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의 미련한 것”을 택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폴 워셔
인류의 역사와 구원사 속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쓰인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그는 유례 없는 박해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로마 제국 전역에 복음을 전했으며, 기독교 사역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하게 본을 보여주었다. 바울 사도는 인간에게 전달된 메시지 가운데 가장 믿기 어려운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그 모든 역사를 이루어냈다. 바울은 지성과 열정의 측면에서 매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이 능력을 발휘한 이유는 재능이 아니라 복음을 충실하게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바울 사도는 다른 무엇보다 설교자였다. 예레미야처럼 그도 복음을 전하려는 강한 열정을 느꼈다. 복음은 그의 내면에 결코 가두어놓을 수 없는 거센 불길과도 같았다.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후4:13).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17,22-24).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나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전도의 미련한 것”을 택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다(고전1:21). 모든 설교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타락하고 부패한 이 시대의 문화적 관점이 아니다. 바로 성경이다. 부패한 이 시대의 문화는 자신이 보기에 지혜롭고,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하는 말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좋아한다(롬1:22,딤후4:3).
바울 사도는 어느 곳을 가든지 복음을 전했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야 한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특별히 정해 주신 방법은 설교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정해 주신 것과 오늘날의 속된 문화가 바라는 것 사이에는 넘나들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 성경의 “일점일획”이 지닌 권위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마5:18).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틀림없이 역사하실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복음의 아름다움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마7:6). 설교자는 육에 속한 사람들의 부패한 마음이 원하는 것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의 역할은 그들이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로 복음의 참 맛을 느끼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기까지 그들에게 참된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다(사55:1,시34:8).
참 복음을 전하는 설교는 세상 사람들 눈에 늘 어리석어 보인다. 설교를 “적절하게” 만들어 그런 반감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면, 복음의 능력은 현저히 줄어들고 말 것이다. 인간의 희망은 정교한 논리, 탁월한 언변, 속된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고전1:27-30).
우리는 마치 철근으로 동여맨 듯, 죄에 단단히 속박된 문화에 살고 있다.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나 영적인 삶을 지도하는 사람들이 교훈적인 이야기나 멋스런 금언, 삶의 지침을 전하는 데서 그친다면, 어둠의 권세를 향해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 곧 성경에 정통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문화를 향해서든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신다”라고 외칠 수 있는 설교자가 필요하다.
- 폴 워셔, 『복음』, pp 1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