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12권, 3장 "성화, 새로운 유의 예배"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교리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 주며, 또한 그러한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유의 삶을 살 수 없다. 바로 그것이 휴매니스트들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다. 인류의 전체 난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이다. 여기에 바로 오직 유일한 해답이 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의 요점은, 우리가 누구며, 어떠한 사람인지를 인식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화해와 죄의 용서를 받은 것만이 아니다. 여러분은 거듭났고 또한 새로운 피조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있다. 바로 그것이 행실과 품행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런 다음에 그로부터 교리를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첫 번째 동기는 이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자기들의 느낌과 충동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로 통제를 받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동기는 마음에 호소한다. 참된 신학은 항상 마음을 움직인다. 휴매니스트들은 정서적인 호소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다. 그들의 호소는 단순히 지성적인 태도에 관한 것뿐이다. 그들은 차갑고 그들에게는 뜨거움의 요소가 전혀 없다. 그들은 불쌍한 죄인을 멸시한다. 왜냐하면 그 죄인이 두뇌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들의 지성적인 성향에는 마음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는 머리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똑같은 관심을 가진다. 사도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라는 어구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모든 자비하심’ 그 자비하심이 여러 방식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여러 다양한 시기에 임하는 것이다. 또한 매일같이 임하며 반복적으로 임한다.
자비하심이란 ‘목회서신들’ 속에 있는 문안 인사를 보면, 일종의 형식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자비하심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은혜는 아무런 대가 없이 베푸는 호의이다. 자비는 이것과 병행을 이루어 우리의 상태와 조건을 하감하시고 우리를 안쓰럽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는 여기서 우리가 향유하는 구원의 모든 은택들은 전적으로 이 불쌍히 여기심, 자비하심의 결과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긍휼(자비하심) 얻은 사람들로 표현한다.(롬11:30-31) 의롭다하심, 성화, 영화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결과이다. 우리가 숙고해 온 모든 교리는 바로 이 자비하심에서 나온 것이다.
사도는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말하며 이러한 유의 삶을 살라고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진실로 인식한 사람들은 그것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다. 사도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많은 자비하심을 생각하고 감사하기를 원한다면 여기 그 방식이 있다. 입술로만 하나님께 감사하지 말고 여러분의 삶으로 더욱더 감사하라.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변화된 의지는 진리를 이해하고 느끼는 것의 결과이다. 이 문제는 아무리 강조한다 할지라도 지나칠 수 없다. 우리는 행실에서 거의 율법주의적인 방식으로 다룰 때가 많이 있다. 이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처럼 복음은 행실의 전체 문제를 높은 영적인 차원으로 들어 올리고 있다. 다른 어떤 사람이나 다른 어떠한 것도 그런 일을 하게 하지 못한다. 세상은 이 두 가지 가장 장엄한 동기들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
사도는 완벽한 답을 준비하고 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첫째, 우리 자신 전체, 우리의 몸과 영과 혼을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혼적인 부분(mind),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영을 가리킨다.(위치만 니의 삼분설적인 이해가 아닌 여기서 존스 목사님은 전인적인 헌신을 강조하기 위해 삼분설을 씀-번역자) “영적인 예배”라는 표현도 같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 ‘드리다’ - 자신을 어느 누구의 마음대로 하도록 내놓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를 지나치게 해석하여 내 자신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우리는 항상 ‘노예들’ 이다. 우리는 본질상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이다.(롬6:17) 그러나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노예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자원하는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결코 자유로운 자가 아니다. 사람은 다 사탄의 노예든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6:20) 그러니 너희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의 삶의 양식을 계속 할 권리가 없다.
‘권고하노니’ - 그 노예는 자원하는 노예이며, 자기가 노예됨을 기뻐하는 노예이다. 억지로 노예 되지 않은 사람이다. “누구를 섬기느냐 하는 것은 완전한 자유이니이다”(영국 국교회 공기도서 중) 여러분은 자원하는 심령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넘겨주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행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비심 때문이며, 여러분에게 주어진 권리로 그것이 최상의 일이기 때문이다.
‘몸’ - 주석가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순전히 육체적인 몸으로 해석해야 한다.(롬6:12,13 8:12,13 골3:5 고전619,20,15 살전1-5, 5:23)
사도는 여기서 구약의 제사 체계로부터 끌어 온 유추법을 사용하고 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피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느니라”(레11:12)- 그들은 몸도 드렸다. 짐승의 몸이 제단 위에 올려졌다. 그것이 전제로 드리는 번제이다. 영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육체의 몸도 드렸다. 사도는 여기서 우리의 실제적인 육체의 몸을 하나님의 제단 위에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스러운 구원에 우리가 참여하게 하실 정도로 크신 자비하심을 베푸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