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피리를 불어도 ---, 애곡하여도 ---”(마11:17)/ 로이드 존스

강대식 2013. 4. 25. 10:5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이 세대에 분명 문제가 있다는 말씀인데, 주님은 하나의 유명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가 장터에 앉아서 친구들을 부르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 주님의 복음을 믿지 않고 복음의 유익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도 이 어린아이들에게 똑같이 비교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같이 춤추자고 청해도 듣지 않고, 우리가 너희들에게 상여 놀이를 하자고 해도 너희가 원치 않는다. 우리들이 같이 하자고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희들은 원치 않고 꼭 반대되는 것만 하려고 하는 듯하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꼭 이 어린아이들과 같다. 이 세대의 자녀들,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장터에서 놀이를 청하는 아이들처럼 행동한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환언하면 ‘이 세대’는 세례 요한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같이 즐기며 기뻐합시다.” 요한은 대답하였습니다. “회개하고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하시오.” 그러자 그들은 우리 주님을 보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절대로 관계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소. 그런데 당신은 그들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소. 당신은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요.”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너무 즐거워하고 먹는 것과 포도주 마시기를 좋아하는 인물’이라고 평하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요한과 예수님이 거절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분이 상하여 복음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것이 본 비유를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밖에 머물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냉담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불신 상태가 있습니다. 이 불신 상태에 대해서 우리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첫째,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불신은 하나의 굳어진 사고형태 내지는 하나의 고착된 정신입니다. 불신은 믿지 않으려는 인간의 부정적인 상태 정도가 아니다. 성경은 전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불신은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입니다. 그것은 아주 확정적인 사고 형태를 지닌 영혼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불신을 내용적으로 이렇게 묘사합니다. “불신은 죄의 한 표출이다. 그것은 저 잔혹하고 악질적인 질병의 한 증상이다.”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불신자들은 사탄에게 속은 자들이며 죄와 악의 노예들이기 때문에 불신 상대에 빠져 있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성경의 족쇄로부터 해방되고 복음이라는 마약으로 부터 풀려났다고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이들은 가련한 인간들입니다. 이들은 노예들임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다른 악덕들의 희생자들처럼 자신들이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들은 마치 어떤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와 같습니다.

 

한 가지 간단한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복음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는 열린 마음입니까, 아니면 시장터의 어린아이들과 같은 마음입니까? 우리들은 듣지도 않고서 복음을 안다고 말합니다. 내가 만일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편견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도무지 내게 말을 못하게 되는 셈입니다. 시장터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그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피리 불 것을 결정하였고, 자기들이 애곡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자기들 이외에는 누구도 말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아이들이 자기들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단에 의하면, 이것은 언제나 불신 상태의 첫번째 증상이며 비극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불신은 시실을 직시하고 공정하고 편견없는 조사를 해 보지 않은 채 결정을 내리고 결론을 짓습니다.

 

불신 상태의 두번째 특징은 항상 변하고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불신은 사고가 아닌 편견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참된 이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느낌과 충동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신은 비합리적이며 항상 자신의 위치를 바꾸기 때문에 취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불신자들은 처음에는 “피리를 불며 춤을 추자”고 말합니다. 그들은 금방 마음을 바꾸고 “상여 놀이를 하며 곡을 하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다음 순간에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불신자들의 정확한 상태입니다.

 

비근한 예로서 알더스 헉슬리가 일으킨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지성주의 운동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문제가 사람들이 느낌에 따라 살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이 점에서 종교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인간의 지성을 추켜들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과거로부터 전승되는 것들을 우리 속에서 모두 제거하고 과학적인 지성주의를 강조하게 됐습니다. 이제 와서 헉슬리는 말하기를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신비주의라고 합니다. 지성주의를 사용해 보았지만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의 새로운 주장에 따르면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우주의 배면에 깔린 원시적인 정신에 우리가 몰입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교도가 되어야 합니다. 헉슬리의 말은 결국 지성주의로서는 전혀 뚫고 나갈 길이 없으므로 신비주의에서 우리의 구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은 항상 바뀌고 모순됩니다. 우리는 불신이 다음 순간에 무슨 말로 바뀔는지 전혀 예측하지 못합니다. 지난 백 년 동안 불신자들이 내세웠던 인생 문제의 해결책들을 훑어 보십시오.

 

불신 상태의 또 다른 특징은 만족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불신은 자기 나름의 요구들로 시작됩니다. 요청하는 것들이 있지만 만족을 찾지 못하고 안식과 화평을 얻지 못합니다. 성경은 죄에 빠진 인간의 운명은 난민처럼 지상에서 방황하기만 한다고 증언합니다. 본인은 다음 구절을 아무리 자주 인용해도 지루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57:21).

 

현대인들에게는 지적인 만족도 없습니다. 어째서 그 많은 이론들과 가설들이 끝없이 바뀌고 있습니까? 왜 쓸데없이 탐색만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급급합니까? 어째서 각종 종파와 유사 종교에 사람들이 쏠려 다닙니까? 더구나 불신은, 도덕적 만족도 얻지 못합니다. 온갖 쾌락을 추구하는 광적인 이 세상의 불안정을 보십시오. 무슨 안식이 있습니까? 그들은 구하는 것을 찾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극도로 불행합니다. 피리를 불고, 상여 노래를 부릅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해보고 그 다음에는 저것을 해봅니다. 항상 바꾸어 보지만, 자기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찾지 못합니다. 불신자들은 돈도 많이 벌고 영향력도 크게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없는 것이 없이 다 소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불신 상태에 있는 한, 그들은 자기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안식과 평안을 절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끝으로, 불신의 가장 큰 비극은 영광스러운 진리에 눈 멀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은 최고, 최선의 유익을 차단시킵니다. 세례 요한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체에 대해서 눈이 멀게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식의 삶을 바랬지만 요한이 거절하자 욕질을 했습 니다· “그는 귀신이 들렸어. 정신이 나간 사람이야. 그는 회개를 외치는데 광신이야, 광신!” 이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선지자이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주자(前走者)로서 달렸던 전능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대사자(大使者)를 보고 사람들이 던진 말입니다. 오, 불신이란 얼마나 괴악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종을 병신이라고 하고, 귀신이 들린 광인(狂A)이라고 부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먹고 교제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라고 합니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그들과 함께 계셨는데도 그 분을 ‘이 목수’라고 불렀습니다. 능력 있는 기적들을 행하시고 그의 손에 모든 능력들을 쥐고 계셨는데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불신은 최대의 은인들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너무도 사악한 행위입니다.

 

복음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의 회개의 촉구가 있고, 용서의 제공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광스러운 구원입니다. 우리들이 천국과 영원한 복락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에게 제일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받고서 자기 죄를 확실히 깨닫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 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눈에 속절없는 죄인이며,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절대적이시며 영원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이 세상이 아는 최선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죄와 무가치함을 철저히 인식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죄를 확신하면 주님이 당신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시고 주님의 기쁨 속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받을 수 있으며 죽음과 무덤을 넘어 영원한 세월을 주님과 함께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신으로부터 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 밖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사탄에 의해 눈이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저 추악한 불신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최대 은인이시며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선물이신 그리스도 사이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우리가 직시할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 로이드 존스,『복음의 핵심』, pp 119-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