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주일설교, "거룩함을 이루라"
본문: 고후 7:1
1. 거룩함을 이룰려면, 약속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경건하지 못한 자들은 거룩함과 아무 관계가 없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는 사람도 거룩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섬기는 자도 거룩과 관계가 없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도 거룩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들에게 임할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진노 밖에 없다.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들이 하는 일은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분쟁 밖에 없다.
이들은 자기들만 이를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잘한다고 한다.
불경건한 자들은 남을 판단하면서도 자기는 지키지 않았던 그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가 드는 비유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 목에 녹음기를 달고 나온다고 잠시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녹음기는 도덕적 판단을 할 때만 작동한다고 상상해 보자. 인간의 한평생에 걸쳐 진정한 도덕적 동기가 낱낱이 녹음기에 기록된다. 마지막 날, 사람이 죽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녹음기를 틀어놓고,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녹음된 스스로의 도덕적 판단들을 자신의 귀로 직접 듣는다. “너는 이 일을 잘못했고, 너는 저 일을 잘못했다”고 할 것이다. 수많은 도덕적 판단들이 쏟아져 나오고, 하나님께서는 돌아 서서 “너 자신의 말을 근거로 해서 너는 그러한 도덕적 기준을 지켜 왔는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침묵한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타인을 구속하려 했던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지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도덕적 진술들(너희들이 타인을 구속하고 비난하는 데에 기준을 삼았던 판단들)에 따라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당연한 도덕적 진술들보다 못할지라도 상관치 않겠다. 너희들은 죄책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말씀하신다. 목소리를 높일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경이 없는 자에게는 마음과 양심의 법으로 ,
성경이 있는 자에게는 성경의 기준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롬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남은 도덕적 윤리적 잣대로 쉽게 판단하던 사람들이 자기는 그 잣대로 살지 않는다.
자신은 탐심과 정욕과 더러움에 쉽게 빠지면서도 자신에게는 그리도 관대할 수가 없다.
정의의 칼날을 쥐고 휘두르던 자들이 성범죄 뇌물죄 권력남용죄에 걸려드는 것을 본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위선으로 겉만 깨끗이 할 뿐이다.
(마23:27-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로 깨끗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거룩함과 관계가 없다.
정의와 거룩을 부르짖으면서도 남을 판단할 때만 쓰고 자신은 뒷구멍으로 추악한 짓을 한다.
그 많은 윤리적 가르침과 교육이 있어도 날로 세상이 악해지고 범죄가 극악해지고 있다.
세상은 도덕과 윤리와 교육과 종교로 거룩을 흉내낼 수는 있어도 결코 이룰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요구하는 자들은 자기 백성과 자기 자녀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물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된다.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성경 말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자들만이
살 수 있는 진리이고 살아야 할 진리이다.
믿음이 없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뿐이다.
그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지를 모르니 회개할 시간에 대적하고 있다.
의와 불법이 함께 할 수 없고, 빛과 어둠이 함께 사귈 수 없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함께 할 수 없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고후6:16-18)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하나님이 나의 백성을 삼은 자, 나의 자녀를 삼은 자,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 자녀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백성, 그 자녀들에게 거룩함을 이루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백성, 그 자녀들은 하나님이 머리털까지 다 세신 자들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거룩함을 이루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으라고 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2. 거룩함을 이룰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한 거룩함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거룩함을 온전히 이룰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속성 중 거룩함이 으뜸인 줄을 모르니까 그분을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죄를 가지고는,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고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 때문에 흘리신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의롭다 하시고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은 우리로 거룩함을 이루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성화라 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친애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없다. 있을 수도 없고, 신성을 모독하는 망발인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아들의 대속적인 십자가 형벌이 필요한 것이다.
그냥 사랑뿐이시라면 아들의 십자가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의와 공의가 필요한 것이다.
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상을 통치하시는 가운데 나타내시고 실행하시는 것이다.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공의는 그 의를 어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이다.
의는 거룩하심의 입법적 표현이요, 공의는 거룩하심의 사법적 표현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의로 표현한 율법을 어기면 벌 주시고, 순종하면 상주시는 것이 공의이다.
믿지 않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시는 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 표현인 의와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가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다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
어느 정도까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느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그분의 온전한 거룩하심까지 우리도 온전히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을 정도까지이다.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을 정도까지이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영광스러운 교회로 성전으로 만들 때까지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으로 이 일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속성의 순서에 주의해야 한다.
거룩하심이 먼저이고, 의와 공의가 그 다음이고, 신실하심, 선하심과 사랑이 그 다음이다.
선하심과 사랑이 먼저가 되니까,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게 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부터 가르치니까, 할아버지 수염 뽑는 손자들만 키우게 된다.
하나님의 속성은 따로 분리시켜도 안 되고, 순서를 바꾸어도 안 된다.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전체로 거하시고 모든 속성은 전체로서 균형을 이루고 계신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는 그 속성의 순서를 따라 해야 한다.
거룩함, 그 거룩함의 표현인 의와 공의, 그리고 사랑과 선하심과 신실하심이다.
주기도문의 처음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로 시작한다.
사랑부터 축복부터 생각하고 구하는 것이 바로 기복신앙이고 우상신앙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축복의 수단,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순서와 균형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내가 만든 하나님, 내가 만든 법으로 섬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심과 의를 온전히 우리 가운데 이루시기 위해
출애굽하게 하시고, 광야의 훈련과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신다.
가나안과 축복과 영광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고
거룩함과 성결의 결과 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상이다.
축복과 영광과 가나안이 목적이 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종교의 추악한 온갖 모습을 연출하게 된다.
삼박자 축복이 나오고, 형통신학, 믿음신학이 날개를 달게 된다.
거룩함이 떠난 종교, 거룩함을 잃은 종교, 축복만을 노래하는 종교는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한 종교요, 백해무익한 종교일 뿐이다.
거룩함의 훈련과정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에 사람들이 왜 현혹되는가?
탐욕 때문이다. 조급함 때문이다.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3. 거룩함을 이룰려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깨끗하게 해야 한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면, 욕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육으로 영으로 온갖 더러운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축복을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만 믿고 매달려야 내려오는 것은 환난과 곤고와 진노 뿐이다.
당장은 진노가 내리지 않고 형통만 보이니까 달려가지만,
하나님이 참고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는 시간이 지나면 악인의 형통은 무너지고 만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되고,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하고,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하고 만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은 광야 시절의 훈련과 연단의 시기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변하지 않는 환경 때문에, 닥치는 위기와 문제 때문에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한다.
믿으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시37:3-11)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하나님 앞에서 참고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할 일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것이다.
광야 훈련과 연단의 세월 동안 하나님은 고난과 역경만 주시느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 과정 속에서 형통도 주시고, 안식과 평화도 주신다.
하나님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으라고 하시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성실하게 책임지신다는 것이다.
때를 따라 만나도 주시고 생수도 주시고 옷이 헤지지 않게 하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도 하신다.
형통 중에는 찬송하고 고난 중에는 기도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은혜의 인도하심 따라 가고,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하심 따라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우고
비천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워가는 것이다.
죄가 있어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느냐고 하신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하신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라고 하신다.
영을 깨끗하게 해야 육도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속이 깨끗해지지 않고서는 겉을 깨끗이 할 수가 없다.
생각부터 잡아야 행동도 잡을 수 있다.
부주의하고 경솔하고 무례한 작은 행동들이 쌓여서 습관이 되고 인격을 형성한다.
기도와 말씀 생활 속에서 성령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성령을 근심케 하거나 소멸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을 시간을 정해서 읽고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고,
혼탁하고 혼합해진 성경해석들을 바로 잡기 위해 청교도들의 경건 서적을 가까이 하시기 바란다.
순전한 말씀 성령의 충만이 성결한 삶,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갈 수 있다.
열심히 원한다고, 열심히 달려간다고 축복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것이 축복을 이룬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축복과 영광을 이룬다는 것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