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12권, 11장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첫 번째 단락(3-8) 교회 안에서 은사를 행사하는 남녀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두 번째 단락(9-마지막) 교회 안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 단락에서 사도는 교회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성령의 은사의 표준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는 초대교회에 있어서 아주 골칫거리였음에 틀림없을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러 서신들은 주로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난제들에 대한 대응책들이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문제들은 여전히 로마에 있는 교회나 다른 여러 교회들 속에서도 일어났던 문제들이었다. 이 대목이 고린도전서 12장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단락의 분석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예증으로 사용하여 자기의 권위를 역설하면서 동시에 자기의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두 가지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말하는 바를 청종하기를 바라고, 아울러 그들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 또한 사도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을 알기를 원한다. 바울의 서신 거의 모든 곳에서 이 점을 발견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요점은 겸손이다. 사도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동등한 자리에 놓고 있다. 사람들은 이 영광스러운 겸손을 하나의 연약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사도는 자기의 주제를 도입함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겸손의 필요성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사도가 겸손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서 설정해 놓고 있는 원리들은 무엇인가?
첫째, 그리스도의 삶은 모두 은혜에 속한다는 것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 속에서도 그 요점을 다루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3:27)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자랑할 만한 여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원리는 우리의 전체 입장이 은혜의 결과요 우리의 전체 행동은 그 은혜를 기초로 서 있다는 것이다.
둘째, 4-5절에서 발견된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려 준 것이다. 몸에 대한 유추법의 요점은 몸의 각 부분이 항상 한 전체의 부분이라는 점이다. 그 부분들은 다른 부분들과 관계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특히 머리와 관계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도는 이 두 원리를 설정해 놓고 6-8절에서 계속 설명해 나가고 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말하노니” - 은혜는 정말 그런 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호의이다. 그것은 자비하심이요 축복, 곧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은혜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설명될 수 있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로 역할을 수행하도록 능력을 주었던 ‘특별한 은혜’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한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갈라디아서 1:15-16, 에베소서 3:7-8에서도 이 점을 거듭 반복하고 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결코 그는 사도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로 하여금 이 비상한 통찰력, 그러한 이해력, 바울로 하여금 신약의 모든 기자들 중에서 놀랍게 빛을 발하도록 한 그 특이한 분별력의 기능을 갖게 하여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베드로도 바울에 대한 글에서 자신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음을 인정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벧후3:16)
사도가 사도행전 26장에서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앞에서 증언하면서, 그는 부르심을 받았고, 그는 사로잡힘을 받았고, 그는 세움을 받았고 지명된 것임을 말했다. 그리고 로마서 11장에서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라는 이 어구 속에 내포되어 있다. 한편에서는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4:16, 빌3:17)고 말할 수 있었고, 고린도전서4:15절에서는 ‘나만 너희의 아비니라’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거만한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음은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오직 받은 것뿐임을 알고 있다.
교회 안에서 권위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로마 카톨릭은 교황이 그리스도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교회 역사 속에서 그러한 비행이 저질러졌다. 신학에 있어서 권위는 항상 영적인 것이지 직무적인 것이 아니다. 그 원리는 정말 중요한 원리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직무가 아니라 사람이다. 이제 직무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되어 버렸다. 신약성경에 성직 계급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다른 직무들, 여러 다른 소명들, 여러 다른 은사들이 있다. 그 모든 것은 세상과 국가로부터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은 콘스탄틴 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기독교 초기 2세기까지는 세상적인 성직 계급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 장로 감독이라는 말은 상호 교환적인 용어일 뿐이었다. 3세기 들어와서 그 직무들이 나누어져, 감독, 장로, 집사의 순으로 되고 로마에 교황을 세운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약성경과 동떨어진 것이며,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말하노니”라는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개념이다. 사도들은 겸손해지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복도, 소위 보좌라고 불리우는 자리에 앉을 필요도 없었고, 사람들로부터 멀리 높이 떨어져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 중에 있었고,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하나였다. 신약성경에는 언제나 권위와 겸손의 조화가 드러나 있다.
교회연합이라는 문제가 우리를 압박해 오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질문들을 던지라. 현재의 체계가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신약성경의 어디에 그것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