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메이첸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를 신뢰할 수는 없다/ G. 메이첸

강대식 2014. 9. 1. 20:01

만약 우리가 예수의 인격에만 집중하고 그가 이룬 것을 무시하거나, 그 인물에만 집중하고 그의 메시지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암울함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슬픔 대신 기쁨을, 연약함 대신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손쉬운 타협에 의해서나, 논쟁을 회피함에 의해서나, 예수는 붙잡고 복음은 거부하면서 그것을 얻을 수는 없다.

 

슬퍼하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영적으로 세상을 정복하게 된 자들로 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에 그와 가졌던 접촉이 가져다준 영감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것은 그가 부활했다는 메시지였다. 오직 그 메시지가 그들에게 살아 있는 구주를 줄 수 있다. 오직 그 메시지만이 오늘날 우리에게 살아 있는 구주를 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인물에만 집중하고 메시지를 간과한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와 생생하게 접촉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로 인해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메시지는 부활의 사실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예수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가 신뢰할 만한 인물임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그를 신뢰하기를 그가 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구원했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가 또한 우리를 구원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위해 그는 그것보다 더 큰 일을 했다. 우리를 위해 그는 죽었다. 우리의 무서운 죄책, 하나님의 율법의 정죄, 이것이 은혜의 행동에 의해 제거되었다. 바로 이 메시지가 우리를 예수에게로 이끌며, 그를 오래전 갈릴리 사람들의 구주만이 아닌 당신과 나의 구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지에 대한 믿음 없이 그 인물에 대한 신뢰를 이야기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신뢰란 신뢰하는 사람과 신뢰받는 사람 사이에 인격적 관계를 수반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 인격적 관계는 복된 십자가의 신학에 의해서 확립된다. 로마서 8장이 없는 예수의 지상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죽은 이야기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 혹은 그 장이 포함하고 있는 메시지를 통해서 예수가 오늘 우리의 구주가 되는 까닭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라는 인물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의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신뢰라고 말하는 것은, 실은 감탄 혹은 존경의 의미일 뿐이다. 그들은 예수를 모든 역사의 지고의 인물로, 혹은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자로만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고의 인물이 그의 구원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일 때만 신뢰가 일어난다. “그가 다니면서 착한 일을 하셨다”, “그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분명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존경이고, “그는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그는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라는 말은 역사적 형식의 말이다. 그것은 발생한 어떤 일에 대한 설명이며, 사실에다 그 사실의 의미를 첨가한 것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심오한 전체 구속 역사의 본질을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 교리가 믿음의 뿌리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비교리적인 종교 혹은 일반적 진리에만 근거한 종교를 원한다면, 우리는 바울뿐 아니라, 초기 예루살렘 교회뿐 아니라, 예수 자신까지 포기해야 한다. 오늘날 대중적인 설교에서 교리에 대한 현대적인 욕설이 동원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는 칼빈이나 투레틴 혹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신학자들에 대한 공격이 현대의 교인들에게는 크게 위험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리에 대한 공격은 교회를 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정하는 만큼 아무 잘못 없는 그런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신학에 대해 반대하는 내용은 곧 신약성경의 핵심 그 자체에 대한 반대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그 공격은 17세기 신학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성경, 나아가서 예수 자신에 대한 공격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 자체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성경의 교훈을 위대하게 설명한 역사적 내용에 대한 공격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불행한 일이다. 만약 교회가 1.900년의 기독교 역사의 모든 연구와 사색의 결과물을 다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면, 설령 성경이 그대로 보존된다 하더라도 그 손실은 엄청날 것이다. 이전 세대들의 노력은 존중되어야 한다. 각 세대가 이전 세대의 성취에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려 한다면, 어떤 학문에서도 참된 진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학에서는 과거를 매도하는 것이 진보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그 매도는 얼마나 천박한 악담에 근거하고 있는가! 교회의 위대한 신조들에 대한 거창한 비난을 들은 사람이 나중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읽거나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신학적인 책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으면 다소 충격을 받고, 그 과정 속에서 현대의 얄팍한 용어들에서 등을 돌리고 매 단어마다 생명이 약동하는 죽은 정통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한 정통 속에 온 세상을 기독교의 사랑으로 환히 빛나게 하기에 충분한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교리에 대한 현대의 악평 속에는 위대한 신학자들과 신조들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신약성경과 우리 주님에 대한 공격도 들어 있다. 자유주의 설교자는 어떤 염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기초해 있는 기독교 전체 토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자유주의 신학과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즉 자유주의 신학은 전적으로 명령법의 분위기이지만 기독교는 큰 승리를 거둔 직설법과 함께 시작하며,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지만 기독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동을 선언한다는 것이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7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