자.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매일 지고 주님을 따르자.
진리의 기둥에 우리 몸을 묶고, 왁스로 귀를 막아야만,
싸이렌의 노랫가락에 홀리지 않을 수 있다.
세속주의에 사로잡히고 신비주의와 연합한 기독교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