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2권, 성령하나님과 놀라운 구원 (강의안)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시리즈 2 성령하나님과 놀라운 구원
1장 성령의 인격
서론
성경은 장별로 죽 읽어나가라고 권장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위대한 교리들을 구원의 계획에 따라 살펴보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는 처음부터 그렇게 해왔으며, 요즘의 교회가 이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비극이다.
성경을 통독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나무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의 목적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해 주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를 연구하는 것만큼 성경의 독특하고 신적인 영감을 놀랍게 증거해 주는 것은 없다.
교리 연구를 통해서 성경이 하나의 책인 것을 알게 되고,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지만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의 메시지에는 놀라운 일관성이 있어서 한 가지 주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다.
인류가 타락한 순간부터 하나님은 구원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하셨으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단계별로 보여준다.
성령의 교리도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교리이며,
성경의 두 번째 구절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가르침은 이후 계속해서 나온다.
이 놀라운 통일성은 성경의 독특하고 신적인 영감성과 무오성의 증거이다.
1. 성령에 대한 교리
위대한 구원계획에서 성령은 구원의 적용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수행하신 그 위대한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고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실행자이시다.
1) 성령의 교리 역사
기독교 초기 수세기 동안은 성령의 교리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성자의 인격에 공격이 가해졌고, 교회는 성자의 교리를 수호하고 확증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느라 그랬다.
종교개혁은 성령의 교리를 재발견한 시기이기도 하다.
워필드는 존 칼빈을 위대한 성령 신학자라고 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체제에서는 성령이 무시되고,
사제직, 신부, 교회, 마리아, 성인들이 성령의 자리에 놓여졌다.
종교개혁은 이 위대한 교리를 재발견했으며,
성령의 교리를 가장 철저히 연구한 사람들이 17세기에 영국에 살았던 경건한 청교도들이었다.
성령의 교리에 대한 존 오웬이 저술한 두 권의 책보다 더 훌륭하게 기술한 작품은 지금까지 없었다.
토마스 굿윈과 다른 청교도들 역시 그랬으며,
성령의 교리가 그토록 철저하게 연구된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결코 없었다.
2) 성령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태도와 그 이유
오늘날 사람들은 성령의 교리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잘못된 방법으로 강조 또는 과장하는 입장을 취한다. 후자가 전자의 원인이 된다.
위조와 거짓과 과장을 싫어한 나머지 성령에 대한 모든 것을 멀리해 버린다.
예언, 종말, 재림에 대한 교리를 무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3) 성령의 교리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
복되신 삼위일체의 위대한 교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가 진실이라면 우리의 사고와 교리 속에서
성부와 성자께 드리는 것과 똑같은 열심과 경의를 성령께도 드리지 않는 것은 대단히 큰 죄이다.
오늘날, 어느 때든지 교회의 영적 생활이 저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사람이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위대한 교리를 나타내는 찬송가들이 대단히 적은 것이 그 표시이다.
4) 성령의 이름들
성부와 관련시키는 이름들; 하나님의 영, 주의 성령, 하나님의 성령, 주 여호와의 영, 아버지의 성령.
성자와 관련시키는 이름들;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주의 영.
직접적이거나 개인적인 호칭들; 성령, 성결의 영, 거룩하신 자, 생명의 성령, 진리의 영, 보혜사.
이름이 보여주듯 성령의 사역은 거룩함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적용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거룩함과 질서를 만들어 내시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 때문이다.
성령의 궁극적인 사역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영들, 즉 악한 영들과 구분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2. 성령의 인격성
1) 성령의 인격성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이유
왜 성령을 하나의 힘이나 영향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가?
① 성령의 사역은 무언가 신비스럽고 은밀하기 때문에 성령을 영향력으로 생각한다.
성령은 은혜와 열매들을 만드시고 우리에게 은사들과 각종 능력들을 주시기 때문이다.
② “영”이라는 단어의 의미 때문에 성령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오해한다.
같은 단어가 숨결 혹은 바람, 능력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③ 성령의 상징들로 인해 성령을 비인격적 존재로 오해한다.
비둘기 모양으로, 기름과 물과 불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④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함께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⑤ 헬라어의 “영”은 중성명사다.
그래서 영어 번역에서 himself가 아닌 itself로 번역하는 실수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2) 성령의 인격성의 증거
① 중성명사인 성령을 남성대명사 “그”로 지칭한다.
(요16: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② 성령을 성부 및 성자와 같이 동일시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이것은 세 위격의 하나됨, 하나 안에 계신 세 분을 말한다. (고후13: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③ 성령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언급된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행15:28).
④ 성경은 성령께 인격적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지식을 가지고 계심.
(고전12: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 성령은 주권적 의지를 갖고 계심.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성령은 마음을 갖고 계심.
“성령의 열매는 사랑”-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심.
“성령을 근심케 말라”-성령이 슬퍼하실 수 있음.
(고전6: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이 내 안에 인격으로 계심- 성화와 거룩함을 촉진함.
3. 성령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
이 교리를 우리와 동떨어진 이론적인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교리는 실제적인 교리이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디에 있든, 어디로 가든 성령이 당신 안에 계신다.
또한 정말로 구원의 복을 누리기 원하신다면, 그 일은 당신의 몸이 성령의 전임을 앎으로서 가능해진다.
2장 성령의 신성
1. 성령의 인격성(계속)
1) 성령에게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으며 “그가”
2)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동일시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3) 성령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언급됨으로써 “성령와 우리는”
4) 성령이 인격적 속성들을 가짐으로써 “지, 정, 의”
5) 인격적인 존재만이 행할 수 있는 행동들을 행함으로써
(고전2:10)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통달하는 것은 인격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성령이 말씀하신다.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이 간구하신다. (롬8:26)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이 증언하신다. (요15:26)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인도하신다. (요16:13)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허락하지 않으신다. (행16:6-7)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6) 성령의 직무는 인격적 직무다
성령은 보혜사라고 묘사된다. 주님은 요14:16에서 “또다른 보혜사”라고 하셨다. 보혜사란 우리의 옆에 서서 도와주는 분을 말한다. 동일한 단어가 대언자(요일2:1)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성령은 우리 주님 대신 오신 분이다. 성령은 우리를 지도하고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신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16:7).
7) 성령은 인격적인 대우에 반응하신다
① 우리는 성령께 거짓말할 수 있다. (행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② 성령을 모독할 수 있다. (마12:31-32)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③ 욕되게 할 수 있다. (히10:29)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
④ 근심하게 할 수 있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2. 성령의 신성
1) 성령의 신성의 증거
① 성경이 성령의 신성을 명확하게 주장한다.
아나니아의 사건에서 “(성령을 속이고)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② 성령의 이름이 하나님과 결부되어 있다. (고전12:4-6)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③ 하나님의 속성이 성령께 돌려진다.
“영원하신 성령”(히9:14), 편재성(시139:7), 전능하심-“성령이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전지하심-(고전2:10)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6),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
④ 성령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다.
창조-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새로운 창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살리는 것은 영이니”(요6:63).
영감을 주시는 일- (벧후1:20-21)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모든 성경은 성령에 영감되고 무오하게 통제된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진리를 주시고 사람들을 영감시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부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롬8:11).
2) 성령과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
①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이 영원히 동등이시고 공존하신다.
삼위일체 문제에 대하여 가장 지혜로운 처신은 그 분명한 진술을 인정하여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지만 그 복되신 신성 안에는 세 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위격은 동등하시고 영원히 공존하신다고 말하는 것.
②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았으며,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온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③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
기독교회의 초창기에도 분열과 분리가 있었다. 첫 번째 중요한 분열은 11세기에 이 가르침 때문이었다. 전체 서방 교회(로마카톨릭과 개신교를 포함)는 이 가르침을 주장하였고, 동쪽 지역의 교회(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아들로부터 나오는 것”을 거부한다.
성령이 성부뿐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나온다고 말하는 이유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으로 불린다는 사실과 함께, 성령의 신성의 증거로 제시한 모든 논증이 이를 말한다. 주님은 성령을 보내실 분이 바로 자신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성부와 함께 하시며, 또한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과 똑같이 주님 자신도 성령을 통해 일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 성경은 성령이 게신 곳은 어디든지 성부와 성자도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우리 주님은 그가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며, 그 결과 성부와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세 분은 언제나 함께 일하신다.
④ 성령은 언제나 성부와 성자에게 스스로 종속되신다.
(요16:13-14)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이것이 복종이고 사역의 분담이다. 성자는 자신이 성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하며, 성령의 사역은 성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의 영광을 반영한다. 그리하여 복되신 삼위일체라는 이 놀라운 교리의 신비를 엿보게 된다. 성령은 스스로를 가리고 숨기시는 것처럼 보인다. 성령은 언제나 성자에게 초점을 맞추신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시험해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성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 자문해 보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에게 성자를 가리켜 보여 주심으로써 간접적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성령 자신에게 과도하게, 비성경적 방법으로 집중한다면 쉽게 잘못된 길로 가 이단이 될 수 있다.
⑤ 결론.
성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있는 위와 같은 역할의 분담,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한 종속의 관계에서 성부는 형체가 없으시고 보이지 않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시라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도 볼 수 없는 이” 이 분이 바로 성부이시다. 성자는 볼 수 있게 나타난 신성의 모든 충만이시다. “그 안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이분이 바로 성자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피조물에게 즉시 작용하시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시다. 우리는 성령이 그의 능력으로 아들의 형상 가운데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부는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분이시다. 성자는 눈에 보이는 분이 되셨으며, 성령을 통해 나에게 실제가 되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성부께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간다. 성자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하시는 분이시다. 또는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 주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3.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
성령이 무엇을 하시는지에 대해서만 생각지 말고, 그분이 누구이신지 깨닫도록 하자. 성자가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태어나셨을 때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낮아짐과 겸손의 행동이었는지요! 하지만 복되신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거하기 위해 오신 것 역시 마찬가지로 겸손의 행동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아지 못하느냐”(고전6:19).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분을 근심하시게 할 수 있다. 성육신과 더불어 이 사실을 통해,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고, 구속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낮아지심을 기억하도록 하라.
복되도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여! 아멘.
3장 창조와 일반은총
1. 오순절 날 이전의 성령의 역사
1)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
오순절 성령강림은 하나의 전환점이다. 두 가지 위험이 있다.
오순절의 의미를 과도하게 중요시하거나, 과도하게 경시하는 것이다.
오순절 이전 성령의 활동에 대한 상반된 기록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한 구절들이 있는 반면,
한편으로는 오순절 날 이전에도 성령의 능력있는 역사가 벌어졌다고 말해주는 듯한 구절도 있다.
아래 진술은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것, 성령이 오시리라는 것, 이제 곧 성령이 오시려 하고 있다는것, 그리고 드디어 성령이 오신 위대한 날이 이르렀다는 것을 암시한다.
① 요엘서2장28절 이하에는 오순절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이 있다.
베드로는 행2장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다. 겔32:26-27에도 예언이 있다.
② 눅3:16-17에서 세례 요한은 성령이 오실 것을 이야기한다. 요7:39,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행1: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③ 행2장에 있는 오순절 사건 자체에 대한 기록
2) 오순절 이전 성령의 활동
① 창조.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령은 세상의 창조에 관여하셨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를 통해, 성령에 의해 모든 것을 만드셨다. 복되신 삼위일체는 언제나 모든 사역에 함께하시지만 역할을 나누셨다.
② 창조의 유지와 보존. 사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시104편은 여호와께서 피조물로부터 자기 자신이나 자기 영의 능력을 거두신다면 모든 피조물은 쇠하고, 기울어지고, 소멸되어 죽는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자기 영을 보내시면 만물이 소생한다. 성자도 성령을 통하여 이 일을 하신다.
③ 일반 은총. 일반 은총을 책임지고 있는 분은 성령이시다. 일반 은총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일반적 복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일반 은총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없이 성령이 행하시는 일반적 작용의 의미한다. 이를 통해 성령은 도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죄를 억제하고 사회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적 의를 증진하신다. 성령은 맨 처음부터 활동하고 계셨으며, 구원받지 않고 지옥으로 떨어진 사람들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하셨다.
2. 일반 은총
1) 일반 은총이 나타나는 방식
“참 빛 곧 --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1:9). 그 빛은 자연적 빛으로서 자연적 오성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양심에 있는 빛이며,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이 양심의 빛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일반 은총이라고 부르는 성령의 작용 중 하나이다. 이 빛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가 인류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빛을 태어나는 각 사람에게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정부와 국가. 동일한 일반적 빛이 정부, 법률, 롬13장의 “권세들”에도 나타나 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하나님은 국가들의 경계를 나누셨다. 통치자들, 지배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정하셨으며,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않도록 정하셨다(롬13:4).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이 모든 일을 하시고 유지하신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성령의 이런 영향 아래 있다.
여론.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여론, 일반적으로 일치된 의견이 존재한다. 사람에게는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의식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일반 은총의 표시이다. 만일 성령이 사람들 안에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인류는 타락과 죄의 결과로 인해 오래 전에 사라져 잊혀진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문화. 문화란 예술과 과학, 그리고 정신, 문학,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등에 대한 관심을 말한다. 예술이 사람을 구속해주지는 못하지만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해준다. 셰익스피어나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도 성령의 일반적 영향력, 일반 은총의 작용에 의해 그 재능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가진 재능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래서 문화로부터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문화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그런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가 아니라, 작품을 산출해 낸 사람들에게 예배와 찬양과 경배를 바치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일반 은총이란 관점에서 예술 작품들을 바라보면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인류에게 이런 일반적인 재능을 나누어 주셨기 때문이다.
특정한 행동에 따르는 악한 결과들. 사45장,“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이 말은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라거나 악의 창시자라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행동에 따르는 악한 결과들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신다. 특정한 행동들이 특정한 고통스럽고 악한 결과들로 귀결되도록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런 것들이 일반 은총이 나타나는 방식들이다.
2) 일반 은총의 결과
① 죄인들에 대한 심판의 시행이 연기 된다. 어떻게 세상이 죄 가운데 계속 존재해 나갈 수 있는가? 그 답은 세상은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계속 돌아가도록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인간의 생명은 전체적으로, 또 각 사람에게 있어서 연장되고 있다. (롬2:4)“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벧후3:9)“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최종 심판을 선언하시는 대신 성령에 의해 세상이 유지되게 하신다.
② 죄가 억제되고 일정한 한계 내에 가두어진다. 성령이 사람들과 더불어 다투신다(strive with)는 것이다.
이 말은 “계속 존재하게 하다, 유지시키다”라는 의미와 동시에 하나님이 사람들이 너무 늦기 전에 자기들의 죄와 행위가 얼마나 극악한 것인지 알게 되도록 성령을 통해 간절히 권고하고 계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스데반은 “너희도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죄가 가장 추악하게 표현되는 것을 억제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러한 일에 내주시는 시간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성령은 특별히 죄를 억제하신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정부들과 다스리는 자들과 권세들을 세우셨다. 이것은 죄를 일정한 한계 안에 가두기 위함이다. 어떤 사람을 종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일반 은총의 작용이다. 이것은 죄를 죄를 억제하여 일정한 한계 내에 가두시는 하나님의 방법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도덕과 의와 종교에 대한 관념들, 선함과 아름다움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모두 성령이 작용하신 결과이다.
(롬2: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③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적인 복들이 전달된다. 우리는 일반 은총 아래에서 해나 비와 같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적 복들을 받게 된다. (마5:44-45)“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행14:15-17)“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딤전4:10)“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영혼이 구원받는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인자하고 선하게 유지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순절은 전환점이다. 성령은 오실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세상에서 일하고 계셨다.
4장 오순절의 의의
1. 오순절 날 이전의 성령의 역사
앞 장에서 성령이 창조, 우주의 유지, 일반 은총에서의 역사의 세 측면을 보았다.
1) 오순절 이전의 성령의 활동(추가)
④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한 은사를 나누어 주심. 삼손, 모세와 70장로, 브살렐, 여호수아
⑤ 예언. 엘닷과 멜닷, 발람, 사울, 구약의 선지자, 모든 성경,
⑥ 신자에게 임하심. 다윗과 구약의 모든 성도들. 세례 요한, 엘리사벳, 사가랴, 제자들의 사역,
2) 규명해야 할 문제
어떤 구절들은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고, 어떤 구절들은 성령이 활발하게
활동하셨으며 놀라운 일들이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일어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2.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
1) 오순절 이후 일어난 변화
①주님이 오신 이후 성령의 사역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신약에 들어서는 순간, 주님의 오심을 이야기하는 순간 뭔가 새롭고, 특별하고, 추가적인 일이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세례 요한은 주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을 예언한다(마3:11).
②오순절에는 성령이 광범하게 부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은사의 부어짐, 광범위함, 값없음, 충만함이 강조된다.
③오순절 이후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었다.
(요14:17)“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④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커다란 하나됨이 일어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형성되었다.
행2장의 하나됨은 거대했다. 다양한 민족의 하나됨이 있었다. 사도들 또한 하나됨이 있었다.
같은 하나됨을 고넬료의 집(행10장), 사마리아 사건(8장), 에베소 사건(19장)에서도 볼 수 있다.
오순절에 일어난 일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 결합된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만 일어날 수 있다.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행20:28)는 주님이 하러 오신 일을 완수하기 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승천하신 순간 주님은 교회를 사시기 위해 필요한 일을 완성하셨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주님이 자신의 몸인 교회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머리이신 주님께 성령이 주어진 것이다. 승천하신 후 열흘이 지나, 이제는 몸된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 자기 영을 그 몸의 안과 위로 보내어
충만하게 하신 것이다. 성부가 약속하신 것이 그 일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사역을 완수하신 성자에 의해 보내졌다. 오순절 날 교회는 하나의 연합체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립되었다.
(고전12: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 모든 신자가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날이 바로 오순절 날이었다.
2) 오순절과 교회
오순절 날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공적으로 출발한 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넬료 집의 성령 부어주심은 그들이 세례를 받아 예루살렘의 동일한 몸에 들어오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이다. 이전 세대로부터 감추어졌던 비밀은 이방인들이
함께 상속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며,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고, 이 세상에서는 그들을 통해 주님이 일하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히11:39-40)“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약의 믿음의 영웅들도 신자였으나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지는 못하였다.
그리스도가 아직 승천하지 않으셨고, 사역을 완수하여 아버지께 돌아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그들은 뒤로 밀려나 유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교회는 하나이며 그 이후 언제나 하나였다.
이것이 오순절 날에 일어난 일의 진정한 의미이며 중요성이라 할 수 있다.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의 의미(8장)-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함. 불완전한 종교를 바로잡기 위함.
에베소에서 일어난 사건의 의미(19장)- 복음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요한의 세례)를 바로 잡기 위함.
3) 오순절 사건의 핵심 의의
①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주시라는 사실에 대한 최종적 증거를 주는 것이었다.
②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③ 교회에 더하여진 여러 민족이 이 몸의 지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주는 것이었다.
④ 신약 성경에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거하신다. 구약에서 성령은 사람들에게 임하셨다 다시 떠나셨다.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그의 충만한 가운데 계시다가, 전체 몸을 통해 그리스도로부터 오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의 지체이기에 성령은 완벽하게 우리 안에 거하신다.
4) 오순절 사건과 성령충만의 차이
오순절 날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이 동시에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그 결과 증거를 할 수 있었으며,
이 일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는 사실로 인해 종종 혼란이 일어났다.
오순절 날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난 것은 성령충만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한 몸으로 연합되는 것과 교회의 시작을 강조한 것이다.
특별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은 반복해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일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일어난 일이었기에 반복될 필요가 없었다.
성령충만은 반복될 수 있고 또 종종 반복되지만, 오순절 날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성령 충만이 아니었다. 거기서 일어난 일은 우리 주님이 자기 백성을 위한 사역을 마치고 부활하사 교회의 머리가 되셨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교회는 그의 몸이 되었으며 몸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 성령이 주어졌다.
(이 견해는 존스의 초기 견해인 것 같다. 후기의 책들에서는 오순절을 성령의 특별한 부으심으로, 부흥은 오순절의 재현이라고 강조한다.)
5장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
1. 주님 자신에 대한 성령의 사역
1) 주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 1:35)
2)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였다”(행 10:37-38)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으며”(눅 3:22)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마 4:1)
3) 주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다.”(히 9:14)
롬 1:4,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
4) 주님은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다.(행 1:2)
2. 성령의 일반적 사역
성령의 일반적 사역: 모든 사람에게 구속을 적용하는 것.
성령의 특별한 사역: 구속받은 사람들에게만 구속을 경험적으로 적용시키는 것.
요 16:8-11에 나타난 성령의 일반적 사역
(요 16:8-11) 『[8]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성령이 오셔서 교회와 세상 안에 존재하시는 것 자체가 일반 사역의 일부이다.
위 구절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이며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종종 이 구절들은 각 개인을 구원에 이르기 하기 위해 그들의 영혼 속에서 행하시는 것인양 해석된다. 간접적으로는 이런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바른 의미는 이 구절들이 성령이 오시는 것과 그분이 오신 결과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이라고 단언한다. 주님은 성령이 오셨을 때 개개인 신자들이 아닌 세상을 판결하실 것이라고 주의 깊게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세상은 신자가 된 사람과 되지 않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주님은 성령이 죄에 대하여 세상을 판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해설하신다. 성령이 죄에 대한 모든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세상을 판결하시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는 한 가지 특별한 사실만 구체화하고 계신다. 마찬가지로 “의”와 “심판”에 대해 해설하실 때에도 우리 주님은 그것을 매우 특정한 일로 제한하신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성령이 교회에 계시다는 사실 자체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판결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 주님께 집중시키시며,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사역 전체의 특징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실 수 없다. 성령 스스로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시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안에 있는 충만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고, 중재하시고, 우리 안에 재현하시고, 실현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전적으로 성령이 주님에 대해 어떤 일을 하실 것인가의 관점에서 이 세 가지를 해설하신다.
1) 성령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 때문에 “죄에 대하여” 세상을 판결하실 것이다.
적절한 설명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오순절 날 성령이 교회에 오신 것과 이 때 따른 표적들, 그리고 성령이 사도들을 사용하신 방법 등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세상이 나사렛 예수를 거부하고 “그를 없애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외친 것이 완전히 잘못된 일이었음을 선고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오신 것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주시라는 명확하고 최종적인 증거이다. 성령이 교회에 오심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며, 따라서 그를 거부한 세상의 죄가 선고된다. 즉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고 못박은 것이 죄라는 판결을 받는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성령이 특별히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 때문에 세상을 판결하신다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2)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선포한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은 그의 다시 살아나심 안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완벽하고 흠 없는 순종의 삶과
십자가에 달리신 수동적 순종을 통해 사람들이 지은 모든 죄의 죄책과 형벌이 해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이셨다는 궁극적 증거는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확증하신 분에게만 그분의 몸인 그분의 백성, 곧 교회를 위해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이다. 오순절날 성령이 오신 것 자체가 의의 길은 오직 하나이며 그 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정하신 의의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는 하나님 자신의 아들의 의이다. 성령은 이 사실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셨을 때 성령은 세상에게 의가 무엇인지 선고하고 계셨다.
3)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신 것은 사탄의 패배와 그에게 선언된 심판의 최종적인 증거였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골 2:15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공개적인 수치를 당하게 하시고 이기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요 12:31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을 심판하고 패배시키셨다는 의미이다.
우리 주님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의 사역이 받아들여졌고, 그리하여 사탄의 지배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실 위대한 구속의 사역이 완수되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신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판결 혹은 심판이다. 특히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의 결과 세상이 결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의 위대한 선포였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사탄은 더 이상 세상을 주관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께 있으며, 그분은 성령에 의해, 그의 사역자들과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예언하신 것과 같이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신 것 자체가 세상에 심판을 판결한다.
성령이 행하시는 외적 부르심
성령은 구속받은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모두에게 특별한 예비적 사역을 하신다.
이것은 성령이 오신 이후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일반적인 부르심이 주어졌다는 의미이다. 불신자로 남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강경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은 오직 구속받은 사람들에게만 제시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구원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행 17;30)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을 증언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복음은 보편적인 선포이다.
복음의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많은 사람이 성령이 직접 역사하신다고 주장한다. 퀘이커가 청교도의 주류에서 이탈한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말씀은 필요 없고, 성령이 각 사람에게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내적인 빛”에 의해 직접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천만의 말씀이다. 성령은 언제나 말씀을 사용하신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5).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성령이 말씀을 통해 하시는 일
1) 성령은 말씀을 통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계시하신다.
2)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제시하시며, 그의 백성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을 진술하신다. 설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 주님의 삶과 죽음, 부활, 그리고 부활후의 타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3) 성령은 우리를 불러 회개케 하신다.
4)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르신다.
제 6 장 구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1. 성령의 일반적 사역에 대한 보충사항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 그분이 진실로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분이며, 선지자이자 교사이자 하나님의 계시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라는 최종 증거이자 표시가 된다. 성령의 임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보여 준다.
2. 외적 부르심에 대한 상반된 반응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반적 부르심이 주어졌지만 그 반응은 달랐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1) 펠라기우스주의
원죄란 없다. 사람들은 일종의 중립적 상태에서 태어나 살아가며, 모든 사람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선이나 악을 선택할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거나 거부할 능력이 있다. 성령은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
2) 반펠라기우스주의
성령은 사람들을 도우시지만 사랑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생겨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소망하고 진리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에게 오셔서 도우신다. 펠라기우스는 너무 극단적이었다. 사람들 스스로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이 이런 소망을 나타내면 성령이 도우실 것이다. 일종의 협력적 은혜를 가르치고 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진리와 구원의 지식에 이르도록 우리와 협력하여 은혜로 도우시는 것뿐이다.
3) 아르미니우스주의
이것은 17세기 초 네덜란드 사람인 아르미니우스에게서 비롯되었다. 그의 위대한 제자 중 한 사람인 존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아르미니우스는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그렇게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어서 성령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받아들여 믿을 수 있도록 충분한 분량의 은혜를 주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그 은혜에 협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부만 그 능력을 사용하기로 선택하고 나머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사람이 먼저 소망하면 성령이 와 그를 돕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적 견해는 사람은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고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소망하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성령과 협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협력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4) 루터파
역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중생의 초기 단계에서 은혜 역시 모든 사람에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은혜에 저항하면 그는 불신자로 남아 정죄를 받는다. 저항하지 않으면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사람이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파는 사람에게는 능동적으로 협력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거부할 능력이 있다고 한다.
5) 개혁주의적 견해
사람은 역시 전적으로 부패했고 완전히 무력하고 무능력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멸망하는 일이 벌어지는가?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한 사역 때문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의 성령이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시지 않는 일을 구원받는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신다고 한다. 선행적 은혜, 즉 사전에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여 그들이 믿도록 하는 은혜를 말한다. 이 견해는 궁극적으로는 다른 모든 일에 앞서는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타락의 교리를 바로 이해하면 개혁주의적 견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 교리를 다룰 때는 우리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가며 우리 자신의 개념이나 철학에 너무 이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이해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도 있을 것이 분명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도, 루터파도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고, 구원의 길 혹은 과정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믿음을 강화시켜 주고, 확신을 세워 주며, 앞으로 주어질 복된 소망의 확실성을 알게 해주는 것은 없다.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엡4:14) 사람들은 너무 게을러서 교리를 연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들이 잘못된 교리를 믿는 이유이다. 조만간 그들은 최신 사이비 종교나 이단을 따라가게 된다.
3. 구원의 순서
‘구원 받을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행해지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면 성령은 어떤 순서에 따라이 사역을 행하시는가?’ 성경 자체는 어떠한 정확한 순서도 제시하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구절은 로마서 8장 28-30절이다.
(롬 8:28-30)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또 다른 본문은 행26:17-18이다. 루터파는 즐겨 이 구절을 사용한다.
(행 26:17-18)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구원의 순서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 두 사람도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보기가 매우 어렵다.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순서를 전혀 다르게 제시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발생한다.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요한 방법이 있다. 구원의 순서를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생각할 수 있다. 즉, 거룩하심 가운데 타락의 결과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며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고 계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와는 정반대 되는 것으로서 시간에 따라, 즉 이 일들이 시간과 경험 속에 나타나는 방식에 따라 사고하는 것이다. 아니면 이 순서를 순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어서 주관적인 관점을 취해서 접근할 수도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 역시 타락에 대해, 그리고 타락의 결과 죄 가운데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그 교리에 따라 여러분 나름대로 구원의 순서를 정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유용한 영적 훈련이 되리라 생각한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칭의, 중생, 믿음, 양자됨, 회심, 성화, 견인.
주관적 요소를 더 강조하면서도 신학적 순서를 유지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효력있는 부르심, 중생과 믿음, 칭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회개와 회심, 양자됨, 성화, 견인.
순전히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죄의 자각, 회심, 믿음, 칭의, 중생, 양자됨, 성화, 연합과 견인.
구원의 순서를 다룰 때 주의 할 점
시간적 요소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이 요소들이 서로 대단히 엄격하고 기계적인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실로 위험한 일이며 언제나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은 시간에 제한 받지 않기 때문이며 바로 그 때문에 우리에게 어려움이 발생한다. 구원의 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문제지만 반드시 탐구해야 한다. 한가지 순서가 다른 것보다 필연적으로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고찰하고 파악해 나가면서, 그 순서가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자 의무이다.
제 7 장 효력있는 부르심
1. 효력있는 부르심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복음의 부르심이 오직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유효하다.
우리는 외적 부르심 외에도 이런 효력있는 부르심이 존재하며, 어떤 사람이 구원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복음의 부르심이 유효하게 임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확증해 주는 성경 구절은 로마서 8:28-39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고전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그들은 단순히 성도로 불리우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되도록 부르심 받았다.
고전1:23-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벧전2:9-10,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들이 구원받은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효력있게 부르신 것이다.
교회를 의미하는 에클레시아는 ‘부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교회라는 단어 자체가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음을 확증한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내적이고 영적인 부르심이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외적 부르심에 덧붙여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에게 오는 내적인 부르심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효력있는 부르심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과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 대조를 이룬다.
내적이고 영적인 부르심의 존재를 보여 주는 성경 구절들
(요 6: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그리스도께 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배운 사람들이다. 성령에 의해 아버지에 대해 배운 사람들, 오직 그들만 그리스도께 온다.
(요 6:63-65)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외적 부르심에만 반응했을 뿐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껍데기인 외적 말씀에만 매달렸을 뿐, 성령을 받지 못했다. 다른 이들을 오게 하셨고, 그들은 남아 즐거워했다. 이것은 영적이며 내적인 부르심이 있다는 증거이다. 부르심을 효력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성령의 이러한 역사가 없이는 그런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한다.
(딤후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하나님이 하시게 되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효력있는 부르심의 필요성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 역사 없이는 어떤 사람도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이 성령의 역사는 절대 필요하다.
본성상 하나님의 원수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사역이 필요하다.
(롬 8: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후 4:3-4)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효력있는 부르심의 본질
내적인 부르심이란 영혼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성령이 직접 작용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즉각적이고, 영적이며,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이다. 이 부르심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양식의 영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 작용이 없이는 우리는 어떤 참된 영적 행동도 할 수 없다.
진리의 도덕적 영향을 받게 되는 정도가 아니다. 부르심은 성령이 사람들 자신의 깊은 곳에서 작용하시는 것이다. 단순히 성령이 우리의 타고난 재능과 능력을 고양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영혼에 작용하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새로운 영적 행동의 원리를 만드시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자연적 지성인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육에 속한 사람”이다.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이라는 놀라운 진리, 삼위일체에 대한 엄청난 교리, 성육신과 속죄에 대한 모든 교리 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영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능력, 새로운 원리가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 이 새로운 영적 원리, 영적 활력과 활동의 원리를 심어주며, 그 결과 복음의 일반적인 부르심이 우리에게 효력있게 임한다.
이 부르심이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성경 구절들
(행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주님은 그녀의 마음에 뭔가 내적인 역사를 일으키셨다. 외적인 부르심이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변했다.
(고전 2:10-15)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효력있는 부르심의 결과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성령이 영혼에 내적 작용을 하실 때 그 결과는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불가항력적 은혜라고도 한다. 강요당하는 것 같아 이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성령은 내 생애 처음으로 이 영광스럽고 놀라운 진리를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를 내 안에 심으신다. 성령은 나의 의지에 역사하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은 나를 때리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내 의지에 작용하여 나로 하여금 이 일들을 바라고, 기뻐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은 인도하시고, 설득하시고, 나의 의지에 작용하셔서 복음의 부르심을 효력있게 만드신다. 이 일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 실패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실 때 그 역사는 효력이 있다.
제 8 장 중생: 새로운 성향
1. 중생 교리의 중요성
1) 효력있는 부르심과 중생의 관계
일반적인 부르심을 효력있게 만들기 위해 성령은 정확하게 무엇을 하시는가? 그 답은 중생이다. 어떤 의미에서 중생은 유효한 부르심보다 선행한다. 다시 말해 부르심이 효력 있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중생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2) 오늘날 중생에 대한 이해의 문제점
중생의 교리는 속죄의 교리와 더불어 비교할 바 없이 중요한 교리이다. 중생의 교리를 분명히 하지 않고는 기독교의 교리와 진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교리가 심각하게, 그리고 한탄스러울 정도로 무시되고 있다. 대부분의 찬송집이 성령에 대한 강력한 교리적 찬송을 담고 있지 않다. 중생의 교리는 절대적으로 중추적인 교리이다.
2. 중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중생을 묘사하는 용어들
① “중생의 씻음”(딛3:5)
② 낳다 혹은 다시 낳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일2:29,3:9)
③ 낳음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다른 단어들
(약 1:18)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엡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
(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④ 살리다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골 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2) 중생의 의미
이 용어가 막연하게 또는 일관성 없게 사용되어 큰 혼란이 있어 왔다. 로마 카톨릭 저자의 경우 신자에게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중생은 회심과 구별되어야 한다.
회심은 우리가 하는 것인 반면, 중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다.
회심은 어느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실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중생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이 회심할 때 혹은 돌아설 때 그들은 자신들이 중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회심은 중생 이후에 온다. 사람들 안에서 먼저 위대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들의 외적인 삶과 생활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씨를 뿌리는 것과 그 씨뿌림의 결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중생은 생명의 씨를 심는 것을 의미하며, 그로 인해 생기는 결과와는 명백하게 구분해야 한다. 발생과 출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발생은 출생이 있기 오래 전에 일어난다. 발생은 특정한 과정이 진행된 후 실제 출생의 과정으로 귀결된다. 중생은 출생이 아니라 발생이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실제 출생시에 일어나나, 이것은 발생의 과정, 즉 생명의 씨뿌림이 이미 일어났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은 영혼에 새로운 생명을 심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것이 중생의 본질이다. 중생은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원리가 심어지는 하나님의 행동으로써 그 결과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이 거룩해진다. 그리고 실제 출생은 이 성향이 첫 번째로 발휘되는 증거를 보여준다.
3) 중생시에 일어나는 일의 본질
중생은 인간 본성의 실체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생은 실재하는 물질적 실체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이다.
중생이 인간 본성 전체가 완전히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중생한다고 해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생은 영혼의 기능이나 본질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혼의 기능은 지성, 기억, 감정, 의지, 양심이다.
중생은 단순히 도덕적 개혁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의 의지가 변화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스스로를 개혁시켜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① 중생은 새로운 영적 삶의 원리가 심어지고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성향의 전체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혼의 기능들 외에 배후에서 그들을 통제하는 무언가가 있으며, 우리는 것을 성향이라고 부른다. 성향은 우리의 행동과 인격을 결정하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똑같은 재능을 갖고 있을지라도 선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악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 그 기능들의 배후에 있으면서 그 기능들을 통제하고 사용하는 이 선한 성향이 그로 하여금 자기의 기능들을 선한 방향으로 사용하도록 만든다. 사람들의 기능들과 능력들을 주관하여 한 사람은 예술적이 되게 하고 다른 사람은 과학적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성향이다.
중생은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우리의 근본적 성향을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나의 인격과 행위, 그리고 나의 기능들을 사용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성향 속에 하나님은 거룩한 원리, 새로운 영적 생명의 씨앗을 집어 넣으신다.
중요한 예는 사도 바울의 경우이다. 다소의 사울 시절의 그는 능력이나 이해력, 의지, 기억력에 있어서 탁월하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여 그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교회를 핍박하였다. 하지만 잠시 후 그가 전무후무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보라. 동일한 능력 동일한 재능, 동일한 인격,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정반대의 뱡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무엇이 변화되었는가? 변한 것은 바울의 영혼의 기능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똑같은 열정, 똑같은 논리, 똑같은 철저함,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동일한 담대함 등 그는 분명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전체 방향성, 전체 경향, 전체 사고방식이 변했다. 그는 다른 사람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새로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을 이해해야만 중생과 심리학적 변화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중생할 때 그들이 마치 우표처럼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심리학 운동의 희생자가 되면 똑같은 사람들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분이다. 중생이 하는 일은 모든 것의 배후에 있으면서 방향과 방식과 방법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성향을 다루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중생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성향의 변화임을 깨닫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② 중생은 우리 안에 있는 성향의 힘 때문에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전인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의 성향이 바뀔 때 나는 새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처럼 된다. 성향이 변화되었다고 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지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똑같은 지성,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성향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다른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며, 그래서 새로운 마음처럼 보인다. 감정면에서도, 의지면에서도 마찬 가지다.
③ 중생은 즉각적인 변화라는 것이다. 발생은 그 정의상 언제나 즉각적인 행동이다. 생명의 씨앗이 수태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한 번의 순간적인 행동이다. 중생에는 중간 단계가 없다. 생명은 심어졌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점진적이지 않다. 중생이 즉각적이라고 할 때 우리의 자각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 자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각은 분명 시간의 영역에 속해 있는 반면, 생명을 심는 행동은 초시간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즉각적이다.
생명의 씨를 심는 발생과 성향의 변화는 잠재의식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감지할 수 없는 비밀, 측량할 수 없는 작용이다. 중생에 대해 우리가 첫 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근거를 제시해 보겠다. 니고데모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니고데모여, 그건 몇 가지 특별한 사항을 변화시키거나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다.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너의 삶을 지배하는 성향이다. 너는 거듭나야 한다. 그것은 네가 사용하려 하는 이 모든 기능의 배후에 있는 어떤 것이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발생한 것을 알아차려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바람을 깊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결과는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④ 중생은 분명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으로서 사람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그 어떤 기여도 하지 않는다.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여러분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하나님은 이 원리, 영적 생명의 씨를 심으신다. 우리는 스스로 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발생시킬 수 없다. 중생은 전적으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영적 생명의 원리, 성향에 생긴 이런 변화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로 인해 완전히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향이 변하기 때문에 전체 사람이 마치 새로운 피조물처럼 되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이다.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 근본적인 것이 그들 안에서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능들은 여전히 이전과 같다. 절대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 노력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답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모습대로 만드셨으며, 그 모습 그대로일 때 하나님을 최고로 영화롭게 할 수 있다. 항상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거의 모든 면에서 똑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주의하라. 그것은 영적이기보다 심리적인 변화일 가능성이 크다. 각 개인이 자기 모습을 간직했기 때문에 수 세기 동안 사도들과 교회에 영광스러운 다양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모두 함께 같은 구세주와 같은 은혜, 같은 중생과 같은 성향의 변화를 증언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들과 재능들과 성벽들과 능력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얼마나 놀라운 구원이며, 얼마나 영광스러운 구속의 방법인가?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께 합당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제 9 장 새로운 출생
1. 중생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예화
(정리)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의 결과로 사람들 사이에 부르심이 효력있게 된다.
부르심이 유효하게 되는 것은 이제 이 사람들 안에 자기들에게 주어진 이 영적 진리, 혹은 신적 진리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이전에 없던 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생은 단순히 영혼의 기능 중 일부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람의 근본적인 성향의 변화로 규정했다.
성경은 우리가 "새 마음“(겔 36:26)을 받았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마음“이라고 할 때는 요즘처럼 단순히 감정이 거하는 곳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이 거하는 가장 중심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새 마음 혹은 청결한 마음이 주어지는 것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제가 근본적 성향이라고 묘사한 것, 즉 다른 모든 것을 통제하고 결정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며, 변화는 바로 거기에서 일어난다.
중생 문제 전체는 분명 큰 신비이다. 그것은 기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바람에 비유했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1) 접붙임 예화
가장 훌륭한 예화이다. 성경 자체에도 등장한다.
특정한 유형의 배를 키우기 원할 때 흔히 이런 방법을 쓴다. 키우기 원하는 자그마한 접붙일 어린 가지가 있다. 다음에는 흔한 야생 배나무를 골라 칼자국을 내고, 만들어진 상처에 어린 가지를 끼워 넣고 묶는다. 그러면 당신은 원하는 종류의 배만 열리는 놀라운 배나무를 갖게 될 것이다. 바로 바로 가지치기를 해 준다면 마침내 이 나무에서 여러분이 원하는 좋은 배만 열리는 때가 오게 될 것이다.
새생명을 심으면 첫 단계에는 하나의 나무에 재배된 본성과 야생의 본성이 모두 존재하게 될 것이다. 한 나무에 두 성품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옛 가지를 쳐내면 새 가지가 점점 전체를 지배할 것이며, 결국에는 여러분이 원하는 열매들만 생산하는 배나무가 될 것이다. 저는 이것이 중생에 대해 지금까지 사용된 최고의 예화라고 생각한다.
두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의 자아이다. 하지만 새 본성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 우리는 땅에 있는 우리의 지체를 죽이도록 부르심 받았다. 옛 본성에 속한 것을 계속해서 가지치고 억제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이 새 생명은 자라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새 본성이 점차 더 분명히 보이게 될 것이다.
중생에서는 우리 안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진리 혹은 사람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가 변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변화는 우리의 바깥에서만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어린 배 가지를 배나무에 접붙이는 것만큼 분명한 변화이다.
2) 잘못된 예화
부지깽이의 예화
부지깽이가 불 속에 있는 동안에만 붉게 달궈지고 부드러워진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에 대한 예화이며, 그 안에 거할 때만 새로운 생명, 새 삶의 방식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저는 이 예화가 중생의 교리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그리스도인이며 거듭난 사람도 타락할 수 있다. 신비적 의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을 수 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거듭났다. 그들 안에는 새로운 원리가 있다.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변화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이 이 변화를 충분히 보여 주고 있지는 않지만, 변화는 존재하며 이 사람들이 완전히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고 묘사해서는 안 된다.
구명대의 예화
구명대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물에 떠 있다. 구명대를 벗어 버리면 이 사람은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이 예화 역시 중생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변화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생의 교리는 이 변화가 단순히 주님과 우리의 관계 혹은 진리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어떤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우리 안에 심어진 새로운 생명이며, 삶과 순종의 새로운 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자라고 발전하여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우리는 영광으로부터 영광으로, 하늘나라에 이를 때까지 변화됩니다.”(찰스 웨슬리) 그 일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며 우리는 변화되고,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2. 중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
무엇보다도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1) 성경의 명시적 진술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 재출생은 절대적으로, 전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고사하고 그것을 볼 수조차 없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는 히12:14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함은 단순히 여러분이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는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함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주를 보지 못하고 볼 수도 없다. 이 거룩함은 중생을 통해 우리 안에 심어진다. 새로운 삶은 거룩한 삶이며, 거룩한 원리가 우리 안에 심어지는 것이다.
2) 성경의 암시적 진술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우리 주님은 자신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요10:10) 오셨다고 말한다. 이 사실 자체가 중생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내가 그에 합당한 본성을 가져야 한다. 영적인 것이 있고 육에 속한 죄된 것이 있는데 그 둘을 결합할 수는 없다. 당신은 거듭나야 한다. 영적으로 변해야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성품과 죄의 결과물인 사람들의 성품이 중생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내가 진리를 인식하고 소원할 능력과 분별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나는 중생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실은 나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육적인 마음을 갖고 있고, 그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그래서 중생이 필수적일 뿐 아니라, 그것도 처음부터 필수적이다. 중생이 없이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중생이 일어나기까지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
3. 중생은 어떻게 생기는가?
1) 중생은 도덕적 감화가 아니다
이것은 진리의 도덕적 영향력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복음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 영향력과 능력 아래 나아올 때 복음이 그들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자기들 안에서 위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것은 그런 변화가 아니다.
우리는 인격 저 밑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변화를 일으킨다.
2) 중생은 세례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라는 도구를 통해, 그리고 오직 세례를 통해서만 중생이 발생하고 성취된다고 가르친다. 세례시에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우리 안에 있는 도덕적 본성이 변하여 새롭게 된다고 한다. 루터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중생을 세례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거듭났다는 증거를 보인 사람들이었다는 성경적 증거가 사도행전 한 곳에만도 수없이 많이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실로 그들은 거듭났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 그들이 새로운 출생의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표적과 인침으로 세례가 주어진 것이다.
4. 중생과 말씀과의 관계
1) 말씀은 중생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중생으로 심겨진 생명의 씨를 싹트게 한다.
중생이 말씀을 통해, 그리고 말씀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시사하는 많은 본문이 있다.
“그가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제가 중생이라는 행위와 출생을 구분했고, 둘 사이에 오랜 시간의 간격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위 두 본문은 모두 출생에 대한 것임을 말씀 드리고 싶다. 말씀은 발생의 행위에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심어진 생명이 태어나게 하는 데에 사용된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향이라고 부르는 근본적인 부분이라는 점이다. 성향이 변화되고 올바르게 되었다면 말씀이 임했을 때 효력있게 될 것이다. 말씀은 결과를 내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6:65,“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청종하고 말씀을 들었던 것은 주님이 “그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연 것은 말씀이 아니라 주님이셨다.
2) 구약의 성도들과 갓난아기들의 경우는 중생과 말씀의 관계를 확증해 준다
옛 세대와 새 세대에는 단 하나의 언약만 있다. 우리가 믿음의 자녀이기 때문에 여러분과 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은 우리 조상이다. 우리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나라에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동서로부터 오는 반면 유대인들은 바깥에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13:28-29). 다시 말해 구약 성도들은 거듭났다. 다윗은 거듭났다. 그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었다. 족장들도 선지자들도 마찬가지다.
만일 그 구약성도들이 거듭났다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중생의 행위를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말씀이 아님이 분명하다 중생은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것이다. 그들을 다루고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셨다.
갓난 아기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이들과 갓난아기들이 하늘나라에 갔으며, 앞으로도 갈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이라 믿는다. 중생이 언제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만 일어난다고 주장한다면 갓난아기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물론 어린아이도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은 방식으로 중생한다는 것이다. 중생은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성령을 통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각이 없는 갓난아기에게도 성인에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생명의 씨를 심으실 수 있다.
5. 중생은 잃어버릴 수 없다.
당신이 중생했다면, 언제까지나 중생한 채로 있을 것이다. 저는 이것이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생은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중생이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 자신이 행하시는 역사이며, 하나님의 역사는 영원하다고 말해 준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 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는 중생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하나님에게서 끊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생명을 내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요한 일서의 다음 구절들을 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그런 사람은 계속해서 죄에 거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왜 그런가?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 즉 중생한 사람은 결코 죄의 삶 안에 거하지 않으며 거할 수도 없다. 일시적으로 죄에 빠질 수는 있으나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것이 어떤 사람이 거듭났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시금석이다.
요일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들은 중생한 사람이 아니었다.
히 6장과 10장도 그 사람들이 중생했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고 대답해 드리겠다. 그들은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그들이 거듭났음을 말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생한 사람은 그 안에 거한다. 죄에 빠져 타락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으나 그 안에 거한다. 생명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안에 생명이 없다면, 그는 거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은 스스로를 나타내고 자신의 존재를 증거한다.
제 10 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
중생에는 어떤 수단도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것은 우리 영혼에 행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역사이다. 중생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이며 영원한 역사이다. 궁극적으로 신자의 안전은 이 위대한 중생의 교리애 달려 있다.
제가 교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데 교리가 가장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중생으로 인한 결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중생했다는 사실의 증거들을 다루고자 한다. 많은 사람이 이 문제로 인하여 곤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며,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룬다. “내가 중생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중생했음을 아는 것은 중생 교리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1. 영적 생명의 표지
중생은 우리 안에 영적 생명의 원리가 심어지는 것이다. 생명은 언제나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 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본문은 요한 일서이다. 요한일서에 대한 책을 쓰면서 <생명의 시금석>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 매우 적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팔복 또한 생명과 중생에 대한 시금석이라고 생각한다. 요한 일서에는 영적 생명 혹은 우리가 중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이 네 가지 중요한 시금석에 따라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서신서이다.
(1)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4:1-2).
당신이 그리스도는 진실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복되신 성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심을 믿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그리스도는 여호와이시며, 그가 성부와 동등하시며 영원히 공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 즉 복되신 삼위일체 의 두 번째 위격이 육체로 오셨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5:1)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어떤 사람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내용을 담아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시고 자신이 중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2) 계명을 지키는 것.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2: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분하는 방법이라고 요한은 말한다. 그뿐 아니라 계명 지키는 것을 즐거워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이 복된 새 생명을 받은 자인지 아닌지를 즉시 드러내 준다.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바울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시는 “양자의 영”이 있다고 말한다(롬8:15).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3:6). 성령은 “양자의 영”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느낌, 의식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4) 형제를 사랑하는 것.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고 서로에게 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때 그들을 알아 본다. 그들은 우리와 한 가족이며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다른 모임들보다도 그들과 교제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뭔가 공통적인 것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우리가 같은 곳에 속해 있음을 안다. 그 어떤 것도 결코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다.
(5) 육체와 성령의 충돌
제가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며, 또 오랜 시간 동안 저에게 큰 위로가 되어 준 시금석이 있다. 그것은 제 안에 있는 투쟁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은 지극히 귀중한 시금석이다.
바울은 갈5:17에서 이것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과 육체, 이 둘은 서로 싸우고, 혹은 “거스리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그 안에 큰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성령은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원하고 있지만, 마귀가 역사하는 다른 영역인 육체는 어두움의 나라를 위해 그들을 원한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소유권 다툼을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충돌의 장소라는 것, 일종의 대격전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아주 주의하시라. 저는 단순히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하기 전의 옛 생활에서는 당신은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고 모든 일은 당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안다. 당신이 그 투쟁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신 안에 당신 자신과는 별도로 또 하나의 영이 있어서 당신을 다루고,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당신을 세상과 떨어지게 하고, 당신에게 진리를 가리켜 보여 준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성령의 작용을 인식하며,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탄의 권세를 인식한다. 육체와 성령의 충돌은 중생의 증거이다.
(6)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망.
그들은 선물보다 그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복보다는 복 주시는 분에게 더 관심이 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시42:2)에 대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영혼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 당신이 어떤 상태에 있든 당신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중생했음을 알고 기뻐할 수 있다. 그것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7)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함.
마지막 시금석은 하나님의 자녀는 단순히 죄사함을 받고 죄의 결과들을 피하기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안다는 것이다. 죄인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죄의 결과를 싫어하고 죄로 인해 벌받기를 원하지 않지만 죄에 대한 의식이라곤 전혀 없다. 그들은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미워한다. 우리 주님이 그들에 대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5:6)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적극적인 의에 대한 적극적인 주림과 목마름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그들은 책에서 읽은 성도들과 같이 되길 원한다. 청결한 마음을 원한다. 그들은 순결해지고 싶어 한다. 거룩해지고 싶어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한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한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
연합의 교리는 중생의 교리와 분리할 수 없다.
이보다 저 중대하고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교리는 없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잘못된 개념
신비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있다. 우리가 엄청난 거룩함과 신성함에 이르렀을 때에만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적이기 보다는 철학적인 신비주의자, 혹은 성경적이기보다는 철학적인 신비주의자들이다. 위대한 영국의 윌리암 로조차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도 초기에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관계를 끊었다. 그가 지나치게 철학적일 뿐 아니라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철학적 신비주의자들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일종의 영원으로의 흡수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많은 동양 종교의 가르침의 특징이기도 하다. 불행한 사실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잘못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자신을 죽여 나가도록 훈련해 결국 신비적 연합에 도달한, 비교할 수없이 엄청나게 거룩하고 성화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정말로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교리이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의 중요성
그리스도가 하신 구속사역의 모든 유익은 이 연합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지 않는 한, 그와 연합하지 않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어떤 복도 얻을 수 없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
연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 무엇이든 받기 위해서는 원천에 결합되어야 한다.
중생조차도 논리적으로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 연합하는 순간 우리는 거듭난다.
그리스도께 결합하는 순간 우리는 이 생명의 원리를 받는다.
성령의 특별하고도 독특한 사역은 분명 이 연합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합에 대한 가르침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시작한다.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하는 순간, 연합에 대한 말씀도 시작하신다. 우리를 성부 및 성자와 연합시켜주며 주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고, 이 교제와 연합의 사역이 성령의 특별한 직무라고 할 수 있다
.
(3)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성경의 설명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골로새에 있는”,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16:5)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불가능하다. 몇 가지 사실들을 믿고 그저 “계속 이렇게 나가다 보면 언젠가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고 그분께 연합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결코 불가능하다!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주님은 이 연합을 가지와 나무 간의 연합에 비유하신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이 연합은 나무 줄기와 그 나무의 생명력 있는 부분인 가지 사이의 신비적 연합이다.
성경은 또한 머리와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을 말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엡 4;15-16도 같은 말을 한다. 엡5:30-32는 신자와 주님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연합이라고 말한다.
벧전 2:4-6도 그 관계가 건물에 비유된다. 계속해서 6절에서 베드로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모퉁잇돌과 개개의 벽돌 사이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불신자와 아담 사이의 연합과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을 대비시킨다.
이것은 로마서 5장의 중요한 논증이고, 고전 15:22-49에서 반복된다.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아담의 모든 후손이 아담과 맺었던 관계와 같은 종류의 연합이자 관계이다.
(4) 중생과 연합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거듭난다. 중생을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거나 연합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어떤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중생과 연합은 언제나 함께 고려해야 한다. 둘은 서로 돕는 관계이다.
제 11 장 그리스도와 연합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
⑴ 실체의 융합이 아니다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일종의 인격의 혼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연합을 우리의 실체 혹은 존재의 본질이 우리 주님의 실체 혹은 존재의 본질과 합쳐져 사라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비주의자들은, 당신은 사라지고, 신성과 영원에 흡수됨으로써 당신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완전한 구원은 영원 속에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여러분과 제가 영원의 끝없는 시간 동안 개인들로 존재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우리는 사라지거나 하나님께 흡수되어 합쳐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은 언제나 개인들로서 존재할 뿐 아니라, 지극히 복된 광경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도 별개로 구분되어 있지만, 서로 결합되어 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시다. 부분적으로는 인간이고, 부분적으로는 신적인 새로운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둘은 분리되어 있으며 또한 함께 있다. 물질적 의미에서 융합되어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신자와 주님과의 연합도 실체의 융합이나 뒤섞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⑵ 호감이나 흥미의 연합이 아니다
이 연합은 우연히 동일한 흥미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구성한 느슨하고, 일반적이고, 외적인 연합이 아니다. 베토벤 동호회 등등. 이것도 연합은 연합이다. 이것은 신비주의의 오류를 피하려다 나온 표현 방식이다. 우리의 연합은 이보다 훨씬 더 크고 더 깊은 것이다.
⑶ 영적인 연합
성령에 대한 교리가 대단히 중요해진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은 성령의 기능, 특별한 사역이며,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임재에 의해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다. 물질적인 연합이 아니라 영적인 연합이다.
고전 6:16-17,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이라”“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 12:13, “우리가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⑷ 신비적 연합
에베소 5장에서 바울은 주님과 그리스도인 신자 간의 연합이 남편과 아내의 연합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신비적 연합이라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여기 하나의 연합이 있다. 신비적이라는 말보다 이 연합을 더 잘 묘사하는 용어를 찾을 수 없다.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될 뿐 아니라 그 둘은 친밀한 방법으로 묶여 있어서 둘이 정말로 하나가 된다. 이것이 신비적 연합이다.
⑸ 생명의 연합
이 말은 우리의 영적 생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나온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유지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이 생명의 연합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연합은 그야말로 생명의, 영적인 연합이다.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생명 일부가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받고 있다.
요 14:19-20,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모든 일은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생겨 난다.
요 17:22-23,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
이것은 주님 자신이 주신 진리이다. 주님은 자기 백성이 이 생명의 영적인 관계의 의미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아버지가 주님 자신 안에 계신 것같이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
갈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이것이 생명을 주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연합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⑹ 유기적 연합
‘유기적’이라는 말은 양방향의 통행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생명의’라는 말과 차이가 있다.
즉 이 연합에서는 우리가 받기만 할 뿐 아니라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엡 4:15-16,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라고 말하는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모두 능동적인 지체들이다. 몸의 각 부분은 몸의 생명에 대해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머리뿐 아니라 각 지체들도 활동을 하고 생명력을 지닌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기여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엄청난 개념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 놀랍고 고귀한 진리를 인식하는 것보다 더 우리의 믿음을 자극하고, 실제로 거룩해지도록 격려하고 자극해 주는 것은 분명 아무것도 없다. 저는 교회의 영적 수준이 이토록 낮은 주된 이유는 이런 교리들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주관적인 견지에서 생각하며, 뭔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는 나머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고 우리의 고귀한 부르심과 특권적 위치를 인식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⑺ 개인적 연합
우리 모두는 각각 별도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우리는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에게 연결될 뿐, 개인이 직접 우리 주님과 연합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모두 개인적으로 우리 주님과 관계를 맺으며, 우리가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오로지 이 관계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동시에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에 속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올바른 순서는 우선 개인을, 그 다음 두 번째로 집단을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로 인해 난 것이 아니라-교회는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가 아니다- 성령으로 났다. 이렇게 태어난 순간 보이지 않는 신비적 교회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측면을 강조하도록 하자. 교회를 통해 주님께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주님께 나갈 수 있으며, 집단적으로만이 아니라 단독으로도 주님께 연합되어 있다.
⑻ 분리될 수 없는 연합
연합은 단 번에, 그리고 영원히 이루어지는 일이다. 들어왔다가 나가고 들어왔다가 나가는 일을 반복하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분리될 수 없는 연합이다.
롬 8:38-39,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 연합이 이루어지는 방법
⑴ 성령과 믿음
연합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엡2:5) 살리신다. 그것이 연합이다. 그러므로 효력있는 부르심과 중생, 그리고 우리가 살펴 본 모든 일에서 주된 사역은 성령이 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 우리의 믿음이 작용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믿음이 이 연합의 중대한 부분이라는 사실도 강조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이 연합이 유지되고, 발전되고, 강화되도록 돕는다. 오직 믿음이 활성화될 때에만 이 연합과 우리의 중생, 기타 우리가 살펴본 모든 일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신자와 주님과의 연합을 다루는 성경 본문에서는, 이 믿음이라는 요소가 필연적으로 강조된다. 성령은 연합을 이루시고 믿음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믿음은 점점 더 연합을 바라고 그 연합이 유지되게 한다. 믿음은 점점 더 주님의 충만하심에 다가가며, 우리가 연합의 진리를 더 많이 깨닫게 될수록 점점 더 그 충만함에 다가가게 된다.
⑵ 연합은 교회나 성례를 퉁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교회가 없이는 결코 거듭날 수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바로 이 점에서 교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견해를 단호히 부인한다. 성경에는 이렇게 말하는 구절이 없다.
마찬가지로 연합은 성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연합은 세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세례를 통한 중생을 말하는 어떤 가르침도 믿지 않는다. 또한 성만찬 의식을 통해 연합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성례는 연합을 유지하고 그 연합이 길어지고 커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을 자극하는 데에는 커다란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성례가 연합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3. 연합의 결과
⑴ 객관적(언약적) 결과
주님과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몇 가지 일이 생겨나고, 이 일들은 우리의 지위, 상태, 신분에 영향을 준다.
언약적이라는 말은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용어이다. 본성상 우리 모두는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는 언약의 머리이다. 미국의 모든 주는 연방적 연합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모든 인류가 아담과 이와 같은 언약적 연합안에 있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에서 그가 행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된다.
아담이 범죄했기에 우리도 범죄했다. 그가 타락했기에 우리도 타락했다.
이것이 원죄와 원죄책의 교리이다.
그러나 이제 다른 한 편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똑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이다. 롬 6:6을 주관적으로 혹은 경험적 의미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객관적인 의미이다. 내가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했기 때문에, 그가 못박혔을 때 나도 못박혔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신다.
이 언약적 관계로 인해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믿어야 한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나 역시 죄를 범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나도 십자가에 못박혔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살아났다. 엡 2;6을 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울은 지금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는 우리가 여전히 땅위에 있지만, 언약적으로, 그리고 이 관계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골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이 말씀 역시 분명히 언약적 진술, 법적 혹은 법정적 진술이다. 물론 이 용어들은 어렵다. 하지만 가치 있는 것은 모두 어려운 법이다. 어렵다고 해서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우리는 하늘에 앉아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진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이 일은 이미 일어났다. 물론 이 일이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면에서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구속되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칭의에서 바로 영화로 넘어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강조해야 할 사항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이 한량없이 받으신 성령을 받는다.
이 연합의 다음 결과는 우리가 양자 됨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사항은 우리는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다. 그리스도가 상속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 상속자들임이 분명하다.
⑵ 주관적(영적) 결과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제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7장과 요한일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와 (고후3:18)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같은 의미다.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롬8:29)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이다. 물론 저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닮는 것을 말한다.
제가 강조하는 마지막 사항은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그리고 심지어 그의 죽으심에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얼마나 위대한 사상인가? 골 1:24에서 다르게 표현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은 육체 가운데 있는 자신의 고난을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과 역경의 남은 것을 채우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신비적 연합의 결과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이와 같이 신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사53:3)이셨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으며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및 연합을 가장 민감하게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이 고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의 고통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영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와 그들의 상실된 상태 때문에 정말로 고통을 받는다.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 때문에 우리는 주님처럼 영혼의 탄식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자 구세주와 우리가 연합한 것의 주관적 결과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 성령을 통해 우리가 신자와 주님 간의 연합이라는 이 놀라운 교리에 눈을 뜨게 하소서. 우리가 힘을 다해 이 연합을 상세히 연구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며,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았습니다. 그것이 나의 상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와 연합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입니다.”라고 말하게 하소서.
제 12 장 회 심
1. 회심이란 무엇인가?
회심은 새로운 본성이 옛 모양의 삶을 그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첫 번째 행위이다. 그것은 중생한 영혼이 무엇인가로부터 무엇인가를 향해 이동하는 첫 번째 행동이다. 회심은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첫 번째 단계이며, 중생을 통해 받은 새 생명이 처음으로 행동하고 나타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좋다.
회심은 분명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이것을 말해주는 구절이 많이 있다.
마 18: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육에서 나와야 한다. 육적인 상태에서 돌이켜 다른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회심이 필수적이다.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 중에 잉태”되었으며(시51:5),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였다. 우리 모두가 원죄와 원죄책 아래 있기 때문에 회심을 경험해야 한다.
회심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회심의 동인은 무엇인가?
회심은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역이며, 성령은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 그 일을 하신다. 그부르심은 우리를 다음 단계, 즉 우리의 행동으로 이끈다. 인간의 행동을 처음으로 언급한다. 회심을 무엇이라 정의하든 하나님이 하시는 일 뿐 아니라 사람의 행동도 언급해야 한다.
부르심은 효력있게 임하며, 부르심에 효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 무언가를 한다. 부르심과 반응, 이 두 측면이 회심이다. 중생과 연합에서 우리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마음 속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 하지만 회심에서 우리는 행동하고 움직인다. 부르심을 받아 행하는 것이다.
2. 회심의 특성
일시적 회심의 문제
우리 주님은 ‘일시적인 뭔가가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셨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문제를 다루셨고 사람들을 멀리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주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19-20)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13:20-21)
그는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일시적인 회심의 의미이다. 그는 말씀을 받은 듯이 보인다. 그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그의 안에는 뿌리가 없었고, 그 때문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직접 주신 가르침이다. 이렇게 기쁨으로 회심하고서도 생명력 있고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수 있으며, 그 회심은 일시적이었음이 증명된다.
행 8장의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 13절에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3절에 “악독이 가득”했으며,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셔서 회개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고 베드로는 말한다.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일시적 회심이 진정 무엇인지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딤후 2: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히 6장과 히 10장의 고전적인 본문의 경우
“한 번 빛을 받고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히6:4,6)
이 사람들에게는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 깊이 생각해야 하고, 정의를 내려야 한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과 영감된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겉으로는 회심인 것처럼 보여도 분명히 회심이 아닌 경우가 있다.
거짓 회심도 존재한다.
일시적 회심의 경우는 그 회심이 성경의 진리가 전해진 결과 일어난다는 것이다. 거짓 회심의 경우에도 비록 그리스도인의 회심과 극히 유사해 보이긴 하지만, 이것은 진리가 아닌 다른 동인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다.
오늘날처럼 이 구분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적은 없다. 어떤 사람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한 그것은 틀림없이 참된 회심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과 생활방식과 경험에 있어서 커다랗고 심오하고 극적인 변화를 한 삶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이 거짓 회심인 이유는 그들에게 회심의 필수적 요소인 진리와의 관계 맺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오로지 현상에만 관심이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삶 전체가 완벽하게 변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다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오직 심리학책을 보는 것뿐이다. 심리학은 요 몇 년간 큰 인기를 끌면서 기독교의 믿음을 아주 강력하게 공격한다. 그래서 제가 이 문제를 이토록 염려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다 미소를 지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심리학적 변화와 경험이 일어났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을 일으키는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계속해서 기독교 전체를 무시할 것이다.
3. 회심의 구성 요소
1) 모든 회심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회심은 잡자기 일어나야 하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한가?
시간의 요소는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2) 회심 사건은 언제나 극적인 것은 아니다.
행 16장 단 한 장만 읽어 봐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빌립보 간수의 경우는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루디아의 경우는 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극적인 성질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3) 회심에 수반되는 감정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가장 감정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언제나 가장 감정을 많이 느끼는 사람은 아니다. 감정은 분명 존재하지만, 특정한 강도나 형태의 감정을 고집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4) 참된 회심은 나이에 관계없이 일어난다.
5) 회심을 규격화시키고 일정한 원리를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
만일 우리가 다양할 수 있는 문제를 하나의 변하지 않는 원리로 규정하고 그것을 고집한다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커다란 해를 줄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우리의 특정한 기준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회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성경을 넘어서서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일이 없도록 대단히 주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음 속에 분명한 정의를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중대하고 필수적인 일이겠는가!
6) 회심의 영구적이고 필수적인 요소
그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다. 이 사실은 저를 정말로 전율하게 만든다. 성경의 가르침에는 놀라운 일관성이 있다. 모든 교리는 서로 일관성을 유지한다. 우리가 성경의 인도에 자신을 맡긴다면 앞에서 말한 것을 뒤에서 부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가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사 가운데 위대한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항상 반복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어느 세기에 일어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역사라면 동일한 표식이 있을 것이다. 부흥의 역사를 읽어 보면 언제나 비슷한 특징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부흥은 바로 사도행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신앙의 참된 표식은 언제나 1세기의 신앙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다! 기준이 되는 형태가 존재한다. 역사는 언제나 부흥에 이러한 위대하고 본질적인 요소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회심한 성도 각 사람의 역사들 역시 그러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같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똑같아야 하며, 언제나 그러했다. 여러분은 초창기와 중세, 종교개혁의 시기, 청교도 시대, 18세기 복음주의자들 등 여러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 보실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똑같다. 한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이 생각난다.
7) 회심의 유일한 필수 요소는 회개와 믿음이다.
회심에는 두 개의 필수 요소가 있으며, 이들은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등 성경 모든 곳에서 강조된다. 바울은 행 20;21에서 이것을 한 문장으로 말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이것이 회심이다. 회개와 믿음, 즉각적이건 점진적이건 상관 없다. 회개가 있어야 한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둘 중 하나가 없다면 회심이 아니다. 둘 다 필수적이다.
8) 회개가 믿음에 선행한다.
믿음이 회개보다 먼저 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제가 믿음이라고 말할 때는 일반적 의미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사용한 의미 즉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회개하기 위서는 일반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특정한 일들을 믿지 않으면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며 회개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특별한 의미의 믿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 경우 회개가 믿음보다 먼저이며 바울은 그런 순서로 말한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왜 회개가 먼저 와야 하는가? 성경에서는 언제나 회개가 첫 번째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약의 첫 번째 설교자 세례 요한도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막1:4)를 선포했다.
두 번째 설교자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권하셨다(막1:15). 베드로도 오순절날 행한 설교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7-38).
회심의 일차적 요점, 기독교 구원의 첫 번째 사항은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는 것이다. 저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만 다룰 뿐, 그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복시키기 위해 그 모든 일을 하셨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고후5:19) 분은 하나님이셨다. 저는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의 가장 큰 약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체험에, 행복에, 주관적 상태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모든 영혼의 첫 번째 필요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사람의 잘못된 점은 그들이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회개를 먼저 놓아야 한다. 그것이 원래의 문제이며 타락과 원죄의 주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 이하 23장까지의 요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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