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주일설교, "달려 갈 길, 받은 사명"
본문: 행 20:17-24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다.
이것은 따로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생각한다.
받은 사명을 감당하고 완수하기 위해서 달려가는 것이지요.
향방 없이 마구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다.
다들 달리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무리에 섞여서 달려간다.
누가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고, 힘있는 사람이 권하니까 따르고 다수가 가니까 나도 간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고 한다. 다수결의 좋은 점도 많지요.
그러나 우중정치, 대중의 어리석음의 정치가 되기도 한다,
다수결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일 수도 있다.
진리는 결코 다수결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남은 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만 구원하신다.
역사가 한참 흐르고 나서야 그때 대중들이 지향하던 것들이 망하는 길이었음을 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갖고도 바알신앙을 혼합하여
어리석고 멸망하는 길로 다들 함께 가고 말았다.
역사의 교훈을 바로 보고 바로 가야 할텐데 그렇지를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의 생사화복과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그 거룩을 공의와 정의와 사랑으로 나타내시고 이루신다.
세상과 사람을, 많이 가진 사람, 힘있는 사람들이 우선은 통치하는 것 같지만,
그 배후에 그 위에 하나님이 거룩과 법도를 가지고 그분의 계획대로 구속사를 이루어 가신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힘깨나 쓰던 왕후장상들이 이름도 없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갔다.
오늘은 이긴 사람들이 내일은 지고 오늘 떠오르던 사람들이 내일은 떠내려가고
음지에 있던 사람들이 양지에 들어서고 고난 받던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다.
제일 멋진 것은,
잠시 고난의 경한 것들을 받던 사람들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 것이다.
자,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복된 길일까요?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을 위해서 살다 가는 것보다 더 허망한 것은 없다.
죽으면 끝이 아니다. 죽으면 심판이 있고,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에 따라,
영원히 살 곳, 지옥과 천국이 결정되고, 거기서 상급과 형벌의 정도가 정해진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가장 복된 인생을 사는 비결을 말씀해 주고 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야 하고
그 사명을 마치려 함에는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 주 예수께 받은 내 사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하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우리도 각기 내 인생이 지향하는 푯대, 우리가 향해야 할 부름의 상이 있어야 한다.
현재 직장과 가정과 사업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만이라면, 이 세상을 떠나갈 때 우리는 빈 손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밖에 없다.
그 달란트, 그 속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구속사가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만이 할 수 있고, 나만이 해야 하는 의무와 특권이 있다.
그것이 내 사명이요, 부름의 상이다.
어디서든 어느 처지에서든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준비하고 일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요
푯대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내 인생의 푯대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평생 아무리 열심히 살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세상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산 것에 지나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늘에 시민권이 있음을 알고,
그 하늘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우리의 우선순위가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내 나라, 내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으로 바뀌어야 한다.
땅에다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야 한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야로 묵상하면
내가 달려갈 길, 내 사명의 길이 보인다.
세상과 세상의 일만 주야로 묵상하고 주야로 바라보니까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내가 정말 달려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직접 하는 것과, 그것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것은 동일한 사명의 수행이다.
직접 씨를 뿌리는 자도 있고, 거기에 물 주는 자도 있다.
하나님은 각기 기여한 대로 상을 주신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3:8-9)
이 땅에서 우리가 한 일들은 불을 가지고 태워서 남는 것이 우리의 상이 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2-15)
오직 나와 내 나라의 의식주와 행복만을 위해 산 사람들은 불로 태우면 남을 것이 없다.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되, 겨우 영혼만은 구원을 받되
겨우 불 가운데 건져진 불쌍한 영혼이 될 거라는 말씀이다.
불로 태워도 해를 받지 않고 태워 없어지지 않는 금과 은과 보석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헌신한 부분들이다.
불로 시험하여 합격한 공적은 상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2. 사명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
세상 사람들도 자기의 야망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 간다.
게으른 자에게 돌아올 것은 가난과 궁핍, 남의 도움 없이는 못사는 신세일 뿐이다.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잠24:30-34)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도 맡기신다.
요셉은 노예 신세일 때도, 죄수 일때도 부지런하여 총무가 되었다.
다윗은 아둘람 굴 시절에도, 시글락 성 시절에도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였다.
모세도 나이 80이 되었는데도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러 호렙 산으로 가다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40년 동안 기다리던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은 다윗을 불러내어 세우는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신다.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78:70-72)
양의 우리에서, 젖 양을 지키는 중에, 부지런히 일하는 현장에서 다윗을 이끌어 내셨다.
양의 우리에서 젖양을 잘 지키며 달려가는 것을 보시고, 이스라엘의 우리와 백성들을 맡기셨다.
그랬더니 젖양을 기르던 마음의 완전함으로 백성을 기르고
양을 잘 치던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백성을 잘 지도하였다.
골리앗을 죽일 때도, 사울 왕이 준 보검이 아니라, 양을 치던 시절에 부지런함으로 익숙해진
물매에 돌을 담아 던져 한 방에 명중시켜 죽였다.
마음의 완전함(성품의 성숙)과 그의 손의 능숙함(능력의 전문화)은
현재 주어진 일, 작은 일에서의 부지런과 충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형편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것도 사명감으로 달려가는 자의 몫이다.
사명감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은 궁핍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우게 된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능력 주실 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어떤 처지에서도 부지런히 달려가자.
3. 사명을 이루는 달음질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구차스럽게, 살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죽고, 목숨을 걸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게 돼 있다.
자기와 새끼들만 연명할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가문들은 몰락하고
오히려 자기와 자식들이 목숨 걸고 의병과 나눔에 헌신한 가문들은 오랫동안 번영하고 있다.
인생을 길게 보면, 역사를 길게 보면, 사필귀정이요, 공의가 나라를 오랫동안 부강하게 한다.
불의와 부패는 반드시 멸망과 몰락을 가져온다.
악인의 형통은 등불이 꺼지듯 꺼지고 풀이 베임 같이 채소가 쇠잔함 같이 사그라지고 만다.
더 더욱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주님의 제자의 길을 갈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4-35)
‘자기를 부인하고’, 이제 돌보야 할 나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주님의 본을 따라
자기 목숨을 걸고 달려간다는 뜻이지요.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하면 죄에 대해서는 죽어야 한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 나라보다 내 나라를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의보다 내 의를 더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죄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다.
거듭나고 회심하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게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쓰라는 것이다.)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이 사명을 위해 달려가고 마치려 함에는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겠는다는 것이다.
그는 사역을 달려가는 동안에도 목숨을 걸고 하였다.
모든 겸손과 눈물과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거리낌이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
그는 이제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한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고 하신다.
그가 목숨을 걸고 전한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다.
죄를 회개함 없이는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이 있을 수 없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것이 정확한 회심의 정의이다.
주 예수께 받은 은혜의 복음은 바로 회심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십자가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과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회심은 일어날 수가 없다.
이 은혜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은혜의 복음을 거부하고 전하는 자들을 죽이고자 하였다.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사탄의 계략이 거기에 있다.
회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을 주고, 이후의 사명길을 달려가는 데 있어서
성령과 말씀을 힘입어 목숨을 걸게 해 준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그물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야고보와 요한도, 세리 마태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곧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랐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사명의 길을
목숨 걸고 달려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