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많은 기독교인이 교회 일로 지치는가? / 마이클 호튼
스스로를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말하는 교회들에서조차 지금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경험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반적인 강조점이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봉사의 수단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지쳐 있으면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복음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신자들에게는 끊임없이 요구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만인 제사장설과 만인 사역자론을 혼동하면 안 된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신약의 서신서들에서 찾아낼 수 있는 직분들을 하나도 세우지 않으신 것처럼 행동한다. 사역을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모든 양 떼가 목자가 되어야 한다. 양 떼에게 자급자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렇게 빈약한 사고를 한 결과다.
교회에 지워진 짐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교회에게 대안적인 이웃, 친구들의 모임, 정치적인 행동 위원회, 사교 클럽 혹은 공공 봉사 단체가 되라고 하신 적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명확하고 온전히 전달하여 신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세속의 임무들을 수행하는 소금과 빛이 되도록 준비시킨다.
아주 오래전 옛날 저 아득히 보이는 언덕 위에서뿐 아니라 매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섬기러 오신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은 우리이지, 하나님이 어찌 우리를 섬기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것은 사실은 모독이요 일종의 교만이라고 하신다.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음식을 취해야 할 사람은 우리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를 통해서 우리를 섬기신다. 특히 교회 안으로 부르신 직분자들을 통해서 섬겨 주신다. 지도자든 교인이든 목사와 교사라는 공적 사역은 전체 몸의 원활한 일을 방해하는 전제(專制)적 기구가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사랑 안에 서로 살고 이 세상에서 그들의 부르심을 이루게 하시려고 주신 선물이다(엡4:8-15). 사역자들은 말씀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달한다. 잘 준비한 설교뿐 아니라 봉사의 일 전체를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내면적인 경험, 경건 그리고 열성을 표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라는 말씀대로 서로 섬기기 위함이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말씀을 노래하며, 성도의 교제라는 형태로 말씀을 묵상한다.
목사와 교사는 선원들이 아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재능과 정력을 교회로 빨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8-29).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정기적으로 푹 빠지지 못한다면, 이웃을 향한 우리의 그리스도 증거가 경박하고, 자충수를 두며 나아가 혼동스럽기조차 한다고 해도 놀랄 일이겠는가? 주의 만찬에서 배불리 먹는 자들이 일상의 세속 천직이라는 빵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생명의 빵으로 다른 사람들을 먹이길 원할(그리고 준비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먹이기에 앞서 배부르게 먹어야 한다. 섬기기에 앞서서 섬김을 받아야 한다. 딱 한 번이 아니라 매주 그래야 한다.
교회는 복음이 아니다. 교회는 구세주가 아니다. 교회는 언제나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세우고, 설교자,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의 제도로서 교회는 우리의 영적 여정 내내 우리의 어머니 노릇을 한다. 칼빈,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마다 교회를 어머니로 받는다”.
많은 사람이 교만, 혐오 혹은 오기에 혼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힌다. 이 사람들은 공적인 집회를 무시하고 설교를 미신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후회 막급한 실수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망상으로 자신을 홀린 이 거룩하지 못한 분리에 합당한 벌에서 빠져나갈 자가 없을 것이다.
열광주의는 근대에 들어 온갖 형태를 취했다. 계몽주의의 세련된 이성주의에서부터 미국이 앞정 선 반 지성주의적인 감정주의까지 다양하다. 경건주의의 효과(특히 2차 대각성에서 극치를 이룬)는 윌리엄 맥라플린이 관찰한 것처럼 “집단적인 신념, 신조의 기준과 전통적인 형태의 적절한 준수에서 개별적인 종교 체험의 강조로” 강조점이 옮겨지는 것이었다. 계몽주의가 “종교의 궁극적인 권위”를 교회에서 “개별 지성”으로 옮겼다면, 경건주의와 낭만주의는 궁극적인 권위를 개인의 경험에 놓았다. 이 모든 것은 일정 기간 복음주의가 근대 세속주의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유포자에 더 가깝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생에서의 성장은 끝이 없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자라난다. 교회를 떠나서 성장한다는 것은 몸의 머리와 연결을 잃는다는 것이다(엡4:12-15). 우리의 믿음은 결코 충분히 강하지 않고, 우리의 소망은 밝아야 할 만큼 밝지 않으며, 우리의 사랑은 알아서 먹는 자가 될 만큼 그렇게 온기 있지는 않다. 성숙도는 교회를 덜 중요하다고 밀쳐 이끌지 않는다. 믿음과 성숙의 원천이 항상 그리스도의 대사들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임을 알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실한 부모로서 자녀들이 자신을 돌보도록 하거나, 온갖 교훈의 사조에 밀려 오락가락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양 떼를 지상의 순례 기간에 잘 인도할 것이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290-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