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에 대해- 고찰 이유, 방식, 징조, 유대인, 적그리스도/ 로이드 존스
8장 재림: 서론
1. 재림에 대해 고찰해야 하는 이유
1) 성경이 수없이 재림을 언급하고 있다
재림은 엄청나게 중요한 주제다.
- 성경의 30분의 1은 재림에 대한 언급이다.
- 초림에 대한 언급 1번에 재림에 대한 언급은 8번의 비율이다.
2) 주님 자신이 재림을 가르치셨다
마 24장과 25장은 이 교리만을 다룬다.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는 오직 이 주제를 위해서 쓰여졌다?
주님 자신이 재림을 강조하셨으며, 자주 언급하셨다.
마 24, 25장, 막 13장, 눅 21장.
알베르트 슈바이쳐-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 복음서는 재림에 대한 예수님의 묵시적 가르침을 끊임없이 강조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초에 유행한 신학적 분위기는 모더니즘 혹은 자유주의로서 ‘예수’를 ‘역사적 예수’와 ‘바울의 그리스도’로 대비시켜 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묵시적 요소들을 빼버렸다. 예수는 도덕과 윤리, 행동과 행위만 가르쳤다고 했다.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고 있다고 하면서 모든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들을 제거해 버렸다. 이에 대해 슈바이처는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이후 교회의 역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소위 ‘역사적 예수’를 뒤엎어 버렸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복음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3) 사도들도 재림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첫 장부터 이 주제를 만나게 된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질문에 답하였다(7절).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서신서에서도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을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베드로는 벧후 3장에서 바울에 대해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주님의 날이 임함에 관하여 말하였으되”라고 한다. 그들은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바울서신, 야고보서도 요한서신과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이 교리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서 순교자들과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을 격려해 주었다.
그것은 복된 소망이자 교회가 고대하는 것인 동시에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된다. 베드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1-12)
2. 재림의 교리가 소홀히 여겨지는 이유
1) 영적 무기력
우리는 삶과 환경에 희생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낙심시키고 우리 삶을 다른 일들로 가득 채워서, 이 복된 소망을 잊어버리게 하려 애쓰는 원수와 대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교리는 핍박과 환난의 때에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의 헛됨을 알게 될 때만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2) 재림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들
거짓 관점과 개념들 때문이다.
1설, 재림- 죽음 가운데 데려가시기 위해 오시는 것(요 14:1-3)
2설, 재림- 오순절날 교회 위에 그리고 교회 안에 임했을 때 일어난 일.(요 14:17-18)
주님이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오신 것으로 해석.
3설,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 사건으로만 해석하는 것. 주님의 오심을 유대 민족의 국가가 멸망하는 것에 국한시킨다.
3) 그리스도인들의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
터무니 없는 가르침에 대한 소심함과 신중함.
수세기 동안 재림의 날자를 독단적으로 예언하곤 했다. 이런 가르침들의 별난 생각과 과장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재림의 교리를 전혀 고찰하지 않고 내버려 둠으로써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말하게 되었다.
이론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정통성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베드로의 말처럼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일이다(벧후 3:16).
3. 재림의 문제에 접근하는 바른 자세-균형
신중한 것이 옳은 일이기는 하지만, 신중함이 그 문제를 완전히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주제에 대해 균형 있게 읽는 것이 지혜롭다. 먼저 성경을 읽으라.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읽으라. 양쪽 입장 혹은 모든 입장의 글을 읽으라. 한쪽 입장의 글만을 읽는 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일이다.
똑같이 경건하고 똑같이 학구적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면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읽고 최선을 다해 검토해 보아야 한다. 경고- 이 교리에 관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 배타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거룩함에 관련된 운동을 조직하거나 재림과 관련된 운동을 조직하는 사람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다. 모든 교리는 결합되어야 한다. 한 가지만 전파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한다면 당신은 결국 균형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교회는 언제나 모든 교리를 전파해야 하며 특정한 교리들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4. 재림에 대한 서론적 접근
1) 재림과 연관해 사용한 용어들
묵시(apocalypse)- 계시, 수건을 벗기는 것, 벗겨진 수건의 개념
현현(epiphany)- 나타남 혹은 드러남
묵시는 우리 주님이 서 계시고 그 앞에 장막이 쳐 있다가 그 장막이 거두어져 우리가 주님을 보게 된다는 개념이다. 현현은 주님의 오심, 주님의 나타나심을 강조한다.
파루시아(parousia)- 임재. 주님이 그의 백성에게 다시 오셔서 임재하시는 것.
하나님의 날- 벧후 3:12, 주의 날- 살전 5:2, 벧후 3:10
주 예수의 날 혹은 그리스도의 날- 고전 3:13
이 용어들은 상호 교환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2) 재림이 일어나는 방식
1 인격적인 오심이다.
2 영적인 것일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 오신다.
영적인 오심- 오순절날 성령을 통해 오심,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시에 심판 가운데
“주님의 오심”, 지금도 여전히 영적으로 오심, 부흥의 때에 특별한 방식으로 교회에
오심,
육체적 오심- 재림 교리. “이 후에 인자가 --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0-11).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초림과 재림은 둘 다 육체적인 것이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계 1:7)
3 재림은 가시적인 사건이다.
비밀스럽고 보이지 않는 사건으로서의 재림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다.
4 재림은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번개의 번쩍임에 비유(마 24:27). 도적이 밤에 오는 것에 비교(마 24:43).
5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이다.
영광 중에, 하늘 구름을 타고,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나팔 소리가 나매”(고전 15:52)
왕의 왕, 주의 주로 오실 것이다.
재림에 대한 연구는 우리를 경건으로 인도한다.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거룩한 삶을 촉진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3) 재림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당부의 말
그 연구가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든다면 당신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쭐하게 되고 지성과 열정이 자극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연구 방식이다.
그 연구가 당신으로 하여금 무릎 꿇고 에배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방식의 연구이다. 그 일을 해냈다는 자기 만족감을 불러 일으킨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연구방식이다. 이것은 지성만이 아니라 전인격을 위한 주제이다. 그것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진리에 올바른 방법으로 접근하게 되기를 빈다.
9장 재림의 시기: 징조들
1. 재림의 시기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
1) 재림의 시기에 대한 연구는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해야 한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라는 견지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하며, 그 관심을 통해 거룩해지고 그 위대한 날을 위해 준비되고자 하는 열망이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접근법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2) 재림의 날짜를 확정하려 시도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사용하셨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갔다. 과거를 큰 교훈으로 삼아 주님을 더 잘 알고, 더 참되게 섬기며, 진리를 아는 지식을 향해 정직하게 힘쓰고자 하는 큰 소망을 가지고 이 주제에 접근하라.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구절
살전 5:1-2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막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강좌가 끝났을 때 처음보다 더 불확실해졌다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기뻐할 것이다.
재림의 시기를 확정하는 일에 집착한 나머지 영적인 삶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하게 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2. 재림의 시기 연구에서 유념해야 할 원칙
1) “때”라는 용어를 사람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들은 재림이 그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의 세대에 일어날 일이라고 믿었을까요?
암시가 나타나 있긴 하지만 그들이 글로써 그렇게 가르친 구절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찾아보라. 표면적으로는 그런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나님 편에서 어떤 진술을 할 때에는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같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벧후 3:8)
2) 우리는 이미 말세에 살고 있다.
신약에서 사용되는 “말세” 혹은 “말일”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우리 주님의 초림부터 시작해서 재림까지 이어지는 신약시대 전체를 말한다.
3) 예언적 원근법
구약의 예언들을 읽어보면 선지자들이 주님의 초림과 재림을 한 호흡으로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주의 깊게 확인해야 한다.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와 세상 끝의 심판 날에 대한 언급이 서로 중복되어 있다. 마 24장과 25장 혹은 마가복음 13장이나 누가복음 21장과 같은 본문을 읽을 때는 이 원리를 유념해야 한다.
3. 재림의 징조
성경은 주님이 오시기에 앞서 특별한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1) 이방인을 부르심
마 24:13-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막 13:10, 롬 11:25“이방인의 충만한 수”)
2)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모여듦
-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이 일어날 것인가?
- 민족적 회심에 대한 논거들, 마 19:28, 눅 21:24,
- 민족적회심에 대한 반론들-, 마 8:11-12, 마 21:28-32, 43. 마 22:1-14, 눅 13:6-9.
벧전 2:9-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신 말씀(출19:6)의 반복.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의 세 가지 해석
①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사람들의 전체 숫자
②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회복되는 것
③ 선택받은 유대인의 총 수, 즉 구원받을 유대인의 총 수
10장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마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벧전 2:9<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신 말씀(출19:6)의 반복.>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 “온 이스라엘”은 교회가 아니다
롬 9, 10, 11장에서 교회가 아닌 유대 민족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이 일어날 것인가
유대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을 것이며 특별한 지위에 놓이게 되어 종말에는 교회와 유대 민족이 있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일까?
구약의 예언들이 그것을 지지한다고 주장.
장차 도래할 위대한 축복의 날을 고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을 때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1) 이 해석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이 다른 방법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과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2) 민족적 회심에 대한 반론
신약 성경을 읽음으로써 구약만 읽었을 때는 오로지 유대인들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이는 예언을 신약에서는 교회에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에서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행2:16)
요엘 2장을 보면 유대 민족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베드로는 그것이 교회에 적용된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 성취이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그것은 성취의 시작이었으며 그 이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교회가 속해 있으며 재림으로 인도하고 있는 이 시대 전체에 대한 것이다.
- 구약의 예언들은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행 15:14-18, 아모스의 예언이 성취된 것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는 아모스가 말한 “다윗의 장막”이 다윗의 더 위대한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예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영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에스겔 40장에서 마지막 장까지의 예언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 전체를 다시 차지하고 예루살렘에는 실제로 성전이 다시 세워질 날이 온다고 믿어야 한다. 다시 번제와 속죄제가 드려져야 한다.
한 제사가 영 단번에 드려졌고 그것을 기념하는 떡과 포도주가 있는데도 다시 모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 주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이 유대인들이 거룩한 땅으로 회복될 것에 대해 말씀하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코 없다.
마 8:11-12,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사도 바울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다고 말한다.
골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바울은 더 이상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다고 말한다. 영단번에 끝났다.
엡 2:14, 18,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하셨다.
- 롬 11장의 가르침만으로도 입증할 수 있다.
바울의 전체 논증은 오직 하나의 뿌리만 존재하며 구약과 신약의 교회는 하나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지가 아니라 이 한 뿌리이다.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절)
이 본질적 하나됨과 연합, 그리고 연속성이다. 유대민족만의 특별한 위치는 불가능하다.
- 바울은 롬 11:25-26에서 연대기적 순서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연대기적 순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라는 말은 그런 식으로 , 그렇게 해서라는 의미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게 해서, 즉 그가 기술한 방법대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3. 로마서 11장 26절의 해석
성경의 난해한 구절을 다룰 때 언제나 좋은 원칙은 그 구절에 너무 집중하지 않는 것, 말하자면 현미경으로 들여보듯 뚫어지게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더 낳은 방법은 뒤로 물러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9장 첫 부분에서 시작한 주제를 11장 마지막까지 이어가고 있어요”
1) 로마서 9-11장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남은 자, 즉 영적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 9:6)
-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영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약속들은 문자적인 의미의 전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용된 일이 결코 없으며, 언제나 남은 자, 즉 외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 내적 할례를 받은 영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 항상 존재한다.
2) “온 이스라엘”은 유대인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있다. “유대인의 충만한 수”도 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 하나님이 유대인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 그들은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
3) 지금도 이스라엘을 민족적 의미로 이해하는 오류가 벌어지고 있다
육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 오신 그리스도를 거부함
4) 모든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갈라디아서 3장의 구절들
7-9절,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29절,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민족적, 육체적 이스라엘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모든 믿음의 자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닌 모든 사람, 예수님께 속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구속을 받은 모든 사람이다.
5)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방법은 동일하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의 결론적인 해석은 하나님이 모든 시대의 믿는 유대인들 총원, 하나님이 미리 아신 그들은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인들과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종말이 되기 전에 유대인의 많은 수가 회심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특별한 지위를 지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다른 길은 없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영원한 복음이며 다른 복음은 결코 없다. 롬 8장을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성취되고 있다.
11장 적그리스도
1. 적그리스도와 관계 있는 성경구절들
요일 2:18,
살후 2:1-12
단 7:8, 15-28
계 13:1-8
1) 단 7장, 살후 2장, 계 13장에 나타난 적그리스도
모두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증거
① 그들의 기원이 같다. 단 7:8에서는 작은 뿔이 네 번째 짐승에게서 나오고, 계13에서는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마지막 단계이고, 살후의 불법한 자는 로마제국이 제거된 후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② 나타난 시기가 같다. 작은 뿔은 로마 제국을 나누어 물려받은 후계자 중 하나. 짐승은 이교의 로마로 행진해 가는 용(사탄)으로부터 그의 능력과 큰 권세를 받는다.
③ 그들의 종말이 같다. 마지막 심판 때에 멸망당한다.
④ 종교적이고 동시에 정치적인 권세를 휘두른다.
⑤ 신성모독을 전제로 한다.
⑥ 통치기간이 똑같이 3년반이다. “한때와 두때와 반때” “마흔 두 달”
⑦ 하나님의 백성과 전쟁을 벌인다.
⑧ 큰 권세를 가지고 있다.
⑨ 신에게 바치는 충성을 요구한다.
2) 이 본문들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특징(특정한 일들)
① “베도하는 일”, 즉 배교가 있을 것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배교가 일어난 후 드러남
②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의 나라와 역사에 대적한다.
③ 하나님의 성소에 앉는다.
④ 스스로를 신격화한다.
⑤ 영적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계시되는 비밀
⑥ 위장과 거짓 기적으로 가려져 있다.
⑦ 막는 자에 의해 지연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멸망당할 운명.
2. 적그리스도에 대한 세 가지 해석
1) 이 일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 유대인들의 배교와 그리스도의 거부.
2) 전적으로 미래에 일어나는 일이며, 예루살렘의 회복된 성전에서 자신을 높이고 성도들과 전쟁을 하는 유대인 혹은 이방인이라고.
3) 교황 제도를 말한다.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의 견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살후2:4)-교회의 교황석. 로마 제국 몰락 후 교황의 권력이 시작되었다는 것. 교황이 경배를 요구할 뿐 아니라 정치적이자 종교적인 요소까지 가지고 있다. 복음에 반대한다. “거짓 기적”은 로마가톨릭이 주장하는 수많은 기적들, “거짓 것을 믿는다”는 기적을 믿는 것, 트렌트 공의회가 참된 믿음을 저주한 사건이다.
개혁주의자들은 “막는 자”가 로마 황제들이고, 살후 2:8의 “그의 입의 기운”은 개신교 종교개혁이고, 계 11:13의 무너진 “성 십분의 일”은 프랑스 혁명이다.
3. 적그리스도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내용들
1) 적그리스도는 이미 사도 바울과 요한의 시대에 활동하고 있었다.
2) 이 세대가 끝나기 직전에 최고의 힘을 발휘할 것.
3) 끔찍한 정치적 권세에 뒤이어 똑같이 끔찍한 종교적 권세가 나오는 것.
4) 적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는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5) 택함 받은 자들까지 속일 정도의 기적과 표적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다.(엡 6:12)
-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3권,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pp 135-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