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존 라일, 『거룩』 (강의안)
존 라일, 『거룩』, 장호준역, 생명의말씀사, 복있는사람, 2009
로이드 존스의 추천의 글
“거룩”을 주제로 한 이 위대한 책을 새롭게 출간한 것에 대해 누구나 고마워할 것이다. 20여년전 헌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읽으면서 누렸던 영적 정신적 만족감을 저는 도무지 잊을 수 없다. 그의 설교는 항상 성경 말씀과 더불어 시작하고 말씀을 풀어간다. 라일 주교는 17세기의 위대한 청교도들이 파 놓은 샘물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의 저서들은 오늘날의 독자가 아주 쉽게 읽은 수 있는 현대적 형태로 주어진, 참된 청교도 신학의 정수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머리말
존 라일, “여자들이나 생소한 설교자들이 들려주는 감정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연설, 큰소리로 부르는 노래, 열기에 찬 방, 사람들로 꼭 찬 천막,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에서 받는 강렬한 반(semi)종교적 느낌들,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모임, 공개적인 신앙 간증 등 이 모든 것이 당시에는 매우 흥미롭고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정말 분명한 근거와 실체가 있어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이런 집회에 참여했던 사람이 가정에서도 이전보다 더 거룩하고, 온유하고, 욕심이 없고, 애정이 넘치고, 친절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었는가? 주신 은혜에 만족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들에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가? 그의 부모나 남편, 그리고 친척들이나 친구들이 그와 함께 지내는 것을 이전보다 더 원하고 편하게 느끼는가? 요란스럽고 흥분을 일으킬 만한 것이 없이도 고요한 은혜의 방편을 누리고 차분한 주일을 보내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과 세세한 부분에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이전보다 더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가?”
“오늘날의 엄청난 ‘대중 집회’들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이 과연 가정의 경건과 개인적인 성경 읽기와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 의심스럽다.”
서 론
거룩한 삶을 살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세속성에 마음을 빼앗겨 경건한 마음이 무디어졌다. 개인적 경건이라는 주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사람의 수준은 많은 부분에서 처참하리만큼 곤두박질쳤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고(딛2:10), 우리의 일상 습관과 성품으로 이 교훈을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한데도 쉽게 간과되고 있다.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호감을 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착하지도 않다는 평을 듣는다.
성화는 칭의만큼이나 중요하다. 개신교가 아무리 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해도 삶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오히려 더 해롭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세상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을 거짓되고 공허하다고 멸시하고, 급기야 기독교 신앙 자체를 싫어한다. 우리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거룩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거룩이라는 주제는 바른 기초 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미숙하고 부당하고 편향된 주장으로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 날 칭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고 신비적으로 만드는 데 사탄이 성공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성화에 대한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욥38:2). 저는 물음의 형태로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하겠다.
이 지침을 “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거룩에 관한 경고”라고 생각하시기 바란다.
1. 성화 교리를 다루는 많은 사람들이 회심한 사람의 거룩은 개인적인 노력과 전혀 상관 없이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대담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데, 과연 이런 주장이 지혜로운 것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모든 거룩의 뿌리이다. 거룩한 삶의 첫걸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을 갖기 까지는 한 톨의 거룩도 거둘 수 없다.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거룩한 삶의 시작일 뿐 아니라 거룩한 삶을 이어가는 비밀이다. 하지만 성경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거룩을 위해서는 믿음뿐 아니라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말했던 사도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자신이 “싸운다”, “달음박질한다”,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 말한다(고전9:26,27) 그것만이 아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도 하고(고후7:1), “힘쓸지니”라고도 하고(히4:11),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자”고도 한다(히12:1). 더구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도 할 것이라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은혜이다(롬4:5). 하지만 성결하게 하는 믿음은 삶으로 역사하는 은혜이다. 이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갈5:6), 시계태엽과 같이 속사람 전체를 움직인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거룩”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다. “믿음만이 의롭게 한다”는 말은 지극히 바르고 성경적이지만, “믿음만이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그렇게 바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의롭게 되었음을 사람 앞에 가시적이고 분명하게 의롭게 되었다고 드러낼 수 있는 믿음은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약2:17).
2. 산상수훈이나 사도 바울이 쓴 대부분의 서신들 후반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상에서의 거룩함에 대한 많은 실천적인 권고를 약화시키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스스로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날마다 자기를 구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에 힘써야 한다. 신약성경은, 양심을 아프게 하지도 않고, 감정을 상하게 하지도 못하는, 거룩한 삶에 대한 일반적인 권고 이상의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일상에서 거룩함을 빚어내는 특정한 요소와 세부적인 권고를 신자에게 분명하고 온전하게 제시하고 강조해야 한다. 참된 거룩은 단지 믿음과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능동적인 행함과 수동적인 은혜가 우리의 행함과 태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참된 거룩은 우리의 말과 성품, 본성적 필요와 성향을 통해 그리고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 남편과 아내, 통치자와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우리의 몸가짐, 시간 사용, 일터에서의 행동, 아플 때나 건강할 때의 행동을 통해, 부요할 때와 가난할 때 우리의 처신 등을 통해 나타난다. 오래전 경건한 저자들은 이 모든 문제를 속속들이 다루었다. 원론적인 언급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깊이 파고들어 갔고, 더 세부적으로 나아갔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거룩한 사람이 가정이나 직장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참된 거룩은 단지 내적인 감흥이나 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눈물이 흐르고 탄식하고 흥분하고 맥박이 빨라진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설교자와 교파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끼고, 우리와 의견이 맞서는 모든 사람과 기꺼이 싸우려는 분명한 태도가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거룩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는 것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습관과 성품과 행실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롬8:29).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볼 때 일상의 행실과 성품에서 진보와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자기를 내려놓는 헌신과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운동의 가르침을 듣고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막대한 해를 끼칠 뿐이다.
3. 모호하고 막연한 말로 완전을 이야기하고, 성경적으로나 사람의 경험으로나 전혀 근거 없는 거룩의 표준을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양 그리스도인을 다그치는 것이 지혜로운가?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이라면, 신자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고(고후7:1),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히6:2), “온전하게 되라”(고후13:11)고 권면하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생각이나 말, 행실, 태도로 짓는 죄로부터 완전하고 흠없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문자적인 완전을 가르치는 구절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아담의 후손 가운데 이 세상에서 그것을 얻은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성도라 할지라도 스스로 절대적이고 문자적인 완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와 불완전을 항상 절감했다. 신령한 빛을 더 누리는 사람일수록, 무수하게 많은 흠과 부족함을 자신에게서 보았다.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더 큰 “겸손으로 허리를 동였다”(벧전5:5).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많이 사용하고 있는 완전과 관계된 말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죄의 본질이나 하나님의 성품, 자신의 마음, 성경, 용어의 정의 등에 무지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처음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는 ‘큰 죄에 빠진 날 위해’와 같은 찬송이 맞았지만, 지금 자신은 그 찬송을 부를 단계는 지났고, 그 내용은 자기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수준과 맞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아주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도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은 “지난 3개월 동안 죄악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주 무지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가르침은 유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해롭다. 있지도 않은 “완전”에 이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선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침륜에 빠지기도 한다. 한 마디로 이런 가르침은 위험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4. 로마서 7장의 내용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아직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나 연약한 초신자의 경험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이 문제는 사도 바울이 서신을 기록한 이래로 1,800(2,000)년 동안 논란거리였다. 존 웨슬리나 찰스 웨슬리, 존 플레처까지도 사도 바울 자신의 현재 경험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로마서 7장 기록은, 모든 시대의 성숙한 성도들이 자기 경험을 기록해 놓은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히려 이 기록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연약한 신자의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사의 탁월한 주석가들 대부분이 한결같이 로마서 7장을 성숙한 신자의 고백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한다. 여기에 반대하는 주석가들 대부분은 소키누스주의자, 아르미니우스주의자,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과 탁월한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5. 오늘날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교리를 말하는 사람이 흔히 사용하는 말은 과연 지혜로운가? 이 교리가 성경에서 의도한 것 이상으로 높아져 있지는 않은가?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와 하나요, 그리스도가 그 안에 거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신비로운 연합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다시 살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는 성경 구절이 다섯 군데 있다(롬8:9-10,갈2:20,4:19,엡3:17,골3:11). 우리는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아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고”(엡3:17).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일을 해가신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확하고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의미를 넘어서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내주하심을 말할 때는 그 의미를 더욱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성령의 사역을 무시하게 된다(요즘 내재 신론이나 우주적 그리스도를 말하는 뉴에이지적 신비사상은 같은 류이다-요약자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에도 계시고, 천국에도 계시고, 두세 사람이 그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도 계시고, 어디에나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머리와 대제사장 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재림 때까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고, 그분이 떠나시면서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지금도 그분의 백성 마음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요15:2^). 로마서 8:9-10을 보면 확연하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사도 요한의 말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새뮤얼 러더퍼드의 <영적인 적그리스도>를 보라.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두 세기 전에 극단적 이단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반율법주의와 광신주의의 가장 악독한 형태로 변해갔다. 이 끔찍한 오류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같은 말씀을 무리하게 푸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이런 가르침을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 일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자는 죽어서 이미 장사되었고 그리스도만이 그들 안에 살면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육신의 안락함만을 구가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죄를 짓기 시작했다! 왜곡되고 과장된 진리는 가장 위험한 이단들의 어미가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6.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회심과 성별 또는 회심과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을 본다. 이 둘을 완전히 구분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로마 카톨릭은 교회를 죄인, 회심자, 성도의 세 부류로 나눈다. 오늘날 현대 교사들도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을 회심하지 않은 자, 회심한 자, 완전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더 높은 수준의 삶”에 도달한 자의 세 부류로 나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성경은 항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산 자와 죄 가운데 죽은 자, 신자와 불신자. 회심한 자와 회심하지 않은 자, 좁은 길로 가는 자와 넓은 길로 가는 자,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만 나눈다. 그러나 각 범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와 은혜의 정도는 다르고 다양하다. 그러나 그 차이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한 승강기인데 서 있는 높이가 다른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 두 범주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있다. 생명과 사망, 빛과 어둠, 천국과 지옥의 차이만큼이나 멀다. 하지만 사람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눈다는 말은 성경에서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다. 저는 두 번째 회심(second conversion)이라는 개념을 몹시 싫어한다.
은혜는 정도마다 큰 차이가 있고 영적인 삶은 항상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은혜 안에서 자라기 위해 항상 힘써야 한다. 하지만 신자가 신비로운 변화를 통해 단번에 완전한 성별과 지복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이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은혜, 지식, 믿음, 사랑, 거룩, 겸손, 영적인 마음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고, 많은 성도들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갑작스럽고도 즉각적인 변화를 통해 신자가 회심에서 성별로 급작스럽게 건너띈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성별이 없는 회심이 있는가! 두 번째 회심으로서의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신자에게 촉구하는 사람은, 성경이 새 생명, 새 창조, 영적인 부활이라고 일컫는 위대한 처음 변화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경시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주장을 듣다 보면, 이들이 말하는 성별되는 때가 바로 이들이 처음 실제로 회심하는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옛길”을 따르겠다(렘6:16).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그리스도께 성별하고 더욱 헌신함으로 은혜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가능성과 앞으로 전진해야 할 절대적 필요를, 회심한 모든 사람에게 해마다 역설하는 편이 더 지혜롭고 안전하게 보인다. 대부분의 신자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거룩과 하늘의 기쁨을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두 번째 회심을 가르치는 것은 겸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짓누를 뿐 아니라, 경박하고 무지하고 자기를 속이는 사람을 부추겨 아주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한다.
7. 신자에게 죄와 씨름하고 싸우기보다는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스도의 손에 자신을 맡기기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신자의 의무로서 “너희 자신을 드리라”고 하는 표현은 신약성경 단 한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롬 6:13-19이다. 총 다섯 번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 자신을 타자에게 수동적으로 맡기라”는 의미는 아니다.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드려 섬김과 유익과 소용이 되게 하라는 것을 알 수 있다(롬12:1).
또한 신약성경의 서신서 전체를 통틀어 서른 군데 정도에서,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할 책임이 있고, 이 일을 위해 개인적인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수동적인 주체로서 그저 자신을 드리기만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어나 일하라고 말씀한다. 거룩한 침노, 갈등, 전쟁, 싸움, 군사의 삶, 씨름 등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로 언급한다.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된다.
그 가르침은 본 번연의 <천로역정> 같은 고전을 불태워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사실인 칭의와 성화를 계속해서 혼동한다. 칭의를 통해 사람에게 요구할 말은 “믿으라, 그저 믿기만 하라”는 것이고, 성화를 통해 요구할 말은 “깨어 기도하고 싸우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성경에 무지하고, 따라서 신앙도 견고하지 못하다. 이런 사람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 다닐 수밖에 없다(엡4:14). 아테네 사람들과 같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우리 조상들을 통해 다져진 것에는 병적인 염증을 느낀다. 현대적인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는 구름처럼 몰려들지만, 자신이 듣는 것이 과연 진리인지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선정적이고,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가르침을 끊임없이 열망한다.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벧전3:4)과는 전혀 상관 없고 영적으로 술 취해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과장된 찬양으로 쉴 새 없이 감정을 자극해 주고, 감정에 격해 큰소리로 울 수 있는 군중집회 같은 것에만 관심을 둔다. 교리의 차이를 전혀 분별할 수 없게 만드는 무지가 팽배해 있다. 설교자가 “똑똑하고” “열정적”이기만 하면 다른 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이런 것에 문제라도 삼으면 이내 여러분은 “편협하고 관대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질 뿐이다!
슬픈 사실은, 진심으로 거룩을 증진하고자 했던 사람이 서로에 대한 오해와 반목으로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큰 곤경에 처해 있다.
생소하고 기괴한 용어와 어구로 성화를 가르치는 것을 반대한다. 거룩을 증진하려는 운동은 결코 새로 만들어 내는 표현이나 편향된 진술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본문에 집착하거나 한 진리를 위해 다른 진리를 희생하고, 본문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여 인위적으로 조화시킨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투게 하고 이간시키는 거룩 운동은 일단 의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진리와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는 거룩뿐 아니라 평화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거룩에 자라기 위해 힘쓰는 모든 사람은 성경을 더욱 균형 있게 읽고, 교리를 신중하게 분별하고,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 더욱 힘쓰고 분발해야 할 것이다(렘16:19).
제 1 장 죄
“죄는 불법이라”(요일3:4).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독교의 뿌리는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오류와 이단, 거짓 교리는 죄에 대한 모호하고 불분명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교회를 통틀어 가장 부족한 것이 죄에 대한 분명하고 온전한 가르침이다.
1. 죄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죄는 계층과 지위, 이름과 나라, 백성과 방언을 막론하고 온 인류에게 드리워진 엄청난
도덕적 질병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법에 완벽히 합치하지 않는 모든 상상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 “죄”이다. ‘항상 웃으면서도 악한일 수 있다’.
죄에는 행함으로 짓는 죄와 행하지 않음으로 짓는 죄가 있다. 우리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실제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간과함’으로 죄를 짓는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배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25:41-42). 어셔 대주교는 숨을 거두며 기도했다. “주여,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되, 특별히 내가 하지 않음으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 하소서”.
2. “죄”는 엄청난 도덕적 질병의 근원과 원천이다.
인간의 죄악됨은 밖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비롯되었다. 어렸을 때 교육을 잘못 받아서가 아니다. 나쁜 친구들이나 그릇된 본보기에서 기인한 것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죄는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병과도 같다. 우리 모두는 이 병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져 죄가 없고 의로웠던 우리의 첫 조상이 원래의 의에서 떨어져 죄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남자와 여자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형상을 따라 태어나고, 악을 향해 치닫는 본성과 마음을 물려 받는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롬5:12),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6),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이다(막7:21).
갓 태어난 천진난만한 아기도 “천사” 같다고 하지만, 어린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 키와 생각이 자라감에 따라, 그 속에 속임과 악한 성향, 이기심, 방자함, 완고함,
탐욕, 시기, 질투, 정욕의 싹과 조짐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죄의 첫 번째 원인은 그 아이의 타락한 본성 때문이지 결코 학교나 친구 때문이 아니다.
3. “죄”의 정도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성경만이 죄의 정도에 대한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본성적으로 “항상 악할 뿐”이다(창6: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다(렘17:9).
죄는 우리의 모든 도덕적 성향과 지적 기능에 창궐한 질병이다. 사고와 정서, 추론의 능력과 의지가 어떤 식으로든 죄로 오염되었다. 양심조차도 확실한 안내자로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어두워져 있다.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는다면 양심 역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이다. 요컨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사1:6).
공손함과 예의 바름, 점잖은 매너, 단정한 몸가짐, 교양 등과 같은 얄팍한 덮게로
죄라는 질병을 가릴 수는 있지만, 죄는 이미 성향과 체질에까지 깊이 전이되어 있다.
물론 인간에게는 많은 위대하고 고상한 기능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예술과 과학과 문학 등에서 엄청난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어서”,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본성적 지식과 사랑과 경외함이 없다. 인간은 훼파된 성전과도 같아서, 한때 하나님께서 거하셨던 장엄함을 흔적으로만 갖고 있을 뿐이다.
원죄와 타락의 끔직한 결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만이 인간이 처한 복잡한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회심하여 성령의 주권 아래 있는 사람도 여전히 그 속에 완고함이 있는 것을 보면, 죄의 정도와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이 육신 장막이 무너질 때까지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 그러나 죄는 더 이상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한다. 새로운 은혜의 원리에서 비롯된 넘치는 능력이 죄를 억제하고 다스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신자의 삶은 실패의 삶이 아니라 승리의 삶이다.
하지만 신자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몸부림, 매일의 사투, 속사람을 지키기 위한 빈틈없는 경계, 영과 육의 싸움, 자신만이 아는 내면의 ‘탄식’ 같은 모든 것들이, 바로 죄가 얼마나 거대한 능력과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는 저 원수는 과연 힘이 세고 강한 놈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지만 육체를 신뢰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기를 결코 잊지 않는다.
4. 죄책과 죄의 악독함과 무례함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실감할 수 없다.
본질상 유한한 인간은 자신이 맞닥뜨려야 할 거룩하고 온전하신 분의 목전에서 죄의 악독함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실감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고 하시며(욥4:18) 행실뿐 아니라 중심의 생각과 동기를 감찰하시고,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는” 분이다(시51:6). 죄 가운데 태어나 끊임없는 불완전과 우둔함으로 죄인들과 더불어 살다가 이내 사라질 피조물인 우리가 죄악의 무시무시함에 대해 이해해 본들
그것은 너무나 불완전할 뿐이다. 우리는 죄를 헤아릴 수도, 측량할 수도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그분의 대속과 속죄에 대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야말로, 인간의 죄악됨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분명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로만 온전히 값을 치룰 수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죄책은 끔찍하리만큼 사악한 것임에 틀림없다.
5. 우리는 죄의 기만성을 간과하기 쉽다.
죄를 대할 때, 우리는 실제 하나님의 목전에 드러난 죄의 모습보다 한사코 덜 심각하고 덜 위험한 것으로 보려고 한다. 죄를 과소평가하여 변명하고, 죄책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죄는 가롯 유다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찾아온다. 요압과 같이 두 팔을 벌리며 아첨하는 말로 다가온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는 하와의 눈에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했지만, 이 실과 때문에 그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야 했다. 궁전 지붕에서 한가롭게 거니는 것이 다윗에게는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 뒤로 간음과 살인이 따라 들어왔다.
처음부터 죄가 죄로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깨어 기도하자. 사악함에 세련된 이름을 붙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목전에 드러나는 그 본질과 성향까지 바꿀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의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선하신 주님,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는 이 지혜로운 기도를 항상 되뇌어야 한다.
빛에 이를수록 더 많은 죄악을 보게 되고, 천국에 가까울수록 더욱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교회사의 위인들을 보면, 브래드퍼드나 러더퍼드, 맥체인 같은 탁월한 성도들은 항상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복음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요.
아무리 죄가 넘쳐 난다 해도, 은혜는 더욱더 넘쳐 난다. 그렇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참여하신 영원한 구속의 언약을 통해서 은혜가 넘쳐 난다. 의롭고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언약의 중보자를 통해서 넘쳐 난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공로를 통해서 넘쳐 난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대표자로서 드리는 끊임없는 중보기도를 통해서 넘쳐 난다.
자기 백성의 마음에 보내셔서 그들을 새롭게 하시고, 성결하게 하시고, 옛것은 다 지나가게 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넘쳐 난다. 죄를 죄대로 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볼 수만 있다면 누구도 낙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이 죄의 주제를 좀더 분명하고 철저히 다룬 책을 보기 원하는 사람은, 존 오웬, 엔서니 버제스, 스테판 차녹, 맨턴, 그리고 다른 청교도 거성들이 쓴 체험 신학의 걸작들을 보시기 바란다. 이런 주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그 누구도 청교도에 비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죄 교리에서 오늘날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천적 지침들을 제시한다.
1)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우리 시대에 만연하는 모호하고 흐릿하고 막연하고 몽롱한 신학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고, 은혜에 대해 가르치고,
믿음과 회개와 거룩에 대해 가르치기는 하지만, 성경에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이런 그릇된 신앙을 고치고 회복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길은, 죄의 죄악됨에 대한 성경의 옛 가르침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지옥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까지는, 결코 천국을 향해 결연히 돌아서지 않을 것이며, 순례자로 이 땅을 살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이 율법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이며(딤전1:8),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롬3:20, 7:7).
율법의 요구들을 앞세워 사람이 귀 기울이게 해야 한다. 십계명의 뜻을 자세히 풀고
분명히 밝혀서 그 계명들이 요구하는 바, 그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나타내야 한다.
산상수훈에서 우리 주님이 취하셨던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죄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잠시 예수께로 나아와 그분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내 그 자리를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만다.
2)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요즘 유행하는 터무니 없이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교리와 신조를 거부하고 신앙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현대 사조의 경향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진리이고,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옳고, 잘못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멸망받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모두가 구원에 이를 것 같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속죄, 마귀의 인격성, 성경의 기적, 미래에 있을 심판의 영원성과 실재성 같이 중요한 신앙의 주춧돌이, 현대 과학과 보조를 같이 하기에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여겨져, 기독교라는 배 밖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이 위대한 진리를 편들기라도 하면, 여러분은 이내 편협하고, 교양 없고, 시대에 뒤떨어진 신학적 골동품 정도로 취급받을 것이다! 성경을 한 구절이라도 인용해 보라. 유대인의 책 한 군에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는 것은 아니며,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도 많은 새로운 발견들이 계속되어 왔다고 반박할 것이다!
죄의 본질, 죄의 실재성, 죄의 악독함, 죄의 권세, 그리고 죄책에 대해 쉬지 않고 언급하는 것만이, 현대의 이런 역병에 대한 처방이다.
3) 영국 전역을 홍수처럼 휩쓸며 많은 것들을 쓸어가 버린 감각적이고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기독교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 또한 죄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양심이 온전히 일깨워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신앙 체계가 다소 매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우리의 양심에 각성이 일어나면, 우리는 오감에 호소하는 의식적인 기독교만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자연인은 음악, 꽃, 촛불, 향, 종교적 기치, 행진, 아름다운 예복, 신앙고백문, 그리고 인위적인 반(半)가톨릭적 의식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찾지만, 일단 “죽은 자들 가운데서 깨어 살아난” 사람은 그런 것들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허망한 종교적 행위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람들이 죄의 본질과 악독함과 죄악됨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완전하고 분명히 알았다면, 지난 사반세기 동안에 생겨난 반(半)가톨릭적 교회들의 5분의 4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4) 요즘 회자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이론들에 대한 해결책도 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가 몸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완전에 이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없다. 우리의 가장 탁월한 행위조차도 불완전하다. 우리는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우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마땅히 경외해야 할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다. 기도할 때조차도 불완전한 것 투성이다. 나누고, 용서하고, 믿고, 희망하고,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다. 생각이나 말이나 행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귀와 세상과 육체에 대해도 싸워야 할 만큼 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한 상태를 솔직히 고백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5)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개인의 거룩에 대한 저급한 견해에 대한 좋은 해결책은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수준이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비와 양선, 이타성과 온유함, 친절함, 자기부인, 선량함, 선을 위한 열심, 세상과의 분리 등은 마땅히 환영받아야 할 만큼 환영받지 못하고 있고, 우리 조상들의 시대에 비해 평가 절하되고 있는 현실이다.
좁고 깊었던 길이 넓고 얕은 길이 되어 버렸다. 겉으로는 많은 사람을 얻었지만, 질적으로는 많은 것을 잃은 것이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엄청난 부의 증가로 세속성과 방종, 안락함에 대한 추구가 만연하게 되었다. 한때 사치로 여겨지던 것이 지금은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없어서는 안될 것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자기부인과 “고난 받는”것은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딤후2:3).
우리의 관심이 분산되고 영적인 삶은 점점 힘을 잃어 가고 있다. 정통 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주하여 매일의 경건생활을 소홀히 했다. 지난 수년 동안 신자들의 개인적 거룩의 표준은 우리 조상들의 때보다 더 낮아졌고, 이로 인해 성령께서 근심하신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겸손과 성찰이다.
이 상황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죄의 본질과 죄악됨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적인 의식을 빌려 오지 않아도 되고, 참회 제도를 다시 회복시킬 필요도 없고, 수도원주의나 금욕주의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순수하게 회개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을 해야 한다. 첫 번째 원리인 “옛길”로 돌이켜야 한다(렘6:16).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리하고, 하나님 목전에서 죄가 무엇인지 봐야 한다. 주님께서 무엇을 죄라고 하시는지, 무엇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시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요7:17). 부주의하고 안이하게 세상적인 삶을 영위하면서도, 동시에 복음주의 교인이라 자처하며 복음주의 원리들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단 죄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악하고, 훨씬 더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우리에게 착 달라붙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법을 더 온전히 배우게 될 것이다(갈2:20). 우리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많이 용서받은 만큼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을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우리가 높이 지여져 가려면 반드시 먼저 낮아져야 한다.
더 높은 표준의 거룩에 이르는 첫 걸음은,
죄의 엄청난 죄악됨을 더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다.
제 2 장 성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7)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성경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구원에 꼭 필요한 세 가지는, 칭의와 중생과 성화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듭나서 의롭다 함을 받고 성화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된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만약 그런 상태로 숨을 거둔다면, 천국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영화롭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1. 성화의 참된 본질
예수께서 어떤 사람을 참된 신자로 부르실 때, 성령을 통해 신자에게 역사하시는 영적인 일을 성화라고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죄를 보혈로 깨끗하게 하실 뿐 아니라, 죄와 세상을 향한 본성적 사랑에서 그를 분리시키시고, 그의 마음에 새로운 원리를 심으셔서 삶의 실제적인 경건을 이루어 가신다. 성령은 고난이나 섭리적인 임재를 통해 일하시는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방편으로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주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셨다. 대속의 죽음을 통해 죄의 죄책에서 그들을 건지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심으로 죄의 지배에서도 건지셨다. 그들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거룩하게 하셨다.(고전1:30).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9).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5_26).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24).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였으니”(골1:21-22).
이 다섯 본문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칭의를 일궈내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성화도 이루셨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하시는 자”, 그 백성을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로 칭하고 있다(히2:11).
1) 성화는 그리스도인이 참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에 참여함으로 생겨나는 불변의 결과이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15:5).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가지는 더 이상 살아 있는 가지가 아니다. 마음과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도 없는 형식적인 연합일 뿐이다. 인격을 성화하지 못하는 믿음은 마귀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 이는 “열매가 없는 죽은 믿음”이다. 택함을 받은 자들의 믿음이 아니다. 요컨대, 삶의 성화가 없으면 그리스도를 믿는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구속받은 것에 깊이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살아간다.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한다.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 예수의 보혈로 깨끗하게 된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진 자는,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약2:17, 딛1:1, 갈5:6, 요일1:7, 3:3).
2) 성화는 중생의 귀결이요 필연적인 결과이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새로운 본성과 원리를 따라 항상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자신을 지키며, 세상을 이긴다고 분명히 말한다(요일2:29, 3:9-14, 5:4-18).
요컨대, 성화가 없는 곳에는 중생도 없으며, 거룩한 삶이 없다면 새 생명도 없는 것이다.
3) 성화야말로 구원의 핵심요소인 성령의 내주하심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사람의 영혼에 거하시는 성령은 결코 졸거나 주무시지 않고, 항상 신자의 마음과 성품과 삶에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신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말한다(갈5:22). 이 같은 열매가 발견되는 바로 그곳이 성령이 계신 곳이다. 물결과 나무와 연기에 미치는 영향으로 바람이 부는 것을 알듯이, 사람의 행실에 미치는 결과로 성령이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으로 행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시다고 믿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이다(갈5:25). 거룩한 삶이 없는 곳에는 성령도 계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인치심이 성화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다(롬8:14).
4) 성화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표지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자들의 숫자와 이름을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으시고 감추어 두셨다. 그러나 택함을 알 수 있는 분명한 한 가지 길을 주셨다. 택함을 받은 사람은 거룩한 삶을 통해 알려지고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하게 하심으로 --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고(벧전1:2).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하려고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살후2;13),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자들이며”(롬8:29),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엡1:4). 데살로니가 교회에 신자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본 사도 바울이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살전1:3-4). 최소한 성화의 모양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는 택함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5) 성화는 항상 눈에 보이게 드러난다. 교회의 위대한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내리는 성화는, 그리스도처럼 “숨겨지지 못”한다(마5:14). 참으로 성화된 사람은 겸손으로 옷 입어 스스로에게서는 오직 연약함과 부족함만 보게 된다. 스스로 알았든 몰랐든 주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성품과 태도, 인격과 삶의 습관을 그에게서 본다. 삶에서 거룩한 모습을 나타내지 못해도 “성화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며, “성화”라는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빛이 매우 작고 희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두운 방에서는 아무리 작은 불빛이라도 눈에 띄게 마련이다. 아무리 미약한 생명이라도 박동이 있다면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해도, 그에게 있는 성결함은 어느 정도 느껴지고 보여 지게 된다. 세속성과 죄 외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성도”는 일종의 괴물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전혀 성도로 인정하지 않는다!
6) 성화는 모든 신도들 개개인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신자에게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특별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자이다. 빛과 지식, 새로운 원리를 가진 자이다. 그들이 거룩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들 자신의 책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은혜와 새 마음과 새 본성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 그들에게 어떤 핑계도 듣지 않으실 것이다. 항상 깨어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를 항상 책임 있는 존재로서 교훈한다. 죄인을 구원하신 구주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새롭게 하는 은혜를 주셨다면, 그분은 또한 우리가 잠들지 않고 그 은혜를 사용하기를 바라신다. 이 사실을 잊음으로 많은 신자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스스로 무익하고 위로를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7) 성화는 점점 자라는 것이고 그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은 영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더 보고, 더 알고, 더 느끼고, 더 행하고, 더 회개하고, 더 믿었다는 것에 모두 동의한다. 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정도에 비례한다. 바울의 격려대로 그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고(벧후3:18), “더욱 많이 힘쓰”게 된다(살전4:1).
8) 성화는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방편을 얼마나 부지런히 사용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방편”이라 함은 성경 읽기, 개인기도, 정기적인 공예배 참석, 정기적으로 설교 듣기, 정기적인 성찬 참여 등을 말한다. 이 방편은 성령이 영혼에 새로운 은혜를 공급하시고, 속사람에 시작하신 일을 견고하게 하시는 지정된 통로이다. “고통 없이는 영적인 유익도 없다.” 성경 읽기와 기도와 주일을 잘 누리는 일에 소홀하면서 성결에 있어 큰 진보를 기대하는 신자는, 밭에 씨를 뿌려 놓고 추수 때까지 전혀 밭을 돌보지 않으면서 한 해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농부와 다르지 않다. 우리 하나님은 친히 정하신 방편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시다.
9) 성화되었다고 해서 내면의 큰 영적 투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투쟁이라 함은 모든 신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옛 본성과 새 본성, 육체와 영의 사투를 의미한다.(갈5:17).
이는 우리가 건강한 상태에 있으며,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죄 없는 완전”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로마서 7장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나 어리고 불안정한 그리스도인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결코 그 사람이 거룩하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가장 탁월한 신자라 해도, 그의 마음은 서로 대적하는 두 군대 진영의 피비린내 나는 터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세례를 받은 우리도 많은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7조).
10) 성화를 통해 사람이 의롭게 되지는 않지만, 성화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 말이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이제까지 살았던 가장 거룩한 성도의 가장 거룩한 행위조차도 불완전하고 결점투성이이다. 성도의 거룩한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의 맹렬함을 견딜 수 있고, 죄를 보상할 수도 있고, 천국을 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0-28). 우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의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뿐이다. 우리로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는 유일한 권리는, 우리의 행실이 아닌 그분의 공로를 통해서만 얻는다. 이 진리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을 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성화된 사람의 거룩한 행실은, 비록 그것이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너무나 기쁘시게 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히13:16, 골3:20, 요일3:22) 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이 가르침을 잊어버리지 말자. 단지 데이지 꽃을 꺾어오거나 방안을 아장아장 걸어 다니기만 해도 부모가 어린 자녀의 노력에 기뻐하듯이, 우리의 천부께서도 믿는 자녀의 보잘 것 없는 행위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단순히 행실의 질이나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동기와 원리와 의도를 살피신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지체로 여기시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그들을 눈동자 같이 기뻐하신다.
11) 성화는 위대한 심판 날에 우리의 성품을 뒷받침하는 가장 절대적인 증거로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삶에서 성화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아무 소용없다. 위대한 백보좌 앞에서 생명책들이 펼쳐지고, 무덤이 그 갇힌 자들을 내어 놓고,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심판받을 그때, 필요한 한 가지 증거는 바로 성화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참되고 진실하다는 증거가 없다면, 우리의 부활은 단지 정죄를 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날에 효력 있는 유일한 증거는 오직 성화이다. 우리가 어떻게 말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했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12) 성화는 천국으로 가는 우리의 훈련과 준비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천국은 본질상 거룩한 곳이다. 천국에 사는 모든 사람,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거룩하다. 천국에서 행복하려면, 이 땅에 있는 동안 천국을 위한 준비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죽은 후에 영광 가운데 성도로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살아 있을 때 성도가 되어야 한다. 성화되지 못한 사람이 천국에 이른다 한들, 그곳에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본질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곳에서 행복을 느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자기 성향과 습관, 성품과 맞지 않는데, 기쁨을 누릴 사람이 어디 있는가? 새장에서 독수리가 행복해 하고, 양이 물속에서 기뻐하고, 올빼미가 이글거리는 정오의 태양을 반겨 맞으며, 물고기가 마른땅에서 춤추기 전까지는, 성화되지 못한 사람이 천국을 기뻐할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
2. 성화의 가시적 표지들
1) 신앙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참된 성화는 아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해 너무 많이 들은 나머지, 사람들은 기독교 용어와 어투에 무분별하게 익숙해져 있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위해 살면서 죄에게 종 노릇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심, 구주, 복음, 평화, 값없는 은혜” 등에 대해 거침없이 쏟아놓는 사람들의 경박하고 무정한 말을 듣는 것은 참으로 메스껍고 혐오스럽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성화되어야 한다(요일3:18).
2) 참된 성화는 일시적인 종교적 감정에 있지 않다. 몇 가지 종교적 감정을 느낀 것을 가지고 거듭나고 성화되었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태는 없다. 거짓된 종교적 열광 뒤에는 치명적인 영적 질병이 따라온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서는 어떤 실제적인 변화도 없는데, 복음 설교에 감동을 받고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두렵다. 이들이 느끼는 아픔과 이들이 맛보았다는 평화는 단지 표면적인 감흥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돌짝밭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들은 자처럼, 기쁨으로 말씀을 받기는 하지만 이내 복음을 떠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 이전보다 더 나쁘고 완고한 마음이 되어 버린다.
3) 참된 성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나 외면적 헌신에 있지 않다. 많은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성이 내면의 거룩을 대신하게 될까 두렵다. 저는 외적인 의로움이 마음의 성화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더욱이, 외적이고 감각적이고 형식적인 기독교를 좇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세속에 몰두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허영과 자만으로 치닫는 것을 본다. 실제 성화는 극히 미미하면서도, “외적인 신앙 활동”만 많을 수 있다.
4) 성화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물러나 사회적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세대마다 거룩을 추구한다는 구실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의무를 거부했다. 광야에 묻혀 지냈던 은자들이나 수도원에 틀어박혀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로부터 도망쳐 월등히 높은 수준의 거룩에 다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어딜 가든 모든 악의 뿌리가 우리 마음에 드리워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대못질을 하고 틀어박혀 있어도 마귀를 막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갈등과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이 참된 거룩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것이 거룩이다. 거룩은 온실의 화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삶의 여건에서도 무성하게 자라는 강하고 굳세게 나타나는 것이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바로 그곳에서- 부패한 것들 가운데 뿌려진 소금처럼, 어둠 속에 밝혀진 등불처럼-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거룩의 기초적인 요소이다. 동굴 속으로 숨어 버리는 사람은 성화된 사람이 아니다. 가정에서, 거리에서, 거래처와 사업장에서 주인 또는 종업원으로서, 아비 또는 자녀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성화된 사람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5) 성화는 가끔 우발적으로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지속적으로 내면에 역사하는 새로운 하늘의 원리이다. 성화는 사람의 크고 작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 흘러넘치는 것이다. 성화의 처소는 마음이다 우리 몸의 심장처럼, 성화는 우리의 모든 성품에 일정하게 영향을 끼친다. 성화는 외부로부터 힘을 받아 물을 퍼내는 펌프와 다르다. 오히려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같이, 속으로부터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항상 흘러나온다. 오늘날도 돌발적인 충동으로, 가정의 우환이나 질병, 재난 등을 통해 갑작스럽게 일깨워진 양심을 따라 올바르게 행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회개한 것도 아니고, 성화된 것도 아니다. 참된 성도는 히스기야처럼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계명을 옳게 여기고(대하31:21), 전심으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한다(시119:104).
6) 성화는 하나님의 법을 항상 존귀하게 여기고, 삶의 규칙으로 삼아 그 법에 순종하며 살려고 항상 힘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십계명이나 율법과 관계 없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율법을 통해 신자에게 죄를 확신하게 하시고, 칭의를 위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성령은 또한 친절한 안내자로서, 신자가 성화를 추구하면서 율법을 신령하게 사용하도록 이끄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십계명을 경시하신 적이 없다.
7) 성화는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삶을 통해 보여주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부단히 애쓰는 것이다. 특히 이런 가르침은 산상수훈과 사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는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가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8) 성화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편지에서 교회 앞에 제시한 표준에까지 이르는 삶을 살려고 항상 애쓰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었다 해도, 그 속에서 모든 관계에서 행할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와 습관, 성품, 그리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분명하고도 실천적인 지침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그 편지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이런 지침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원한 안내로, 하나님께서 친히 영감을 주신 것이다.
9) 성화는 우리 주님이 자신의 삶을 통해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주신 능동적 은혜에 대한 관심, 특히 사랑의 은혜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통해 나타난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성화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주변의 모든 사람의 행복은 더해 주고 슬픔은 덜어 주려고 애쓴다. 또한 모든 사람을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셨던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한다. 말로만 아니라, 기회를 얻는 대로 자기부인의 수고와 실천을 통해 그렇게 한다. 구원하는 믿음과 실제 회심의 은혜는 항상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한다(골3:10).
10) 성화는 기독교의 수동적 은혜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통해 나타난다. 수동적 은혜란 특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서로를 용납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는 은혜를 말한다.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본으로 제시하기 위해 이 점을 강조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1-23). 주기도문의 용서와, 성령의 열매들 중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이 수동적 은혜이다. 수동적인 은혜를 얻는 것이 능동적인 은혜를 얻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수동적인 은혜야말로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성경이 강조하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용서를 본받아 살지 않으면서 성화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습관적으로 짜증내거나 항상 신랄한 말로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앙심을 품은 사람, 악의적인 사람은 그 속이 세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3. 칭의와 성화의 공통점과 차이점
같은 점)
1)모두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2)모두 그리스도가 영원한 언약을 통해 자기 백성을 위해 이루신 위대한 구원 사역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는 용서와 거룩이 흘러나오는 생명의 샘이다.
3)모두 동일한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의롭게 된 사람은 항상 성화된 사람이고, 성화된 사람은 항상 의롭게 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이 둘을 짝지어 주셨고, 결코 나뉠 수 없다.
4)모두 동시에 시작된다. 의롭다 여김을 받은 그때에 또한 성화하게 된다.
5)모두 구원에 꼭 필요하다. 누구든지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용서와 더불어 새로워진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보혈과 더불어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영원한 영광의 이름을 가질 뿐 아니라 그 이름에 걸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점)
1) 칭의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다. 성화는 그 정도가 아주 미약할지라도 내면에서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2) 칭의를 통해 우리가 얻는 의로움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되어 누리게 되는 위대한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의로움이다. 성화를 통해 우리가 얻는 의로움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우리 안에 새겨진 것이지만, 여전히 많은 불완전과 연약함으로 점철된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다.
3) 칭의는 우리 자신의 공로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성화에서는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애쓰고, 힘쓰고, 분투하고,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4) 칭의는 완성되고 완전한 일이며, 사람은 그가 믿는 바로 그 순간에 완전히 의롭게 된다. 성화는 불완전한 일이고, 천국에 이르기까지는 완전해지지 않는다.
5) 칭의는 더 이상 자라나지 않는다. 성화는 분명히 점진적인 사역이다. 삶이 지속되는 한 계속해서 자라고 확장한다.
6) 칭의는 우리의 인격,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구원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성화는 우리의 본성과 마음의 도덕적 갱신과 관련이 있다.
7) 칭의는 우리에게 천국의 권세를 주고, 천국에 들어갈 담력을 준다. 성화는 우리로 천국에 합당하게 한다. 우리가 천국에 살게 될 때 천국을 누리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8) 칭의는 우리 밖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다른 사람이 쉽게 분별하지 못한다. 성화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사람의 눈에 명백히 드러나 숨기지 못한다.
적용)
1)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처한 위험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다(히12:14). 성화 없이는 구원도 없다. 교회를 다니거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 가운데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참으로 두렵고, 끔찍하고, 놀라운 일이다. 성화되지 못한 영혼이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성경이 잘못된 것이다.
2) 우리 각자의 상태를 분명히 알고, 스스로 성화되었다 느끼고 알기까지는 결코 쉬지 말자.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기 기뻐하는가! 이는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물음이다. 성화되었는가? 아닌가? 만약 아니라면, 우리의 잘못이다.
3) 성화되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갈 길은 명확하고 분명하다.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 핑계가 아닌 전적인 필요를 가지고 믿음으로 그분께 자기 영혼을 드리며, 하나님과의 평화와 화해를 구하러 그리스도께 가야 한다. 탁월한 의사의 손에 자신을 맡기듯이 우리를 그분의 손에 맡기고, 자비와 은혜를 구하며 울부짖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살아야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
4) 거룩에 더욱 자라가고 더 성화되기를 원한다면, 항상 처음처럼 계속 전진해야 한다. 항상 새롭게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 그분은 모든 지체에게 생명과 힘을 주시는 머리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자기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은혜와 능력을 충만하신 그분으로부터 날마다 얻는 것이야말로 점진적인 성화의 위대한 비밀이다.
머뭇거리고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자는 일반적으로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소홀히 하고, 성령을 근심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5) 이 땅에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기껏해야 자기 자신에 대해 날마다 겸손해야 할 이유밖에는 찾을 것이 없고, 매 시간 자비와 은혜를 필요로 하는 빚진 자라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빚이 많을수록 우리 자신의 불완전을 더 볼 수 있다. 새롭게 되고,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입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흠 없이 완전해지는 일이 아직 우리를 기다린다. 우리가 천국을 갈망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6) 높은 표준의 거룩에 다다르기 위해 분투하고 성화를 중요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방앗간에 매인 말처럼, 교회당과 예배 주변을 맴돌며 이리저리 오갈 뿐, 도무지 자라지를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옛길에 우뚝 서서 탁월한 거룩을 추구하고, 담대하게 다른 사람에게 함께 거룩한 길을 가자고 요청하자. 이 길만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거룩이 행복이다. 가장 위로가 넘치는 일생을 산 사람은 다름 아닌 성화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일반적으로 삶 전체를 보면, “성화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앗아갈 수도 없는 견고한 위로를 누린다. “지혜의 길은 즐겨운 길이요”(잠3:17).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시119:165).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 또한 성경을 말한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48:22).
첨언
성화는 너무나도 중요한 주제이다. 성화의 교리를 더 면밀히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존 오웬의 「성령론」을 강력히 추천한다.
이 주제를 단행본으로 이렇게 완벽하게 다룬 사람이 없다.
제 3 장 거룩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우리는 거룩한가? 우리는 주님을 뵐 수 있을 것인가?”
1. 무엇이 참되고 실천적인 거룩인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거룩하다고 하는가?
1)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에 품는 습성이 거룩이다.
하나님의 판단과 합치하는(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습관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판단하는 성향이다 하나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부합한 사람이 가장 거룩한 사람이다.
2) 거룩한 사람은 죄로 드러난 모든 것을 피하고, 알려진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분명히 돌아선 사람이고, 온 마음으로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며, 세상을 실망시키는 것보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말한 바울과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다(롬7:22).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한다고 말한 다윗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시119:128).
3) 거룩한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고자 분투한다.
그분을 믿어 날마다 평강과 능력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형상을 본받고”자 애쓰는 사람이다(롬8:29).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살려고 하며,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워 스스로 낮아지신 것처럼, 마음을 낮은 곳에 두고 겸손하려고 한다. 성부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음료와 양식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말도 안 되는 거짓 고소 앞에서도 그분은 온유하고 오래 참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리스도가 죄인을 향한 긍휼과 사랑이 충만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죄를 거부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세속적인 사람과 구별되셨음을 기억한다.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가로막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4) 거룩한 사람은 온유함과 오래 참음과 양선과 인내와 친절한 성품을 추구하고 혀를 다스리려고 애쓴다.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을 때 다윗이 보여주었던 태도가 좋은 예이다. 아론과 미리암의 비난 앞에 섰던 모세 역시 좋은 모범이다.
5) 거룩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절제한다.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애착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색욕을 억제하고, 정욕을 제한하기를 힘써서 언제든 그것들이 제멋대로 나대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얼마나 적절한가?(눅21:34)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는 사도 바울의 말은 또 어떤가!(고전9:27)
6) 거룩한 사람은 사랑과 형제 우애에 애쓴다.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말했으면 하는 대로 말하고,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황금률을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말한다(롬13:8). 거룩한 사람은 모든 외적인 행실과 품위로 자기 신앙을 더 빛나게 하고, 주변 모든 사람이 보기에 더욱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변해 간다.
7) 거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비와 박애의 정신으로 대하려고 애쓴다.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빈둥거리거나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고, 선을 베풀려고 한다. 이런 사람은 도르가처럼 행한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9:36).
8) 거룩한 사람은 순전한 마음을 추구한다. 자신의 마음은 조그만 불똥이 튀어도 금방 타오르는 부싯깃과 같음을 잘 알기 때문에, 유혹의 불꽃이 마음에 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
9)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한다. 그것은 노예근성에서 비롯된 두려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아버지 목전에 있는 것처럼 행하는 아들로서의 두려움을 말한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느5:15).
10) 거룩한 사람은 겸손하다. 마음을 낮은 데 두고 항상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긴다. 다른 사람의 마음보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더 많은 악을 발견한다. 인자함으로 유명했던 그림쇼가 만년에 죽음의 침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무익한 종은 이제 떠납니다”라는 것이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했던 바울의 마음에 공감한다.
11) 거룩한 사람은 삶의 모든 의무와 관계에 있어서 신실함을 추구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골3:23).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는 바울의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좋은 남편과 좋은 아내, 좋은 부모와 좋은 자녀, 좋은 상사와 좋은 부하, 선한 이웃, 좋은 친구, 착한 국민, 그리고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하고,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룩이라면, 이는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다.
12) 거룩한 사람은 영적 사고방식을 갖기 위해 힘쓴다.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일들을 소홀히 하지는 않지만, 그 마음과 생각의 우선순위를 장차 오는 삶에 둔다. 하늘에 보화를 둔 사람처럼 살려고 하고, 본향을 향해 길을 나선 나그네와 이방인처럼 이 세상을 살아간다. 무슨 일이든, 어디에서든, 누구와 있든, 자신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끄는 것일수록 더욱더 소중히 여긴다.
이상이 거룩의 특징들이다. “거룩하다” 일컫는 사람이 추구하는 성품이다. 그러나 이 거룩에 대한 설명 때문에 낙담하는 여린 양심이 없기를 바란다. 어떤 신자 앞에도 걸림돌을 놓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거룩한 삶을 산다 해도, 남아 있는 죄의 가능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거룩한 사람이 가장 비참하게 여기는 것은, 항상 “사망의 몸”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다(롬7:24). 선한 일을 할 때도 그에게 “악이 함께 있”다(롬7:21). 옛 사람이 사사건건 그를 방해한다. 하지만 그는 남아 있는 죄와 타협하지 않는다. 이것이 거룩한 사람이 갖는 탁월함이다. 거룩한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성화의 사역은 예루살렘 성벽과 같다. “곤란한 동안에”도 성은 계속해서 중건되었듯이 말이다(단9:25). 성화는 점진적인 사역이다. 가장 밝게 빛나는 태양일지라도 표면에는 흑점이 있다. 가장 거룩한 사람도 성령의 저울에 달아 보면 많은 흠과 결점이 드러난다. 그들의 삶은 죄와 세상과 마귀와의 끊임없는 전쟁이다. 때로는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오히려 정복당할 때도 있다. 육체는 항상 성령을 대적하고, 성령은 육체를 대적한다(갈5:17). 그러나 부족하게나마 거룩의 특징을 갖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중심으로 바라는 바요, 간절한 기도 제목이다.
저는 참된 거룩이야말로 위대한 실재라고 담대하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거룩은 빛이다. 만약 거룩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드러낼 것이다. 거룩은 소금이다. 만약 거룩이 있다면, 그 맛이 느껴질 것이다. 거룩은 값비싼 향유이다. 만약 거룩이 있다면, 그 향기를 피해 숨을 수 없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도 때로는 뒤로 미끄러지고, 죽은 자와 같이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불순물이 섞였다고 해서 금이 아닐 수는 없다. 희미하고 어둡다 해도 빛은 빛이다. 아직 어리고 연약한 은혜라고 해서 그것이 은혜가 아닐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의로 자신을 죄에 방임하면서 겸비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을 “거룩하다”고 할 수는 없다. 오웬은 말한다. “죄를 가장 무거운 짐, 슬픔,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참된 신자일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2. 실천적 거룩이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이유
거룩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1)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분명히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 알렉산더 레이턴은 “이점에서 복음과 율법이 일치한다”고 했다.
2)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위대한 한 가지 이유와 목적이 거룩이기 때문이다. 그는 에베소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택함받은 자가 된다(벧전1:2).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심을 받았다(롬8:29). 신자가 택함을 받은 것은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이다.(엡1:4). 신자의 부르심 또한 “거룩한 부르심”이다(딤후1:9).
신자가 고난을 받는 이유도 “거룩하게 참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히12:10). 예수님은 완전한 구주이시다. 그분은 단순히 신자의 죄책만을 제하시는 것이 아니다. 죄의 권세를 피하는 일도 하셨다.
3)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믿음을 가졌다는 유일하게 바른 증거가 거룩이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죽은 믿음(입술의 고백만 있고, 성품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을 경고한다(약2:17). 참된 믿음은 거룩하게 한다. 사랑으로 역사하고, 세상을 이긴다. 마음을 청결하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유일하고도 안전한 증거는 거룩한 삶이다. 일반적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 죽을 때도 주님 안에서 숨을 거둔다. “자신의 마음과 삶을 정결하게 할 만한 영광스러운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의 상태는 허망하고, 그의 믿음은 건전하지 못하다”(로버트 트레일).
4)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사랑하는 유일한 증거가 거룩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예수님의 머리를 찌른 가시면류관은 우리 죄로 만든 것이다. 우리 주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찌른 것도 죄이다. 그분을 겟세마네와 갈보리 십자가로 데려가 무덤으로 이끌어 내린 것도 우리의 죄이다. 오른손을 잘라 버리고 오른 눈을 빼내어 버리기까지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또 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은 싸늘하게 식은 무정한 마음임에 틀림없다.
5)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된 유일하고 건전한 증거가 거룩이기 때문이다. 하늘 아버지를 닮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 말해 봐야 헛된 것이다. 삶으로 자신이 어느 가문 사람인지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6)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위하는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우리를 지켜보는 주변 사람에게 해를 주거나 유익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무언의 설교이다. 신자의 거룩한 삶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거룩하지도 못하고 신실하지도 못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해악을 끼친다. 이들은 목사가 입술로 쌓아 올린 건물을 삶으로 무너뜨린다.
7)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누리는 위로가 거룩에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와 슬픔, 거룩과 행복, 성화와 위로 사이가 얼마나 긴밀한지 자주 잊어버린다. 선한 일에 무관심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힘쓰지 않으면서, 자신의 칭의를 아주 생생하게 느끼고 부르심에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질없는 소리이다.
8)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땅에서 거룩하지 않으면 천국을 준비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룩해지지 않고 죽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천국에서 편하고 행복할 수 있겠는가? 죽음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각자가 숨을 거둘 때의 그 성품으로 다시 일어나게 된다. 지금 여기서 거룩에 대해 외인이라면, 우리가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 지금 여러분은 경망스럽고, 부주의하고, 세상에만 집착하고, 탐욕스럽고, 방탕하고, 쾌락만 추구하고, 불경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천국에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그리스도를 죽게 한 죄와 짝하고,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친구들을 멸시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만나 뵐 수 있을까? 거룩하지 못한 사람에게 천국은 가장 불행한 장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영광의 거룩한 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은혜의 학교에서 받는 훈련을 통과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삶을 통해서 천국에 합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천국의 미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가오는 삶을 천국에서 누리지 못할 것이다.
적용)
1) 여러분은 거룩한가? 아니면 거룩하지 않은가?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히12:14) 이 말씀은 우리 마음을 살피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한다. 지옥에 있는 저 가련한 영혼도 생각하는 정도는 다 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세상과는 다른 사람, 곧 거룩한 나라요, 구별된 백성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주 예수께서는 1,800년전에 이미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4). 구원받는 자가 적을 것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자가 적기 때문이다.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앙에 있어서도 ”고통이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주님을 보기 원한다면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하지 못하다면,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성품 또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천국에서 성도로 발견되고자 한다면, 이 땅에서도 성도여야 한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성경에서 주님이 “너희가 다시 태어냐야 한다”고 하실 때 의아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많은 사람에게 완전한 변화(새 마음과 새 본성)가 필요하다. “거룩함이 없이는”, 그가 누구든지 간에,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
2) “거룩의 중요성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 느끼고 있는가?”
이 주제를 대하는 이 시대의 성향이 염려된다. 주님의 백성이 이 주제에 걸맞는 생각과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거룩을 또 다른 우상으로 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리스도를 그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거룩을 앉히고 싶지 않다. 그러나 성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상으로 이 시대가 더 많이 생각해야 할 주제라고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칭의와 성화를 하나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자주 잊는다. 여러분에게 성화의 표지가 없다면 여러분의 칭의에 대해 말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성화를 깎아 내리는 것은 은혜의 방편이 아니다. 믿음과 행함은 피로 맺어진 친구다.”(레드퍼드)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설교하셨고, 에베소서는 네 장이 아니라 여섯 장으로 된 편지이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많은 신자들이 더 신령하고, 더 거룩하고, 더 단호하고, 하늘에 더 마음을 두고, 더 온전한 마음이 되기를 소원한다. 신자가 순례자의 마음을 더 많이 가져 단호하게 세상과 구별되고, 더 분명한 천국의 삶을 살아내고, 하나님과 더 가까이 동행하게 되기를 원한다. 오늘날 더 높은 표준의 개인적 거룩이 필요하지 않은가? 인내와 열정은 다 어디 갔는가? 사랑과 믿음의 역사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지난 시대에 도드라졌던 신앙의 능력은 어디 있는가? 그 옛날 세상을 뒤흔들고, 성도들을 세상과 구별하게 했던 분명한 품격은 어디로 갔는가? 확실히 우리가 가진 은은 찌꺼기가 되었다. 우리의 포도주는 물 탄 포도주가 되었다. 우리의 소금은 짠맛을 거의 잃었다. 모두가 반쯤 잠들어 몽롱하다.
밤이 다 가고, 여명이 가까워 온다. 잠들지 말고 모두 깨어 있자. 눈을 더 크게 뜨고,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자(히12:1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오웬은 말한다. “그리스도가 죽으셨는데 어찌 죄가 살아 있을 수 있으며, 그분이 이 세상에서 못 박히셨는데, 어찌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해 못 박히고, 세상은 그에 대해 못 박힌 사람의 영혼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3) 거룩해지기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몇 가지 권면을 드린다.
거룩하고 싶은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싶은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하라. 자기 죄와 연약함을 절감하고 그리스도께 피하기까지 여러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런 진보도 이룰 수 없다. 주님은 모든 거룩의 뿌리이다. 시작이다. 거룩해지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그분께 나와 그분과 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지혜와 의로움이 되실 뿐 아니라, 성화도 되신다. 그 누구라도 바울이 놓은 “거룩”의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15:5).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지혜는 정죄받을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의로움은 죄책과 정죄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성화는 죄와 더러움이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구속은 속박과 예속일 뿐이다.”(트레일)
지체하지도 말라. 다 준비된 후에 가려고 하지 말라. 가서 그분께 이 아름다운 찬송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대신하라.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기 전까지는 우리의 성화 사역에 벽돌 한 장, 돌 하나도 놓이지 않을 것이다.
거룩은 믿는 백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거룩은 백성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그 성령을 통해 마음에 행하시는 역사이다. 거룩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분과 이루는 생명의 연합의 결과이다.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에서 맺힌 열매이다. “주님, 나의 죄과로부터 저를 구하실 뿐 아니라,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사 죄의 권세에서도 구원해 주십시오”.
앞으로도 계속 거룩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그리스도를 모든 충만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충만은 성도의 모든 필요를 채우고도 남는다.
그분은 위대한 의사이다. 한결같이 온전하기를 바란다면, 날마다 한결같이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그분은 여러분이 매일 먹을 만나이다. 여러분이 매일 마셔야 할 샘물이 나는 반석이다. 광야같은 이 세상을 이기고 다 지나가기 위해 날마다 붙들고 기대야 할 강한 팔이다. 그분께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할 뿐 아니라, 그분을 기초로 지어져야 한다.
바울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 거룩한 사람,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숙한 그리스도인- 이었다. 비결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었다(엡1:23). 항상 “예수를 바라” 보았다(히12:2).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다(빌4:13).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갈2:20).
여러분이 바울이 고백한 이런 일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체득하여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우리가 느꼈던 것보다 더 절실하게 거룩의 중요성을 절감하기 바란다! 우리의 남은 해가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거룩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행복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가 흠과 점이 없는 평화 가운데 발견되기를 바란다!
제 4 장 싸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6:12)
구원받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영혼과 관련해서 반드시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전쟁은 세상이 이제까지 보아 온 여느 전쟁보다 실제적인 전쟁이다. 승리도 있고 패배도 있다. 무엇보다 이 전쟁의 결과는 가공할 만한 분명한 결과가 따른다. 영적 전쟁의 결과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참된 거룩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전쟁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삼상16:18,출15:3).
1. 참된 기독교는 싸움이다
세상에는 참되고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 아닌 많은 것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1800년 전에 기독교 신앙이라고 불렸던 것은 이런 것과는 달랐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매 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어떤 “싸움”도 없다. 그들은 영적 분투, 노력, 갈등, 자기부인, 깨어 있음, 긴장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런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을 매우 경직되고 완고한 사람이라 여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예수께서 세우시고 사도들이 전파한 신앙이 아니다. 진정한 거룩을 이루는 종교도 아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싸움”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용사라고 불린다. 처음 회심하는 날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용사로 살아야만 한다. 편하고 느슨하고 나태한 신앙으로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인 용사가 싸우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주된 싸움의 대상은 세상과 육체와 마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적이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싸워야 하는 원수이다.
- 육체와 싸워야 한다. 회심한 후라도 우리 속에는 악을 향해 치닫는 본성이 있다. 마음은 연약하고 물과 같이 불안정하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매일 씨름하고 분투해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9:27).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 세상과 싸워야 한다. 날마다 세상이라는 강력한 원수의 교묘한 영향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세상의 좋은 것들에 대한 모든 애착, 세상의 조롱과 비난에 대한 두려움, 세상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은밀한 욕구,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것처럼 하고 싶은 은근한 바람, 차지도 덥지도 않으려는 생각 등은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인을 에워싸고 있는 영적 원수들이다.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약4: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5:4).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12:2).
- 마귀와 싸워야 한다. 우리의 옛 원수는 죽지 않았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래로, 마귀는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니며(욥1:7), 사람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한 가지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쟁이”인 그는 우리를 지옥에 보내기 위해 밤낮으로 애쓴다(요8:44). 때로는 미신에 빠지게 하고, 때로는 반역을 일으키게 하고, 때로는 이런 계략 저런 계책으로 항상 우리 영혼을 공격한다.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싸울 때 원수가 떠나간다(엡6:11). 매일 싸우지 않으면 무장한 강한 원수 마귀는 결코 우리 마음에서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
영국에 살았던 가장 지혜로운 사람 웰링턴공작의 금언을 기억하라. “전쟁 중에 적을 과소평가하고, 전쟁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최악의 실수다.” 성경은 말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6:12).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2:3).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16:13).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딤전1:18-19).
이 말씀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면, 여기에 위대한 교훈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참된 기독교 신앙은 분투와 싸움과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싸움”을 터부시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다.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엄청난 실재이며, 매우 중요한 주제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반드시 싸워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쓰신 편지를 보면, “이기는 자”외에 그 누구도 약속을 받지 못한다. 은혜가 있는 곳에 싸움이 따른다. 신자는 용사이다. 싸움이 없는 거룩은 없다. 싸우는 영혼만이 구원받은 영혼으로 항상 드러날 것이다.
이 싸움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싸움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싸우든가, 아니면 잃어버리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느낌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분명히 사탄과 동류가 아니다. 세상 나라의 왕들처럼, 사탄은 자기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과는 싸우지 않는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한다면, 이는 오히려 우리가 희망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는 두 가지 위대한 표지 가운데 하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내면의 평화뿐 아니라 내면의 싸움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지가 된다.
2. 참된 기독교 신앙은 믿음의 싸움이다.
그리스도인의 전쟁은 영적인 무기로 싸우는 전쟁이다. 믿음이라는 경첩에 승리가 여닫힌다. 전쟁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믿음에 달려 있다.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전반적인 믿음은, 그리스도인 용사의 성품을 형성하는 주요한 기초이다. 지금 나의 모습, 행동, 사고, 희망, 행위는 단순한 한 가지 사실, 성경에서 분명하게 계시되고 드러난 명제를 내가 믿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교리가 없는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뼈와 힘줄이 없는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것을 믿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이신론자들의 비참하고 불편한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무언가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교의학과 그리스도인의 고지식함을 비웃는 사람들조차 일종의 믿음을 갖고 있다. 믿음은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가진 영적 존재의 중추이다. 자신이 구체적으로 믿는 위대한 원리를 마음 깊이 새기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 대해 치열하게 싸울 수 없다. 의식하든 않든 그것은 그들 마음에 분명히 자리하고 신앙의 뿌리를 형성한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배운 자이든 못 배운 자든, 죄와 용감하게 싸우고 그 죄를 넘어서려고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마음에 자기가 믿는 분명하고도 위대한 원리가 있다고 확신해도 된다. ‘삶이 바른 사람은 그릇될 수가 없다’고 하지만, 믿음이나 신앙하는 바가 없이 바른 삶과 같은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 용사가 가지는 특징의 핵심과 원천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직분에 대한 특별한 믿음이다. 그리스도인 용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기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달리시고, 자기를 대신해 빚을 갚아 주시고, 죄를 다 담당하시고, 범과를 짊어지시고, 자신을 위해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자기를 위한 중보자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구주를 믿음으로 바라본다. 이런 예수님을 보고 그분께 의지하고 매달린다. 평화와 희망을 맛보고 기꺼이 그 영혼이 원수와 대적하여 싸운다. 그리스도의 임재와 기꺼운 도우심을 항상 생생하게 믿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용사가 성공적으로 싸우는 비결이다.
믿음에는 분량이 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정도로 믿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 해도 믿음에 기복이 있다. 깨어 죄를 대적하고 죄와의 싸움에서 오는 피곤함을 이기는 데는, 그리스도가 자기 편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믿음의 방패”는 악한 자의 화전을 물리친다(엡6:16). 믿음이 클수록 더 큰 승리가 있다! 믿음이 클수록 더 큰 내면의 평화가 있다!
믿음의 가치와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히브리서 11장을 주의깊이 읽어 보라. 아벨로부터 모세에 이르는 위대한 인물의 긴 목록을 보라. 그들이 어떻게 세상과 육체와 마귀와 싸워 이겼는지 보라. 이들은 모두 믿음을 통해 승리를 얻었다. 초대교회사를 펼쳐 보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죽기까지 믿음에 견고히 서서, 이교 황제들의 맹렬한 핍박에도 흔들리지 않았는지 보라. 세상의 지배자였던 로마 전체의 힘으로도 팔레스타인에서 몇몇 어부와 세리로부터 시작된 신앙을 없애지 못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는 신앙이 바로 교회의 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르틴 루터, 니콜라스 리들리, 라티머, 존 후퍼의 삶을 연구해 보라. 지난 수백 년 동안 교회사에 큰 자취를 남겼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웨슬리와 윗필드, 헨리 벤, 그리고 로매인과 같은 사람들이, 유력한 사람들과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오는 반대와 핍박과 조롱과 비난에 어떻게 맞섰는지, 어떻게 이 땅에 기독교 신앙을 다시 불러일으켰는지 보라.
그리스도인의 용사로 살고 싶은가? 믿음을 위해 기도하라.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선물을 구한 사람은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기도하기 전에 반드시 믿어야 한다. 신앙대로 살지 않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믿음이 자라도록 기도하라.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지고, 그리스도를 더 굳게 붙잡으라. 제자들이 드렸던 기도를 날마다 드리라.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17:5).
3. 참된 기독교는 선한 싸움이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악하다. 그러나 전혀 악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선한” 전쟁이 있다. 그 전쟁은 그리스도인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닌 영혼의 싸움이다. 거룩하여 주님을 보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싸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비록 영적이기는 하지만 실제적이고 치열한 싸움이다. 이 싸움은 용기와 담대함과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거기에는 넘치는 위로가 있다는 사실을 꼭 알기 바란다.
1) 그리스도인 싸움이 선한 이유는, 가장 선한 대장의 지휘 아래 싸우기 때문이다. 그분은 완전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 전능한 능력의 구주이시다. 우리 구원의 대장은 자기를 따르는 용사들을 항상 승리로 이끄신다. 자신의 보혈로 구속한 영혼들을 너무나 소중히 여겨 결코 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선한 싸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가장 선한 도움을 힘입어 싸우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성자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고, 성령으로 새롭게 된 신자는 자기 힘으로만 전투에 나가지 않는다. 성령 하나님이 날마다 그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신다. 성부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를 보호하신다. 성자 하나님은 모세가 그리심 골짜기에서 싸우는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한 것처럼, 매 순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이 삼겹줄은 결코 끊어질 수 없다!
3)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가장 선한 약속과 더불어 싸우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는 지극히 위대하고 소중한 약속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예”와 “아멘”인 그 약속은 분명히 성취될 약속이다. 식언치 않을 뿐 아니라, 능히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분이 주신 약속이기 때문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롬6:14).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롬16:20).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 현재 일이나 미래 일이나--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4)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가장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싸움에는 엄청난 사투와 고통스러운 갈등이 있다 상처와 부상이 있고, 불침번과 굶주림, 피로 등이 따른다. 하지만 모든 신자는 하나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롬8:37). 한 명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요18:9). 이것이 선한 싸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그 싸움에 참여한 영혼에게 선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인의 싸움만이 사람에게 남아 있는 가장 선한 것들을 불러일으킨다. 겸손과 박애를 일깨우고, 이기심과 세속성을 가라앉힌다. 위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도록 한다. 임종을 앞둔 필립 헨리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를 섬기며 보낸 삶이야말로 이 땅에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6)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세상에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용사들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어디에 있든 사람들에게 복이 된다. 그들이 머무는 곳마다 신앙과 도덕의 표준이 고양된다. 적들조차도 그들을 주목하고 존중하게 된다. 어디를 가든 소수의 참된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그 이웃에게 복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선한 싸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7)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선한 이유는, 이 싸움을 싸우는 모든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상급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그 일부만을 볼 뿐이다. 싸움은 보지만, 상급은 보지 못한다. 십자가는 보지만, 면류관은 보지 못한다. 세상에서 멸시를 받으면서도 어려움을 감내하고 상한 마음으로 겸손히 기도하는 사람은 보지만, 그들에게 미소 지으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이들을 위해 예비된 영광의 나라는 보지 못한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말자.
적용)
1) 아마도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보상을 얻기 위해 열심히 분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조심하라. 여러분은 지금 쓰디쓴 절망의 씨를 뿌리고 있다. 이 길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길이다. 비참함과 영원한 파멸로 난 길이라는 것을 결국 알게 되겠지만, 그때는 너무 늦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오늘 주님의 편에 서기로 결심하라. 지난날의 부주의함과 불신은 털어버리라.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노예로 사로잡히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잊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으라. 생명과 행복과 자유를 위해 일어나 싸우라.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로 모여 그의 군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아둘람 동굴에서의 다윗처럼, 아무리 스스로 합당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라도 자기에게 모여드는 자들을 기꺼이 받으신다. 용사로서 더 철저하고 더 온전한 마음을 가질수록, 더 편안 마음으로 싸울 수 있다. 여러분을 대적하는 모든 것보다, 여러분을 위하시는 그분이 더 크시다. 영원한 자유냐 아니면 영원한 소각이냐는 여러분의 선택이다. 자유를 택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라.
2)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고, 연단을 통해 이미 그의 용사로 증명된 사람일 수도 있다. 싸움에 이기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죽을 때까지 무장을 풀어서는 안된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믿음의 방패, 성령의 검, 희망의 투구와 같은 무기는 하나같이 다 필요한 것들이다(엡6:14-17). 단 하루도 이 무기 가운데 하나라도 빠뜨리고 살아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있다가 1,800년 전에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간 용사가 영감을 받아서 한 말을 기억하자.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 이 말을 절대 잊지 말자! 우리 앞서 싸웠던 수많은 용사들이 우리가 싸우는 것과 동일한 싸움을 치렀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자 덕분에 넉넉히 이겼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고, 우리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기억하자. 조금만 더 싸우면 마지막 나팔이 울리고, 평화의 왕이 새 땅을 다스리러 오실 것이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7).
싸우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거룩하게 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죽었을 때도 영광의 관을 얻지 못한다. 절대 잊지 말라!
제 5 장 비용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눅14:28)
매사에 “비용이 얼마나 들까?”라고 자문해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특별히 “비용을 계산하는 것”이 중요한 데가 자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진실로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은 얼마일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는 위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던 사람이 두 해 또는 세 해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신앙에서 떠나 이전에 짓던 죄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그들은 거룩한 그리스도인, 견실한 신앙인이 되는 데 “드는 비용”을 계산해 보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따라 영생으로 가는 길이 즐거운 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길은 좁은 길이다. 십자가를 짊어진 후에 면류관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1.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무엇인가?
제 취지를 오해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드는 비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려는 사람이 드려야 할 희생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이다.
단지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예배에 참석한다. 주중에도 웬만큼 도덕적으로 산다. 주변 사람이 믿은 것만큼만 믿으면 된다. 값싸고 쉬운 일이다. 자기 부인이나 희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 기독교의 구원이 이런 것이라면, 생명의 길을 묘사한 말씀도 바뀌어야 한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은 광대하니!”
하지만 성경의 표준에 따르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는 꼭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원수들과 싸워야 한다. 희생을 드려야 한다. 애굽을 떠나야 한다. 광야를 지나야 한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 경주를 해야 한다. 안락의자에 앉아 편하게 천국으로 가는 것이 회심이 아니다. 회심을 통해 위대한 갈등이 시작된다. 승리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른다. “비용을 계산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 자기 의를 버려야 한다.
모든 자긍심과 오만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다른 이의 의와 공로에 힘입어 값없이 구원받아야만 하는 가난한 죄인으로 천국을 누리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 “길을 잃은 양처럼 그릇 행하고 잘못된 길로 다녔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했고, 성한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도덕성, 존경받을 만한 점, 자신이 하는 모든 신앙생활에 대한 신뢰를 버려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한다. 한 경건한 농부가 유명한 제임스 허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죄악된 자신을 부정하는 것보다 교만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2) 자기 죄악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릇된 모든 습관과 행실을 기꺼이 버려야 한다. 주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든 상관없다. 죄악에서 떠나야 한다. 그것을 대적하고 싸워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고, 다스려야 한다. 정직하고 분명하게 해야 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특정한 죄와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일시적으로만 그 죄를 떠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모든 죄를 지독한 원수로 여겨야 한다. 큰 죄든 작은 죄든, 공개적인 죄든 은밀한 죄든 모든 죄를 완전히 거부해야 한다. “악을 씹어 단맛을 즐기고 혀 밑에서 살금살금 녹이면서 아까워서 내뱉지 못하고 입 속으로 우물거리고 있지만”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악을 버려야 한다(욥20:12).
3) 안락함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천국으로 난 길을 완주하려면, 고통과 어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진지에 있는 초병처럼, 날마다 눈을 부릅뜨고 깨어 서서 지켜야 한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누구와 어디에 있든지, 매일 매 순간 자신의 행실에 주의해야 한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성품을 나타내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지내며 동기가 무엇인지, 모든 관계에서 자신의 행실이 어떤지 살펴야 한다. 모든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기도와 성경 읽기와 주일 성수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귀한 체험을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하는 “대리적” 기독교를 은근히 바란다. “고통이 없이는 얻는 것도 없는 것”이 우리의 영혼이다.
4) 세상의 평판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사람의 어떤 악평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조롱받고, 놀림받고, 비방받고, 핍박받고, 미움을 사기도 할 것이다. 신앙에서 비롯된 생각과 습관 때문에 멸시를 받고 조롱을 당한다 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15:20).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보았다. 나열한 목록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하나라도 배제할 만한 것이 있는가? 자기 의와 죄악과 나태함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누리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담대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천국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나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십자가 없는 값싼 기독교는 결국 면류관도 없는 쓸모없는 기독교로 드러날 것이다.
2. 비용을 계산하는 것이 사람의 영혼에 왜 중요한가?
그리스도가 정하신 의무를 소홀히 하면 항상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생 동안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본질을 외면하며 살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용을 계산하기 싫어하는가? 죄에 관대하고, 자긍하고, 안락함과 세상을 사랑하는 습관은 생각보다 떨쳐 버리기가 훨씬 어렵다. 조금 싸우다가 절망하여 포기한다. 아무 희망도 은혜도 없이, 하나님을 만나기에 부적당한 영혼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믿음의 “뿌리”와 “터”가 부실한 사람들이 있다. 많은 경우 믿는 가정에서 자라고 양육되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얻은 신앙 지식은 많다. 그러나 직접 내면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다. 마음에 분명한 은혜의 역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아주 위험하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 비용을 계산하도록” 촉구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비용을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과 가나안 사이 광야에서 비참하게 쓰러져 갔다.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이집트를 나섰다지만, 노정에서 여러 위험과 어려움을 마주하자 그들의 용기는 곧 시들해졌다.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다. 이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자기 죄 가운데 죽어 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도 “비용을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6:66). 데마 역시 비용을 계 산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곁을 떠났다. 신앙을 가진 부모의 자녀들이 비용을 계산하지 않기 때문에 악하게 드러나기도 하고, 기독교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참 엄중하고도 슬픈 사실이다. 거룩해지고 싶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용을 계산하는 것을 강조해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모든 교회에서 이 설교의 주제를 분명하게 강조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를 나타낸다. “비용을 계산하라”. 세상에서 돌아서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고 가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용사로 싸우는 싸움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군대로 떠밀어서는 안 된다. 비용을 계산해보라고 정직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5-27). 현대의 많은 종교 교사들의 가르침과 이 말씀이 어떻게 조화가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교리는 정오의 해처럼 분명하다. “비용을 계산해 보라”고 분명히 경고하지 않고 사람을 성급하게 재촉하여 제자도를 고백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앞서간 탁월한 복음 설교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루터와 라티머, 백스터, 웨슬리, 윗필드와 존 베리지, 롤런드 힐 같은 사람들. 그들은 끊임없이 “미혹받지 말라 비용을 계산해 보라”고 외쳤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 감동이 곧 은혜는 아니다. 피어난 모든 꽃이 다 결실하는 것은 아니다.
선을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 따라가기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열심을 내라. 기꺼이, 값없이 주시는 온전하고도 즉각적인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권하라.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진리 가운데 하라. 온전한 진리를 말해 주라. 병사를 모집하는 일에 천박한 술수를 사용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라. 멋진 제목과 보수와 영광만 말하지 말라. 원수와 전쟁과 무기와 보초를 서는 것과 행군과 훈련에 대해도 말해 주라. 기독교의 한쪽 면만을 말하지 말라. 우리의 구속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는 말하면서, 우리가 반드시 지고 가야 할 자기부인의 십자가는 뒤로 감추어 두지 말라(마16:24). 기독교가 수반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라고 사람들에게 간청하라. 동시에 비용에 대해서도 일러 주라.
3. 비용을 바르게 계산하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 힌트.
1) 여러분이 진실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득과 손해를 생각해 보고 비교해 보라. 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잃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 여러분의 영혼은 구원을 얻는다.(막8:36)
2) 여러분이 진실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칭찬과 비난을 생각해 보고 비교해 보라.
사람에게 비난받을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
3) 여러분이 진실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친구와 원수를 생각해 보고 비교해 보라.
한편에는 악인과 마귀가 원수로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우정과 호의를 받아 누리게 된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12:4-5).
4) 여러분이 진실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을 생각해 보고 비교해 보라. 이 시대는 편안히 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깨어 기도하고, 싸우고, 분투하고 믿고, 일할 때이다. 하지만 그 시대는 곧 끝난다. 도래 하는 시대는 안식과 생명의 시대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5) 여러분이 진실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죄가 주는 쾌락과 하나님을 섬기는 행복을 생각해 보고 비교해 보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뜻대로 행함으로 얻게 되는 쾌락은 공허하고, 비실재적이고, 만족함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행복은 견고하고, 영원하고, 실재한다. 건강이나 환경에 좌우되는 행복이 아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 행복이다. 썩지 않을 영원한 면류관을 얻게 하는 행복이다.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욥20:5). “우매 하는 자들의 웃음소리는 솔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전7:6). “평안을 주노니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6) 참된 기독교 신앙에 따르는 어려움과 무덤 너머에서 악한 자의 몫으로 예비된 어려움을 생각해 보고 비교해 보라. “지옥에서 한 날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평생의 삶보다 더 가혹할 것이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 고통은 사람이 온전히 감당하거나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막9:48).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25).
7) 죄와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의 숫자와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떠나간 사람의 숫자를 생각해 보고 비교해 보라. 많은 이들이 매년 세상의 넓은 길에서 돌이켜 좁은 길로 들어서고 있는 데 반해, 진실하게 좁은 길을 가는 사람 가운데 그 길이 지겨워 넓은 길로 돌아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지옥을 향해 내리닫는 걸음은 자주 그 길을 잃어버리지만, 천국으로 난 길을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한 길을 간다.
이런 계산을 항상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항상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한다(왕상18:21). 이러한 잘못이 거듭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히 11장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강력한 원리가 있어야 한다.
노아는 어떻게 끝까지 방주를 완성할 수 있었는가? 믿음이다. 모세는 어떻게 바로의 궁전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버리고,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명예를 거절할 수 있었는가? 믿음이다. 자신이 얻게 될 “큰 상”이 이집트의 모든 영화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라 믿었다.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는가? 믿음이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만난 예수님이, 자신이 포기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한 분임을 믿었다.
그들로 하여금 그런 결정을 내리게 하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영혼에 대한 바른 결정을 내리게 하는 비밀이다. 이 믿음을 갖고 볼 때, 우리는 모든 것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이 믿음이 충만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 무엇을 더하지도 않고, 면류관에서 무엇을 빼지도 않게 된다. 우리의 결론이 모두 옳은 것으로 드러난다. 우리의 계산은 틀림없이 들어맞게 된다.
결론적으로, 1) 자신의 신앙 때문에 치르고 있는 대가가 무엇인지 전지하게 생각해 보라.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신앙으로 인한 어떤 어려움도 없고, 시간도 들이지 않고, 생각도 없고, 근심도 없고, 고통도 없고, 성경을 읽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자기부인도 없고, 갈등도 없고, 노력도 없고, 수고도 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런 신앙을 가진 여러분은 평화를 얻지 못하고, 죽을 때도 희망이 없다. 고통의 날에 아무 힘도 얻지 못한다. 임종 때에도 여러분을 북돋아주지 못한다.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신앙은 가치 없는 신앙이다. 너무 늦기 전에 깨어나라. 깨어 회개하라. 깨어 돌이키라. 깨어 믿으라. 깨어 기도하라.
2)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동기가 필요하다면,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생각하라. 하나님의 아들이 여러분이 진 빚을 하나님께 갚고 완전한 구속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하늘을 떠나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시고, 무덤에 내려가셨는지를 생각하라. 아, 게으른 사람이여, 진정 당신은 수고하기가 싫어서 천국을 잃어버리려는가? 단지 애쓰는 것이 싫어서 영원히 파선하기로 작심했는가? 비겁하고 무가치한 생각을 버리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용기를 얻으라. 죽음과 심판과 영원을 내다보고 진지하게 나아가라. 확실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3) 여러분 가운데 실제로 자신은 이미 비용을 계산했고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탁한다. 인내하고 계속 행진하라. 마음이 약해지고 절망에 빠져 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원수들이 너무 많게 느껴지고, 자기를 둘러싼 죄악이 너무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인내하고 계속 행진하라. 시간이 얼마 없다. 깨어 기도할 시간도,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떠밀려 다닐 시간도, 죽음과 여러 변화를 맞이할 시간도, 몇 번의 겨울과 여름을 더 맞이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른다. 이 모든 것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이내 끝에 도달할 것이다. 이제 최후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 그 후에는 더 이상 싸울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동행하시고 현존하신다. 이 땅에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이유이다. 지금까지의 우리 모습을 보고 우리 삶의 여정을 뒤돌아보면, 자신의 무기력함에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십자가는 무겁게 여긴 반면에, 우리가 받을 면류관은 너무나 작게 여겼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집에 거의 다 와 간다. 참된 그리스도인, 견실한 신자가 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든다. 하지만 이는 확실한 보상이 있는 일이다.
제 6 장 성장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전3:18)
우리는 은혜 안에 자라가고 있는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 신앙의 진보를 나타내고 있는가? 세월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썰물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처럼 인생은 속히 지나간다.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의 실체가 시험받을 때가 점점 다가온다. 이날이 오면 신앙의 기초를 “반석”위에 두었는지, “모래” 위에 두었는지 드러날 것이다(마7:24-27).
성장은 아주 실제적인 주제이며, “성화” 전체의 문제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참된 성도는 자라간다. 진실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건강과 풍성함, 영적 행복과 위안은 영적 성장이라는 주제와 뗄 수가 없다.
1. 은혜 안의 성장의 실재가 있다.
칭의 문제에 있어서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다(골2:10). 믿는 순간부터 신자는 자신의 칭의에 대해 더하거나 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칭의를 잘 알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가장 연약한 성도조차도, 가장 성숙한 성도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의롭게 되었다. 우리의 선택과 부르심, 칭의에는 정도의 차이나 증감이 없다.
“은혜 안의 성장”이라고 할 때는, 성령이 신자의 마음에 부으시는 은혜의 크기, 열정, 힘, 능력, 정도가 자라가는 것을 말한다. “
“은혜 안의 성장”이라는 교리를 주장하는 주된 근거는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살후1:3).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권면한다”(살전4:10).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너희 믿음이 자라--기를 바라노라”(고후10:15).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살전3:12).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4:15). “너희 사랑을 --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1:9).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4:1).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은혜 안의 성장”이라는 교리를 세우는 또 다른 근거는 “사실과 경험”이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성도들의 생애를 보면, 은혜의 정도에 차이가 있다. 동일한 사람이라도 그의 믿음과 지식이 때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그리스도인에 대해 “약한” 믿음과 “강한” 믿음을, 성경에서 “갓난 아이”, “아이”, “청년”, “아비”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모든 생명이 겪는 과정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1) “은혜 안의 성장”은 영적 건강과 부요함을 보여주는 최상의 증거이다. 아이들이 크지 않고, 꽃이나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건강한 영혼은 반드시 자라간다.
2) “은혜 안의 성장”은 행복한 신앙생활의 한 방편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에서 자라가는 것과 우리가 누리는 위로가 서로 연관이 있도록 하셨다. 신앙을 통해서 가장 큰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성령의 가장 분명한 증거가 마음에 있는 사람이 자라간다는 것은 확실하다.
3) “은혜 안의 성장”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비밀이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일깨우고, 세상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계속적으로 향상되고 전진하는 신자이다. 이런 신자의 성장을 볼 때, 사람들은 그에게 생명과 실재가 있다고 생각한다.
4) “은혜 안의 성장”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살전4:1, 히13:16, 요15:1,8). 하나님은 모든 백성을 기뻐하시지만, 특히 자라가는 백성을 기뻐하신다.
5) “은혜 안의 성장”은 가능한 것일 뿐 아니라 신자는 자라가야 할 책임이 있다. 신자에게는 그 속에 새로운 원리가 있다. 이 원리를 억누르지 않는 것은 그의 엄숙한 의무이다. 자라가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자기의 특권을 상실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라지 않는다면 다른 누가 아닌, 우리 자신이 비난받아야 한다.
2. 은혜 안의 성장을 알 수 있는 표지가 있다.
1) 겸손이 더해 가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자신의 죄악됨과 무가치함을 절감한다. 이런 사람은 욥처럼 “나는 비천하오니”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욥40:4). 아브라함처럼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라고 말한다(창18:27). 야곱처럼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라고 말한다(창32:10). 다윗처럼 “나는 벌레요”라고 말한다(시22:6). 이사야처럼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말한다(사6:5).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한다(눅5:8).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릴수록 하나님의 거룩과 완전을 더 알게 된다. 자신에게 있는 무수한 불완전을 더 철저히 지각하게 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영광에 무르익어 갈수록 신자는 더 깊이 겸손해진다. 자기에게 있는 빛이 더 밝고 환해질수록, 마음에 있는 연약함과 부족함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지금 자기에게서 발견하는 것에 비하면, 처음 회심했을 때 자신에게서 보았던 것은 너무나 미미하다. 자신 속에서 겸손이 더해 가는지 보라.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더해 가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더 큰 안식을 얻는다.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알아간다. 그분의 마음과 의도를 알아 간다. 대속자, 중보자, 제사장, 대언자. 의사, 친구, 목자로서의 그분의 직분과 영광이 형언할 수 없는 모습으로 펼쳐진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고 있는지 보라.
3) 일상의 삶에서 거룩이 더해 가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죄와 세상과 마귀를 더 잘 이긴다. 기질과 언어와 행동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삶의 모든 관계에서 자신의 행위를 더 살핀다. 모든 일에 있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자 더욱더 애쓴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더 높이”, “더 위로”,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항상 좌우명으로 삼는다(빌3:13). 자기 안에 거룩이 자라고 있는지 보라.
4) 사고와 관심사가 더 신령하게 되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영적인 것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고 세상에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성실하고 열심히 또 양심적으로 삶의 모든 관계를 수행한다. 하지만 영적인 것을 가장 사랑한다. 벗들과의 영적 관계, 영적 활동, 영적 대화가 영원한 가치로 다가온다.
5)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더해 가는 것이다. 해가 갈수록 사랑이 가득해진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특히 형제를 향한 사랑에서 더 그렇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관용하고, 동정하며, 사려 깊고, 다정하고, 신중한 것을 통해서 그 속에 있는 사랑이 능동적으로 드러난다. 모든 사람에 대해 온유하고 인내한다. 다른 사람의 행위를 가장 좋은 의도로 해석한다.
6) 영혼을 선대하려는 열심과 부지런함이 더해 가는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나눔, 기도, 전도, 심방 설교 등-에 계속 힘쓴다. 그 일 자체를 자신이 받는 상급으로 여긴다. 영적 침체를 나타내는 분명한 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의 영혼과 그리스도의 나라 확장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이다.
3. 은혜 안에서 자라가고자 하는 사람이 사용해야 할 방편이 있다.
1) 개인적으로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이다. 개인기도, 성경읽기, 묵상, 자기 성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세 가지 일에 힘쓰지 않는 사람은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참된 기독교의 근본이다. 여기서 잘못되면, 평생에 가는 길이 잘못된다!
지금은 특별한 위험이 도사린 시대이다. 많은 종교적인 활동과 분주함, 요란함과 흥분으로 넘쳐나는 시대이다. 과연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는 시대이다(단12:4). 수많은 사람들이 감각적인 설교를 좋아한다. 감동을 준다는 많은 대중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시4:4). 200년전의 영국 그리스도인들은 요즘의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더 성경을 많이 읽었다. 더 자주 하나님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다.
2) 공적인 은혜의 방편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개 교회의 일원인 신자가 할 수 있는 모든 방편을 말한다. 주일 공예배, 공적인 기도모임, 찬양을 하며, 설교를 듣고, 성찬에 참여한다. 공적인 은혜의 방편을 어떻게 누리느냐 하는 것은 신자의 영혼의 번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건강에 이상이 오면 입맛부터 없어진다. 은혜의 방편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영적으로 병들었다는 신호이다. 공적인 은혜의 방편에 참여할 때마다 “힘을 다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전9:10). 이것이 은혜 가운데 자라가는 비결이다!
3) 일상의 사소한 문제를 다루는 자신의 행위를 잘 살피는 것이다. 영혼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질, 말, 일상에서의 관계, 시간 사용과 같은 모든 일에 경각심을 갖고 임해야 한다. 한 시간 한 시간이 하루를 만든다. 하루와 하루가 인생을 만든다. 하찮은 시간은 없다. 나무뿌리가 썩기 시작하면 가지 맨 끈 이파리에서부터 그 증상이 나타난다. 어느 작가는 “작은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서서히 타락해 갈 것이다”고 말했다. 나무의 수액처럼, 기독교 신앙이 우리 성품의 모든 가지와 이파리까지 흘러 모든 사람을 흡족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은혜 안에 자라가는 방법이다!
4) 누구와 사귀고 어떤 사람과 어울릴지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하는 것은 사람의 성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함께 지내고 대화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어조를 닮는다. 보통 이로운 것보다는 해로운 것에 더 쉽게 영향을 받는다. 질병은 전염되지만, 건강은 그렇지 않다. 기도와 성경 읽기를 독려하고, 우리의 구원과 영혼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도록 하는 벗을 찾아야 한다. 장차 올 세상에 대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벗을 찾아야 한다.
5) 은혜 안에 자라가는 핵심은, 주 예수와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믿음과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신자와 구주 사이의 일상적인 친교를 말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면서도, 그분과의 “교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외인일 수 있다. 성경에 인용된 신랑과 신부, 머리와 지체, 의사와 환자, 재판장과 의뢰인, 목자와 양,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는 날마다 계속되는 상시적이고 긴밀한 교제와 공급이 전제되어 있다. 사랑스럽고 인격적인 친구로서 그리스도와 친밀해지고, 확신을 가지고 그분을 붙잡는 것이다.
“교제”하는 습관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 안에서 자라갈 수 없다. 모든 필요보다 앞서 그분을 찾아야 한다. 모든 어려움을 그분께 말씀 드려야 한다. 모든 인생의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분께 물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슬픔을 그분 앞에 펼쳐 놓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기쁨을 그분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그분의 목전에서 모든 것을 행할 줄 알아야 한다. 날마다 그분께 나아가서 기대해야 한다.
적용)
1)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영혼에 무관심하는 것은 정신없고 바보같은 짓이다. 이보다 더한 자살이 또 어디 있을까? 더 늦기 전에 깨어나라. 즉시 그분을 찾으라.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되지 않으려거든 그리스도를 찾으라.
2) 지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은혜 안에 자라가는 것이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 처음 회심한 이래로 거의 진보를 나타내지 못한 사람이다. “찌꺼기같이 가라앉아” 있는 사람이다(습1:12). 과거에 받은 은혜, 옛날의 체험, 지식, 믿음, 옛날의 방식과 표현에 안주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 당장 성장이 멈춘 이유를 밝혀 내기로 결심하라. 그 이유가 무엇이든 위대한 영혼의 의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먼저 나아가서 여러분에게 있는 은밀한 질병을 고쳐 주시도록 간구하라.
3) 실제로는 은혜 가운데 자라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가 산을 내려온 모세처럼, 얼굴이 빛나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단언하건데 이런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자라가는 그리스도인을 이웃으로 둔 사람은 복이 있다! “땅 위를 덮는 하늘”을 맛보는 것과 같다.
성장하는 영혼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깊은 인식이다. 자기는 무익한 종이고, 죄인의 괴수라는 인식만 할 뿐이다. 자라가는 그리스도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두 마디뿐이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계속 전진하십시오!”이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혜에 빚진 자들이다.
마지막으로, 은혜 안의 성장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자 한다면, 더 많이 알고 싶다면, 이 세상에서 더 많은 시험과 환난을 지나가야 할지라도 놀라지 말자. 탁월한 모든 성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된 자였다(히2:10).
주님께서는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질병, 상실, 십자가, 걱정, 실망 같은 것들은 우리가 겸손하게 되고, 깨어 있고, 영적인 마음을 갖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포도나무를 다듬는 전정가위 같고, 금을 정련하는 용광로와 같다. 혈과 육에게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12:11).
제 7 장 확신
(딤후4:6-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아래로는 무덤을, 뒤로는 자신의 지나온 사역을, 그리고 앞으로는 장차 다가올 위대한 심판 날을, 삼중적 관점으로 조망하고 있다!
1) 아래로 무덤을 보고 있지만,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 마지막 제례를 포함한 모든 준비가 다 끝났다. 이제 죽음의 일격만 맞이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 죽음이 임박했을 때, 사람은 가장 숙연해진다. 무덤은 탄식을 지아내는 싸늘한 곳이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2) 뒤로 자신의 지나온 사역을 돌아보고 있지만, 부끄러움이 없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 지금 그는 용사로서 말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무서워하여 움츠리고 뒤로 물러나는 세상과 육체와 마귀에 대항하는 싸움을 다 싸웠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 상을 얻기 위해 경주하는 사람으로 말한다. ‘나는 내 앞에 놓인 경주를 다 달렸다. 아무리 거칠고 가팔라도 주어진 경주를 다 마쳤고, 아무리 어려워도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 길이 지루해도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결승점이 보인다.’
“믿음을 지켰으니” - 한 사람의 청지기로 하는 말이다. ‘나는 나에게 맡겨진 영광의 복음을 굳게 지켰다. 사람의 전통과 혼합하지도 않았다. 내가 스스로 고안한 무엇을 더해서 복음의 단순성을 해치지도 않았다. 복음을 희석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용납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한 명의 용사로서, 경주자로서, 청지기로서 나는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3) 앞으로 올 심판의 위대한 날을 바라보되, 전혀 의심이 없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 사도 바울은 지금 머뭇거림이나 의심 없이 말한다. 이미 면류관을 받은 사람처럼 전혀 주저함이 없다.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그 면류관을 자기에게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확신하고 있다. 자기 눈으로 모든 것을 직접 본 것처럼 말한다.
사도 바울은 “강한 소망의 확신”을 가지고 심판 날에 자기가 맞게 될 일을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확신은 너무나 중요한 주제임에도 오늘날 쉽게 간과되고 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 참된 거룩과 확신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일수록 일반적으로 더 큰 확신을 누린다.
1. 확신에 찬 소망은 참되고 성경적이다.
확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적극적인 은사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가 반드시 추구하고 구해야 한다. 회심한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평안을 얻어 자기 죄가 용서받았고 영혼이 구원받았다는 분명한 확신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의심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두려움에 미혹되거나, 걱정스러운 질문들로 고민에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 요컨대,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와의 허다한 싸움으로 힘들기는 해도, 두려움 없이 죽음을 대망하게 된다. 당당하게 심판을 대면하게 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많은 사람들이 확신을 진리로 여기지 않고 거부한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전혀 터무니없는 말로 확신을 부인한다. “죄 용서에 대한 신자의 확신은, 허구이고 불경건한 확신이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이단의 주요한 오류”라고 한다.
우리 가운데에도 대다수의 세속적이고 생각없는 그리스도인이 확신의 교리를 반대한다. 참된 신자 가운데에서도 확신을 위험한 교리로 여겨 거부하고 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확신을 추정 정도로 여긴다. 확신하지 않고 자기 영혼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심과 긴장을 가지고 사는 것을 겸손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후회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아주 해로운 생각이다. 물론 성경적인 근거도 없이 확신을 고백하는 뻔뻔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성경의 진리는 항상 오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은 분명하고 참된 실재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단지 진리가 오용될까 두려워 진리를 적용하는 데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25-26).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1:10).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이상의 본문에서 단순한 “희망 사항”이나 “신념” 이상의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설득과 확증과 지식의 말에서 비롯된 확신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 명확한 의미를 통해서 이 말씀을 본다면, 확신의 교리가 진리로 다가온다. 섣부른 추정으로는 베드로와 바울, 욥, 요한의 삶의 자취를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낮은 마음을 가진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기 상태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깊은 겸손과 강한 확신 사이의 완벽한 조화를 본다. 영적 확신과 교만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연관성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단호한 말씀을 분명하게 느끼고, 하나님의 결연한 약속을 주저없이 믿으며, 식언치 않으시는 그분의 말씀과 맹세를 의지하여 용서와 평화를 확신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있는 무엇인가를 보아야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되었다. 새 언약의 중보자와 진리의 성경을 의지하여 확신하는 것이다. 신자가 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하신 말씀 때문에 그분을 붙드는 것이다. 결국 확신은 다름 아닌 장성한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약속을 두 손으로 꼭 붙잡는 대장부의 믿음을 가리킨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낫겠나이다”라고 말한 백부장이 가진 믿음이다(마8:8).
바울만큼 확신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가리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한 바울은 자신의 타락과 죄책을 깊이 절감했다(딤전1:15). 하지만 자신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의 넓이와 길이를 더 깊이 절감하고 있었다. 휘장 안에 있는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을 기억했다(히6:19). 자신을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신 분의 쉼 없는 중보와 공로와 말씀을 기억했다. 바로 이런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바울은 이토록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고 주께서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다”.
2. 확신에 찬 소망에 이르지 못한 신자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도 바울이 누렸던 확신의 희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믿고 용납받을 것에 대한 어렴풋한 희망을 가지는 것과,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누리고 넘치도록 풍성한 희망을 가지는 것은 전혀 다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피할 수 있는 믿음, 즉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은혜이다. 하지만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많은 염려와 의심과 두려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다. “예전에 써 넣고 붙이지 못한 편지가 있듯이, 마음에 은혜가 기록되었지만 아직 성령이 확신으로 봉인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거부의 상속자로 태어난 아이는 아직 자기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지 못한다. 어린아이로 살다가 어린아이로 죽으면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가진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전혀 알지 못한다. 구원을 받았지만, 결코 산 희망을 누려 보지도 못하고, 그의 기업을 통해 얻는 참된 특권조차 알지 못한다.
영광스러운 복음이 주는 자유로움을 박탈해서도 안 되고, 합당한 몫을 삭감해서도 안 된다. 사람에게 있는 교만, 그리고 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이미 좁아질 대로 좁아진 구원의 문을 더 좁고 협착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주 예수님은 긍휼과 자비가 많으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 믿음의 양이 아니라 질을 보신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불씨도 꺼뜨리지 않으신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비록 믿음이 겨자씨보다도 크지 않다 해도,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고 그분의 옷깃이라도 만지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성화에는 차이가 있지만 칭의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믿음이 작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하시고 받으셨다는 사실을 평생 온전히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더해 가는 두려움과 의심으로 힘겨워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만 확신하지 못하는 단순하고 하찮은 믿음이라 해도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그런 믿음을 통해 강력하고 풍성한 위로를 받으며 천국에 이르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안전하게 포구까지 데려가기는 하겠지만, 돛을 전부 올리고 기쁨과 확신 가운데 힘차게 항해할지는 의문이다.
믿음과 확신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보면 도움이 된다. 믿음은 뿌리이고, 확신은 그 위에 피어난 꽃이다. 뿌리가 없으면 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물론, 뿌리는 있지만 꽃이 없는 경우는 있다.
믿음은, 떠미는 군중을 헤치고 예수님 뒤로 와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분의 옷깃을 만진 불쌍한 여인이다(막5:27). 확신은, 자신을 에워싸고 돌을 던지는 살인자 앞에서도 잠잠히 서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외치는 스데반이다(행7:56). 믿음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부르짖는 회개하는 강도이다. 확신은, 온몸이 종기로 얼룩진 채 재 가운데 않았으면서도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욥19:25), “비록 그분이 날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믿고”(욥13:15)라고 말한 욥이다. 믿음은, 두렵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하는 외침이다(막9:24). 확신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 누가 정죄하리요”하고 외치는 자신만만한 도전이다(롬8:33-34).
믿음은 생명이다. 하지만 생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약하고, 병들고, 고통당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괴롭고, 웃음을 잃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가? 확신은 생명을 능가한다. 확신은 건강과 강력과 권세와 생기와 역동과 에너지와 장부다움과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다루는 것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특권을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의 문제이다. 평화냐 평화가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큰 평화냐 아니면 작은 평화냐의 문제이다. 처음의 모습 그대로냐 아니면 장성한 분량에 이른 모습이냐의 문제이다.
믿음을 가졌는가? 믿는 자는 복을 받되, 삼중의 복을 받는다! 깨끗함을 받았고, 의롭다 함을 받았고, 지옥의 권세가 넘보지 못한다. 그러나 확신을 가졌다 하면 훨씬 더 좋다. 더 볼 수 있고, 더 느낄 수 있고, 더 알 수 있고, 더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3. 확신에 찬 소망을 간절히 추구해야 할 이유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주는 복을 받을 만한 만조의 때를 놓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낮고 비천한 상태로 스스로의 영혼을 방치하고 있다.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아5:1).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1) 지금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위로와 평화를 위해서라도 확신을 추구해야 한다.
의심과 두려움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자가 누리는 행복을 빼앗아 간다. 불확실함과 걱정은 건강, 소유, 가족, 애정, 직업 등 우리 삶 전반에 아주 나쁜 영향을 가져온다. 영혼에 끼치는 영향은 더더욱 나쁘다. 하지만 확신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일종의 힘겨운 매임에서 벗어나, 큰 위로로 나아가게 된다. 삶에서 가장 큰 일이 이미 해결되었다. 완성되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이외에 다른 일, 질병이나 빚 같은 일은 상대적으로 소소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런 확신에 힘입어, 신자는 고통 중에서도 인내한다. 상실감 속에서도 잠잠하다. 슬픔 가운데서도 동요하지 않는다. 악한 세월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 만족하게 된다. 확신을 통해 그 마음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확신의 한 방울이 쓴잔을 달콤하게 해준다. 십자가의 짐을 가볍게 해준다. 거친 순례의 길을 평탄하게 해준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비취 준다. 항상 발아래 든든한 반석이 있는 것과, 두 손으로 붙잡을 확실한 것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 동행하는 든든한 벗이 있고, 마지막에 다다를 확실한 본향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확신을 통해 가난과 실패도 견딘다.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10:34).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합3:17-18). 하나님의 자녀는 확신을 통해 자기에게 닥친 극심한 상실도 견뎌 낸다. “평안하다”고 느낀다(왕하4:26).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그랬던 것처럼, 확신에 찬 사람은 감옥에서조차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다. 가장 극심한 어둠에서조차 노래한다. 모든 일이 자기를 대적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기뻐한다(욥35:10,시42:8). 헤롯의 감옥에 있던 베드로처럼, 확신에 찬 사람은 내일 당장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잠을 잔다. “내가 평안이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4:8). 천국에는 자기가 당한 모든 것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있음을 항상 기억한다(고후4:17).
확신은 고통과 병중에 있는 사람을 붙들어 준다. 잠자리를 편하게 해주고, 임종의 머리맡을 지켜 주어 임종을 맞는 신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 집이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5:1).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빌1:23).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시73:26).
죽음의 순간에 확신이 가져다줄 수 있는 강력한 위로는 너무나 중요하다. 임종의 순간만큼 확신이 소중한 때도 없다. 죽음이 엄몰해 오는 순간에 “나는 안다”, “나는 느낀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영혼이 이 땅을 떠나야 할 때, 확신만큼 우리를 강건하게 해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2) 확신은 능동적으로 애쓰고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추구해야 한다. 자신의 노력과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의지하여 은혜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분명한 확신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확신의 희망이 결여된 신자는 과민하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불안, 의심, 의문, 갈등, 타락에 휩싸여 지낸다. 하나님을 위해 일할 시간은 없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그 누구도 사도들만큼 수고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수고하려고 사는 사람들 같았다. 그리스도의 일이 그들의 양식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삶을 드렸고, 자기 자신을 드렸다. 편안한 삶과 건강과 세상적인 위로를 십자가 밑에 내려놓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확신에 찬 소망 때문이었다.
3) 확신은 그리스도인을 더 확고한 그리스도인 되게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일관성 없고, 기회주의적이며, 불만족하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확신이 없다. 그래서 세상과 절연하기를 주저한다. 새 사람을 입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옛 사람의 모든 길에서 벗어나기를 주저한다.
4) 확신이 가장 거룩한 그리스도인을 낳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추구해야 한다. ‘확신은 부주의함과 나태함을 낳는다’는 벨라르미노 추기경의 말만큼 진리와 동떨어진 말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용서를 온전히 확신하는 사람은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힘쓴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물음이 있다. 여러분을 감싸고 있는 영원하신 팔을 느끼고, 날마다 여러분의 영혼을 가까이 이끄시며 “나는 네 구원이라”하시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싶은가? 사는 날 동안 포도원에서 힘써 일하는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고 싶은가? 모든 사람 중에서 담대하고, 심지가 곧고, 한결같고, 타협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드러나고 싶은가? 탁월한 영적 마음을 가진 신령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확신을 소홀히 여기고 낮은 수준의 믿음으로 만족한 것이, 여러분의 모든 실패와 평강이 없는 이유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가? 모든 은혜의 토양과 뿌리가 되는 믿음은 빈약하고 궁핍하게 내버려 두면서, 여러분에게 있는 은혜가 쇠약해져 가고 아련해진다고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는가? 믿음에 자라기를 힘쓰라. 구원의 확신이 넘치는 사도 바울의 희망을 구하라.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라. 여러분은 많은 것을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했을 것이다. 다른 길을 택하라. 주님의 팔을 더 온전히 의뢰하라. 그러면 곧 다른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더해질 것이다
4. 확신에 찬 희망을 얻기가 어려운 몇 가지 원인이 있다.
1) 가장 흔한 이유는, 칭의 교리에 관한 잘못된 견해 때문이다. 많은 신자들이 알게 모르게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의롭다 함과 구원을 얻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구속받은 죄인, 의롭게 된 죄인, 새롭게 된 죄인이다. 칭의는 완전하게 성취된 사역으로 정도나 단계가 없다. 성화는 완전하지 않고 완료되지 않은 것으로,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완전하지 못하다.
2) 확신이 결여된 또 다른 주된 이유로, 은혜 안에 자라가는 데 게으른 것을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단 회심만 하면 그 이후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구원받은 상태를, 몸을 뒤로 제치고 앉아 마냥 행복해 할 수 있는 안락의자처럼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성장하고, 더욱더 풍성해지고, 믿음을 더하라”는 명백한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다(살전3:12,4:1, 벧후1:5,3:18, 빌1:9).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는 것이 항상 우리의 목적이고 갈망이 되어야 한다. 삼십 배를 남겼다면 육십 배를 남기기 위해 힘써야 하고, 육십 배를 남겼다면 백 배를 남기기 위해 힘써야 한다(마13:23).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이다. 이는 또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부지런함과 확신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1:10).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히6:11).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13:4). 청교도의 금언, “믿음은 들음을 통해서 더 견고해져 간다. 하지만 행함이 없이는 믿음의 확신에 이를 수 없다.”
3) 신자에게 확신이 부족한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생활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일관성 없는 삶은 양심의 평화를 현저하게 저해한다. 담대하고 단호한 태도로 세상을 거부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따라가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를 주저하고, 거룩하고 영적인 삶으로부터 뒷걸음질하는 등의 결단성 없는 삶은, 영혼의 정원을 병해충으로 들끓게 할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의 진에 들여놓은 한 명의 아간이 여러분의 손을 무력하게 할 것이다. 성령의 증거를 얻고 싶으면, 날마다 성령을 좇아 파종해야 한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하지 않는다면, 기쁨으로 하나님의 길을 걷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느끼고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삶의 방식에 달려 있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과 사람에게 거리낌 없는 양심을 지키려고 힘썼다(행24:16). 신앙의 기초에만 머물지 말고 완전으로 나아가라. 확신은 신자가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누리는 평강은 믿음에 비례한다. 이 복된 근원을 경작하라. 물론, 단번에 확신에 이르지는 못한다.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유익하기도 하다. 우리는 힘들게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확신을 얻은 후에 의심이 가끔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라. 지금 우리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입고 있다. 우리 안에는 죄가 남아 있다. 육체는 끝까지 성령을 거스릴 것이다. 우리의 육체 외에도, 예수님을 시험했고 베드로를 무너뜨렸던 강력한 마귀가 있다. 그러나 낙망하지 말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아무리 총명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잠시 동안 확신을 잃어버릴 수 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확신은 가장 예민한 식물이다. 날마다 매시간 깨어 잘 지켜보고, 물을 주고, 보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확신이 있을 때, 더욱 깨어 기도하라. “확신을 소중히 여기라”. 항상 경계를 늦추지 말라. 말을 타고 오는 것처럼 순식간에 닥쳤다가, 걸어서 가는 것처럼 천천히 떠나는 것이 영적 어둠이다. 온 줄도 모르게 이미 와 있는 것이 바로 영적 어둠이다. 떠나갈 때는 느릿느릿 천천히, 여러 날이 지난 후에야 떠나간다.
무엇보다도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성령을 괴롭히지 말라. 사소한 나쁜 습관이나 작은 죄악을 경솔히 다룸으로써 성령을 힘들게 하지 말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가장 친밀하게 동행하는 사람이 가장 큰 평화를 누린다. 주님을 가장 온전히 따르고 가장 높은 수준의 거룩을 추구하는 신자가, 가장 확신에 찬 소망을 누리고 자신의 구원을 가장 분명히 확신한다.
“믿음은 확신이 아니다. 확신은 때때로 강건하고, 강력하고, 영웅적인 믿음에 대한 상급과 면류관으로 주어진다. 확신은 하나님의 성령이 말할 수 없이 분명한 빛을 영혼에 비추셔서 모든 어둠을 몰아내고, 이전에 드리워져 있던 의심과 두려움을 흩어 버리시는 것이다” -홉킨스 주교-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왜 항상 자신에게 불리한 쪽으로 결론 내리는지 알 수 없다. 튼튼하고 굵은 가지뿐 아니라 포도나무의 어린 눈도 뿌리로부터 수액을 공급받는다. 이처럼, 강건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연약한 믿음도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그러므로 연약한 신자는 감사함이 마땅하다. 은혜안에 자라가기를 힘쓰는 동안에도 이미 자신이 받은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헨리 벤-
제 8 장 모세, 우리의 모범
1 모세가 포기한 것.
모세는 자기 영혼을 위해서 세 가지를 포기했다. 그가 드린 위대한 세 가지 희생은,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희생이었다(히 11:24-26).
1)높은 신분과 지위를 포기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했다. 그녀는 바로의 외동딸이었고,
서열로 볼 때 모세는 언젠가 이집트의 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2) 쾌락도 거부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쾌락은 지위고하,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좇는 환상이다. 이전에 모세의 입술에 놓였던 잔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들이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잔을 외면했다. 거절했다. 포기했다!
3) 부귀도 거절했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모세는 가공할 만한 부와 재물을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보화를 가지려 하지 않고, 그것들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는 거절했다. 그는 포기했다!
모세는 지위와 쾌락과 부귀를 한꺼번에, 즉시 거절했다. 젊은 날의 객기와 일시적 기분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그의 나이 사십이었다.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이다. 그는 자기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잘 배운 사람이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행7:22). 아무리 많은 것을 거부한 사람이라도 모세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희생과 자기부인에 탁월한 사람이 많이 있지만, 모세는 그중에 발군이었다.
2 모세가 선택한 것.
모세가 선택한 것은 그가 거부한 것만큼이나 놀랍다. 그는 자기 영혼을 위해 세 가지를 선택했다. 그것을 통해 구원의 길이 열렸다. 모세는 그 길을 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세 가지를 선택했다.
1) 고난과 고통을 선택했다.
모세는 바로의 궁에 있는 안락과 편안함을 떠나 공공연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 섰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박해받는 백성이었다. 불신과 의심과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들과 친분을 맺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들이 애굽의 폭압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무리 구하고 노력해도 안정된 가정과 조국을 되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고통과 시련과 가난과 궁핍과 불신과 염려와 심지어 죽음을 택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모세였다.
2) 멸시받는 백성과 함께 있기로 했다.
모세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던 유력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떠나 이스라엘의 자녀들과 함께 했다. 어려서부터 고귀하고 부유하고 화려한 사람들 가운데서 자란 그가 자신의 높은 지위를 버리고 낮아져 불쌍한 사람들-노예, 농노, 천민, 종, 압박받는 자, 빈민, 고통받는 자, 벽돌 굽는 자-과 운명을 같이 하고자 했다. 얼마나 놀라운 선택인가?!
3) 치욕과 멸시를 선택했다.
바로의 궁전에서 떠나 이스라엘 진영으로 들어간 모세에게 쏟아진 비난과 조롱이 어떠했을지 짐작이나 하겠는가? 사람들은 그가 어리석고, 나약하고, 미련하고, 제정신이 아니고 완전히 미쳤다고 말했을 것이다. 모세는, 왕자로서 가지고 있던 모든 영향력을 잃었을 것이다. 함께 살던 사람들의 신망과 존경도 한순간에 다 잃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바로의 궁전을 떠나 이집트의 노예가 되었다!
이 모든 정황을 고려해 보면, 그가 모르고 그 길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나약하고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성경은 특별히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고 말한다(행7:22).
3. 모세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원리
모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놀랄 만한 그의 행동의 원천은 바로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행동했고, 믿음으로 선택했고, 믿음으로 이집트의 영화를 거절했다. 그의 모든 행위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목적을 모세의 마음에 두시고 그것을 보게 하셨다. 구원자가 이스라엘 무리 가운데서 태어날 것,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어진 위대한 약속이 성취되어야 할 것, 그것이 임박했다는 것을 모세에게 계시하셨다.
모세는 이 약속과 계시를 믿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믿었다. 하나님은 완전히 지혜로우신 분임을 믿었다. 하나님은 정말 자비로운 분임을 믿었다.
모세에게 믿음은 망원경이었다. 침침한 이성의 눈에 시련과 절망, 폭풍과 격랑, 피로와 고통만이 들어올 때, 모세는 이 망원경을 통해 저 멀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안식과 평화와 승리를 보았다.
모세에게 믿음은 해석자였다. 무지한 감각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명령을 불가사의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믿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넘치는 위로를 찾아냈다.
믿음은 모세에게, 모든 지위와 명성은 땅에 속한 것이고, 헛되고 공허하고 잠시 지나가는 것일 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참되고 위대하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권속에 속한 왕이며, 귀족 중의 진정한 귀족이었다. 지옥에서 으뜸보다는 천국에서 꼴찌가 되는 것이 더 나았던 것이다.
믿음은 모세에게, 세상적인 즐거움은 “죄가 주는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세상의 즐거움은 죄와 함께 버물려져 있어서, 세상의 즐거움을 따라가는 사람은 죄로 이끌리고, 영혼이 파괴되고, 하나님께 싫어 버린 바가 된다. 안일하게 죄를 짓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고 순종하는 것이 훨씬 낫다.
믿음은 모세에게, 신자는 천국에서 이집트의 보화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원한 상급,
도둑이 훔쳐 가거나 좀과 동록이 슬지 않는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천국에서 받는 면류관은 썩지 않을 것이다.
믿음은 모세에게, 고통과 고난이 실제 악이 아니라고 말했다. 고통과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이다. 은혜의 자녀가 영광에 이르도록 가르친다. 고통과 고난은 우리의 타락한 의지를 정화시키는 묘약이다. 고통과 고난은 우리에게 있는 찌꺼기를 녹여 없앨 용광로이다. 세상과 우리를 묶는 올무를 끊을 검이다.
믿음은 모세에게, 모든 치욕과 멸시는 “그리스도의 능욕”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과 멸시를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믿음으로 본 것들이 곧 그의 삶의 실체가 되었다. 그의 믿음이 우리가 아는 모세가 되게 했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믿음이 말하는 바를 믿었다.
모세가 세상이 주는 지위와 부귀와 쾌락을 거부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는 저 멀리 앞을 내다보았다. 열국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재물이 날개짓 하고 달아나 버리는 것과, 쾌락이 심판과 사망으로 이끄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적은 무리만이 영영히 서는 것을 보았다.
모세가 멸시받는 백성과 고통과 치욕을 선택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는 그 이면에 있는 것을 보았다. 고통이 잠시 동안만 있으리라는 것과, 치욕은 사라지고 영원한 영광만이 있으리라는 것과 멸시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영광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라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다.
그가 옳지 않았는가? 비록 그는 죽었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바로의 딸이 누구인지 기억조차 못한다. 바로가 다스렸던 도시가 어디였는지 알 수도 없다.
이집트의 영화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성경이 읽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세의 이름은 남아 있다. 지금도 여전히 살아서 “믿음으로 사는 자는 행복하다”고 증거한다.
4. 모세의 믿음의 역사의 합당한 결과로서 우리가 따라야 할 실천적 교훈
1) 모세처럼, 세상보다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정치인은 자기 자리를 박차고, 부자는 그 재산을 다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어떤 지위에 있든 고난을 각오하라는 것이다. 안 좋게 보이는 것을 더 많이 선택하고, 좋게 보이는 것을 더 많이 포기하고 거부해야 한다.
오늘날 세속적 기독교가 득세하고, 사람들은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지 않고, 어떤 희생도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대가도 치를 필요가 없는 값싼 기독교는 아무 가치도 없다.
자기 영혼에 대한 간절함이 있고, 주일에나 겨우 교회 가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성경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신약성경의 성도처럼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제 곧 여러분은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어려운 일을 견뎌야 하고, 자기 영혼을 위해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지금도 십자가에 대한 적개심은 여전하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여전히 멸시받는 적은 무리이다. 참된 복음적 기독교는 여전히 치욕과 멸시를 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은 여전히 나약한 광신자요 미련한 자로 취급받는다.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누구를 섬길지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동시에 양편에 설 수 없다. 그리스도의 친구면서 동시에 세상의 친구가 될 수는 없다. 이 세상 자녀들의 틈바구니에서 나와야 한다. 그들에게서 떠나야 한다. 많은 조롱과 어려움과 반대를 감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될 것이다.
이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기꺼이 해야 한다. 적은 무리가 붙잡고 살아가는 생각을 따라가야 한다. 이런 삶은 대가를 치른다. 도도하게 흘러가는 다수의 생각을 거슬러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길은 좁고 험하다. 이 사실을 부인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 길을 따라가라. 희생과 자기부인 없이는 구원받는 신앙은 없다.
모세처럼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포기하는가? 아니면 세상이라는 애굽에 빌붙어서 “나는 이게 꼭 있어야 해. 그것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어”하고 말하지 않는가? 여러분이 고백하는 기독교에는 십자가가 있는가? 땅의 것을 추구하며 사는 주변 사람이 여러분의 신앙 때문에 불편해 하고 거북해 하는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두루뭉술하게 풍조와 유행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는가? 복음 때문에 받는 고통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가? 자신의 믿음과 실천으로 인해 사람들이 여러분을 멸시하고 수치를 준 적 있는가? 바로의 딸을 떠나 기쁨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어 본 적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해 본 적 있는가?
이것은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질문이다. 하지만 이 길 외에는 없다. 성경이 그렇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한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5-27). 많은 사람들이 은혜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영광은 누리고 싶어 한다. 일은 하지 않으면서 일한 삯은 너무도 원한다. 추수는 바라지만 수고는 하지 않는다. 거두기를 바라면서 뿌리지는 않는다. 상급은 원하면서 싸우지는 않는다. "쓴잔을 마셔야 단잔을 느낄 수 있다“는 번연의 말처럼,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2) 세상보다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게 하는 것은 믿음밖에 없다. 다른 것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지식도 못하고, 느낌도 못하고, 정기적으로 행하는 종교적 외양으로도 못한다.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자라가는 신앙을 위해서는 반드시 살아 있는 기초가 있어야 한다. 그 기초는 다름 아닌 믿음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전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성경 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이에 어긋나는 모든 교리는 누가 가르쳤든 다 거짓이라는 실제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가진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의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칭찬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칭찬을 더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모세와 같은 선택을 한다. 장차 얻어 누리게 될 일에 대한 기대 때문에 지금 잃어버리는 것이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항상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에게서 자신의 필요한 것을 얻고, 그분을 자기 영혼의 만나로 누리는 습관이 있어야 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3) 신앙이 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속적이고 불경건한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세처럼 살고자 하는 생각을 한순간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 쓸모도 없고 유익도 없다.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라 불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그리스도 교회에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단 두 부류만이 있을 뿐이다.
4)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는 참된 비결은, 위대한 믿음에 있다.
은혜와 은사와 재능에 대해서는 생각도 많고, 말도 많이 한다. 반면에, 믿음이 은혜와 은사와 재능의 뿌리요 어머니라는 사실은 잘 잊어버린다.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 사람은 그가 가진 믿음만큼만 갈 수 있다. 사람의 삶은 자신이 가진 믿음의 분량에 비례한다. 자신이 누리는 평화, 인내, 용기, 열심, 사역 등은 다 그가 가진 믿음에 비례한다.
웨슬리나 윗필드, 벤, 헨리 마틴, 비커스테스, 찰스 시므온, 맥체인과 같은 탁월한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그들의 은사와 은혜가 아니라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하나님이 제시한 은혜의 모태에 영광 돌리고, 그들의 믿음을 칭송하라. 믿음이야말로 이들이 나타낸 모든 성품의 원천이었다. 그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기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도는 믿음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행위가 아닌가? 그리스도인의 부지런함은 다름 아닌 믿음이 역사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담대함이 무엇인가? 의무를 정직하게 담당하는 믿음이다. 그들을 그렇게 거룩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 살아 역사하는 믿음 때문이었다. 믿음이 눈에 보이게 드러난 것이 거룩이다. 거룩은 성육신한 믿음이다.
믿음은 모든 성품의 뿌리이다. 뿌리를 바르게 하면, 곧 많은 열매가 맺힐 것이다. 여러분의 영적인 번영은 항상 믿음에 달려 있다 믿는 자는 구원에 이를 뿐 아니라, 결코 목마르지 않고 승리한다. 견고한 믿음으로 이 세상이라는 물 위를 성큼성큼 걸어 위대한 일을 이룰 것이다.
철저하게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여러분이 믿는 바를 살아 내라.
모세를 모범으로 삶아 그의 자취를 따라가라. 가서 모세가 했던 것처럼 하라.
제 9 장 롯, 우리를 일깨우는 경고
“롯이 지체하매(꾸물거리자)”(창19:16).
1 롯은 누구인가?
롯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이다. 롯은 참된 신자였고, 회심한 사람이었고, 진짜 하나님의 자녀였고, 의롭다 함을 받은 영혼이었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벧후2:7-8). 주변에 횡행하는 “불법의 행실로 그 심령이 상했다”(벧후2:8) 롯은 정의롭고 의로운 사람이었고 성령이 인치시고 확정하신 사람이었다. 많은 흠과 결점과 연약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2 본문은 롯의 행동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롯이 꾸물거리자” - 급히 서둘러야 할 때 그는 오히려 더뎠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뒷걸음질 쳤다. 촌각을 다투는 순간에 오히려 시간을 허비했다. 서둘러야 할 때 늑장을 부렸다. 열심을 내야 할 때 무덤덤했다. 너무나 기이한 일이다!
더 두려운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롯과 같은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이고 아는 것도 많은데, 그대로 살지 않고, 실천은 적고, 수년 동안 답보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이들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진리를 사랑한다. 좋은 설교 듣기를 좋아하고, 설교 중간 중간에 드러나는 복음 교리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다. 목회자와 자신들보다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 친구들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일을 계속한다.
천국을 믿지만 갈망하지는 않는다. 지옥도 믿지만 무서워하지 않는다. 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그분을 위해 하는 일은 아주 미미하다. 마귀를 미워하지만 마귀를 불러들이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싸워야 할 싸움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이미 전쟁을 마친 사람처럼 행동한다. 알만큼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정말 놀랍다!
희생하는 것을 무서워하고, 자기를 부인하기를 꺼린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른 눈을 빼어내 버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도무지 따르지 못할 것 같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을 더 넓게 만들고, 십자가를 더 가볍게 해보려고 애쓰지만,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항상 세상과 보조를 맞추려고 한다. 세상으로부터 결연히 돌아서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고, 미심쩍은 오락거리나 세상과 관계를 지속할 그럴듯한 변명과 명분을 만들어 내는 데 아주 교묘하다. 나름대로 명분을 갖고 세속적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정당화 하려고 애쓴다. 이런 사람은 게으름, 나태함, 못된 성질, 자만심, 이기심, 조급함 등 자기를 괴롭히는 죄악들과 거의 싸우지 않는다. 이런 죄악들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속에 자리하도록 내버려 둔다. 이들은 모두 롯의 형제자매이다.
3 롯이 머뭇거린 이유는 무엇인가?
1) 그가 젊었을 때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롯은 믿음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선택했다. 영원에 속한 것을 바라보지 않고, 잠시 지나가는 것만 고려했다. 단지 비록하고 “물이 넉넉한” 것이 그 이유였다(창13:10). 그곳은 소돔과 가까웠다. 그는 이 사실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얻을 이득만 생각했지, 영혼의 유익은 고려하지 않았다.
2) 롯은 죄인들과 함께 뒤섞일 특별한 이유가 없음에도 그렇게 했다.
성경이 금하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불필요하게 세상적인 사람 사이에 자리 잡는 것처럼 자신의 경건을 해치고 영원에 대한 관심에 해로운 것도 없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 영혼의 박동은 약해지고 무기력해진다. 죄에 대한 느낌도 무디고 둔해진다. 영적으로 분별하는 눈도 침침해져서 급기야 선악을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손과 발 마디마디에는 영적인 마비가 찾아와, 시온으로 가는 길에 메뚜기조차 버거운 짐이 되어 절룩거리며 걷는다. 이 일은 자신의 가장 악랄한 원수에게 통행권을 팔아넘기는 것이다. 삼손 같이, 자신의 머리털을 잘라 블레셋 사람에게 스스로를 내어 주고, 두 눈이 뽑히고, 연자방아를 돌리는 노예로 전락하는 행위이다.
- “꾸물거리지” 않기를 바란다면, 세상적인 사람과의 불필요한 사귐을 조심하시라. 롯과 같은 선택을 할까 조심하시라. 자기 영혼이 생기 없고, 나른하고, 졸립고,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익하고, 굼뜨고, 육적이고, 어리석고, 둔한 상태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롯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1)집이나 거처를 잡을 때 이 사실을 잘 기억하라. 몸뿐 아니라 영혼도 편한지 고려해야 한다. 지금 생각하는 집이 천국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인지도 잘 살펴야 한다. 복음을 설교하는 곳이 가까이에 있는가? 영혼을 돌봐 줄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가까이 살고 있는가? 생명을 사랑한다면, 이런 것을 무시하지 말라.
2)직업을 선택할 때 이것을 기억하라. 급여가 높고, 일이 수월하고, 이점이 많고, 전망이 밝다고 다가 아니다. 영혼을 먹일지 아니면 굶주리게 할지, 영혼이 번성할지 아니면 퇴보할지, 주일을 지켜 일주일에 한 날을 여러분의 영적인 일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를 말이다. 금을 너무 비싸게 주고 살 수도 있다. 롯과 같은 선택을 할까 조심하라.
3) 아직 결혼 전이라면, 남편이나 아내를 선택할 때 이를 기억하라. 보기에 좋고, 취향에 맞고, 비슷한 점이 많고, 애교 넘치고, 호감이 가고, 편안히 살 집을 가졌다고 다가 아니다. 여러분의 영혼, 불멸하는 영혼을 생각하시라. 여러분이 꿈꾸는 결혼이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될지 아니면 이 땅의 것을 추구하게 될지,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이끌리게 될지 아니면 세상으로 더 나아가게 될지, 가족의 신앙이 더 왕성하게 자라갈지 아니면 더 퇴보하게 될지, 영광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따라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백스터가 말했듯이, 결혼하기 전에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십시오.” 어디에서도 결혼을 통해 회심하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영혼이 궁핍하고 주리게 된다면, 지갑이 두둑해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안식일을 팔아 좋은 거처를 장만하지 말라! 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자리를 팽개친 에서를 기억하라. 롯과 같은 선택을 할까 조심하라! 아무리 머뭇거리더라도 참된 신자는 결코 쫒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꾸물거리는 자의 신앙이 번성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은혜는 부드럽고 예민한 식물이다. 소중히 품고 가꾸지 않으면, 이 악한 세상에서 곧 병들고 만다. 아무리 빛나는 황금이라도 습기에 계속 노출되면 그 빛이 바래지기 마련이다. 가장 뜨거운 쇠도 금방 차가워진다. 쇠를 벌겋게 달아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거나 찬물을 약간만 뿌려도 새까맣고 딱딱하게 되어 버린다.
4 롯의 우유부단함이 초래한 결과는 무엇인가?
저는 항상 탁월한 거룩과 영적인 유익은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행복과 “온전히 주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머뭇거리는 신자라면, 하나님께 잘 쓰임받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가 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믿음을 통해 누리는 큰 위로와 평화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1) 멸망해가는 소돔 사람들에게 롯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롯의 식구 외에는 소돔 사람들 가운데 단 한사람도 의인으로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집안의 종들 가운데서도 한사람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미적거리는 영혼은 세상에서도 유익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2) 롯은 자기 가족이나 친지, 관계된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돕지 않았다. 사위들도 소돔에 닥친 심판을 경고하자 농담으로 여겼다.(창 9:14) 롯의 처도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고, 두 딸도 아비를 유혹하여 아비로 하여금 악독한 죄를 짓게 만들었다. 머뭇거리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가족들로부터 무시를 당한다.
머뭇거리는 신앙을 가진 부모가 경건한 자녀를 두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아이의 눈은 귀로 듣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받아들인다. 아이의 눈은 귀로 듣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받아들인다. 아이는 항상 여러분의 말보다 행동에서 더 많은 것을 본다.
3) 롯은 죽을 때 아무 증거도 남기지 못했다. 롯이 산에서 도망하지 못한다고 소알에 살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나 소알에서 떠난 후에 굴에서 보여준 행실은, 그가 얼마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했고 그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후에 그는 성경에서 사라진다. 비참한 말년을 보냈을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다윗의 임종은 들어서 알지만, 유독 롯의 임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듣지 못한다. 롯의 임종은 정말 암담했던 것이 분명하다! 머뭇거리는 신자는 일반적으로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둔다. 구원을 받기는 하겠지만, 마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다(고전3:15).
- 물론 “꾸물거리지” 않는 신자라고 해서 항상 세상이 주목하는 것은 아니다. 노아는 120년동안 복음을 선포했지만,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 예수님은 심지어 자기 백성으로부터도 높임을 받지 못했다. “꾸물거리지” 않는 신자라고 해서 가족과 친지가 다 회심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자녀가 많았지만, 그중 대다수는 경건하지 못했다. 하지만 롯의 악한 선택, 가족이나 세상에 유익이 되지 못한 것과 머뭇거리는 신앙 사이에는 연관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이 롯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며 우리에게 경계를 하도록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여러분은 롯처럼 머뭇거리는 신앙이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신자라 고백하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훨씬 더 경박해졌다. 특정한 형태의 기독교가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교회의 특정한 파벌에 속해서 그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만 열심이다. 대중적인 신앙서적은 서점에 나오기가 무섭게 책상에 꽂힌다. 모임마다 참석하고, 회원으로 가입하고, 설교자에 대해 토론도 하고, 선풍적으로 유행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에 흥분하고 열광적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은혜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 만연해 있다. 반면,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은 여전히 현저하게 드문 일로 남아 있다! - 참된 영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시간 사용과 대화와 오락과 옷차림과 누리는 기쁨에 있어서 세상과 구별되고, 어느 곳에 있든지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증거하고, 누구와 있든지 우리 주님의 향기를 발하고, 항상 좋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고, 겸손히 기도하고, 잠잠하며, 사랑하고, 인내하고, 온유하고, 죄짓는 것은 어떤 행태든지 무서워하고, 세상에 사는 동안 겪게 될 위험한 일에 대해 항상 깨어 있는 것과 같은 삶 - 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 사이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이에 대해 가슴 아파하지도 않는다.
베드로 사도는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것을 부탁한다(벧후1:10). 게으르지도 말고, 부주의하지도 말라. 작은 은혜에 안주하지도 말고, 세상보다 약간 낫다고 만족하지도 말라.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은 바라지도 말라.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동시에 세상과 보조를 맞추어 보려고 하지도 말라. 천국에 대한 소망과 영광을 향한 갈망으로 행복하고 싶은가? 쓰임 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꾸물거리지 말라.
그리스도 재림의 때에 준비된 자로 드러나고 싶은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밝히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꾸물거리지 말라! 신앙을 통해서 섬세한 위로를 누리고 싶은가? 성령의 증거를 느끼고 싶은가? 어둡고, 불평 많고, 침울하고, 신경질적이고, 우울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꾸물거리지 말라!
병중에도, 그리고 임종 시에도 자신의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누리고 싶은가? 믿음의 눈으로 하늘이 열리고,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맞으러 일어나시는 것을 보고 싶은가? 여러분이 떠난 후에 분명한 증거를 남기고 싶은가? 우리가 위로 넘치는 소망 가운데 여러분을 무덤에 안치하고, 여러분의 상태에 대해 의심 없이 이야기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꾸물거리지 말라! 사는 동안 유익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꾸물거리지 말라! 우리 중 단 한 명도 머뭇거리는 자가 없었으면 좋겠다! 시간은 머뭇거림이 없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심판도, 마귀도, 세상도 그렇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도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머뭇거리는 자라면, 즉시 그리스도께로 가서 고침을 받아야 한다. 어떤 일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방법이다. 즉시 고침을 받으라!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의원이신 그 분은 바로 거룩한 일을 시작하실 것이다.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렘3:13,22).
또한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형제 자매가 꾸물거리는 것을 보거든 그들도 깨워야 한다.(히 3:13, 10, 24) “형제여, 자매여, 롯을 잊었는가? 깨어라! 롯을 기억하라! 깨어,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라!”
제 10 장 기억해야 할 여인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17:32).
성경에서 이 짧은 본문만큼 심각한 경고도 없다. 주님의 말씀이다. 롯의 처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남편 롯은 “의인”이었다. 소돔이 멸망하던 날, 그녀는 남편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즉시 죽고 만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주님은 지금 그녀를 교회에 주는 경고로 제시하고 계신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 교회에는 세속성의 위험이 해마다 점증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창궐한 세속성이라는 질병에 대비하고 안전히 거하기 위해서는 롯의 처를 기억해야 한다.
1. 롯의 처가 누렸던 종교적 특권
아브라함과 롯이 살았던 시대에는 구원에 이르는 참된 신앙이 아주 드물었다. 성경도, 목회자도, 교회도, 전도지도, 선교사도 없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은혜를 입은 소수의 가정에만 제한되었다. 롯의 처는 분명 하나님의 큰 호의를 입은 여인이었다. 경건한 남편을 두었고, 이런 남편과 결혼해서 모든 믿는 자의 아비가 되는 아브라함을 백부로 얻게 되었다. 이들에게 종교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 삶의 지배적 원리였고, 모든 행위의 근원이었다. 그녀가 누린 것은 결코 작은 특권이 아니었다.
은혜를 누릴 기회가 많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특별한 경고와 메시지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은혜없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었다. 그녀에게 있던 신앙의 모양은 보이기 위한 것이었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다. 함께 지내는 사람들 때문에 한 것이었다. 마음이 세상에 가 있었다. 세상이 그녀의 마음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이런 상태로 살았고, 죽을 때도 이런 상태였다.
종교적 특권만으로는 어떤 영혼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라. 풍성한 은혜의 방편과 기회가, 해처럼 내리쬐는 환경에서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가장 탁월한 설교와 양질의 가르침을 누릴 수도 있고, 빛과 지식과 거룩을 누리고 선한 사람과 더불어 지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회심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끝까지 그런 상태로 살다가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될 수도 있다. 영혼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종교적 특권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이었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종이었다.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였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다. 그들은 성령의 은혜가 필요했다.
우리 마음과 삶에서 열매 맺도록 애를 써야 한다. 이런 특권에도 불구하고 별 유익을 얻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적극적으로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햇빛이라도 살아 있는 나무를 자라게 하기도 하고, 죽은 나무를 말려 땔감으로 만들기도 한다. 열매 없이 거룩한 것을 가까이 하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굳게 하는 것도 없다. 요컨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특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해같이 빛나는 특권 아래 있으면서도 결실하지 못하는 불모지같이 남아 있지 않도록 조심하라. 여러분이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완고한 마음으로 세속에 물들어 있지 않도록 조심하라. 부모의 신앙을 힘입어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 부모가 아닌 여러분 자신이 생명의 떡을 취하고, 마음에 성령의 증거를 가져야 한다. 여러분이 회개하고, 여러분이 믿고,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롯의 처와 다르지 않다. 깨달음과 지식과 좋은 설교와 많은 은혜의 방편과 거룩한 친구는 다 크나큰 복이고 특권이다. 이런 것을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하지만 이 모든 특권들을 가졌다 해도 성령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롯의 처는 많은 특권을 누렸지만, 은혜가 없었다.
2. 롯의 처가 지은 죄
그녀가 지은 죄에 대해 성령은 아주 간단한 말로 언급한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19:26). 죄의 실체가 한 마디에 다 들어 있다.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1) 뒤를 돌아본 행위 자체는 사소한 것이지만, 이것으로 롯의 아내의 진짜 성품이 드러났다. 아주 미미한 증세가 때로 치명적인 불치병의 증세일 수 있다. 하와가 열매를 따먹은 것 자체는 아주 미미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행위는 그녀가 흠이 없는 상태에서 떨어져 죄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 오라기의 짚을 통해 바람이 부는 방향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한 번의 시선이 죄인의 타락한 마음 상태를 보여줄 수도 있다(마5:28).
2) 뒤를 돌아본 행위 자체는 사소한 것이지만, 롯의 처의 경우, 그 행위는 불순종을 의미한다. 천사의 명령은 아주 직접적이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삼상15:22-23). 하나님께서 성경이나 설교자를 통해 명백히 말씀하실 때, 인간이 할 일은 분명하다.
3) 그 행위는 거만한 불신앙을 보여준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설마 소돔을 멸하실까 하고 의심을 한 것 같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11:6). 스스로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아주 위험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될 때, 우리가 할 일은 평강을 유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4) 그 행위는 세상을 은밀히 사랑했음을 의미한다. 그녀의 몸은 소돔을 빠져나왔지만, 그 마음은 아직 소돔을 떠나지 못했다. 집을 도망쳐 나올 때, 마음을 두고 왔다. 나침반 바늘이 항상 북극점을 가리키듯이, 그녀의 눈은 자기 재물이 있는 곳을 향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약4:4).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주님께서는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다가 멸망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롯의 처를 통해 우리가 배우기를 바라셨던 것은, 세속성에 도사린 엄청난 위험이다. 우리 모두 이 위험을 볼 수 있는 눈과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란다!
요즘처럼 교회에서 세속성에 대한 경고를 소리 높여 외쳐야 했던 때도 없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질병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어둠 속을 어슬렁거리는 흑사병이며, 벌건 대낮에도 목숨을 앗아가는 질병이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스러져 갔고, 심지어 강건했던 사람들도 상함을 입었다. 그녀는 살인자도, 간음자도, 도적도 아니었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나중에 불신앙으로 떨어져 버리는 믿는 가정의 자녀가 얼마나 많은가! 그 좋은 신앙들이 아침 구름처럼 금새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한때 전도유망하게 보였던 영성은 다 어디로 갔는가? 세상에 대한 사랑에 막혀 사라졌다.
결혼한 많은 부부가 자녀를 낳아 기르기 전까지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단 자녀를 낳아 키우기 시작하면 신앙에서 멀어진다! 세속이라는 누룩이 이들의 습관과 옷차림과 오락과 시간 사용에 조금씩 번져 간다. 그들은 변했고, 세상의 영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지금 롯의 처가 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뒤를 돌아보고 있다.
스물, 스물한 살까지는 성실히 신앙생활 하다가 나이가 들수록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젊은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점점 눈에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대신해 마음을 채우기 시작한다(고후4:18). 메뚜기 떼처럼 그들의 영혼에 돋아난 파릇파릇한 잎사귀를 다 갉아먹어 버린다. 올바른 가르침에 대한 열심도 그친다.
처음에는 뜨거운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열심을 냈다가, 지금은 미지근하고 형식적이고 냉담해진 세례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른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말씀을 막아서 결실하지 못하게 한다. 세상의 재물과 명성과 학식에 더 마음이 간다. 영적 능력은 다 꺼져 버리고 다 식어서 차디차게 되었다. 한때 그토록 눈부시게 타오르던 불꽃을 이 세상이 꺼 버렸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열심히 섬기다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게을러지고 나태해진 사역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들릴라로 대변되는 세상의 치마폭에서 놀아나다 그 능력을 다 잃어버린 삼손같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갈3;3) 그들은 부자로 살기 원하고, 세속적인 여인과 결혼한다. 살을 에는 듯한 세상의 서리는 이전에 전도유망했던 영적 꽃봉오리를 다 떨어지게 만든다. 그들의 설교는 이전의 기름 부으심과 능력을 잃어 간다. 점점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쓰고, “극단적인 견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병적으로 신경 쓴다. 한때는 사도의 진정한 계승자요 그리스도의 용사처럼 보였던 사람이, 정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고 외식이나 하면서 소일하는, 아무에게도 거슬리지 않고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는 목사로 전락하고 만다. 세상이 그의 손과 발을 꽁꽁 묶어 버렸다.
신앙이 있다는 그리스도인들이 교묘한 말로 자신의 양심을 눈멀게 하고, “지위에 따른 의무”나, “세련된 삶”이나, “기쁨에 찬 신앙생활”을 들먹이면서 자기 속에는 분명히 세속성이 없다고 핑계 대는 것을 보노라면 참 마음이 슬퍼진다. 성공을 확신하며 웅장하고 화려하게 삶의 항해를 시작했지만, 세속성이라는 큰 구멍이 생겨서 안전한 항구를 목전에 두고도 모든 화물과 함께 침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야곱과 다윗과 베드로와 함께 시작했지만, 에서와 사울과 가룟 유다와 같이 끝맺는다. 룻과 한나와 마리아처럼 시작했지만, 롯의 처와 같은 종말을 맞는다.
믿음이 있는 여러분, 행복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결코 타협하지 말라. 마치 흥정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는 마음을 거의 드리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최대한 많이 얻으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계산적으로 살다가는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모든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하라.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마6:33).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영혼을 위해서, 안전을 위해서, 그리고 유익하게 쓰임받기 위해서라도 롯의 처와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62).
3. 하나님께서 롯의 처에게 내린 징벌
그녀는 순식간에 살아 있는 육신에서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 정말 끔찍하고 두려운 결말이다! 아주 절망적인 결말이다. 하나님은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을 엄히 벌하시고, 주신 특권을 오용하는 자에게 가공할 만한 진노를 내리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고, 지옥은 실재한다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최근에 거짓 교리가 홍수처럼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지옥과 마귀와 징벌에 대한 믿음의 조상들의 가르침은 시대에 맞지 않는 구식이라고 한다. 지옥에 대해 바로 이야기하는 것이 고통스럽고, 껄끄럽고, 거북하다고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 반드시 직면해서 분명히 다루어야 한다. 저는 아무리 혼자일지라도 결연히 옛 자리를 지키고, 지옥의 실재와 영원성을 주장할 것이다.
지옥의 문제는 전체 복음의 근간에 자리한 물음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과 그분의 정의와 거룩과 성결이 모두 이 문제와 결부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인격적인 믿음의 필요와 성화가 모두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지옥에 대한 옛 가르침을 거부하면 모든 기독교 신앙의 체계가 흔들리고, 나사가 빠지고 핀이 뽑힌 것처럼 무질서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지옥을 분명하게 말한다. 성경이 지옥의 실재와 영원성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논증하는 것보다, 차라리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쉬워 보인다.
1)하나님은 본질상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탐닉하는 자를 반드시 벌하시고, 이런 자들의 구원을 거부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라고 선언하는 바로 그 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고 불신앙에 대해서 선언한다.
2)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실 뿐 아니라, 믿음이 없는 완악한 자를 벌하시고 원수에게 보응하시는 분이다. “악인이 스올로 돌아감이여”(시9:17).
3)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지옥의 실재와 영원성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신 분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는 두려운 사실이 나타나 있다. 지옥, 격심한 고통, 영원한 멸망, 심판의 부활, 고통받는 곳, 바깥 어두운 곳, 벌레도 죽지 않는 곳,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 영원한 형벌 등의 표현은 지옥을 가리키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용하신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모범대로 가르치려는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4) 우리가 지옥의 실재 혹은 영원성을 부정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천국의 복락도 사라지고 만다. 성경은 지옥의 영원성을 천국의 영원성만큼이나 분명히 확증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영벌”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가 “영생”(마25:46)이라는 말에도 동일하게 쓰이고 있다.
신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자로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음을 자주 상기해야 한다. 불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파수꾼은 태만함에 대한 책임을 피하지 못한다. 설교에서 지옥을 언급하지 않는 목회자는 신실한 목회자가 아니다. 그에게는 사랑이 없다.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감추는 것을 어찌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마귀를 돕는 것이다(겔18:4,20). 만약 목회자가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지옥에 관해 더 신실하게 설교하고 촉구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섰을 것이다.
건강하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잘 들으라. 자신의 신학에 지옥을 포함시키라. 여러분의 마음에 계시는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이시라는 원리를 분명히 하라. 천국의 지복의 기초를 놓으신 영원한 경륜으로 비참한 지옥의 기초를 놓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라. 오, 오늘날과 같은 불신앙의 시대에 성경 전체를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건강하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간청한다. 지옥의 실재와 영원성에 대해 분명히 가르치지 않는 목회를 조심하라. 이런 목회가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해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여러분을 어르고 달래서 잠들게 한다. 하나님의 진리의 어떤 부분이라도 누락한다면, 그것은 곧 전체를 망치는 일이다.
허다한 관점과 지식과 신앙고백이 난무하는 이 때에 영혼의 파선을 막을 표지를 띄우고자 한다. 모든 영적 항해자들이 지나가는 수로에 부표를 띄우고 그 위에다가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크게 쓰고 싶은 것이 제 심정이다.
적용)
1) 그리스도의 재림에 별로 관심이 없는가?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소돔 사람들과 같고, 노아 때의 사람들과 같다. 조심하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2) 미적지근하고 냉랭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두 주인을 섬기려 하고,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짝하려고 애쓴다. 영적인 박쥐가 되려 한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3) 두 의견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가? 광야와 만나에 싫증내고, 할 수만 있으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4) 은밀히 즐기면서 버리지 못하는 죄가 있는가? 숨은 세속성, 탐욕, 정욕이 거죽처럼 달라붙어 있다. 다른 우상은 기꺼이 부수면서 이것만은 부수지 못한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5)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는 죄는 시시하게 여기는가? 슬프게도 많은 이들이 그렇다!
6) 신앙적 특권에 안주하고 있는가?
7) 종교적 지식을 신뢰하는가?
8) 신앙을 고백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세상과 짝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9) 임종 시에 회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가?
10) 복음주의 교회에 다니고 있는가? 매 주일마다 진리를 듣지만, 여전히 냉랭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자기가 좋아하는 목회자의 설교를 계속해서 듣기는 하면서도, 여전히 좋아하는 죄와 짝하고 있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라면, 조심하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엄중한 말씀이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지기를 바란다! 이 말씀이 우리가 잠들려고 할 때 우리를 일깨우고, 죽은 자처럼 느껴질 때 우리를 소생하게 하고, 둔하고 무디게 느껴질 때 우리를 예리하게 하고, 냉랭하고 차갑게 느껴질 때 우리를 뜨겁게 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뒤로 물러나려고 할 때, 이 말씀이 우리를 다그치는 박치가 되고, 딴 길로 가려고 할 때 우리를 저지하고 데려오는 고삐가 되기를 바란다! 시험이 찾아올 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영혼아, 너를 구원하신 이의 경고를 기억하라! 영혼아, 나의 영혼아, 그분의 말씀을 잊었느냐. 영혼아, 나의 영혼아, 롯의 처를 기억하라!”
제 11 장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트로피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23:39-43)
본문 말씀은 “회심한 강도”에 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 불안해하는 수많은 양심이 쉼을 얻었고, 적지 않은 사람이 평안히 임종을 맞이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보면, 여기 그리스도가 받은 가장 위대한 트로피가 있다.
첫 번째 교훈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자원하는 마음을 알아야 한다.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라고 가르친다.(사63:1) 회심한 강도가 처했던 상황보다 더 절망적이고 필사적인 경우가 있는가? 무덤이 그를 마중 나와 있고 사망까지는 이제 딱 한 걸음만 남았을 뿐이다. 처음에 예수님을 욕하고 불경스러운 말을 퍼부었던 그가 전혀 다른 태도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자기의 영혼을 살펴 주시고, 지은 죄를 용서하시고, 다른 세상에서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간청한다. 정말 놀라운 변화이다. 주 예수께서는 즉시 그에게 바로 오늘 낙원에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자애로운 답을 주셨다. 그를 완전히 용서했고, 모든 죄악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았고, 은혜로 그를 용납했으며, 값없이 의롭게 했으며, 지옥문에서 건져 올려 영광에 들어가게 하겠다고 확신을 주셨다. 주 예수께서는 자신도 죽음을 맞이하고 계셨던 바로 그 시간에 죽어가는 죄인에게 영생을 베풀어 주셨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증거가 여기 있다. 그리스도는 믿음의 기도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그 어떤 죄인도 내쫒지 않고 다 받으실 것이라는 증거를 보라.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증거를 보라. 이 강도는 세례를 받지도 않았고 교회에 속하지도 않았다. 성찬을 받지도 않았고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라고는 전혀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믿음이 있었고 구원을 받았다. 가장 어린 믿음이라도 참된 믿음이라면 그 영혼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증거를 보라. 그분은 죽은 영혼을 소생하게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시며,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쥐고 계시며, 한번 여시면 닫을 자가 없는 분이시다. 겸손히 여러분의 영혼을 그분의 손에 의탁한다면,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받으실 수 있다.
여러분은 죄를 용서받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여러분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참된 신자인가? 그렇다면, 자신의 믿음, 느낌, 지식, 기도, 달라진 삶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라. 우리는 그분을 높이고, 그분께 있는 충만함을 더 많이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려고 애쓰는가?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말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그리고 그 일에 지치지 말라.
두 번째 교훈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구원을 얻는 이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이 진리는 그 곁에 함께 메달려 있던 다른 행악자의 비극적인 결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는 아주 엄중한 경고이다. 두 사람은 모두 똑같은 기회를 얻었지만 한 사람만 그 기회를 붙들어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분명한 사실은 회개와 믿음은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않은 채 삶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구원받고 낙원에 이른 회심한 강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이전에 살아온 대로 죽어간 다른 강도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자비를 마음대로 사용하여 자기가 원하는 때에 회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할 권리는 없다.
사울과 다윗을 보라. 구원은 나 자신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남용하지 말라. 자기 영혼에 소중한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 자기 속에 선한 경건한 확신이 있다면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세 번째 교훈은 성령은 구원받은 영혼을 한결같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회심한 강도에게 하신 것처럼 순식간에 변화시키시든, 아니면 점진적으로 하시든 성령이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발자취는 항상 동일하다. 신앙의 원리는 같다.
1) 이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 보라. 이 강도가 예수님을 변호한 상황은 어떠했는가? 온 나라가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외쳤으며, 제자들마저 그분을 버리고 도망했던 때이다. 제자들은 굉장한 이적과 표지를 직접 눈으로 보았지만, 이 강도는 고통과 연약함과 고난과 아픔으로 힘겨워하시는 주님을 본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강도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믿었고 그 나라를 기대하였다.
2) 이 사람이 가진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을 보라.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마음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우리는 모두 성한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공동기도서)
3) 이 사람이 다른 강도에게 보여준 형제 사랑이 어떠하였는지 보라.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은혜는 사람을 이기심에서 일깨워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도록 한다. 신자가 가진 모든 성품은 성령으로부터 기인한다. 강도가 회심한 후 신자로서 산 삶은 너무도 짧았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회심한 강도를 예로 들면서 성령의 역사의 증거가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회심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기 전까지는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의 영혼에 대해 어떤 증거가 남기를 바라는가? 회심한 강도를 본받으라. 좁은 무덤에 여러분을 누인 후, 여러분이 참된 신자였음을 증명한답시고 신앙의 파편을 주워 모으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라. 여러분의 회개와 믿음과 거룩에 대한 증거가 확고해서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상태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도록 하라.
네 번째 교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가 죽으면 주님과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오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땅을 떠난 신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사람의 지성으로는 헤아릴 수 없지만, 그들은 모든 수고와 슬픔과 고통과 죄를 벗고 복된 안식을 누리고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양은 목자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좋은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일생동안 자신을 이끄신 분과 함께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저는 낙원이 어떤 곳인지는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가 그곳에 계시는 것만 봐도 그곳이 얼마나 즐거운 곳인지 알 수 있다.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신자는 무덤에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낙원에 이르는 것이다.(요약자)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계신다.
다섯 번째 교훈은 각 영혼이 맞이하게 될 영원한 분깃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은 ‘오늘’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윗은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뿐”이라고 말했다(삼상20:3). 낙원 혹은 지옥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단 한 걸음이다. 이 땅을 떠난 성도들은 마지막 숨을 거둔 바로 그 순간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떠나 보낼 준비를 마칠 바로 그때, 그 영혼은 이미 그리스도의 임재를 누리고 있다. 그들을 위해 슬퍼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슬퍼해야 한다.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 성도는 즉시 이 땅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보다 더 존귀해지고 그들이 누렸던 어떤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린다.
적용)
1. 겸비해진 마음으로 회개하는 죄인이 있다면, 회심한 강도가 어떻게 하였는지를 보고 그와 같이 하라.
2. 자긍하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있다면, 회심하지 않은 강도가 어떻게 자기가 살아온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였는지 보고 그와 같이 되지 않도록 하라. 주님을 아직 찾을 수 있을 때 찾으라.
3.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자가 있다면, 세상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표준으로만 만족하지 말라. 회심한 강도와 같은 마음을 품으라.
4. 먼저 세상을 떠난 신자 때문에 마음이 슬픈 사람이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누구의 손에서 얼마나 복된 상태로 있는지 보라. 그러므로 이기적인 슬픔에서 벗어나라. 오히려 그들이 모든 문제에서 풀러나 안식에 들어간 것으로 기뻐하라.
5. 연로한 그리스도의 종이 있다면, 여러분이 얼마나 본향에 가까이 와 있는지 보라. 조금만 더 수고하고 조금만 더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만왕의 왕께서 여러분을 데려오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즉시 모든 싸움을 마치고 모든 평화 가운데로 들어갈 것이다.
제 12 장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 분
“(37)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막 4:37-40)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원리들을 잘 아는 것도 좋지만, 그리스도 그분의 얼굴을 뵙고 그분의 아름다움과 그분을 친근히 아는 것은 더욱 좋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탁월한 거룩에 이르는 비결이다. 복음서가 기록된 이유는 그리스도를 더 잘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4복음서를 통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네 번이나 서술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기 바란다면, 우리 영혼의 기초를 반석이신 그리스도께 두어야 한다. 날마다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해 필요한 성령의 은혜는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얻어 누리는 것이다. 우리의 위로자는 우리의 맏형이신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려면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혼토록 영광 가운데 지내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소중한 그리스도를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있다. 신부는 마땅히 신랑을 잘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1.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해서 인생이 겪는 슬픔과 어려움이 우리를 비껴가지는 않는다.
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다 믿지 않고 있을 때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신실한 소수의 양 무리가 곤경에 처하도록 목자는 내버려 두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나섰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시련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성공과 부, 건강, 죽음이나 슬픔을 겪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누구든지 자신의 택한 종이 되면 많은 어려움을 겪고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스도와 고난, 그리스도와 긴장, 그리스도와 폭풍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모든 어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따라가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따라가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매서운 겨울바람은 어느 나무가 상록수인지를 금방 드러내 준다. 고난과 폭풍도 이와 같다. 누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고, 누구의 신앙고백이 말뿐인지를 밝히 드러내 준다.
어려움이야말로 우리 마음에 들러붙어 있는 찌꺼기를 녹여 없애는 유일한 불로 드러날 때가 많다. 고난은 선한 일에 많은 열매를 맺도록 우리를 다듬는 위대한 정원사의 손에 들린 전정가위이다. 햇빛만으로는 우리 주님의 논밭에 추수를 가져올 수 없다. 비바람과 폭풍의 날도 무사히 견뎌 내야 한다. 그리스도를 섬기고 구원받기 원한다면 그분의 방식대로 해야 한다. 자기 몫의 십자가와 슬픔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하라. 그분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 분이시니 안심하라.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시107:7)
2.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다.
“고물에 베게를 베고 주무셨”다 - 그분은 모든 것에 있어서 성부와 동등하셨고 영원한 하나님이셨다. 동시에 죄를 제외한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이 되신, 혈과 육을 가진 참 사람이셨다. 우리처럼 배고프고 목말랐으며 지치고 힘들었고, 우리처럼 슬퍼서 우셨다.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신 것만큼 완전한 사람이셨다는 사실에 깊은 위로를 얻는다. 그분은 능력있는 구주이실 뿐 아니라 함께 아파하는 구주시다. 그분은 구원에 능한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아는 사람의 아들이시기도 하다. 두 본성이 연합된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에 대한 놀라운 증거이다. 우리의 연약함과 수치를 기꺼이 담당하신 구주의 놀라운 사랑, 그리고 우리의 처지와 형편 속으로 들어가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시는 데서 그분의 지혜를 본다. 만약 우리 구주께서 하나님이기만 하셨다면, 두려움 없이 그분께로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1) 가난하고 궁핍한가?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었다, 그분은 멸시하는 동네에서 사셨다. 사람들은 그분을 목수의 아들로 알았고, 설교하기 위해 배를 빌려야 했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 나귀 새끼를 빌려 타야 했고, 빌린 무덤에 장사되셔야 했다.
2)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세상에서 혼자라고 여겨지는가? 그분은 메시아로 오셨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셨다.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은 어부와 세리들이였다. 이들마저도 마지막에는 그분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3) 사람들의 오해와 중상과 핍박을 받는가?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는 자, 술고래, 세리들의 친구, 사마리아인, 정신병자, 마귀라고 불렸다. 죄가 없음에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범죄자로 정죄당하셨다.
4. 사탄이 유혹하고 끔찍한 생각을 집어넣는가? 예수님께도 성부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도록 꼬드겼다.
5) 마음에 심한 고통과 갈등이 있는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하고 부르짖으실 때 그 영혼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를 누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영혼의 피난처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라.
3.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연약하고 부족함이 많다.
파도가 배를 때리기 시작하자 제자들이 보인 행동이 바로 이 사실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믿지 못했다. 모든 권세가 그분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들은 무수한 증거를 보았고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알고 있었다. 오늘날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험이 없을 때는 아주 잘 지내면서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시험이 찾아들고 고난과 핍박이 시작되면, 자기에게 있다고 믿었던 강한 확신은 찾을 수 없게 된다. 거기에 평안과 희망과 인종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고난의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한 것이 드러난다.
분명한 사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말 그대로 절대적인 완전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항상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정의로운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다.(전7:2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본토 친척을 떠나갔으나 불신앙에 사로 잡히자 자기 처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도 두려움과 불신앙에 사로잡혀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삼상27:1)라고 말하기도 했다.
“예수님과 실제로 함께 있었던 그들은 그렇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라고 쉽게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유혹을 받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신의 연약함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다. 여러분에게 있는 믿음은 연단을 거친 믿음인가? 여러분에게 있는 확신은 시험을 통과해서 생긴 것인가? 교만한 마음이 아닌 두려운 마음을 가지라. 자긍하고 스스로 높이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법을 배우라. 여러분 안에는 지금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숨어 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해같이 밝은 곳에도 흑점은 있지만 해는 온 세상을 비춰준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다이아몬드도 흠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가치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흠은 더디게 보고, 은혜는 속히 보라! 타락이 있는 곳에서 은혜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세상 어디에서도 은혜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은혜는 여전히 질그릇에 담긴 보화이다. 사람에 대해 너무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도 거룩한 사람도 아니라는 진리에서 끝까지 물러서지 말라. 하지만 회심한 그리스도인도 연약함과 의심과 두려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4.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우리 모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1) 창조의 능력을 보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2) 섭리하시는 능력을 보라. 그분은 세상 만물을 그분의 뜻대로 질서 정연하게 운행하신다. 세상은 법을 세우고 전쟁을 벌리고 흥망성쇠를 거듭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예수님 뜻대로 통치되고 있으며 그분의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3) 예수님이 공생애 3년 동안 베푸셨던 기적을 보라. 그분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죄악을 명하여 은혜에 굴복하게 할 수 있다. 자신이 사악하고 타락한 자처럼 느껴진다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능치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위로를 얻으라.
4) 특히 지금 여러분 앞에 놓인 문제를 보라. 여러분의 마음도 풍랑에 일렁이는 파도와 같이 이리저리 휩쓸릴 때가 있을 것이다. 지난날의 죄악의 기억이 양심을 치고, 좌절과 두려움으로 소망이 없다고 생각되는가? 그분은 여러분의 마음에도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누리고 있지만, 가난에 대한 두려움, 육신의 고통, 사랑하는 이를 잃을 슬픔, 일에서 소외된 삶의 외로움에 처해 있다면 그분께 나아가 부르짖으라. 그분은 여러분을 새롭게 해주실 것이다. 다른 어떤 것이라도 의심이 생기면 의심하라.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5. 주 예수께서는 믿음이 약한 사람을 참을성 있고 부드럽게 대하신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 크게 책망하는 법도 없이 단지 이 두 가지를 물으신다. 우리 주님의 공생애동안 제자들은 단 한 번도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눅9:45, 18:34) 베드로는 주님의 고난의 길을 만류하기까지 했다. 그들에게서는 제자로서 전혀 걸맞지 않은 생각과 행실이 자주 드러났다.(막9:34, 6:52, 눅9:54)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땅히 깨어 기도해야 함에도 잠만 잤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그 순간에는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수제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해가며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 그들은 과연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눅24:25) 이런 제자를 대하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은 변함없는 동정과 긍휼과 친절과 부드러움과 오래 참음과 사랑이었다. 부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시고 40일을 함께 지내시기까지 하셨다. 승천하시면서까지 약속으로 그들을 격려하셨다.(마28:20) 우리로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다 자란 양은 물론 어린양도 돌보신다. 때때로 사랑으로 훈계하고 책망도 하실 것이나 결코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건강한 양뿐만 아니라 병약한 양도 돌보신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이름을 성령이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시는지 참으로 경이로운 장이다. 그들이 가졌던 믿음의 위대함은 칭찬하고 기념하지만 그들에게 있었던 많은 허물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구원은 갈망하지만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세상에서 나오라. 제자들을 참으신 바로 그 주께서 여러분을 용납하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여러분이 넘어지면 그분이 일으키실 것이다.
이미 회심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주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본받고 다른 이들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하기를 배우라. 이제 갓 믿기 시작한 사람들을 온유로 대하라. 뒤로 물러나 침윤에 빠진 자들을 온유로 대하라. 안타깝게도 많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인의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 젊은 회심자의 손을 이끌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돕는 바나바의 일을 할 신자가 너무 적다. 세상에 성령의 은혜가 필요한 이상으로 신자에게도 성령의 부으심이 절실하다.
적용)
1. 그리스도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에게는 이 땅에 속한 것이 보물일 것이다. 여러분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 그날이 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직 그분을 만날 수 있을 때 그분을 찾으라. 여러분을 절대 만족시킬 수 없는 세상과 절연하고 썩지 않을 보화를 찾으라. 가롯 유다의 진짜 죄는 주님께로 다시 돌아와서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믿지만 지금보다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선 주 예수님은 실제로 살아 계신 인격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항상 기억하고 그분을 인격으로 대하라.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구원하신 주님을 이야기하기보다 자신의 구원을 더 많이 이야기한다. 그리스도의 인격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다.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다. 복음을 항상 그 목전에서 살아가야 할 살아계신 전능자에 대한 계시로 여기라.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실제로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임재로 충만한 천국과 그곳에서 그분을 친히 뵙는 영광을 맛보기 위한 최상의 준비는 이 땅에서 살아 계시는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친교를 누리는 것이다. 인격과 관념처럼 별개인 것도 없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전혀 변치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구주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팔레스타인 땅 곳곳을 다니셨던 그분의 여정에 함께하라. 이런 생각을 통해 여러분은 날마다 분명한 신앙의 실제와 생명을 갖게 된다.
바울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사람일 것이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
제 13 장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 “교회” 여러분은 이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의 지체인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교회에 속해 있는가? 이것은 심각한 물음이다.
1) 건물- 그리스도는 “내 교회”라고 말씀하신다.
이 교회는 물리적인 건물이 아니다. 함께 모인 일단의 무리를 가리킨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교회가 아니다. 가시적 교회와는 달리 사람의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가장 중요한 교회이다.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참된 신자로 이루어져 있다.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그 은혜를 받아 누리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양 무리이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이것이 바로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의 구성원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똑같은 방식으로 예배하지도 않고, 동일한 치리 방식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교회의 모든 지체는 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간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가시적 교회는 이 교회에 속한 종이요 하인이다. 가시적 교회는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비계와 같고, 겨와 같다. 비계 뒤로 위대한 건물이 지어지고, 겨에 싸여 살아 있는 알곡이 자란다. 가시적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도 탁월한 가치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지체를 훈련하고 자라게 한다는 것이다.
이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유지하시고,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은혜로운 약속을 받았다. 후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끝없는 사랑과 구원하는 자비는 다 교회를 향한 것이다. 이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라고 함이 마땅하다.” 이 세상에서는 참된 교회가 소수이고 멸시를 받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 무엇보다도 영광스럽고 소중하다. 반석 위에 세워진 이 교회와 비교할 때, 솔로몬의 성전은 제아무리 모든 영광을 더한다 해도 미미하고 보잘 것 없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 외에 그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
2) 건축자 - 그리스도는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선언하신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나의 고유한 일이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복된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애로 돌보신다. 성경에 계시된 구원 계획에 따르면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의 각 지체를 거룩하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특별한 의미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받는다. 예수님은 특별하고도 탁월한 방식으로 교회의 구주가 되시고 구속주가 되신다. 합당한 때에 교회의 지체를 한 명 한 명 부르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롬1:6). 그들의 죄를 씻는 분도 그리스도이다.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1:5).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주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참된 교회를 세워 가기 위해 많은 방편들을 사용하신다. 복음 사역, 성경, 애정 어린 책망, 적절한 말씀 증거, 고난이 가져다주는 변화 등과 같은 모든 방편과 도구를 통해 영혼을 위해 계속 일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지혜로 자신의 교회를 세워가신다. 완전하고도 변함없는 분명한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을 하신다. 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 전능자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건축자이다. 나라와 가시적 교회가 자기 의무를 알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자신의 일을 계속해 가신다. 주님은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
3)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반석의 의미가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를 가리키는가? 만약 베드로를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하셨다면 “너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베드로에 대해 말씀하실 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는가?(마16:19) 반석이라 함은 그가 방금 한 훌륭한 신앙고백을 가리킨다! 오류투성이고 불안정한 사람인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부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신 강력한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관한 진리를 말한다. 예수님은 약속된 구원자이시요, 참된 보증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중보자이시라는 복된 진리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바로 이 반석을 기초로 서 있는 것이다. 유일한 이 기초 위에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연결되어 있다. 여러분이 하나뿐인 참된 교회의 지체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면 자신이 자리한 기초를 보라. 자기 영혼이 반석 위에 있는지 주의해서 보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를 결코 마지막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모래 위에 지은 궁전보다, “반석 위에” 세운 움막에서 발견되는 것이 몇 천 배나 나을 것이다.
- “음부의 권세” 지옥과 마귀의 권세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시9:13,107:18,사38:10). 지독한 원수인 마귀와 이 세상 주관자들의 공격에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끊임없이 시달렸다. 머리를 상하게 하지 못할 것을 알고 발뒤꿈치라도 상하게 하려고 애썼다. 신자에게서 천국을 빼앗지는 못해도,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라도 괴롭게 하려고 안달이었다. 음부의 권세와의 전쟁은 지난 6천 년 동안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겪어 왔던 일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지난 6천년 동안 불타면서도 아직도 다 살라지지 않은 떨기나무였다. 광야로 도망갔지만 아직도 삼킴을 당하지 않은 여인이었다(출3:2,계12:6,16). “음부의 권세”는 쉴 새 없이 그리스도의 백성을 공격해 왔다.
1) 음부의 권세가 드러내는 적개심에 놀라지 말라. “너희가 세상에 속했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것이나”(요15:19). 세상과 마귀가 존속하는 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용사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존속하는 한,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루터). 2) 음부의 권세가 드러내는 적개심에 대비하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3) 음부의 권세가 드러내는 적개심을 잘 견디라. 결국 여러분에게 유익으로 드러날 것이다.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고, 깨어 겸손하게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게 할 것이다. 4) 음부의 권세가 드러내는 적개심에 낙심하지 말라.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 싸움이 없이는 구원하는 기독교도 없다!
-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건축자가 영광스러운 약속을 주신 것이다.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 지옥의 모든 권세가 결코 자신의 교회를 넘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사람이 세운 모든 제국들은 다 사라지고 없지만,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아직 건재하다. 가장 강력한 도시도 돌무더기가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 초기에 세워졌던 많은 교회가 부패하고 멸망했다. 이 교회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자기들의 감독과 공의회와 예식과 가르침과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았고 복음에 굳게 붙어 있지 않았다. 주 예수께 합당한 직분과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 촛대가 옮겨졌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여전히 든든히 서 있다. 사람이 보기에는 참된 교회가 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동안 참된 교회를 내려친 많은 해머는 부러졌고, 앞으로도 계속 교회를 내려치는 해머가 있다면 동일한 운명이 될 것이다.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2:8).
이 약속은 참된 교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지체들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크나큰 절망과 불안에 빠져 자기가 얼마나 안전한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슬픈 일이지만, 다윗과 베드로가 넘어졌던 것처럼 넘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결국 강한 자뿐 아니라 약한 자까지도, 성숙한 자뿐 아니라 어린 자까지 모두 안전하게 본향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제야 끝이 난다. 내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행성이 제 궤도를 운행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가?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신자의 구원도 방해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고 중요하지 않은 돌이라도, 반석 위에 세운 교회의 산 돌은 결국에는 구원을 얻어 궁극적인 안식으로 들어간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신비로운 몸에서는 뼈 하나라도 부러지는 일이 없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영원한 언약으로 하나님과 연합한 그들은 결코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양 무리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18:19). 참된 교회는 이 땅의 알곡이다. 체질과 키질을 당하여 이리저리 흔들릴 수는 있어도, 단 한 톨이라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가라지와 쭉정이는 불타 없어지겠지만, 알곡은 곳간에 들여질 것이다. 앞날에 대한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십시오. 정치인이 정한 법이나 양의 탈을 쓴 이리의 계략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
거룩한 삶에 힘쓰라. 여러분이 속한 참된 교회에 걸맞은 삶을 살라. 하늘 시민답게 살라. 사람 앞에 빛을 비추어, 세상을 유익하게 하라. 여러분이 누구의 사람인지, 누구를 섬기는지 알게 하라. 용감하게 살기를 힘쓰라.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라. 기쁘게 살기를 힘쓰라.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복된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답게 살아가라.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생각보다 천국이 우리에게 도래한다는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야 한다. “반석위에 세운 교회에 속한 모든 자는 복되도다!”
제 14 장 이 땅의 교회를 향한 경고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22).
이 구절은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번이나 반복된다. 이 일곱 편의 서신이 교훈하는 핵심 진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종말의 때를 위한 것이다.
1. 주 예수께서 일곱 편의 모든 서신을 통해서 교리와 실천과 경고와 약속을 하고 계신다.
거짓 교인들에게 있는 불경건하고 일관성 없는 행실과 거짓 교훈을 지적하고 신랄하게 책망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때로는 교회의 믿음과 인내와 수고와 견인을 칭찬하시고, 이러한 은혜를 드높이시는 것을 본다. 회개하고 돌이켜 첫사랑을 회복할 것과 그리스도를 향한 새로운 열심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서신도 교회 정치나 의식을 언급하지 않는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하는 바울의 고별인사에도 성례나 교회 정치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거룩한 삶이다. 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먼저 “거듭나야” 하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성령이 이루신 “새 창조”가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각각 편지를 주실 때 바로 이런 것을 생각하셨다.
신앙은 전적으로 나와 그리스도 사이의 개인적인 일이다.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어찌 되었든지, 그것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 그리고 내 마음과 성령 사이의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성경적이다. 이것만이 하나님이 복주시는 유일한 가르침의 체계이다. 회개와 믿음과 회심과 성령의 사역을 목사의 중대한 설교 주제로 삼는 교회만큼 부흥하는 교회도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2 모든 서신들마다 주 예수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하신다.
주 예수께서 어떤 교회에는 “내가 네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 하시고, 다른 교회에게는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고 하시며, 또 다른 교회에게는 “네 사랑과 섬김과 믿음”을 안다고 하신다. 주목할 말씀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이다. “네 신앙고백과 네 바람과 네 결심과 네 소원”을 아는 것이 아니라, “네 행위”를 안다고 하신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행위는 너무나 중요하다. 물론 행위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행위는 의롭게 하지도 못한다. 죄를 없이할 수도 없다. 행위 덕분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행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조심하라. 그는 정말 끔찍하게 속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교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행위는 신앙의 증거라는 사실이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면, 일상의 삶의 방식과 행실에서 그 사실이 드러나야 한다. 아브라함과 라합의 믿음은 행위로 입증되었다. 행실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으면서 말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딛1:16).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눅6:44).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15:3). 아무리 은밀하고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여러분의 모든 행실을 예수께서 다 보고 계신다.
1) 주 예수께서는 회심하지 않고 믿지 않는 모든 영혼의 행위를 아시며, 언젠가 그들을 징벌하실 것이다. 흰 보좌가 서고 책들이 펼쳐지면,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악인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계20:12-13).
2) 주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의 행위를 알고 계시고, 무게를 달아 보신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삼상2:3). 그분은 모든 신자가 한 행동의 동기와 원인을 아신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사람의 칭송을 위해 한 것은 또 얼마나 되는지 다 알고 계신다.
3) 주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의 모든 행실을 아시고, 상을 베푸실 것이다. 그분의 이름으로 행한 말 한마디, 행실 하나도 간과하지 않으신다.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3:8). 예수님은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순수한 동기에서 행한 일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간파하신다. 그분의 눈은 가장 미미한 성령의 열매에서도 탁월함을 간파해 낸다. 여러분이 행한 모든 일의 찌꺼기에서도 황금가루를 골라내신다. 쭉정이 더미에서도 알곡을 가려내신다. 여러분이 흘린 모든 눈물은 그분의 눈물 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선행의 노력이 아무리 미미해도 그분의 책에 빠짐없이 다 기록되어 있다. 그분의 이름으로 건넨 보잘 것 없는 냉수 한 잔에 대해서도 상을 받을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하찮게 본다 해도, 여러분의 사랑의 수고와 역사를 그분은 결코 잊지 않는다.
3 모든 서신이 끝까지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주 예수의 약속을 담고 있다.
“이기는 그에게”, 오직 “이기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약속이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군사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 죄와 세상과 마귀를 대적하는 그리스도의 전쟁에 필연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싸우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서약을 저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영적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바라기만 하면 무기는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엡6:13-17).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탁월한 리더가 있는데, 그분은 구원의 대장 예수이다. 그분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최고의 보급품인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를 공급받아 넉넉히 싸워 간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훌륭한 보상인 영원한 영광이 주어진다.
여러분의 영혼이 깨닫기를 바라는 것은, 참된 신자는 단순히 군사일 뿐 아니라 승리하는 군사라는 사실이다. 죄와 세상과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겠다고 고백할 뿐 아니라 실제로 싸워 이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분명한 표지이다. 오직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용사의 길을 간다. 오직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자기 영혼의 원수와 담대히 마주하고 싸워 이긴다.
승리는 여러분이 구원받는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증해주는 유일한 증거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과 싸워 이기고 있는가? 여러분 마음의 정욕과 기질과 욕구를 이기고 있는가? 마귀를 대적하여 물리치고 있는가? 죄와 마귀와 세상을 이기든지, 아니면 그것에게 종노릇 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어중간한 길은 있을 수 없다. 이기든지 지든지 둘 중 하나이다.
신자의 싸움은 너무나 힘든 싸움이다.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인내로 어려움을 이겨야 한다. 천국에 이르고자 한다면, 날마다 싸우기로 결심해야 한다. 사람들이 고난해 낸 천국을 가는 지름길이 있을 수 있지만, 선한 옛길인 초대교회의 기독교는 십자가의 길, 투쟁의 길이었다. 신자는 죄와 세상과 마귀를 대적하고 물리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저 옛날 성도가 걸어갔던 길이다.
그들의 이름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밝게 빛나고 있다.
1) 모세는 이집트에서 죄악의 즐거움을 누리기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기뻐했다. 이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는 쾌락에 대한 사랑을 이겼다.
2) 미가 예언자는 자신이 진리를 말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아합 왕 앞에서 듣기 좋은 말하기를 거부했다. 이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는 편한 길 가기를 거절했다.
3) 기도를 계속하면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이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는 사망의 두려움을 이겼다.
4) 주님의 부름을 받는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즉시 세관을 떠나 주님을 따라갔다. 이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는 돈에 대한 사랑을 이겼다.
5) 공의회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말했다(행4:20). 이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겼다.
6) 바리새인 사울은 전도유망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핍박하던 바로 그 예수를 전파했다. 이것이 이기는 것이다. 그는 사람에게 칭찬받고자 하는 마음을 이겼다.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이들이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이들을 하나같이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면서도 이 모든 일에서 싸워 이겼다. 그들 역시 여러분이 겪는 모든 시험을 지났고, 결국 승리했다. 그들은 싸웠다. 발버둥쳤다. 분투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이들이 승리한 비밀은 무엇인가? 그들의 믿음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그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모든 싸움을 통해 이들을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예수님은 한 번도 그들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았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계12:11). 이제 여러분의 차례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이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라.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참 두렵다. 그들은 도무지 싸우지도 않고 이기지도 못한다. 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공격하기는커녕 그리스도의 원수와 타협한다. 죄와 싸우지도 않는다. 경고하건대. 이렇게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 천국에 이를 길도 아니다.
정기적으로 복음을 듣는 많은 사람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참 두렵다. 복음의 교리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여러분이, 오히려 그 능력에 있어서 죽은 자같이 될까 봐 두렵다. 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실제로 싸우는 일은 완전히 제쳐 둔 채, 자신의 연약함과 타락에 대한 모호한 하소연만 주절거리며 그리스도에 대한 감상적인 표현에 젖어 있을까 두렵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이 선 자리에서 빛을 바라보라. 싸울 담력을 가지라. 주님이 곧 오신다. 밤이 거의 지났다. 그분의 팔, 그분의 은혜, 그분의 성령이 여러분을 붙들어 줄 것이다. 용기를 내라. 낙담하지 말라. 한두 번 싸움에서 지면 또 어떤가? 그렇다고 모든 전쟁에 지지는 않는다. 때로 힘에 겨워 지치면 또 어떤가?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곱 번 넘어지면 또 어떤가?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마귀를 대적하라. 여러분에게서 멀리 달아날 것이다. 용감하게 세상에서 나오라. 세상은 여러분을 놓아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여러분은 넉넉히 이기는 자로 발견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긴다.”
적용)
1) 오직 세상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에게 경고한다.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을 잘 살펴보라.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원수이다. 여러분은 아랑곳하지 않겠지만, 모든 것이 다 기록되어 있다. 두려움으로 떨며 돌이키라.
2) 형식주의자와 자긍하는 사람에게 경고한다.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중생의 증거, 새로운 마음의 증거, 성령의 역사가 있는가? 두려움으로 떨며 돌이키라.
3) 모든 부주의하고 경박한 교인에게 경고한다. 자기 영혼을 소홀히 여겨 지옥에 가지 않도록 하라. 마귀나 천국이나 지옥 같은 것은 전혀 없는 것처럼, 미소 띤 얼굴로 항상 신사답게 또는 요조숙녀같이 점잖게 행동한다. 깨어나 영원한 실재를 똑바로 보라. 두려움으로 떨며 돌이키라.
4) 구원받기를 바라는 모든 이에게 경고한다. 세상의 신앙 기준으로 만족하지 말라. 이 일곱 편의 서신을 통해 예수께서 칭찬하시는 것은,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세상은 도무지 위험하게 보지 않는다. 세상의 기독교로 만족하지 말라. 두려움으로 떨며 돌이키라.
5) 주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에게 경고한다. 작은 신앙으로 만족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장 봐주기 힘든 것은 작은 은혜, 작은 회개, 작은 믿음, 작은 지식, 작은 사랑, 작은 거룩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내적 평화를 더 누리기를 바란다면, 작은 신앙으로 만족하지 말라.
오히려 해마다 더 큰 진보를 나타내기를 힘써야 한다. 은혜에 더 자라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더 자라가고, 자기를 아는 일과 겸손에 더 자라가고, 하늘에 속한 마음과 영성이 더 자라가고, 우리 주님의 형상에 더 자라가야 한다.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자.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한 신앙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두아디라 교회처럼 거짓된 교리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하자. 사데 교회처럼 죽은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되도록 힘쓰자. 이미 가진 것을 힘써 지키고, 더욱더 풍성히 얻도록 힘쓰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힘쓰자. 우리의 고유한 특징은 고상한 학문과 문학적 지식에 능하고, 세상을 잘 알고, 즐거움을 누리고, 사업에 능한 것과 같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데 있다(딤후6:11).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가장 우선적인 일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의 제일 되는 목적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이렇게 살아가는 한, 우리는 모두 행복할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한, 우리는 모두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한, 우리는 모두 세상에 선한 증거를 남기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한, 교회들에게 하시는 성령의 말씀이 결코 헛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제 15 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6)
그리스도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던지셨던 아주 의미 있는 물음이다. 이 물음이 던져진 지 1800년 이상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장 날카롭고 의미심장한 물음으로 남아 있다.
1. 참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향해 갖는 특별한 정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9:6) 이 땅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마음과 생활에 자리한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자기 영혼이 꼭 필요로 하는 하나님이신 구주임을 알고 그분께 자신을 맡긴다. 그리스도야말로 그가 가진 신앙의 초석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알고 신뢰하고 순종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을 사랑한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 바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빠져나갈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 ‘믿지 않는 사람’이 위험한 것 이상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위험도 크다. 분명한 지식이 부족해도 구원받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할례 받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그들을 보시고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요8:42)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 주님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거듭해서 지었던 죄를 상기시키고 계신다. 사명을 위한 새로운 믿음의 고백을 이끌어 내고자 하셨던 것이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신앙이 여기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하지만 사실 가장 예리한 물음이다. 가장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도 이해할 만큼 쉽고 분명한 물음이지만 신앙의 실제를 가늠할 수 있는 물음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향한 이 특별한 정서의 비밀은 무엇인가?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일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하시는 일 때문에 그분을 사랑한다. 지금도 그분은 날마다 우리 영혼의 필요를 채우시고 끊임없이 자비와 은혜를 더하시며, 그 영혼을 위해 천국에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고 계신다.
1)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구원하는 믿음과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단순한 지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지만 구원하는 믿음은 갖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사역의 원천이다. 사랑 없이는 지치지 않고 사역을 할 수도 없고 선한 일을 끝까지 잘해 낼 수도 없다. 신앙의 큰 족적을 남긴 사람들의 특징은 모두 그리스도를 사랑했다.
3)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면서 특별히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이다. 원죄 믿음 칭의 성화같은 문제는 아이들에게 어려울 수 있지만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아이들도 받아들일 수 있다.
4)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모든 종류의 그리스도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하나로 만나는 공통, 구원받은 모든 영혼들이 천국에서 갖는 두드러진 표지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일 것이다. 이 땅에서 신랄하게 논쟁했던 교리적 특징들은 그리스도께 빚진 마음 하나로 덮어지게 될 것이다.
2.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독특한 표지들
1)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즐겁다. 평생토록 날마다 그분을 생각한다.
2) 그 사람에 대해 듣기를 좋아한다. 그리스도로 넘쳐나는 설교를 좋아하고, 그분을 말하는 모임을 좋아한다.
3) 그 사람이 써놓은 글 읽기를 좋아한다. 보물처럼 지니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꺼내 본다.
4) 그를 기쁘게 하려고 한다. 그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하고 그가 인정하는 일은 천성적으로 익숙지 않은 일도 배우고 하려한다.
5) 그의 친구도 좋아하게 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벗을 자기 벗으로 여기고 같은 몸의 지체, 같은 집의 자녀, 같은 군대의 전우, 같은 집을 향해가는 순례자로 여긴다. 그들을 만나면 마치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낸 것 같이 느낀다.
6) 그의 이름과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구주의 말씀과 이름과 교회가 비방을 당하지 않도록 온갖 경건한 노력을 다한다. 필요하다면 유력자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7) 그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 구주와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날마다 그분께 드릴 말씀이 있고,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 자신의 소원과 자신의 느낌과 두려움도 말씀 드리고, 도우심도 구하고 위로도 구한다.
8) 항상 그와 함께 있기를 좋아한다.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복된 날을 갈망한다.
참된 사랑은 이와 같은 모습으로 드러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감추어진 비밀이나 난해한 사실이 아니다. 빛같이 눈에 드러나고 바람같이 귀에 들리고 열같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사랑은 숨길 수 없다. 만약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없는 것으로 확신해도 좋다.
적용)
1. 우선,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을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해 보라.
참된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어떤 개념을 아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그리스도를 알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뵈뵈, 버시, 드루배나, 가이오, 빌레몬 같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조직신학은 알지 못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하나같이 위대하고 탁월했다.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사랑했다. 오직 감정에만 의존하는 신앙을 반대하지만 전적으로 감정을 배제하는 것은 여러분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하는 것이다.
2.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빚진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치료책은 본질상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마태복음 5장을 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설명하시는 바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어 보라. 로마서 첫 두 장에서 바울이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읽어 보라. 성령의 가르침을 구하는 기도를 하며 이런 본문들을 연구하라. 여러분이 하나님께 빚진 자가 아닌지, 그리스도와 같은 친구가 필요한 채무자가 아닌지 대답해 보라.
여러분은 참되고 절박한 기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을 수 있다. 그분께 빛과 교훈을 주시고 자신을 아는 지식을 주시라고 기도하라. 영혼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도록 기도하라.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임박한 위험과 영원한 멸망 가운데 머무는 것이다.
3.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위로와 권고의 말을 받으라.
첫째 기뻐하라. 사랑하라. 참사랑이 있는 곳에 믿음과 은혜가 있다. 여러분에게 있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일하시는 표시이다.
둘째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랑이 드러나고 알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분을 위해 일하고 그분을 위해 살라.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할 만큼 다 사랑할 수도 없고,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할 만큼 다 살아 낼 수도 없다. 그분을 고백해야 할 만큼 담대하게 고백할 수도 없고, 그분을 위해 우리를 내려놓아야 할 만큼 진심으로 내려놓을 수도 없다.
부활의 아침에 가장 놀라운 일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를 더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제 16 장 그리스도 밖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엡 2:12)
1.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란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가?
1)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보응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대표적인 표지 가운데 하나이다.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가 구원자가 될 리는 만무하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라고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2)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라고 마음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 다니고,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기 때문에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와 중보에 대한 실제적이고 지식적인 확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가 하나님의 소유인지 잘 아신다. 하지만 사람은 믿기 전까지는 누가 의롭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믿음 없는 자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라고 성경은 말한다.
3) 삶에서 성령의 역사가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상은 회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새롭게 하고 성화하는 성령의 역사를 전혀 경험해 보지 않았다.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위해서는 지식과 믿음과 성령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라고는 자신이 무엇을 행한 것뿐 무엇을 믿는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하나님이 명백하게 금하신 일을 행하면서 별 거리낌이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그들은 하나님 앞에 아직 죽어 있는 사람이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다.
2.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모든 것이 바르지 않고 모든 것이 절망이다.
1) 그리스도 밖에는 하나님도 없다.
“그리스도 밖에”라고 시작한 문장을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끝맺는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감히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히12:29)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2) 그리스도 밖에는 평화도 없다.
모든 사람은 양심이 있고,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려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양심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양심에 뿌려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다 갚아 주었고, 믿을 때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가 전가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내적 평화를 누리는 위대한 비밀이다. 이것만이 모든 양심의 갈망을 채우고, 모든 고소와 비난을 막아서고, 모든 두려움을 잠재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16:33)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2:14) 이 평화는 깊은 광맥이고, 항상 흘러넘치는 강물이다.
3) 그리스도 밖에는 소망도 없다.
질병에 시달리거나 임종을 맞이할 때, 자기를 구원해 주지 못하고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하는 모호하고 공허한 느낌을 소망으로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튼튼한 뿌리와 생명과 견고함을 가진 소망은 단 하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직분이라는 위대한 반석 위에 세워진 소망이다. 이 소망은 실제적이다. 이 소망은 모든 필요를 채워준다. 이 소망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 소망 외에 다른 모든 희망은 무가치하다. 그리스도만이 선한 소망이다. “그리스도 밖에”는 희망도 없다.
4) 그리스도 밖에는 천국도 없다.
구주와 구속주 밖에 있는 사람에게 천국은 결코 천국이 아니다. 천국에 대한 모든 참된 이해의 본질은 바로 그곳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말하는 천국에 대한 모든 묘사를 통틀어 볼 때 그리스도의 임재는 천국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천국 보좌는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라고 불린다.(계5:6) 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것은 생명도, 능력도, 안전도, 기초도, 친구도, 의도 없이 천국에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처럼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도 없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처럼 도움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처지도 없다. 노아에 있어서 방주의 의미,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유월절 어린양의 의미,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 만나, 반석, 놋뱀, 구름기둥과 불기둥, 속죄양 등의 의미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혼에 대해 갖는 의미와 같다.
심판도 없고,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고, 영원도 없이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이 여러 물음은 시간 낭비일 뿐일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양심이 있어 저 무덤 너머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적용)
1. 여러분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인가?
진지한 의문과 자기 성찰도 없이 삶을 허비하지 말라. 그리스도 없이 사는 것보다 차라리 돈이나 건강이나 친구나 동료나 갈채 없이 사는 것이 수천 배나 낫다.
2. 지금까지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왔는가?
지체 말고 여러분의 삶의 방향을 바꾸기 바란다. 아직 만날 만할 때 주님을 찿으라. 그분께 나아가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3.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의 친구인가?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라.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야말로 평화와 안전과 행복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리스도 밖에” 사는 사람들의 멸망이 임박해 있다.
제 17 장 영적 목마름
“(37)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7-38)
-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중 하나가 목마름이다.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눅16:24) 육신의 목마름이 이토록 고통스럽다면 영혼의 목마름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자신의 영혼이 영원한 멸망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맛보게 될 고통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고통이다. 영혼을 삼키고 관절과 골수를 찌르는 고통이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목마름이 바로 이런 것이다. 참으로 깨어난 양심이 갖게 되는 갈망이다. 이글거리는 땅을 한없이 걸어도 도무지 쉴 곳을 찾을 수 없는 영혼을 녹아 내리는 열망이다.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를 들으면서 유대인들이 느꼈을 목마름이 바로 이것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우리도 이 목마름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 죽어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것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죽음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고 심판이 따른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되는 때조차도 우리는 얼마나 가난하고 연약하고 변덕스럽고 부족한 피조물인지 절감해야 한다. 영원에서의 우리 자리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마음 중심으로부터 깨달아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화평에 대한 ‘목마름’ 같은 것을 맛봐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변에서 이런 영적 갈망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사실 이런 갈망의 결핍이야말로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이다. 성경에서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을 묘사할 때, ‘죽은’, ‘잠자는’, ‘눈먼’, ‘귀먹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거듭남과 새로운 창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성령이 우리 몸을 거룩한 성전으로 세우시면서 제일 먼저 놓으시는 초석은, 죄와 자기 죄책을 절감하고 자기 영혼이 얼마나 헐벗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새 창조에서 가장 먼저 되는 일은 빛으로 자신의 상태를 조명 받는 것이다. 목마른 영혼을 가졌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의 영적 필요를 깨닫고 참된 영적 목마름을 느끼는 것이 바로 구원하는 기독교의 시작이다. 더 큰 목마름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
- “내게로 와서 마시라” - 이 말씀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 철학자들도 도무지 풀지 못한 난제-“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가?”-를 한순간에 해결한다. (이와 같은 황금문장; 요6:35, 6:37, 8:12, 19:9, 14:6, 마11:28) 이 말씀들을 마음에 새기고 여러분이 차거운 요단 강물에 발을 담글 때, 이 말씀들이 가진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는 목마른 영혼을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생수의 샘이라는 말이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우리의 칭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우리의 구속주요 대속자이신 예수님께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용서, 사죄, 자비, 은혜, 평화, 안식, 구원, 위로, 희망-이 넘치도록 있고 다함이 없다. 이 놀라운 샘이 터지도록 우리의 모든 죄값을 치르셨다. 죄인을 받으시는 것이 그분의 직무이다. 죄인에게 용서와 생명과 평화를 주시는 것이 그분의 즐거움이다. 본문은 온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선언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1. 목마름을 해갈하고 편히 쉬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리스도 그분께로 가야 한다. 교회에 출석하고, 정해진 규례를 따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대면해야 한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 등에 짊어진 짐을 벗겨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직접 그리스도를 대면해야 한다.
2. 실제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 생각만 하고 살다가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반드시 “일어나 나아가야 한다!” 만약 탕자가 생각만 하고 그쳤다면, 아마 평생 돼지우리에서 살았을 것이다.
3. 목마름을 해갈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바라는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단순한 믿음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회개하고 통회하는 상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믿음은 생수를 우리 입술로 가져가는 유일한 손이다.
목마른 자에게 주어진 이 치료책이 얼마나 단순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이 치료책을 받아들이도록 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걸림돌이다.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영적 질병을 치료할 유일한 처방이다. 이 땅과 천국을 잇는 유일한 가교이다. 모든 사람들은 모두 이 생수를 마셔야 한다. 교화사가 배출한 성도들과 순교자들을 보라. 이들은 하나같이 날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와 “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 피는 참된 음료”임을 발견한 사람들이었다.(요6:55)
영적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위대한 처방이 널리 알려진 땅에 살고 있음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성경을 펴서 볼 수 있고, 복음이 선포되고 풍성한 은혜의 방편을 누릴 수 있는 땅에 산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우리에게 유익과 격려가 되는 보배로운 ‘의무’와 ‘약속’이 성경에 얼마나 많은지 알고, 그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한지를 헤아리는 그리스도인은 극히 드물다. 성경의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영혼을 대하실 때 즐겨 사용하시는 위대한 방편이다.
사람들의 약속은 성취될지 여부가 불확실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분은 전능하시고, “뜻이 일정”하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약1:17) 하나님의 보고에는 모든 상황에 적합한 ‘의무’와 ‘약속’이 있다.
본문의 그리스도의 약속은 특별히 영적 목마름 가운데 있는 사람, 그리고 안식을 찾아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약속의 말씀이다.
1. 지금 주님께서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은, 자기 영혼의 부족함을 채울 모든 것을 풍성히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속사람에게는 결코 마르지 않는 샘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 속한 것’에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사망과 심판과 영원에 대한 영적 두려움마저 힘을 잃게 될 것이다.(요16:15) 물론 자신에게 있는 연약함과 마귀의 유혹 때문에 어두움과 의심의 때를 지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가장 비천하고 연약한 신자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나아와서 마시자마자 흐르기 시작하는 “생수의 강”이다.
2. 다른 영혼을 위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것은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하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한 사람의 회심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반드시 다른 사람의 회심으로 이어진다. 회심한 이후의 삶이 너무도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심한 강도조차도 수많은 영혼에게 복의 근원이 되지 않았는가?
1) 이 땅에서 “생수의 강”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있다. 그들의 말, 설교, 가르침 등 모든 것으로 자신에게 있는 생명수를 이웃으로 흘려보내는 통로가 된다.(루터, 윗필드, 웨슬리)
2) 죽음을 맞으면서 “생수의 강”이 되는 신자가 있다. 가장 격심한 고통 가운데서 드러나는 담대함, 화형대에서조차 굽히지 않는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신뢰. 무덤으로 내려가는 순간에서조차 흔들리지 않는 평화 등. 이런 모습에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받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었다. 삼손과 같이 죽는 순간에 그들이 이룬 일은 그들이 일생 해온 일보다 휠씬 위대했다.
3) 죽은 후에 “생수의 강”이 되는 신자가 있다. 이들이 썼던 저서가 세상 곳곳으로 흘러 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행동과 행실을 통해 “생수의 강”으로 드러나는 신자가 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자기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일관된 삶을 잠잠히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말로 말미암지 않고” 이긴 자들이다.(벧전3:1)
믿음으로 나아가 그분을 따를 때, 오직 여러분 한 사람의 영혼만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항상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일어나 말하고 기도하고 일하라.
적용)
1. 영적 목마름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자기 영혼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 자신이 지나온 길바닥에 깔린 석재와 같은 냉랭한 마음으로 와서는 벽의 대리석 흉상처럼 아무 감동 없이 무정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직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저는 결코 누구도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눕거나 움직이지 못할 때가 오면 어쩔 수 없이 내면을 들여다보고 여러분의 영혼의 필요에 귀 기울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양심을 깨우는 큰 종소리가 귀에 들어오게 될 때, 사람들이 자신의 목마름을 깨닫고 안식을 찾아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될 것이다.
2. 지금 여러분의 양심은 깨어 일하고 있는가? 영적 목마름이 있는가? 그렇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초대에 귀 기울이라. 그냥오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 이미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안도를 얻었는가? 날마다 이 샘에 가까이 머물수록 여러분 안에서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을 더 느끼게 될 것이다.(요4:14) 복 받은 사람이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여러분이 열망하는 위로를 얻을 수 없다. 완전한 행복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마귀도 아직 완전히 결박당한 것은 아니다. 그분이 다시 오시면 완전한 해갈을 얻게 될 것이다. 좁은 길의 정상은 결국 우리 것이 될 것이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감사하게 될 것이다.
제 18 장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3:8)
1.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 한 말을 살펴보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 이름난 교회들을 개척하고, 영감을 받아 14편의 서신을 쓰고,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고후11:5, 12:11),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던” 사람(고후11:23),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준다고 말한 사람(고후12:15),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사람(빌1:21)이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회심하지 못한 사람은 사도의 겸손한 자기 평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본문의 이런 표현은 여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전15:9), “죄인 주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더 많은 부족함과 연약함을 보았다는 것이다. 마음에 실제적인 은혜가 더 부어질수록 죄에 대한 자각은 더 깊어진다. 성령이 영혼을 더 조명하실수록 자신의 연약함과 더러움과 어두움을 절감한다. 아브라함, 야곱, 욥, 다윗, 세례 요한 등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겸손하게 말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세대를 통틀어 교회사의 모든 위대한 성도들은 항상 겸손의 옷을 입었다.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이 천국을 향해 내디딜 첫걸음은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겸손한 자기 평가이다. 진실로 자신이 ‘악하다’고 절감하기까지 진정한 선이나 구원하는 기독교 신앙을 도무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겸손을 구해야 한다. 세상에 태어나는 피조물 가운데 아담의 후손만큼 의존적인 존재가 또 있을까? 아담의 후손만큼 관심과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도 없다. 가장 지혜롭다고 하는 인간이 아는 것이라고 해봐야 아주 미미한 정도일 뿐이다,(욥8:9) 온 땅과 하늘 그 어디에도 인간만큼 겸손해야 할 피조물은 없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우리의 바른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배우고 겸손할수록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보라.(빌2:5-8) 천국에 가까이 이른 사람일수록 더욱더 겸손해진다. 수많은 성도들이 임종의 순간에 남긴 한결같은 기록은, 천국의 빛이 비추는 임종의 순간만큼 자신의 죄를 적나라하게 대면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빚진 자라는 사실을 깊이 절감하는 때도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열어 놓으신 휘장 안으로 들어서서 이제까지 지나온 발걸음을 뒤돌아보게 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겸손이 얼마나 아름답고 절실한 것이었는지 완전히 알 것이다.
2. 사도 바울이 자기의 목회적 직무에 대해 한 말을 살펴 보자.
“은혜의 선물을 따라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 바울이 자신의 직무를 설교자, 복음 전도자, 하나님의 대사,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라는 것이다.(딛1:3, 딤후1:11, 4:2,17, 딤후1:11) 바울은 목사가 해야 할 일이 아무리 다양해도 그의 최우선적인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설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수신자들이 깨닫기를 바랐던 것이다.
1) 목사는 성경이 정한 직무이다. 디모데서와 디도서를 잘 읽어보라.
2) 목사의 직무는 가장 지혜롭고 유용한 하나님의 성직 서임 가운데 하나이다. 목사의 직무를 통해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규례와 은혜의 방편이 일상적으로 시행된다. 목회는 죄인을 깨닫게 하고 성도를 세우는 일을 끊임없이 도모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목사직에 임명함으로써 온전히 헌신할 일꾼으로 세워 정하신 방편을 통해 일하신다.
3) 목사의 직무는 영예로운 특권이다. 왕의 대사가 되는 것은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가? 하물며 만왕의 왕의 대사가 되어 갈보리에서 이룬 승리의 소식을 선포하는 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러운 것인가? 주님을 직접 섬기고, 주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이 복 주시기만 하면 이 일이 영원에까지 이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이다. 다른 수고와 노력은 하나같이 썩어 없어질 면류관을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목사들은 썩지 않는 것을 위해 일한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든 받지 못하든 신실한 대사는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목사들을 위한 기도와 간구와 중보를 결코 잊지 말라. 그들의 필요가 채워지고, 그들이 온전한 믿음과 성결한 삶을 지켜 가고, 자신의 가르침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살피도록 기도해야 한다.(딤전4:16)
목사의 직무가 존귀하고 유익한 것은 분명하지만, 깊은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목사는 깨어 영혼들을 살펴야 한다. 만약 목사의 불성실함으로 영혼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값을 그 목사가 물게 하실 것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주님의 메시지를 남김없이 다 전해야 한다. 진리가 조금이라도 가감하여 전한다면, 이는 불멸하는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생명과 사망이 설교자의 혀에 달려 있다. 목사만큼 영적으로 위험한 사람도 없다. 유혹이 많고 시험이 많은 시대에 교회마다 믿음에 견고하고 사자같이 담대하고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목사와 집사가 부족하지 않도록 기도하라.
3, 자신이 선포하는 설교의 위대한 주제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이 한 말을 살펴보자.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 - 십자가의 피를 통해 평화를 얻은 바울이 다른 사람에게도 항상 이 십자가의 도를 전했을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근거도 없는 도덕을 칭송하느라, 미사여구로 인간에 대해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을 늘어놓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문제의 근원으로 나아가, 그들이 얼마나 절망적인 죄인인지, 죄로 찌든 세상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위대한 의사가 누구인지를 밝히 보여주었다. 어디를 가든지 그는 서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선포의 중심은 항상 십자가 못 박히신 그리스도였다.
본문의 이 표현은 여기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혜에 빚진 자인가를 항상 기억하며 그 마음을 말로 표현한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 필요한 모든 것을 무한히 채우고도 남을 만한 무엇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았던 것이 틀림없다. 분명한 것은 당시 바울만큼이나 지금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풍성함을 누리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전히 값없이 나누어 주신다. 이것은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이 받아 누릴 기업이다.
1) 그리스도의 인격에는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이 있다. 완전한 사람과 안전한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한 연합을 이루고 있다. 무한한 능력과 무한한 동정이 우리 구주 안에서 만나고 연합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능히 구하실 수 있고, 사람으로서 우리의 머리와 대표자와 친구가 되시기에 합당하다.
2)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통해 이루신 역사에는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이 있다. 죄를 위한 속전, 화해, 구속,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모든 뜻을 이루었다.
3)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담당하시는 직무들에는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이 있다.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 보증, 제사장, 조정자, 감독, 의사 대장, 왕, 앞서 가신 자, 맏형, 영혼의 신랑이시다.
4)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일컫는데 사용된 모든 이름과 직함에는 말할 수 없는 풍성함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의 어린양, 생명의 떡, 생명수 샘, 세상의 빛, 양의 문, 길, 포도나무, 반석, 머릿돌, 그리스도인의 예복, 그리스도인의 제단 등. 이런 이름이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부요하고 복된 진리가 가득 담긴 것으로 드러날 것이 분명하다.
5) 사람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는 특질과 속성과 성향과 의도에는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이 있다. 그리스도께는 죄인을 향한 넘치는 자비와 사랑과 긍휼, 가장 합당하지 않은 자마저도 구원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는 무한한 권세, 회개하고 믿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자를 기꺼이 받으시는 넘치는 자원함, 가장 완악한 성품이라도 성령으로 변화시키는 무한한 능력, 모든 어려움 가운데 그분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향한 끝없는 연민, 죽은 자를 일으키고 자기 백성을 불러 모아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실 풍성한 영광이 있다. 누가 이 풍성함을 측량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이 풍성함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다. 아무리 깊이 파고 들어가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광산이다. 아무리 길어 올려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실천적 적용)
1. 자신이 하나님의 목전에 허물이 많은 죄인이라는 위대한 근본 진리를 발견했는가? 천국으로 가는 첫 걸음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한 불완전과 타락을 아는 것이 구원하는 신앙의 근본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한 일을 가장 무가치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최상의 그리스도인이다.
2. 그리스도의 목사들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진실하게 죄를 드러내 주고, 양심을 아프게 하는 신실한 목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드러운 말로 죄를 덮어 주고 지적인 기호를 충족시켜 주는 목사들을 좋아 한다. 이들은 경고의 나팔을 불고, 임박한 진노를 말하는 그래서 자신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목사를 싫어한다.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친구이다.
3. 마음과 생각에서 그리스도의 자리는 어디인가? 용서, 평화, 양심의 안식, 죽음을 맞으면서 누리는 희망, 천국 이 모든 것이 이 대답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 어렴풋하게만 본다. 그분께 있는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을 다 헤아릴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주님을 더 알기 위해 힘쓰라.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면, 우리 마음은 이렇게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을 풍족히 가진 나는 이제 더 이상 부족함이 없다. 나는 그리스도로 배불렀다. 나는 그리스도를 가졌으니 나는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을 가진 사람이다”
제 19 장 때를 분별함
“그들은 때를 잘 분간할 줄 알고”(대상 12:32)
사울이 죽자 일부 이스라엘 지파는 누구를 왕으로 섬겨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었다.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는 사람 중에는 특히 잇사갈 지파의 자손이 많았다. 성령은 특별히 이들을 칭찬하고 계신다. “그들은 때를 분간할 줄 알고”
자신의 사사로운 일에만 사로 잡혀 장차 교회와 세상에 닥칠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은 비참한 일꾼이요 불쌍한 그리스도인이다. 주님은 성경과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 다음으로 우리시대에 대해 잘 알기를 원하신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예비하리요”(고전14:8)
1, 온전한 기독교 진리와 성경의 신적 권위를 조금도 굽힘없이 담대하게 주장하고 지켜 가는 것이다.
계시된 성경의 진리가 지금처럼 공공연하고 무차별적으로 그리고 교묘하고 그럴듯하게 공격당한 시대도 없었다.(1879년) 요즘에 교양이 있다는 사람들은 실제로 초차연적인 종교나 성경의 완전 영감, 기적의 가능성과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모든 일은 너무나 교묘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이들의 태도는 솔직하고 오히려 관대하다는 인상마저 준다. 더구나 이들이 인간 본성의 능력과 고귀함을 강조하는 바람에, 견고하지 못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래로 마귀는 끊임없이 사람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했고, “믿지 않아도 너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해 왔다. 황소가 하나님의 방주를 흔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방주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이들의 주장은 연약한 사람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하지만, 이들이 평생 노력해 봐야 이집트를 여행하는 한가한 여행자가 거대한 피라미트에 자기 이름을 긁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들과 믿음 없는 자들이 무슨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세 가지 위대한 사실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다.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계시 종교의 위대한 근본 원리로만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둘째, 성경 자체이다. 성경 저자들이 살던 시대는 각기 달라 사전 조율도 할 수 없었고, 그들은 로마 사람들과는 달리 문학적으로 대단할 것이 없던 나라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기록한 책이 어떻게 이토록 고유하고도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이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초자연적인 책이라고 믿는 사람만이 설명할 수 있다.
셋째, 기독교가 이 세상에 미친 영향이다. 기독교가 뿌리내리기 전의 세상과 뿌리 내린 후의 세상의 도덕적 차이는 밤과 낮이 다른 것 같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세계지도를 보면서 그리스도인이 많은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가 빛과 어둠만큼이나 다르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기독교가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의 종교라고 믿는 우리만이 설명할 수 있다.
불신앙이 만연해 가는 모습을 보고 위축될 때마다 이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두려움을 몰아내라.
2, 이 시대는 우리에게 기독교 교리에 대한 분명하고 확고한 견해를 요구한다.
19세기 교회가 불신자와 회의주의자로 인해 외부적으로 큰 손상을 입은 것만큼이나, 내부적으로도 교리 문제에 대한 안이하고 불분명한 대처로 큰 타격을 입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마치 색맹과 같아서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바르고 그른지 분별할 능력이 없다. 설교자가 똑똑하고 열정적이고 달변이기까지 하다면, 그가 아무리 이질적이고 생소한 진리를 전해도 별 문제 삼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작정 받아들인다. 감상적인 관용과 박애에 길들여져서, 누구나 옳고 모든 목사가 다 바르고, 이 세상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구원에 이를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은 뚜렷이 구분되는 것을 싫어하고, 모든 극단적이고 단정적이고 적극적인 견해는 아주 그릇되고 못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희미한 안개 속에서 살아간다. 평생 살아도 칭의, 중생, 성화, 성찬, 세례, 믿음, 회심, 영감, 미래의 신자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다. ‘논쟁’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과 ‘당파심’에 대한 무지한 혐오감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이 신앙에서 그 어떤 위로도 얻지 못하고 살다가, 소망도 없이 무덤에까지 떠내려갈까 두렵다.
사람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신앙에 대해 무지하다. 신앙에 열심을 내는 것을 싫어하고, 인내와 꾸준한 탐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갈등을 피하고 관대하고 너그럽다는 말 듣기를 좋아한다.
신앙에 있어서 우유부단하고 꾸물거리는 마음의 상태를 조심하라. 어둠 속을 배회하는 페스트같이 급작스럽게 덮쳐서 멸망에 이르게 한다. 자기 영혼을 위해서라도 여러분이 믿는 바대로 결심하고, 진리와 오류에 대해 적극적이고 뚜렷한 견해를 가지라. 교리적으로 분명한 견해를 갖는 것을 두려워 말라. 어디나 기독교의 승리가 울려 퍼지는 곳에는 분명한 교리와 신학이 있었다. 분명한 교리가 없는 기독교는 무기력할 따름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아름답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이런 기독교는 불모지에 불과하다. 만약 우리가 선을 행하고 세상을 흔들어 깨우기를 바란다면, 저 옛날 사도들이 싸웠던 무기로 싸우고 ‘교리’를 고수해야 한다. 교리가 없이는 열매도 없다!
사도시대에 이교도 사원을 텅 비게 하고, 그리스와 로마를 뒤흔들었던 것은 ‘교리’였다. 종교개혁 시대에 기독교 세계를 깊은 잠에서 흔들어 깨우고, 교황을 따르는 사람의 3분의1을 돌아오게 한 것도 ‘교리’였다. 100년 전 윗필드, 웨슬리, 벤, 로매인이 사역했던 시대에 영국교회를 부흥시키고, 꺼져가던 기독교를 다시 활활 타오르게 했던 것도 ‘교리’였다. 여리고 성에 울려 퍼진 나팔소리처럼, 죄와 마귀의 대적을 물리친 것도 분명한 소리로 울리는 교리였다.
3, 이 시대는 우리에게 비성경적이고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로마 카톨릭의 특징을 분명하고도 생생하게 자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을 싫어했던 옛날 영국 신자에게 있었던 개신교에 대한 분명하고 예리한 의식이 무뎌지고 둔해졌다. 이들 가운데는 오히려 개신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카돌릭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사람들의 정서가 달라진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1) 로마 카톨릭의 지칠 줄 모르는 열심도 한몫했다.
2) 성공회 내에서 예식을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기여했다. 사람들은 점점 로마 카톨릭의 독특한 가르침과 의식(미사 화체설, 고해성사, 성직주의, 수도원제도, 허영에 찬 공예배 등)에 익숙해진 나머지 드러나는 엄청난 위험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3) 오늘날 만연하는 인위적이고 거짓된 관대함도 로마 카톨릭의 약진을 거들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모든 종교는 동등하고, 같은 호감과 존경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 대세이다. 특히 동료 목사들에게 경고한다. 교묘하게 또는 드러내 놓고 로마 카톨릭으로 이끄는 모든 종교적 가르침을 조심하라. 종교개혁이 얼마나 복된 것이었는지 점점 잊게 하는 세태를 거부하라. 성경을 읽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숙지하라. 성경을 읽는 평신도야말로 이 나라를 오류로부터 지켜 내는 가장 견고한 요새이다. 여러분은 성경과 신조 외에 교회사도 읽어서, 로마 카톨릭이 과거에 어떤 일을 자행했는지 알아야 한다.
영국과 미국이 부강한 나라가 된 이유는 누구나 자유롭게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종교개혁의 원리가 있는 개신교 때문이다. 종교 개혁을 통해 흑암 가운데 있던 백성이 빛을 보게 되었고, 사제의 횡포 아래 있던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종교개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안에 밝혀진 촛불을 결코 희미해지거나 꺼지게 해서는 안 된다.
4, 이 시대는 더 높은 수준의 개인적인 거룩을 요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상에서의 실천적 신앙에 더 관심을 기울이라고 요청하고 있다.
종교개혁 이래로 오늘날처럼 삶이 아닌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무수한 말을 늘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는 않으면서 듣기는 많이 하는 때도 없었을 것이다. 알맹이 없는 형식주의가 오늘날처럼 만연한 적도 없었다.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고귀한 행동 양식은 오히려 퇴보하고 타락했다. 이런 일에 빠져 있는 젊은 교인을 채근이라도 하려고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편협한 사람처럼 생각한다. 부주의함과 방탕함과 경솔함이 자라나는 세대의 신앙 고백자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현대 기독교는 능력이 없고,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는 이전처럼 세상을 뒤흔들지 못하고 있다는 탄식이 많이 들린다. 그 이유는 신자의 삶의 수준이 너무 낮아졌을 뿐 아니라, 그것이 아예 기독교 전반의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자의 수가 예전 수보다 휠씬 많기는 하지만 정작 기독교적 실천의 표준은 현저히 낮아졌다. 자기부인, 세월을 아끼는 것, 사치와 방종을 물리치는 것, 이 땅에 속한 것과의 구별, 주님의 일에 대한 분명한 태도, 신실한 마음, 단순한 가정생활, 일상에서의 경건한 대화, 인내, 겸손, 진실하고 정중한 태도와 같은 귀한 것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런 우리를 보면서 세상이 멸시한다. 우리의 모습을 본 세상은 더 이상 우리의 증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세상을 감화 시키는 것은 삶이다.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 거룩에 만족해 사는 것은 지나온 삶만으로도 족하다. 이제 때가 되었다. 비아냥대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해도, 명백한 삶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는 있다.
5. 이 세대는 우리의 영혼을 기름지게 할 옛 방법들을 일상에서 확고하게 지켜 가기를 바라고 있다.
공적인 대중적인 신앙 활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동반하지 않는 대중적인 신앙활동은 견고하지 못하고 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가장 우려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불행히도 대중적인 신앙활동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종종 일시적인 감정과 교회 분위기에 이끌려 실제로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의 고백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하고 나면 계속되는 종교적 흥분이 있어야만 만족스러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더 큰 흥분과 자극을 찾는다. 많은 경우 이러한 사람들이 결국 불신앙의 상태로 미끄러져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 버린다.
뿌리 없는 식물은 이내 죽고 만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은 모든 생동적인 기독교의 뿌리이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이 없어도 집회나 강단에서 담대하게 뽐내고, 노래하고, 많은 눈물을 흘리고, 생명을 소유한 자라고 인정을 받고, 사람의 칭찬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없다면 혼인 예복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이다.
1) 개인 기도에 더 열심을 내야 한다. 기도할 때 우리의 온 영혼을 쏟아 부어야 한다. 신앙에서 떠나는 자는 사실 이미 오래 전에 기도의 자리에서 떠난 자이다.
2) 성경 읽기에 진력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모든 오류의 시작이고, 꼼짝없이 마귀의 수중에 떨어지게 한다. 강단에 펼쳐진 성경책이 가정에 있는 성경책을 대신 할 수 없다.
3)개인 묵상과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다윗처럼 자기 영혼과 대화하기 위해서,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자 중보자이신 그분께 쏟아 놓기 위해서, 때때로 홀로 있는 시간을 갖기로 결심해야 한다. 항상 분주한 신자는, 끊임없는 대중적인 신앙활동을 하면서도 바로의 꿈에 나온 파리한 소처럼 되어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6:6)
복음주의 조상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방편이나 기회에 있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열악했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 우리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휠씬 더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들을 통해 회심한 사람은 지금 우리 시대에 거듭났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휠씬 더 오래 참고, 잘 견디며, 분명한 색깔을 나타내고, 안정되고, 견고한 뿌리를 내렸다. 그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보다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적용)
1. 자신의 영혼과 관련하여 - 여러분은 지금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 함정들은 얼마나 그럴싸하고 교묘한지요. 여러분이 내딛는 발걸음을 조심하라. 관용과 박애라는 미명 하에 교리적 진리에 대해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하라.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부르심과 선택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도록 일어나 부지런히 힘쓰라. 누구와 함께 가겠다고 기다리느라 지체하지 말라. 극소수만이 생명의 좁은 길로 갈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어떻게 해서든 그 소수에 포함되도록 힘쓰라.
2. 다른 사람의 영혼과 관련하여 - 여러분이 숨을 거두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선을 행하여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라. 하나님은 종종 연약한 도구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 세상의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다 빠져나가고 있다. 선행에 좋은 결과는 여러분의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의 노력이 자신에게는 항상 유익한 것으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이다.(잠11:25)
제 20 장 모든 것 되시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골 3:11)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이 세 구절은 기독교의 본질과 실체이다. 그리스도는 교리적 기독교와 실천적 기독교 모두의 원천이다. 칭의뿐만 아니라 성화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도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한다.
1.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권고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전부이다.
1) 이 세상과 인간이 그 존재도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셨는가?
그때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과 동등”되셨다.(요1:1, 빌2:6) 그 때에도 그분은 성부의 사랑하는 아들이셨다.(요17:24, 17:5, 잠8:23)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벧전1:20) 구주셨고,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었다.(엡1:4)
2) 이 땅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지음을 받게 된다. 그때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셨는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3) 죄가 세상에 들어와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다. 거룩하게 지은 받은 자신의 본성을 상실했고, 죄인이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과 장벽을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범한 죄에 합당하게 대했다면, 죽음과 지옥과 멸망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셨는가?
타락한 그 날에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빛으로 높이 들리신 것이다. 그날 이래로 그분의 이름 외에 영혼들이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세상이 들은 적이 없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미끄러져 가던 영혼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국으로 들어갔다.
4) 온 세상이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뒤덮여 버린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지구의 한 귀퉁이에서 살아온 소수의 멸시받던 유대인 외에 온 세상은 무지와 죄 가운데 죽어 있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하셨는가?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누리시던 영광을 떠나 이 세상으로 오셨다. 참 사람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준행하셨다.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의로움을 가져오셨다. 그리고 우리의 칭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거기서 자기 원수들로 발등상을 삼으시기까지 기다리신다. 기다리실 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를 위하여 중보하시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라 영혼 구원에 관한 모든 일을 행하신다.
5) 죄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가 온다. 사탄의 지배가 그치고, 죄로 말미암은 피조물의 탄식이 그칠 때가 온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되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는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리스도는 왕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권능과 위대한 영광으로 구름 가운데 강림하시고 온 세계는 다 그분의 것이 될 것이다.(마24:30) 모든 무릎이 그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고, 모든 입술이 그분을 주로 고백할 것이다.(빌2:10-11) 그분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요, 그분 나라는 결코 진동하지 않을 것이다.(단7:14)
6) 모든 사람이 심판받는 날이 곧 온다. 무덤에서 잠자던 자가 다 일어나 나올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단12:2) 그때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시는가?
친히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요5:22, 마25:31-32, 고후5:10) 그리스도께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정도의 미미한 영광과 존경을 표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통틀어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과 회복과 심판과 같은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되신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이 괜히 기록된 것이 아니다.(요5:23)
2.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 되신다.
성경 어디를 읽든, 그리스도의 희생과 대속의 죽음, 그리스도의 나라와 미래의 영감을 마음에 두면서 읽어야 한다. 성경의 난제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면류관을 그 실마리로 꼭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성경 말씀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다. 성경이 애매하고 불가사의한 이유는 이 열쇠를 몰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1) 구약성경의 모든 제사에서 드러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다. 무고한 짐승을 별 의미도 없이 도살하는 일을 영존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2)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나은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아벨은 자기 생축의 첫 소생의 피로 제사를 드려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다.(히11:4)
3) 대홍수가 있기전 악이 관영했던 시대에, 에녹은 그리스도를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유14:15)
4) 약속의 땅에서 장막에 우거하던 아브라함이 대망했던 분도 그리스도이다. 그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기뻐했다.(요8:56)
5) 야곱이 숨을 거두면서 자기 아들들에게 말했던 분도 그리스도이다. 장차 만민이 그에게 나아와 복종할 것이라고 예언했다.(창49:10)
6)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의식법의 실체는 그리스도이다. 희생제사, 피, 제단, 시은소, 대제사장, 유월절, 속죄일, 이사벨의 염소 등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과 상징이며, 그의 사역에 대한 묘사이다.
7)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목전에 날마다 기적을 베푸심으로 그들의 관심을 그리스도께 이끄셨다.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 반석, 들린 놋뱀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이끄셨다.
8) 모든 사사들 역시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지파들로 하여금 장차 오실 위대한 구원자를 대망하게 하려고 사사들을 세우신 것이다.
9) 다윗 왕 역시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아무도 그를 존귀히 여기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 택하사 기름 부으셨다. 다윗은 전 일생을 통틀어 슬픔의 사람이었지만 결국 승리자로 드러난다. 이런 모든 행적이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10) 이사야로부터 말라기까지 모든 예언자가 그리스도에 대해 말했다. 이들의 증언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지 않다. 일직선상에 나란히 있는 촛불을 보는 것처럼, 이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동시에 보고 한꺼번에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분의 통치는 항상 그들의 생각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1) 신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가득하다. 복음서는 사람 가운데 사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그리스도’요. 사도행전은 선포되고 전파되고 설교되는 ‘그리스도’이다. 서신서는 기록되고 설명되고 찬송받는 ‘그리스도’이다.
여러분은 성경이 단지 좋은 도덕적 지침과 교훈으로 가득한 책 정도로 보이는가? 아니면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있는가? 성경이 과연 ‘그리스도가 모든 것’인 책인가?
3. 이 땅에 있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신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한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동일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동시에,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 또한 삼위 하나님의 뜻이라는 증거를 성경에서 본다. 그리스께서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지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은 구원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데 필요한 모퉁잇돌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문이다. 그리스도는 택하심을 입은 모든 죄인이 접붙임을 받은 나무의 뿌리이다. 그리스도는 거룩한 삼위 하나님과 비참하고 불쌍한 아담의 후손이 만나는 유일한 자리이다. 태양이 하늘의 궁창을 채우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참된 기독교를 채우고 계신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 있어 모든 것 되신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거룩한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다.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 중에 무엇이 우리를 실제로 의롭게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의롭게 된 영혼의 ‘모든 것’이 되어야만 한다. 여러분 가운데 부주의하고 세속적인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마지막 날에 허둥지둥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하므로써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혹시 스스로 자긍하면서 형식적으로만 믿는 사람이 있는가? 심판을 통과할 정도로 자신의 행위가 선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당신은 지금 바벨탑을 쌓고 있다. 여러분 가운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 있는가? 임박한 진노가 두려운가? 그리스도께서 당신 영혼의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2) 참된 그리스도인의 칭의뿐 아니라 성화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가 모든 것 되신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거룩에 자라가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앞으로 나아갈 힘을 길어 올리는 위대한 근원이다. 성령은 그분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로서 자기 백성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 친히 값 주고 사셨다.
거룩하고 싶은가?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날마다 받아 먹으라. 반석이신 그리스도께 날마다 생수를 받아 먹으라. 항상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러면 부지중에 여러분의 얼굴은 그분의 영광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광야를 벗어나는 참된 비결은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나아오는 것이다.(아8:5)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어야만 하고, 그리스도를 얻어 누려야 한다. 그리스도 없이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구멍 뚫린 전대에 돈을 넣는 격이고, 조리에 물을 붓는 격이고, 언덕 위로 거대한 돌을 굴리고 올라가는 격이다.
구원받은 영혼에게도 여전히 많은 고난이 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로’만이 이 일을 가능케 한다. 예수님은 진정 역경을 위해 태어난 우리의 맏형이다. 그분은 질고를 아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자기 백성을 어떻게 위로할지를 정확히 아시는 분이다. 그분은 단 한 방울의 슬픔도 우리가 쓸데없이 당하도록 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실망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3) 그리스도는 또한 미래의 희망에 있어서도 모든 것 되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죄를 없이하시고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잠자는 성도들을 무덤에서 일으키시며, 자신의 모든 권속을 불러 모으시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자가 오래 참고 기다라는 이유는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기 때문이다. 세월이 짧은 것을 알기 때문에 잠잠히 왕을 기다린다. 지금은 수업을 배우는 학기 중이지만 곧 영원한 방학이 온다. 지금은 파종하는 때이지만, 곧 추수이다. 지금은 일하는 때이지만, 곧 삯을 받을 것이다. 지금은 십자가를 지지만, 곧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4. 그리스도는 천국에서도 모든 것 되신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서술하기란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천국에 이른 사람이 거기에서조차 ‘그리스도가 모든 것 되심’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계5:6, 12-13, 21:23) 그리스도의 임재가 천국에 사는 모든 이의 영원한 즐거움이 될 것이다.(계22:4) 지금은 그분을 뵙지 못할지라도 이 땅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평화를 누린다. 진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온 사람에게 천국은 너무나 영광스럽고 달콤한 집이 될 것이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교제도 없으며,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이 천국에서 무슨 일을 하겠는가? 그들이 천국에서 하는 일은 오히려 지치게 하고, 그들의 마음에 부담이 될 것이다.
교회(가시적)에서 주 예수께서 자신의 모든 직무를 통해 이루신 일로 인해 존경과 높임과 영광을 받지 못한다면, 웅장한 교회 건물, 많은 예배, 화려한 예식, 수많은 목사 같은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니다. 목사에게 주어진 일은 놋뱀이 높이 달린 긴 장대가 되어야 한다. 믿음의 위대한 대상을 높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으로 증거하지 않는 목사를 결코 예우하지 않으실 것이다.
성경에서는 많은 말로 그리스도의 직무를 묘사하고 있다. 대제사장, 중보자, 구속자, 대언자, 목자, 의사, 신랑, 머리,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포도나무, 반석, 샘, 의의 태양, 앞서가신 분, 보증, 대장, 생명의 주, 아멘, 믿음의 주, 온전하게 하시는 이, 하나님의 어린양, 성도들의 왕, 기묘자, 전능하신 하나님, 모사, 영혼의 감독자 등 이외에도 많은 이름이 그리스도께 돌려졌다. 각각의 이름 하나하나가 사람에게 위로와 교훈의 샘이 될 뿐 아니라 유익한 묵상의 소재가 된다.
실천적 결론)
1) 그리스도가 빠진 종교가 얼마나 무가치한지 알아야 한다. 세례는 받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모호한 개념과 공허한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교인으로서 의무는 다하려고 애쓰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자비우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런 사람은 영혼이 구원될 수 없으며, 근거 없는 망상이고 공허한 환상이다.
2) 그리스도가 모든 것 되는가? 그렇다면 구원의 문제에 있어 그리스도와 다른 것을 혼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알라. 세례 교인 가운데 말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교회, 성례, 목사, 회개, 자신의 선함, 자신의 기도, 자신의 박애에 의뢰하고 있지 않은지 보라. 그리스도께만 합당한 영광을 다른 것에 돌리므로써 그리스도를 그 보좌에서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3) 구원받기 원하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로 직접 가라. 그들은 바라고 느끼고 원하는 것까지는 잘하지만, 결코 그 이상 넘어서 자기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를 올바로 붙잡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세상이 ‘모든 것’이다. 지금의 상태가 계속된다면 가롯 유다, 아합, 가인같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실제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배고픈 사람이 빵을 바라본다고 허기가 채워질 수 없는 법이다. 더 이상 가만히 서 있지도 말고 지금 그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 실제로 느끼고 맛보기까지 쉬지 말고 그렇게 하라. 곧 그리스도가 모든 것 되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4) 회심한 그분의 백성은 믿는 자답게 그분을 대해야 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그분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한다. 슬프게도, 자신들이 마땅히 누릴 특권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삷을 사는 주의 백성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모든 것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믿음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두지 않도록 하라. 성령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자리에 두지 말라. 여러분의 감흥과 느낌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두지 말라. 훌륭한 궁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화실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고 과녁을 바라봐야 한다.
여전히 많은 신자들의 마음에 자긍과 불신앙의 편린들이 널려 있다.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그리스도께 빚지고 있는지 깨닫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날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한지 깨닫는 사람도 너무나 희박하다. 의사는 환자가 진찰을 받으러 나오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큰 평화를 느끼고, “거룩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넉넉히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히12:14) - 끝 -
- 청교도 아카데미, 김영희교수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