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걸어다니는 시체들이고, 우리의 최고급 의상은 수의(壽衣)이다/ 마이클 호튼
우리는 걸어다니는 시체들이고, 우리가 최고급 의상인 양 뽐내는 종교와 도덕이 사실은 수의임을 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자면 우리는 립스틱을 바른 시체와 같으며, 우리의 개과천선이 화장술에 불과하다는 점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무화과 나뭇잎은 좀 더 세련됐다(그리고 비싸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의 벌거벗음을 감추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우리의 시조들이 입었던 가죽옷과는 다르다. 우리의 죄뿐 아니라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64:6) 같다. 이사야 59장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맞서는 재판정의 모습을 보여 준다. 백성이 수많은 재난이 공정하지 않게 그들에게 임했다며 볼멘소리를 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한 기소자인 선지자는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희생자가 아닌 범죄자로 단죄한다.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6절), 증거가 제출된 후에야 백성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9-15절).
이런 상황에서, “중재자가 없음을” 보신 그 재판장은 스스로 전투 복장을 입고 자기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백성의 구원을 성취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16,20절). 교회는 이 주체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체를 우리로 바꿨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8:11). 이런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예레미야는 여기에 덧붙여 말한다.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렘23:16-17). 거짓 선지자들이 위기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거나 하나님의 집을 아끼는 열심 때문이 아니라 인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좁디좁은 세계에 갇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으신 진정한 세계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실제로 우리의 뿌리에서부터 참된 변혁을 가져오는 새롭고 놀라운 무엇 대신에, 부드럽게 현상을 인정해주는 발라드풍의 배경 음악을 더 많이 듣고 있다. 장대 끝에 매달려서 다른 모든 안전의 수단들을 놓아 버리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팔로 떨어지기보다는, (그래도 말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다른 수단을 찾아보도록 권유받는다. 우리가 대본을 쓸 때 죄와 구속은 하찮은 것이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베소 교회처럼 첫사랑, 그리스도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미지근해졌다. 덥지도 차지도 않아서 온기를 느낄 수도 그렇다고 청량함을 느낄 수도 없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곤궁과 헐벗음을 깊이 자각한 교회는 모든 것을 지닌 구세주에게 떨어지지 않게 붙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확신에 빠져 있고 내재하는 죄성을 상대적으로 무디게 인식하고 있는 교회는 편리한 대로 종교와 도덕에 손을 내밀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이 올바른 규칙을 따르게 되면, 메시아의 왕국이 도래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메시아 자신이 오셨을 때, 그들은 자신의 불의와 무기력함에 맞부딪치게 됐다. 그리스도는 괜찮은 사람들이 더 나아지도록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눅19:10) 오셨다. 이것이 우리의 자존심을 짓뭉개는 것이라면, 또한 이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희망적이고 놀라운 소식이기도 하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자기의 의를 쌓으려 하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롬10:3)를 선사 받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신뢰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도덕주의로 향한다. 젊은 부자 관원처럼 예수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다. 율법의 진의가 무엇인지 직면하게 될 때까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하고 스스로 지레짐작할 것이다. 우리가 비뚤어지고 가난하며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저절로 알지 않는다. 밧줄의 끝으로 내몰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제자들도 물었다.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18:26-27).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307-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