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시뿐 아니라 순례 기간 내내 복음만이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다/ 마이클 호튼
신자는 성도인 동시에 죄인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 복음으로 먹어야 하는 필요 이상으로 자라날 수가 없다. 회심시뿐 아니라 순례 기간 내내 복음만이 “하나님의 구원 능력”(롬1:16)이다. 주일마다 그리스도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선명하게 선포된다면, 성도는 믿음과 선행 가운데서 힘을 얻을 것이고, 비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거듭나게 하는 말씀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 외부인은 내부인이 된다. 사람들을 외부인으로 만드는 낯선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낯선 메시지와 낯선 방법으로 하나님의 강력한 일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설교와 성례라는 표지를 통하여 교회의 사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한 교회의 제자화는 참된 선교의 핵심이다. 목사는 선포하고 가르치며 성찬을 시행한다. 장로는 신앙과 행위의 교정을 비롯하여 양무리의 영적 필요를 돌본다. 집사들은 교회가 모은 물질을 급박한 필요에 처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런 표지를 가지고 있고, 이런 표지에 충실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이 선교적이다. 우리의 순례 여정에서 어떤 기독교인의 성숙도 이 사역을 넘어서 자급자족하는 자가 되지는 않는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성령으로 말씀과 성례를 통해 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충분할뿐더러, 세상을 향한 우리의 선교에도 충분하다. 승천하신 우리의 왕이 수단을 제정하셨다. 그 나라를 받은 평생의 신자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을 이끌어 오기 위해서 더 커져 나가는 원을 그리며 활동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종말의 자기중심적 성향에 대해 경고한 후에, 복음을 듣는 자들의 현실적인 필요에 끼워 맞추거나 신조를 행위로 바꾸지 말라고 명령한다. 오히려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한다. 즉 인기를 끌든 그렇지 못하든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2-5).
자아도취의 해결책은 우리에 대해 더 많이 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우리 증거의 초점이 우리의 변화된 삶이면,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증언을 듣는 사람도 쉽게 실망할 수 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에 너무 압도되어 자신들의 영적 전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열중하지 못했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것은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자신들의 증언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들의 내적 변화 혹은 경험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지만, 이것조차도 복음의 결과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중생한 것은 어떤 단계에 이르는 공식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 —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벧전1:23,25)으로 되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의 도덕적인 활동으로 보완되기를 기다리는 죽은 무엇이 아니다. 천만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으며(히4:2) 언제나 의도한 사명을 성취한다(사55:11). 사실, 기독교는 선교적 신앙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전권대사들이 나르는 교서요 선언서이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시대에 많은 개혁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컵의 바깥을 씻으려 했다고 지적한다. 종교개혁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오라고, 죄뿐 아니라 선행으로부터도 도망치라고 했으며 오직 믿음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잡으라고 했다. 전체 예배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선명한 우선순위를 두도록 개혁되었다. 이제 예배는 더 이상 교회가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을 향해 베푸시는 구속의 섬김이 되었다. 이제 백성은 자신의 일상적인 부르심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예배를 마치고 일어서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변혁,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성화가 자신의 알량한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됨의 결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다. 엘리자베스 악티마이어, “사람들이 들을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떠나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확증할 수 있는 어떤 논증도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므로 교회를 깨우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선포함뿐이다. 그리스도를 선포함은 인간의 말 너머의 초월적인 말씀이 있다는 믿음의 증거다.” “미국의 수많은 교회들은 더 이상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믿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사역을 하시면서 언제나 이적으로 군중을 모으셨지만, 설교를 하실 때에는 그 중 상당수를 내치셨다. 예수는 여기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임을 선언하신다. 그것은 예수 자신인 영원한 “하늘에서 내려온 떡”(요6:31)이다. 실망하여 떠나는 자들이게 이렇게 덧붙이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이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절).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32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