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2권, 6장,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세상 정신"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2)
인간 존재의 구성 요소를 몸, 혼, 영의 세 부분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혼의 영역으로, 다시 말하면 정신 영역으로 표현되는 인간 삶의 부분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신 영역, 혼을 통해서 사람들은 이웃 사람들과 관계하고 있다. 그 정신 영역을 통해서 동물, 무생물과도 관계하고 있다. 모든 관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관계에 있어서 이 정신 영역이 주도적인 부분이다.
본문 2절에서 사도는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이 세상’ ‘이 악한 세상’ ‘이 세대’ 라는 말로 자주 발견된다. 사도가 ‘세상’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신약성경에서 사용할 때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
첫째, ‘세상’ 이라는 말을 통해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생각되거나 조직되거나 영위되는 삶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 속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둘째, ‘세상’이라는 말은 타락의 결과로 마귀에 의해서 주도되는 삶과 행동으로 규정될 수 있다. 고후4:3-4에서 ‘이 세상’이라는 말이 나온다. ‘세상’ 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고방식, 즉 하나님을 떠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도적으로 마귀에게 통제되는 삶의 방식을 뜻하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1-3)에서 그 점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국면에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공중권세 잡은 자’에 의해서 지배되고 통제되는 유의 삶이다.
셋째, ‘육체’ 라는 용어에 함축되어 있다. ‘육체’ 라는 단어는 성경의 전문적인 단어로 보편적으로 신약성경에서 사용될 때, 특히 바울 서신에서 사용될 때는 ‘세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로마서 8:3-12에서 사도는 ‘육체’ 라는 말을 사용하여 복음을 또 다른 방식으로 요약하고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대조시키는 형식으로 복음을 아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세상’은 육체를 따르는 것이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물리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다 육체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육신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그러므로 ‘세상’이라는 용어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보다 ‘육체를 따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대한 이 신약적인 가르침을 포착하지 않고는 행실과 도덕에 관해서 신약이 가르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철학자, 도덕주의자, 인본주의자들은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지 못한다. 육신 안에 있는 곳과 성령 안에 있는 것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교육이 우리의 난제를 푸는 일에 철저하게 실패하는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정치가, 행정관리, 법률가들도 애를 쓰지만 그들도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다. 이 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고통으로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다운 행실을 기대하는 순간, 우리가 생각해 왔던 그 시궁창에 우리 자신을 빠뜨린 셈인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 교회는 어리석게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행실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을 부과하려 노력하였다. 마음 아프게도 300여 년 전의 청교도들이 저지를 가장 큰 실수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에도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기독교적 행실을 부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의 오류가 존재하고 있다.
세상은 악에 찬 세력, 마귀의 우두머리인 ‘이 세상 신’, ‘지금 불순종하는 아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인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지배당하고 있다.(엡2:2) 이것은 성경적 교훈의 일차적이고도 근본적인 원리이다.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귀와 그 세력들은 이 세상의 삶을 통제하고 있다. 이 세상의 정치, 예술,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일, 여러 가지 분쟁, 고통과 고뇌들을 그러한 열쇠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라고 말 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라는 용어를 너무 협소하게 국한시키고 있다. 그래서 극장, 술집, 같은 곳에 가지 않으면 세상적인 것에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또 세상적인 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과 동의어로 생각하거나, 소유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세상적인 것을 거기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 전체 속에서 자리 잡고 있는 무엇이다. 실제 행동뿐만 아니라 사고방식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 있다. 그 말씀이 우리에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는가? 여기서 봉착할 수 있는 위험은 두 극단으로 빠져들 수 있다.
두 극단 중 하나는 율법적인 협소함이다.
또 다른 극단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 세상을 본받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비극이며, 사고방식에 있어서 세상을 본받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먼저 서점에서 잘 팔리는 신학 서적을 보면 그 신학이 전적으로 이 세상의 사고방식을 본받는 것을 기초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 신학자들은 “과학적인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이적적인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세상은 음성을 듣지 않을 것이고 교회에 모이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새롭게 오늘날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주장은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모든 교훈을 결정하고 통제하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본받는 또 다른 방식은 복음전도의 영역에서조차 발견된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설교나 긴 예배를 싫어하고, 지나치게 진지해지는 것도 싫어한다. 그들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논증보다는 예화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 설교를 길게 하지 말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시하자” 이것이 세상을 본받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의 메시지나 여러분의 방식을 통제해야 된다는 원리를 허락하는 순간 이 세상을 본받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의 문제들도 신학과 복음전도에 있어서 그릇되면 필연적으로 그와 같이 따라가기 마련이다. 오늘날 ‘신 도덕성’이라고 불리우는 가르침으로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는 이들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동성애, 혼전 성교 등이 죄가 아니다. 그러니 법을 바꿔야 한다. 그러니 변하지 않는 견고한 것이란 하나도 없다.
성경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인기 있는 의견을 결정적인 동인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 근본적인 전제로 시작한다. 신학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1:18에서 모든 사람은 타락하였고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공중권세 잡은 자”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참된 방식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말 못 믿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고방식이 세상과 세상의 견해로 말미암아 정해지거나 조종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저는 머리를 모래 속에 처박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에 초연한 채 석고흉상처럼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하나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학과 지식의 진보도 그 입장을 바꾸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영역에서든지 새로운 지식이 주어지면 그것에 대해 우리의 눈을 열어야 한다. 또 사람들과 사람들의 행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먼저 그런 방면에서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방식, 우리의 관념들, 우리의 실제, 우리의 모든 것들이 위로부터 주어진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서만 통제를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