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성령의 역사와 인간의 의지적 행위/ 존 칼빈

강대식 2014. 1. 16. 09:41

 

주께서는 선한 사람의 속에 그의 나라를 세우실 때에,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의지를 제어하셔서 그 본성적인 성향에 따라서 정욕에 이끌려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도록 하신다. 의지가 거룩함과 의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그 의지를 그의 의로우신 규범에로 기울게 하시고, 그렇게 형성시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가 비틀거리고 넘어지지 않도록,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보존시키시고 강건하게 하시는 것이다.

 

어거스틴: “그렇다면 우리에게 행동이 가해지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궁금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러분 스스로도 행동하는 것이요, 동시에 여러분에게 행동이 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선하신 분께서 여러분에게 행동을 가하시면, 여러분이 선하게 행동할 것이다. 여러분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행동하는 자들을 도우시는 분이시다 ‘도우시는 분’이라는 말 자체가 여러분도 무언가를 행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신다 해도 사람의 행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우리 자신의 노력과 연관짓고 있다. “의지를 발휘하는 것은 본성에 속한 일이나, 그 의지를 올바로 발휘하는 것은 은혜에 속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조금 앞에서,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정복할 수도 없고 싸울 수조차 없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성령께서 사람의 의지를 지도하고 다스리는 규범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성령께서 다스리실 때에는 반드시 교정하시고,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중생의 시작이 바로 우리의 것을 쓸어내는 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성령께서는 움직이시고, 행하시고, 촉구하시고, 참으시고, 지키심으로 그의 역사를 수행하신다. 그러므로 은혜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위들이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은혜가 의지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지를 회복시킨다”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지극히 사실이라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사상은 본질적으로 서로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의지의 부패성과 타락성이 교정되어 그것이 의의 참된 규범으로 인도함 받는 것을 가리켜 그 의지가 회복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에게 새로운 의지가 창조된다고도 말하는 것이다. 본성적인 의지가 너무나도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에 있으므로 그 의지의 본성 자체가 완전히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행하시는 일을 우리 자신이 적절하게 행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우리의 의지가 스스로 기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말이다. 어거스틴은 사람들이 그 자신의 의지에서 선한 것을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전혀 소용이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처럼 자유 의지의 능력을 하나님의 은혜와 뒤섞어 놓으면, 그것은 마치 포도주를 쓴 흙탕물에 섞는 것과도 같아서, 은혜를 부패시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혹시 사람의 의지에 무언가 선한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성령의 감동하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의지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므로 그가 찬양을 받으셔야 마땅한 일들을 우리가 행하는 것으로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하심으로 우리 속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든 그것은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그것이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둘째로, 성령께서 선을 향하여 이끄시는 그 지성과 의지와 노력이 모두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찬다이제스트), pp 409-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