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에 대한 나의 회고
나는 이 책을 1967년도에 전남 목포 인근의 결핵요양소 한산촌에서 처음 접했다. 서울신학대학 3학년생으로서 휴학하고 결핵을 치료받고 있을 때였다. 이 책과 함께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를 읽었다. 이 두 권의 책이 내게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보수 신앙을 깡그리 무너뜨렸고 그래서 나는 폴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이라는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하고자 서울신학대에 자퇴원서를 내고 연세대 철학과로 진학하기까지 했다.
이에 더하여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 등으로 무장하고서 나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나는 교회 밖에서 25년을 살았다. 물론 나중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거치장스런 이름도 떼어버리고 신에게 솔직한 한 인간으로서 살았다. 그 신은 나의 궁극적 관심이었고 존재의 기반이었으며 나는 그 신 앞에 신 없이 살기를 힘쓰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았다.
그런데 1992년 10월 어느 기도원에서 회심하고 보니, 그 25년간의 삶은 흑암과 혼돈과 공허(창1:2)였음을 깨달았다. 그후 그리스도께 헌신하여 목사가 되었고 화성 한 시골에서 아주 자그마한 목회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도 10여년 동안 다른 영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따라 헤메었고, 약 9년전부터 청교도신학을 대하면서 비로소 바른 복음 바른 영 바른 예수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 청교도아카데미에서 이 책을 한 번 다루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이제는 비판적인 입장에서 이 책을 요약하고 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는 보수주의 신학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유명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신학자들이 하나 둘 씩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면서 점점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물들어 갔다. 그들에게서 배운 신학생들이 졸업하여 안수 받고 목사가 되어 장로 교단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그들이 주류가 되고 대세가 되고 말았다. 총회를 차지하고 프린스턴의 이사진과 교수진을 다 장악하고 말았다. 그들을 반대하던 메이첸 교수는 총회에서 목사직이 면직되고 쫓겨났다. 그와 몇 사람이 주축이 되어 옛날의 프린스턴으로 돌아가고자 세운 대학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이다.
이러한 수순이 보수 주류 교단에서 암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다. 광명의 천사로 행세하니까 웬만큼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으로 무장하고 민감한 사람이 아니면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들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을 설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되는 단어들이 자취를 감춘다. 죄와 회개, 성령과 기적, 지옥과 재림 등의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배워서 맘에 들고,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교양과 종교에 맞는 사상들을 성경을 빙자하여 가르치고 설교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 상담학과 심리학의 지식과 방법들이 만연하고, 마켓팅과 경영학 수법들이 그대로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관상기도나 침묵기도 등이 영성훈련의 수단과 기법으로 도입 보급되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그들의 열매들이다. 우선 당장 유용하고 실용적인 가르침과 사상들이 복음과 성령의 이름으로 가르쳐진다. 그것들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저주하고 있는 다른 영이고 다른 복음이고 다른 예수인지를 알기까지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조심하라고 하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인지를 알기까지는, 거짓 선지자들이고 제사장들인지를 알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성경과 영을 바로 알고 가르쳤던 종교개혁자들, 청교도들의 신학을 대면하기까지는 이들의 성경 해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이들의 영이 얼마나 잘못된 미혹의 영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 열매들을 분별하기 위해 책들을 읽어야 하는데 그들의 미혹의 책들이 베스트 셀러를 이루어 가려 버리고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지고 가르쳐지고 있을 뿐이다.
틀은 아무리 새롭게 만들어 봐야 인간이 바뀌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이다. 정의와 사랑을 외치는 자들이 불법과 착취를 서슴치 않는다. 평등을 외치는 자들이 특권을 즐긴다. 공맹의 틀로 이조 5백년을 다스렸지만 가르침과 삶은 달라서 탐관오리들만을 양산했다.
틀은 항상 있어 왔고 틀의 목적과 취지는 항상 좋았다. 다만 그 틀을 운용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달라서 틀이 잘못된 것으로 비난 받는 것이다. 그리고 새 틀을 만든다는 자들도 구악을 일소한다면서 더 나쁜 신악을 만들어 온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사람이 진정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고서는 인류를 위한 교회라는 소망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의 논리를 보면,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예언자들이고 선지자들이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성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돌맞을 각오를 하면서 진정한 신 앞에 그들을 바로 세워주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로 보인다. 신에게 참으로 솔직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일 뿐이고 그렇게 포장할 뿐이다.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현대인을 위한다는 그들의 공언과는 달리 그들은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와 멀어지는 군중들을 양산할 뿐이다.
결국은 이들은 자기들의 철학과 인생관을 어떻게든 퍼뜨려서 동조자들과 아류들을 얻고 교회를 흩뜨리고 성경을 갈기갈기 찢어 발기고 하나님을 깊고 깊은 존재의 바닥으로 밀어넣는 ‘왕마귀’들일 뿐이다. 이 ‘왕마귀’라는 말은 90이 다 된 할머니가 신앙생활 잘 하던 딸이 이런 사상들을 접하면서 변질되는 것을 보며 그 원흉 격에 해당하는 철학교수 양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 딸의 친구들은 한신 계통 또는 민중신학을 구가하는 유명 교수들이었다. 어린 소녀 같이 아름다운 신앙이 한 철학교수 양반을 만나 함께 사업하며 로빈슨이 말하는 신앙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를 위시해서 많은 순수한 젊은이들이 이 철학교수를 만나고서는 교회와 성경을 멀리하고 결국은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망나니들이 되고 말았다.
그들이 구가하는 자유는 사람을 성숙시킨다는 미명하에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죄를 마음껏 짓는 자유로 전락하고, 인생을 어둠과 혼돈과 공허로 채우게 하는 왕마귀(미혹의 영)의 자유일 뿐이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유명 대학의 학위를 받아 주류 교단의 신학교의 교수가 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 오늘날 교회들을 어지럽히고 있다. 교회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들이 그래도 형식적으로는 바리새적이고 보수적이기에 거기에 빌붙어 살기 위해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않할 뿐이다. 그들은 겉보기에 신앙 좋고 지적으로 매우 탁월해 보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성경해석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지혜로 무장한 신학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로 채워진 신학이어야 한다. 성경을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의 계시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내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살기를 힘쓰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성경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성경대로 성령의 인도와 조명을 받으며 성경대로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로빈슨은 신에게 솔직한다고 하는데, 그가 말하는 ‘신’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고,
사탄이고 미혹의 영이고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일 뿐이다.
그는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르고 있다. 귀신의 가르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