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컨대 현재의 고난"(롬8:18)의 의미는?(로마서강해6권2장)/ 로이드 존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난의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만 되는가?
첫째, 그리스도인은 그 고난을 보고 놀라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하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고난에 의해서 요동되지도 말아야 하고 또한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때문에 넘어지고 요동된다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점검할 것이다. 사자에게 던져졌던 초대교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영광의 최종적인 면류관은 순교라고 했으며 ‘순교의 피가 교회의 씨’라고 말했다. 우리가 고난을 받고 있다고 해서 결코 그것 때문에 구원의 진리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의 구원관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며, 또는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만일 마귀가 여러분에게 그러한 생각들을 돌린다면 믿음의 방패로 즉각 소멸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결코 환난이나 시련에 요동되어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의식을 느끼기까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도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사도의 말을 들어 볼 때, 상황이 나아지게 될 것이라는 어떤 암시도 전혀 없으며, 또한 멀지 않아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하는 암시도 없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주님께 와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였을 때 우리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마8:20)고 하셨다. 주님은 그가 자기를 진정으로 따르기를 희망한다면 많은 시련과 고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성경의 가르침은 보편적인 인류의 위안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약의 일종’으로 좀 더 행복을 느끼고 좀 더 자기들의 고통을 잊어보려고 하나님의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천만에! 여러분은 마태복음 24장을 읽어 보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여러 모양과 형태의 고난과 환난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1-4)에서의 말씀은 오늘날의 인생을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가?
세상이 점점 나아지기는커녕 세상이 죄악과 고통과 악의 처소가 되어 갈 것이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이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여러 짐승들로 비유될 수 있는 강한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세상에 처하여 있음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이미 그들은 지금 활동하고 있으며, 교회는 국가와 동맹을 맺게 되고 세속화되고 말았다. 교회와 기독교 이름으로 거짓된 낙관론이 설교되어 왔고, 그러한 위안이 자주 주어져 왔다. 그러나 거짓된 낙관론은 요한계시록에서도 로마서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조건을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도록 노력하라는 부름이 여기에는 없다. 이것은 현대에 있어서 중차대한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이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동맹하여서 어떤 일을 하여 고난을 적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지도 않다.
로마서 13장은 그리스도인은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이고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입법이라든지 그러한 활동을 방편으로 해서 고난의 원인들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지는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또 시원찮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통치자에게 영향을 행사하고 그에 따라서 조직해 나가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고통을 가져오는 요인들을 종식하도록 설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세상을 개혁하기 위한 개선책이 아니다.
사도는 고난을 당했을 때 그저 체념하라고 대답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거짓된 추측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로 하여금 ‘넉넉히 이기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단순한 체념의 사상이 교회의 사상 속에 자주 끼어들었다.
사도는 적극적이다.
첫째, 바울의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독특한 것이다. 세상에서 그 문제를 그런 식으로 대처하는 가르침은 그것밖에 없다. 당시에 매우 인기 있었던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소망 없는 체념이다. 반면에 사도의 가르침은 적극적이요, 승리에 차 있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도 궁극적으로는 도피주의에 불과하며 철저하게 비관적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가르침 속에 있는 비관의 요소와 스토아주의나 또는 불교 또한 세상에서 크다는 종교들의 비관주의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그을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물체는 악하며 오직 유일한 소망은 물체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소망 없고 비관적이고 용기를 꺾어 버리는 관점이다. 불쌍한 것은 교회를 자기들의 고통을 잠시 잊기 위한 도피처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다른 것도 우리가 여기서 발견하는 교훈을 제시하지 않는다.
둘째, 바울의 독특한 가르침은 전체 기독교의 교훈에서부터 유출되어 나온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컨대”라는 말씀 속에서 그 점을 명백히 진술한다. “내가 신앙에 대한 모든 교리들을 파헤쳐 나온 결과로써 나는 이러한 필연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을 받음으로 인해서 불행을 느끼고 있는 그리스도인, 그 사람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리들로 인해서 주어진 위안은 스스로 그 교리를 깊이 생각한 결과로써 나오는 하나의 유추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단순히 어떤 위안을 주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의 임무란 여러분으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혹독해 지기도 해야 하며, 징책을 해야 하기도 하고 또 그들의 생각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해야 한다.
셋째, 그 교훈이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 어떠한 위로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우리가 로마서에서 지금까지 강해해 온 교리에 관해서 분명하지 못하면 사도가 ‘생각컨대’라고 말할 때에 그 사도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한 전체 교리와 우리의 복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계획하고 계신 모든 목적에 관하여 명백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들로부터 약속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뿐이다. ‘생각컨대’ 곧 이 말은 모든 앞에서 제시했던 교리들에 비추어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그것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전체적인 방식에 인도하여 준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잡는 하나의 정신’이 아니다. 기독교는 믿고 체험하는 바의 믿음이다. 또한 그런 다음에 이치를 따져서 생각하는 그러한 믿음이다. 그러한 일에 실패하면 다른 어떤 것도 얻지를 못한다. 이 원리가 명백한가?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 둘, 셋, 넷’ 하는 요점을 살펴보는 것은 쓸모가 없다.
여러분은 고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마귀가 여러분을 참소할 때, 여러분은 그를 털어 내려고만 애쓰는가? 그것은 참된 기독교적인 방식이 아니다. 여러분은 마귀를 다루는 방식을 생각하고, 이치적으로 따져 보고, 논리적으로 논증해 보고, 여러분이 믿는 교리들을 꼼꼼히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컨대’ 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마귀를 다루는 방식이다, 고난이나 환난이나 시련을 다루는 방식은 그 방식 밖에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독특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 가르침은 언제나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근본적인 교리들에 관한 믿음과 확신의 결과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