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의 치료는 칭의, 죄의 지배의 치료는 성화, 죄의 뿌리의 치료는 영화다/ 존 플라벨
병든 영혼들이 가지는 죄책을 보라. 죄책이란 영혼에게 있어 매우 치명적인 상처이다. 불쌍한 죄인의 심장을 찌르는 치명적인 상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죄이든지 간에, 모든 죄는 그 본질 자체에 치명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6:25). 그러한 죄책의 상처를 치료하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죄를 지은 영혼이 영원한 형벌과 비참에 처해지는 것은 사실상 당연한 것이다. 죄책에 기인한 하나님의 정죄의 선고는 가히 두려운 것이다. 세상에서 처할 수 있는 궁핍과 환난을 모두 더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정죄의 무게보다 가벼울 것이다. 단 하나의 달란트가 수많은 깃털들보다 무거운 것처럼 말이다. 그 치료는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로부터 영혼을 풀어내시는 일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이 사면의 은혜를 받은 영혼은 죄로 인해 받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책임에서 온전히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서만 시행된다. 그리스도의 피 외에 하늘이나 땅에서 그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죄인들의 영혼을 지배하는 죄의 영향력 또한 매우 치명적인 것이다. 죄의 지배를 받는 영혼은 서글픈 조건에 처할 수밖에 없다. 영혼의 총명은 어두워지고 그 양심은 둔감해진다. 마음은 굳어져 그 의지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모든 정서는 무질서하게 뒤죽박죽 엉켜있을 뿐이다. 영혼이 가지고 있던 모든 기능은 죄의 권세 아래 완전히 상실 당해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 질병을 치료하실 분이시다.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죄책을 치료하시는 그분께서 당신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우리 영혼을 지배하고 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곧 죄책의 치료로 칭의를, 죄의 지배에 대한 치료로 성화를 이루시는 것이다.
죄의 지배에 대한 치료는 어두워진 총명을 밝히시는 일이다(고전2:14).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성결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어두워지고 무뎌진 총명의 기능을 치료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제 자리에 놓는 것이다(엡5:8). 성결의 영이 그 양심을 소성케 하시면, 양심은 매우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된다. 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은 다시 예민함을 찾은 양심을 가진 영혼만이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은 죄의 지배로 인해 무질서해진 정서를 바로 잡아 제자리에 돌려놓으신다.(히4:6,7). 그 일을 통해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죄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영혼에 존재하는 지독한 질병이다. 우리의 모든 건전치 못함의 뿌리가 바로 그것이다. 사도는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며 탄식했다(롬7:17). 거룩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이 애통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죄책과 죄의 지배에 대한 치료를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본성 속에 내재하는 죄의 문제 자체가 치료되기 전까지는 완전한 상태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위대하신 의사께서 우리를 위해 그 일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다. 우리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말이다. 이것이 구원의 마지막 단계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우리가 온전하게 치유되는 일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처음부터 벽에 자생하게 된 넝쿨의 뿌리는 그 벽을 허물기 전까지는 뽑을 수 없다. 벽이 허물어지는 날 그 담장에 붙어 있던 넝쿨은 뿌리 채 단 번에 뽑혀나갈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치유받는 일이 그러하다. 그 일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몸을 떠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수행하실 것이다.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일은 우리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시점에 이루어진다. 모태에서 영혼과 몸이 연합하는 순간 죄가 임하였던 것처럼 영화는 다시 우리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 존 플라벨, 『은혜의 방식』, PP 246-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