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강좌·존스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3권,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강의안)

강대식 2014. 11. 5. 09:39

 

첨부파일 교리강좌3권종합.hwp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3

 

1 장 교 회

 

우리는 각 교리가 얼마나 놀라울 만큼 필연적으로 다음 교리와 연결되는지 다시 한 번 인식하여야 한다. 진리는 하나이며, 하나님의 목적은 총체적이다.

 

1. 교회론을 고찰해야 하는 이유

 

1) 성경이 교회론을 강조한다.

 

교회론은 성경의 다루는 책에서 완전히 빠져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대부분의 신약 서신들은 교회를 대상으로 씌워진 것이며, 그 가르침은 교회에 대한 것이 많다. 성경 자체의 특성이 이 교리를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2) 교회사가 교회론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영국의 역사에서도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전환점인 종교개혁과, 17세기에 일어난 모든 사건- 청교도 혁명의 일부 측면도 포함- 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우리 선조들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교리를 지켜 내가 위해서라면 큰 역경을 견디고 모든 것을 잃을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떠한 핍박이 와도, 시미지어 목숨을 걸고라도, 비밀 집회소를 만들어 함께 모일 것을 고집하였다. 옛 선조들의 이름과 위대함을 존중한다면 그것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대수롭지 않은 일의 진리와 대의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고난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오늘날 교회의 상황 때문에 교회론이 필요하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교회에 대한 신약의 교리를 알아야 한다.

이 운동의 대표자들은 20세기 교회의 특별한 기능은 교회의 본질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바른 복음 증거를 위해 교회론이 필요하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의 원인은 복음주의자들이 특히 지난 육, 칠십년간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직전 세대들은 단체를 조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교회적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결과 큰 교단들의 복음 증거는 희석되었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아닌 단체에서만 모이게 되었다. 교회에 관한 교리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복음의 메시지와 그것이 오늘날 세상에서 가진 중요성에 깊은 관심이 있다면 교회론을 살펴 보야야 한다.

 

2. 교회론

 

교회론은 대단히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교회론이야말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주제였다. 가능하면 열린 마음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려 애써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쉽게 빠져드는 편견들로부터 건져 주시길 기도하면서.

 

1) 교회와 하나님나라와의 관계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이 두 주제에 대해 상당히 혼란을 느낀다. 이는 데체로 로마 카톨릭교회가 이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의 가르침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또한 교회가 모든 면에서 삶 전체를 지배하고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일관성 있게 주장한다. 중세시대 때 로마 교회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이며 최상의 존재라는 주장을 근거로 왕과 군주와 방백과 나라들을 통치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가장 훌륭한 정의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1:2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로 간주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주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을 때 여기 있었다. 그 나라는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으로 인정되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 나라는 모든 사람과 만물이 우리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해야만 하는 그 때 더욱 충만하게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왔으며,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또한 하나님 나라가 장차 오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현이지만 그 둘이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더 넓고 더 크다. 참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인정되고 인식되며 주님은 거기에 거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순간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이지만 단지 부분일 뿐이다. 하나님은 교회 바깥,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도 통치하신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지 않다.

 

2) 교회의 의미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이며, 이것은 불러 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 에클레시아는 집회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다. 7장에서 스데반은 모세가 광야교회”(38)에 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교회, 모임, 집회였다. 그들은 에클레시아, 즉 구약의 교회였다. 그것이 교회라는 말의 근본적 의미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주인을 의미하는 헬라어 퀴리오스에서 유래했으며 카이저시저도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의미를 결합시켜야 한다. , 교회는 주님께 속했으며, 함께 모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역적 모임으로서의 교회

 

성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용되었을 때는 일반적으로 지역적인 모임을 지칭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거의 언제나 이런 지역적 의미로 사용된다. “저의 교회”(16:5),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모였으며, 사도 바울은 그러한 지역 모임을 주저 없이 교회라 부른다. 그는 교회를 거대한 것으로 보는 에큐레니칼적 이상에 따라 생각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그의 편지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보낸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교회아닌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1;2)을 향해 기록했다.

바울은 교회를 여러 개의 지부로 나누어진 하나의 단일체로 보지 않고, 여러 교회들, 즉 수많은 단일체가 갈라디아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 있고 중요한 점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 보면, 이것이 사도가 교회라는 주제를 다루는 일반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교회들이라는 말 대신 교회라는 말이 사용된 두세 번 정도 있는데, 그중 한 경우는 다소 흥미롭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9;31). 이 구절은 교회들과는 구분되는 유일한 교회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기 보다는 여러 장소로 흩어져 평안 가운데 있는 하나의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고전 12:28에도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교회들 중에가 아니라 교회중에세우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교회

 

교회라는 용어는 또다른 식으로 사용된다. 에베소서의 저 위대한 구절들과 같은 몇몇 본문에서 바울은 분명 교회가 지상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족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1p:22-23). "이는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3:10).

 

보다 큰 의미로서의 교회

 

몇몇 경우에는 유일한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더 광범위한 개념을 보여 주기도 한다.

 

3) 교회를 설명하기 위한 성경의 예화들

 

그리스도의 몸

 

몇몇 신약 서신서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나온다. 고전적인 예는 고전 12장이지만 롬 12, 4장 및 다른 곳들에서도 그런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성전 혹은 건물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에 비교한다.(고전3:10) 2:20에서는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

 

5장에서 그렇고 그 이미지는 계시록에 다시 등장한다.

 

제국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2:19). 로마 제국의 각 부분이 널리 흩어져 있으면서도 중앙의 단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전투하는 교회 혹은 승리하는 교회

 

지상의 교회는 자신의 생명과 교리와 그 모든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 휘장을 지난 교회는 기뻐하며 승리를 누리고 있다. 이것을 장엄하게 표현한 것이 히 12:22-24이다.

 

4) 결론과 요약- 교회란 무엇인가

 

분명 교회는 영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교회라는 단어가 단수로 사용된 모든 예는 교회가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 실재로 존재함을 알려 준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가시적이어서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고, 고린도나 로마, 혹은 다른 특정한 장소에 존재한다고 묘사할 수도 있다. 그 두 가지를 염두에 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지역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유추는 영혼의 유추이다. 사람의 영혼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각 사람이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실이 몸을 통해, 행동과 삶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을 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지역의 교회들과는 별도로 유일한 교회가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실체이며, 참으로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유일한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교회의 일원이 되어야 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교회의 일원이 될 수는 있다. 눈에 보이는 외적으로 나타난 교회의 일원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일원은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 교회와 그것의 눈에 보이는 지역적 나타남을 구분한다는 사실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주권이 인정되는 성도들의 지역별 모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에 더하여, 지역 교회에 있는 참으로 거듭나고 신령한 사람들은 동시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 즉 그리스도의 참된 몸의 일원이다.

 

5) 교회의 연합

 

교회의 연합은 영적 연합이며 생명의 연합이다

 

성경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라는 사실에 즉각 동의해야 한다. 17장이 잘못 인용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사람들은 문맥을 무시하고 한 구절만 떼어 낸다. 21절을 인용해 그들도 하나가 되어라고 말하고는 그걸로 끝이다. 그들은 교회의 분열은 가장 큰 죄라고 주장한다. 분열이 유감스러운 일이며 분파주의가 분명 죄라는 사실에는 물론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그가 어떤 형태의 그리스도인인지에 상관 없이 무조건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요 17장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다.

 

17장은 이 연합의 특성이 어떠한지 아주 명백하게 밝혀 주고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1-22). 그것은 모두 영적인 연합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8), 그러므로 연합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은 특정한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예수님은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저는 그런 사람들과는 하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연합의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 연합은 영적인 연합이다.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 고전 12

 

몸의 유추가 옳은 것이 되려면, 본질적이고, 유기적이고, 영적인 연합이 있어야 한다. 각 지체들이 서로에게 속해 있지 않고 같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에게 같은 피가 흐르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조화롭게 일할 수 없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8). 그러므로 첫째로 강조해야 할 것은 성령이다. 연합은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관들의 합병이나 서류상의 합의가 아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연합한 것도 아니다. 성경에는 그런 개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연합은 신비하고, 영적인 연합이다. 지극히 중대한 생명의 공동체이다.

 

교회 연합은 교리적 연합이다

 

두 번 째 원리, 그것은 연합은 반드시 교리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합은 교리적이어야 한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17:17-18). 말씀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 성육신,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8:58). 동정녀 탄생, 주님의 기적들, 초자연적인 것들, 자신의 죽음의 목적-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는 것- 그리고 성령의 위격에 대해 자신이 하신 말씀 등을 말한다. 이 말씀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하고 연합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이 풍성한 교리들을 부인한다. 그들은 대리적 속죄나 성령의 위격을 믿지 않고, 기적은 불가능하며 전설일 뿐이라고 한다. “저희가 다 하나가 되어라는 구절만 뽑아낼 뿐이다. 그런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은 요 17장을 부인하는 것이다.

 

연합이 교리에 근거해야 한다는 진리는 행 2:42에도 나와 있다

 

오순절 직후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doctrine)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된 책이다. 한 단어 한 단어가 중요하며, 한 구절 내에서 단어의 위치는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교제가 있기 전에 교리적 공통성이 있어야 한다. 교제는 같은 믿음, 같은 진리, 같은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의 의미가 같지 않고서는 진정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믿음의 공통성이 있어야 한다. 2:42에서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먼저 나온 후에 교제가 나온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교제가 먼저이다. 사람들은 , 모두 같이 모입시다. 모이고 나면 믿음의 문제에 대해 결정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리의 하나 됨이 없이는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요한이서에는 더욱 강력한 진술이 나온다. 누구든지 이 교훈(doctrine)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10-11). 요한일서에서도 그는 우리에게서 나간적그리스도들과 그 추종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을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나갔다. 그들은 분명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요일2:19). 그것이 교리에 대한 문제임을 기억하라. 교리는 참된 교제를 위해 본질적이고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교회 연합의 문제를 논의할 때, 언제나 연합의 영적 교리적 특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특별하게 믿는 것이 없는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은 전혀 어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연합이 아니다. 연합이란 적극적인 것이다. 연합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믿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모여드는 것이 아니다. 연합은 생명이며, 능력이며, 열정이다. 연합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해 결합하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의 연합은 그런 연합이다.

 

교회의 긴 역사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영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마음을 같이한 소수의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크게 사용하신 사건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붙잡아 사용하셔서 큰 일을 행하셨다. 하지만 서유럽 전체에 단 하나의 교회만 존재했을 때, 그 교회가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했는가? 암흑 시대이다. 제가 보기에는 이 역사의 위대한 교훈이 현재 완전히 잊혀지고 무시되고 있는 듯하다. 저는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에 대한 열심 때문에, 그리고 참된 연합이 아닌 연합에 관심을 가진 나머지 성경이 왜곡되고 곡해되는 것이 비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다.

 

6) 교회와 국가의 관계

 

로마 카톨릭의 개념은 교회가 국가이며 국가의 모든 일을 주관한다는 것이었다. 반대의 극단은 소위 에라스투스주의적관점이다. 에라스투스는 교회가 국가의 한 부분이라는 창안한 사람이었다. 에라스투스주의는 교회가 국가의 한 조직이며 국가에 의해 통치되고 지배된다는 믿음이다. 영국국교회는 에라스투스주의를 신봉하며 대부분의 루터파 교회들도 같은 견해를 채택한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두 영역 주의라고 묘사할 수 있는 제 삼의 견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셨다. 하나님은 교회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우주의 주인이시다. 국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바울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한 바라”(13:1). 권세 잡은 자들과 모든 다스리는 자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명하신 것이다. 하지만 교회라고 하는 다른 영역이 존재한다. 이 두 영역은 나란히 존재한다. 전자가 후자를 주관하지 않는다. 그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둘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이것이 신약 성경이 묘사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신약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교회를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초대 신자들은 정부와 독립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임재 안에서 모였다. 모임의 바깥에는 그들이 속한 큰 국가가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 국가의 시민이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국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영역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지난 수 세기 동안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였다.

 

성경은 민족교회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와 정 반대이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3:11). 교회는 뭔가 다르다. 그것은 거듭나고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들,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지역적으로 함께 모이는 것- 그것을 교회라고 부를 수도 있고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다-이다. 사회적 인종적 구분이나 국적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교회에서는 그런 것들을 절대 언급하면 안 된다. 그런 자격 조건들을 덧붙이는 것은 분명 성경적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이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똑같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교회였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논증이 아니다. 그때는 그러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은”(21:43) 시대이다. 베드로가 벧전 2장에서 입증하듯이 남은 것은 교회이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말씀을 교회에 적용시킨다. 교회는 이제 초국가적이다. 모든 민족 안에 교회의 백성이 있다. 교회는 이 땅의 다양한 나라에 살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2 장 교회의 표지와 정치

 

1. 교회의 세 가지 표지

 

1) 말씀 선포

 

교회의 일차적 임무이다. 교회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고 생겨났다.

 

. 교회에서 성도들을 세우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 선포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머리 되심과 주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교제이며, 말씀은 이들이 믿음 안에서 강건해지도록 하기 위해 선포된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으며, 사도들과 선지자들도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선포했다.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기로 태어났으며. 교훈을 받아야 했다. 오류에 대해 경고를 받고 이단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했다. 그래서 교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 복음 전도

주님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제자들도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으며, 우리도 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 외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각하고,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명력 있는 믿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사역의 일부이다.

 

2) 성례 집행

 

교회는 말씀 전파와 관련하여 성례가 올바르고 참되게 시행되는 곳이다.

 

3) 권징

 

이 교리가 심각하게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회가 왜 그 모양인지, 왜 교인들의 수는 줄어들고 교회가 사람들에게 능력도,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지, 왜 교회가 세상적 여흥이나 놀이 같은 것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주장을 펼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지, 왜 교회가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지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저로서는 권징을 시행하는데 실패한 것이 궁극적 원인이라고 말씀 드릴 수 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징계가 소홀히 여겨지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은 그렇게 된 것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주제를 충분히 자세히 다루고 싶다.

권징이 시행되어야 하는 근거는 성경이다.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화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18:15-17).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16-17). 권징은 고전 5장 전체의 주제이다. 마지막은 이런 말로 끝난다.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을 것이다.

 

고후 2, 특히 바울이 징계 받은 사람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5절에서 10절까지에 이 문제가 다시 언급된다. 규모 없는 삶을 사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침을 주는 살후 3장에서도 이 문제가 등장한다. 디도서 3:10에는 분명한 명령이 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10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계시록에 실려 있는 각 교회들에게 보내는 여러 편지에도 권징의 시행에 대한 권고가 담겨 있다.

 

권징 시행에 반대하는 자들이 범하는 오류

 

이런 정당화하는 근거를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에서 찾는다. 이것은 성경을 극도로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가라지의 비유는 분명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크다. 우리 주님 스스로 이 비유를 해석해 주시면서 곡식과 가라지를 뿌린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좋은 씨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가라지의 비유는 지역 교회내의 권징 문제와 아무 상관도 없다.

 

가라지의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로마카톨릭과 동일한 오류에 빠지는 것이며, 로마 교회를 따르는 대부분의 교회들 역시 같은 오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권징은 두 가지 주요한 방침에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권징은 교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3:10). 요한은 참된 교리를 전달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는 말할 것도 없고 집으로도 결코 영접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를 그들의 집에 절대 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잉 아니다. 그런 말이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뿐 아니라 교사라고 주장하면서도 거짓을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절대 집에 들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고전 5:11에서 바울은 이것을 명쾌하게 사실상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모든 권징의 문제에서 나는 바깥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너희를 지키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단지 형제인 어떤 사람이 이런 죄를 저지르면 그와는 사귀지 말라는 말이다.”

 

저는 독일로부터 치명적인 고등비평이 유입되기 시작하던 19세기에 우리 선조들이 마땅히 해야 했던 권징을 시행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잘못된 관용과 가라지 비유에 대한 오해로 인해 그들은 상황이 곧 나아지기를 소망하며 이 잘못된 가르침을 허용했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증언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범한 그 끔찍한 잘못의 결과를 우리 세대가 거두고 있다.

 

신자의 삶도 권징의 대상이다.

 

신자가 모순 되고 죄악된 삶을 그리스도의 대의에 헤아릴 수 없는 해를 끼친다. 그가 아무리 정통적인 교리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기질과 욕구와 감정과 육욕을 통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전파하는 믿음을 말과 행동으로 부인하는 자요, 외인들에게 장애물과 거치는 것이 되는 사람이다.

 

성경은 불순종하는 형제가 돌이켜 징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실제로 교회에서 쫓겨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자를 사탄에 내주어야 할 수도 있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고전5:5)하기 위해서이다.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사탄에게 내어주면 사탄은 그의 육체에 고통을 줄 것이다. 곤고하고 비참한 상태가 됨으로써 제 정신이 들어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부흥과 각성이 일어난 시기의 교회사를 읽어보라. 시대와 관계 없이 그런 시기에는 언제나 권징이 두드러지게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웨슬리가 도착했을 때 육백여명의 사람이 보여 있었다. 그가 교인들을 한 명씩 점검하기 시작했으며, 며칠 후 그가 점검으 F다 마치자 교인 수는 삼백 명으로 줄어 있었다. 존 웨슬리가 오늘날 다시 돌아온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

 

부흥과 각성의 기간에는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언제나 정결함에 관심을 가졌다.그들은 신약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에 따라 살기만을 힘썼다. 신약은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 도구, 통로는 반드시 깨끗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모인교회가 아니라 정결한교회를 가르치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세상과 섞인 교회가 어떻게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은 거의 생각할 수도 없다! 교회의 세 번째 표지는 권징이다.

 

2. 교회의 정치

 

신약 성경이 교회 정치에 대해 그리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를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있었던 때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스스로 언제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는 뭔가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때로는 성경에 반하는 전통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1) 교회 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

 

모여든 모든 구성원이 성령에 순종하기 때문에 정치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교회지상주의 또는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 되었을 때, 교회는 스스로를 기독교 국가라고 부르기로 결정했으며, 제도와 정치를 포함한 많은 개념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차용했다. 성경에서는 현대 로마카톨릭 교회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 드린다. 그들은 전통은 성경과 대등한 것이다.

 

조직은 언제나 영혼을 죽이며, 기관은 영혼을 소멸시킨다고 한다. 교회가 너무 복잡해지고, 편협해지고, 경직된 나머지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역사적으로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거의 언제나 새로운 교단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너무 살아 있고 기존 질서를 뒤집는 것이었기에, 옛 교회 조직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배제 되었다.

 

어떠한 지도력도 믿지 않는 것과, 실제로 교회에 지도자가 없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도자는 불가피하게 있어야 하며, 그것을 공식화해 놓지 않으면 반드시 누군가가 자칭 지도자로 나설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와 교회의 제도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 되도록 하자.

 

2) 에라스투스주의적 견해

 

교회는 국가의 한 부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교회를 다스린다는 견해이다.

국가는 교회의 성직자들, 특히 고위 성직자들을 임명하며, 그들이 또다른 사람들을 임명한다. 루터파 교회와 영국 국교회의 견해이다.

 

3) 감독 정치

 

감독 제도로서 감독들에 의한 정치를 그 신념으로 한다. 이들은 교회를 돌볼 책임을 그리스도가 직접적인 영적 후계자인 성직자단 혹은 감독단에게 위임하셨다고 가르친다.

교회 정치는 오로지 감독들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트풋 감독은 신약 성경에서 감독과 장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만족스럽게 증명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1:1). 큰 교구 전체에 하나의 감독이 있어서 그 한 사람의 감독이 여러 교회를 책임지는 것과는 달리, 신약에서는 한 교회에 여러 명의 감독이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의 감독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지위와 기능을 부여받은 나이 든 남자들, 즉 장로들이었다.

 

감독제도는 신약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학자들과 전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

이것은 1세기로부터 수 세기의 시간이 흐른 후 키프리아누스라는 사람에 의해 생겨난 개념이다.

 

4) 로마가톨릭의 견해

 

감독제도의 기원을 사도 베드로에게서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감독에 의한 교회의 다스림을 믿는다면 논리적 결론은 다른 모든 감독단을 지배하는 하나의 감독직이 있으며 그 감독직을 맡은 사람이 최종 권위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권위를 가지고 말하며, 무오하고, 그의 모든 말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로마카톨릭의 주장이다. 교황은 감독의 우우머리일 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의 직접적인 후계자이며, 따라서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역사적으로 정당한 논거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한다.

 

5) 장로교의 견해

 

장로회주의자들은 먼저 지역 교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실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질서와 형식을 위해, 그리고 혼란을 피하기 위해, 지역 교회들이 모두 인정하고 모두 따를 만한 하나의 조직체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노회(presbytery)를 결성했다. 노회의 결정에 따를 것을 엄숙히 동의한다. 더 나아가 노회들을 묶어 총회를 구성한다. 최고법원인 충회의 결정에 노회는 따른다. 이 제도는 장로교회, 그리고 존 녹스와 종교개혁 시대 이후일반적인 스코틀랜드 교회의 정치 방법이 되었다.

 

6) 회중파(혹은 독립파)의 견해

 

모든 지역교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실체이며,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주님의 임재와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심을 믿는,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고 기다릴 때 주님이 성령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교리와 권징 등을 결정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주시리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다. 지역교회는 자율적인 존재로서 스스로를 다스리며, 감독단이 노회나 총회나 그 밖의 어떤 상위 기관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원래 17세기에 소위 회중주의자들과 침례교도들은 그랬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교회가 얼마나 있는가? 그들도 모두 교회 유지 기금과 그 기금을 통해 지역 교회를 통제하는 일에 있어서 장로회적 개념을 받아들였다.

 

7) 성경적인 이상은 회중파의 지역교회 개념이다.

 

이 문제를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독립적인 지역 교회의 개념이 가장 성경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역 교회들이 모여서 교제를 나누는 것은 좋다. 회의를 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제가 신약 시대에 주어진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한 바로는 어떠한 회의도 구속력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도 지역 교회들을 향해 권공의 말을 전했을 뿐 법률적인 권한은 없었다. 단순히 성령과 우리는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라”(28)라고 말했을 뿐이다.

저는 독립적인 지역 교회의 견해를 지지한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신약에 나타난 형태에 가장 가까운 듯하다. 각각의 지역교회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지만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같은 영을 소유한 사람들과 언제라도 모여서 교제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다른 견해를 받아 들이면, 교리 면에서나 실천 면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감독기관에 속해야 할 것이고, 단지 그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틀렸다고, 그리고 위험하다고 믿는 그 가르침을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역사상 언제나 일어났으며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가 이런 입장에 처해 있다. 분명 믿음을 부정하는 목회자나 사역들을 위해 재정지원을 하는 자유교회에 복음주의자가 소속되어 있기도 하다.

 

반복해 말하지만, 신약의 가르침과 지난 수 세기에 걸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상적인 것은 지역 교회라고 생각한다. 의견이 일치한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의견의 일치를 본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가지되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개개의 교회에 무엇을 강요하거나 양심을 구속할 권리는 없는 상태이다. 같은 마음을 가진 신자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영적 삶을 성장시키기 위해 모이는 이 교제는 서로를 돕지만 자유롭고 자발적인 방법으로 돕는다. 어떤 교회도 자신의 견해나 심지어 양심에 반하는 일은 하라고 강요 받지 않는다.

이 문제들은 제게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정치는 나와 상관 없어요. 나는 영적인 사람이니까요.”라고 말한다면, 대단히 비성경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어느 모로나 우리 주님 자신의 교리, 주님이 우리로 보관하고 지키게 하신 그 교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여러분의 일이자 임무이다.

3 장 성례: 표징과 인

우리의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서 세워지고, 강건해지고, 격려받고, 견고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성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다룰 때는 이런 식으로 접근함이 필수적이다.

 

1. 은혜의 방편

 

1) 은혜의 방편에 대한 다양한 견해

 

로마가톨릭 교회- 은혜는 단 하나의 은혜의 방편만을 인정하는데 그것이 성례이다. 모든 은혜는 성례, 즉 세례와 성만찬과 다섯가지 다른 성례들을 통해 신자에게 기계적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퀘이커교도- 오직 신자 안에 계시는 성령의 내적 작용만이 유일한 은혜의 방편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내적인 빛의 역사를 경험하면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믿는다.

 

일부 종교개혁자들- 둘 다에 대한 반작용으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 외에는 다른 어떤 은혜의 방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개신교의 전통적 견해- 성경과 성례가 은혜의 방편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성령이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심으로써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성례는 말씀-성령의 조명과 인도 아래 행해지는 설교, 가르침, 말씀 읽기- 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2. 성례

 

1) 어원

성례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 세기 후 교회와 그의 가르침 속에 도입된 것이다. ‘성례’(sacrament)라는 단어는 라틴어 ‘sacramentum'에서 유래했다. 법정에서의 공탁금을 의미했다.

 

2) 성례의 정의- 내적 은혜의 가시적 표징

영국 국교회 39개 신조의 제25조에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의 표지 혹은 증거일 뿐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신 뜻의 확실한 증거이자 효과적인 표징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일깨우실 뿐 아니라 또한 강화하고 확증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례는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중보가 주는 유익을 표시하고 인 치고 보여 주기 위해, 그들의 믿음과 모든 다른 은혜를 증가시키기 위해, 그들이 순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서로에 대한 사랑과 교제를 증거하고 간직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외인들과 구분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 안에서 제정하신 거룩한 의식이다.” 이어서 성례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친히 제정하셔서 사용되는 외적이고 감지할 수 있는 표징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의미하는 내적이고 영적인 은혜이다.

이 정의들은 성례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준다. 자기 백성에게 이러한 일들을 행하라고 명하신 분은 주님 자신이다. 내적 은혜로 인도하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무언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3) 외적 표징과 내적 은혜의 관계는 무엇인가?

성찬식 때 쓰이는 떡과 포도주, 그리고 세례 시의 물과 받은 은혜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것은 수 세기 동안 엄청난 논란과 논쟁을 불러 일으킨 질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견해- 은혜가 성례의 구성요소 자체에 들어 있다는 것. 즉 은혜가 떡과 포도주, 그리고 물 안에 있다는 것. 기계적인 일이어서 마치 주입되는 것과 같다. 전문용어로는 은혜가 事效적으로(ex opere operato) 작용한다고 말한다. 은혜가 스스로의 힘과 존재에 의해 작용한다는 말이다. (화체설)

 

쯔빙글리의 견해- 단지 외적인 표징 혹은 상징에 불과하다. 가톨릭에 격렬하게 반발.

 

개혁주의적 견해- 은혜의 표징이자 인이다.

4:11,(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 친 것이니

인 이란 약속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결혼반지도 그것이 인이라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성례는 은혜를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결론- 성례는 은혜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이 주는 유익을 나타내고, 인 치고,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4) 성례는 우리가 교회의 일원임을 보여 준다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은 그들이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상징 혹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5) 성례는 반드시 필요한가

로마 카톨릭의 견해- 성례가 없이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

퀘이커 교도의 견해- 성례는 전혀 필요치 않다.(구세군)

개혁주의적 견해-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것이다.

우리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진 존재이다.

 

성례는 결코 말씀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성찬식만을 위한 혹은 세례식만을 위한 예배는 결코 있을 수 없다. 가톨릭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모든 요소가 갖추어진 예배가 있어야 하고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성례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성례는 믿음에 인을 치고 믿음을 확증해준다.

6) 성례의 종류

가톹릭의 견해- 칠성례, (세례, 견진, 성체, 고해, 병자, 성품, 혼인)

개신교의 견해- 세례와 성찬

 

7) 성례는 하나님이 우리는 위해 정하신 은혜의 방편이다

교회 역사상 설교 강단에 서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 진리와 복음적 믿음은 빼놓고 일종의 휴머니즘이나 도덕주의, 심지어 교회를 전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가? 그럴 때에도 다른 방법, 즉 시각적 방법으로 복음이 조금이라도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여전히 섶포된 일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므로 교회에 나왔으나 선포된 말씀으로 배를 채우지 못한 배고픈 양들은 떡과 포도주에서 혹은 세례의 물에서 영적인 양분을 찾을 수 있었고, 스스로 성경을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이 설교뿐 아니라 이런 방법으로도 말씀하실 수 있음을 상기했다. 참으로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지각을 뛰어 넘으며 언제나 완벽하다.

 

 

 

 

 

 

 

 

 

 

 

 

 

 

4 장 세 례

 

1. 세례에 대한 논쟁

 

1) 세례에 대해 독단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2) 세례는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시행하는 것이다. 성례는 은혜를 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은혜를 가리켜 보이고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 안에 그 은혜를 가져다 준다.

 

3) 세례에 대한 주요 견해들

유아세례론자, 침례교도, 구세군 및 퀘이커교도

유아세례는 주후 175년까지 명확한 언급이 없었다.

2세기 말 터툴리안에게서 중요한 증거를 발견하지만 그는 후에 세례 반대론자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수 세기 동안 종교개혁 때까지 오직 유아세례만 존재했었다.

주요 종교개혁자들도 그 관행을 시행했다.

16세기 말에 재침례파가 나타나 신앙고백을 하기에 충분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 고백에 근거해 다시 세례 줘야 한다고 했다.

 

2. 세례의 의미

 

1) 세례는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몸으로 세례받으며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 받는다.

특정한 상황에 동일화되고 특정한 분위기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마태복음 2819절에서 우리는 복되신 삼위일체,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로 세례를 받는다고 했다.

 

2) 세례는 깨끗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죄책으로부터 깨끗하게 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2:37-38).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22:16),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3:21)

세례는 우리가 죄책과 오염에서 해방된다는 보증이다. 고전 6:11,“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에서 씻음은 세례를 의미한다. 디도서 3:5중생의 씻음도 세례이다.

세례의 의미는 우리를 연합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죄책과 죄의 오렵으로부터 씻음 받고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3. 세례의 목적

 

1) 세례의 목적은 우리를 원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가르침은 가톨릭의 것이다. 루터파와 영국 국교회의 일부 분파에서도 세례의 목적은 우리를 원죄로부터 깨끗하게 하고 중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세례적 중생을 말하는 것이다.

 

2) 세례는 죄사함과 칭의에 대한 표징이자 인이다

그들은 세례 받았기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세례 받는 것이다. 세례는 그들이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되는 수단이 아니라, 그에 대한 보증이다.

 

3) 세례는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한 표징이자 인이다

 

4) 세례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표징이다.

 

 

4. 세례의 대상

 

1) 유아 세례를 지지하는 논증들과 그 반론들

2)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논증들과 그 반론들

3) 결론- 세례가 인이라면 성인 신자에게 행해야 한다

 

5. 세례의 양식

 

1) 세례 양식에 대한 논쟁의 역사

물을 뿌리는 것과, 물에 몸을 완전히 담그는 것.

 

2) 세례 양식에 대한 논증들

 

3) 중요한 것은 세례의 의미이지 양식이 아니다

확실한 것은 완전히 물에 잠그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넘어서는 일일 뿐 아니라, 이단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단에 가까워지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양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구약 시대에 일관되게 행해지던 관행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6. 세례 문제에 대한 강의자의 결론

 

세례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성인 신자들이다. 유아 세례를 찬성하는 정당한 논겨는 찾지 못했다. 양식에 대해서는 물을 뿌리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침례가 될 수도 있고, 둘이 결합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방법이 더 성경적이며 역사적으로 많은 증거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돌아보사, 우리의 믿음을 인준해주시고, 우리에게 확신과 힘을 주시며, 우리가 불신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마귀의 공격을 받을 때 우리를 굳세게 하신다. 세례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방식은 어떻든 그것이 의미하는 것, 그것이 인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도록 하자.

 

 

5 장 성 찬

 

1. 성찬에 대한 견해들

 

1) 가톨릭의 견해

화체설- 사제의 행위로 인해 떡이 실제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몸으로 변화된다고 믿는 것. 로마가톨릭은 화체설을 중심으로 방대한 철학을 엮어 냈다.

 

개신교가 생명력을 잃고 무기력하게 될 때는 언제나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성례주의적 가르침, 즉 자신은 아무 할 일이 없고 단지 떡을 먹으면 그 떡이 거의 자동적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가르침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견해는 떡의 흰색은 떡의 실체가 아니라 우유성(accidents)에 속한 것이며 감촉이나 맛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우유성에는 영향을 주지 않은 채로 실체가 바뀌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떡의 실체는 더 이상 같지 않으며 기적에 의해 주님의 실제 몸이 된다고 믿는다. 떡이 실제로 주님의 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떡을 특별한 용기에 담아 경배하고, 그것을 향해 기도한다. 그들은 떡을 성체라고 부르면서 성체를 들고 행진한다.

 

화체설에 대한 반론- 화체설은 성경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들도 인정한다. 그들은 주님이 이것은 나의 몸이라”(22:19)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대단히 강조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어야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명백한 대답은 주님이 그 자리에 육체 가운데 서 계셨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 있는 떡이 실제 주님의 몸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시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또 하나의 설득력 있는 대답은 주님이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22:20). 떡의 경우에 “--이라는 말을 강조했다면 여기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잔이 되고 만다. 주님이 잔 안에 있는 포도주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 잔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한 단어를 근거로 하여 화체설을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실로 비합리적이다. 사실 이 교리는 단지 사제의 지위와 신분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회에 들어 왔다. 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제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제는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된다.

 

2) 루터파의 견해

공재설- 그들은 가톨릭의 주장은 잘못되었으며, 떡의 실체는 변화가 없다고 말한다. 떡은 여전히 떡이지만 주님의 몸이 그 떡에 결합된다. 그래서 그들은 떡과 주님의 몸이 동시에 있다고 믿는다. 우리 주님의 몸이 떡과 함께, 그리고 떡 아래에 있는 것이다.

 

3)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츠빙글리는 성찬은 단순히 표징과 기념일 뿐이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의 성례는 표징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인이다. 성찬도 마찬가지다.

 

2. 성찬의 의미

 

1)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보여 준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떡을 떼는 것과 포도주를 붓고 마시는 것은 우리 주님의 찢어진 몸, 흘린 피를 나타낸다. 강단이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성찬은 여전히 주님의 죽으심을 선언하고, 선포하고, 전파했으며 사람이 전파하는 것과 성찬대의 떡과 포도주가 전파하는 것 사이에는 모순까지는 아니더라도 종종 큰 불일치가 있어 왔다. 주님의 놀라운 예비하심이다.

 

2)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및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참여했다는 것을 상기 시켜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렇게 때문에 그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3) 성찬은 우리가 새 언약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 성찬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신자들과 새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다. 그리스도는 이 새 협정, 하나님이 사람들과 맺으신 이 놀라운 새 언약에서 인류의 머리이며 대표이시다.

 

4)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받아 신자의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 6장이 성찬식에 대한 말씀은 아니지만 적용할 수 있는 진리가 56,57절에 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너희는 나를 먹어야 한다. 너희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 즉 너희는 나를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고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며 너희는 나를 인하여 살아야 한다.” 그것은 영적인 참여였다. 주님은 자신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실체를 문자적으로 먹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개념이다. “내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63).

 

5) 성찬은 신자들 사이의 연합도 보여 준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10:16-17) 우리는 성찬식을 하면서 떡을 뗄 때,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상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찬식에서 성찬이라는 용어는 우리와 주님의 교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이의 교제도 나타낸다.

 

6) 성찬은 위의 모든 사실을 우리에게 인쳐 준다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새 언약이 주는 유익들에 참여하는 자라고 말씀해 준다. 성찬은 이 모든 것을 인쳐 준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인 쳐 준다.

 

성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자리다. 성찬식 때 우리는 언제나 감사해야 하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지금 하나님은 나에게 내가 새 언약 안에 있으며,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양자 삼으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의 모든 복과 유익들이 나의 것이고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 순간 나는 이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3. 누가 성찬에 참여할 것인가

 

1) 오직 신자들만 성찬에 참여한다

성찬은 오직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연약한 신자들, 심지어 죄 가운데 있는 신자들도 참여한다. 완벽한 상태가 되어야만 성찬식에 나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자신을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을 살피려 하지 않으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고 적지 아니하니”(고전11:30). 바울은 우리가 스스로를 판단하면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고 벌하실 때, 이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하기 위해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다.(32) 이것은 우리가 설교와 권면을 듣지 않으려 하면 우리는 약해질 수 있고, 병에 걸릴 수 있으며, 죽음을 상기하고 두려워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11:30)라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문구가 나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자신을 판단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 구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죽었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그들이 멸망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죽음이라는 수단까지 사용해 징계하셨다는 것이다.

 

4. 성찬은 말씀의 은혜를 확증하는 것

성찬이 말씀 선포보다 더 많은 일을 하지는 않는다. 성찬에서 새롭거나 추가적인 은혜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성찬이 하는 일은 말씀의 효력에 대해 인을 치고 우리가 은혜를 받았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특별한 은혜는 없다. 오직 성찬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교회 안에 있는 최고의 은혜의 방편은 말씀, 선포되고 가르쳐진 말씀이다. 성찬은 단지 은혜를 전달하는 또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성찬이 놀랍고 특별한 것이긴 하지만 추가적이고 특별한 은혜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하는 일은 은혜를 강화시키고 더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례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찬을 통해 믿음 안에서 강건해지고 세워지고 견고해짐을 느끼며, 위대한 구원을 기뻐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6 장 죽음과 불명성

 

1. 종말론은 무엇이며 왜 연구해야 하는가

1) 종말론이 다루는 내용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운명, 개인적 미래를 알고 싶어하고 동시에 세상 전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이 주제들은 모두 대단히 실제적인 것들이며, 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익숙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2) 오늘날 종말론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가 초에는 종말론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이생에서의 삶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 즉 이 세상의 사회적 상황을 개선시키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그 중 중요한 것 하나는 물론 과학 지식의 진보와 그 지식을 기반으로 한 잘못된 추론이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삶은 없으며, 이생에서의 삶과 세상만 있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낙관론은 1차와 2차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불확실성과 불안정을 느끼게 되었다. 인생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끝날 것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내세에는 희망이 있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이 불안정의 시대에 그들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도록 돕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도록 돕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대해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는지 알아야 한다.

 

2. 죽음- 개인적 관점의 종말론

1)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

죽음은 존재의 단절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성경은 절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일 뿐 절대로 존재의 단절이 아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영혼은 육체를 떠날 것이며 게속 존재한다.

아주 중요한 두 본문이 이 문제 전체를 매듭지어 준다.

1 12:4-5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10:27,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

2 16장에 나오는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같은 내용을 가르쳐 준다.

그들은 둘 다 육체를 남겨 두고 떠났지만 그들의 영혼은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성경의 근본적 정의이다.

 

2) 우리는 왜 죽는가

인기 있는 철학적 견해는 죽음은 삶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서 삺의 과정의 일부라는 것이다. 생명이 만들어질 때 그 안에 죽음의 배아, 죽음의 씨앗도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에 따르면 죽음은 삶의 일부로서 삶 안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형벌이다. 죽음은 죄로 인해 들어왔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죽음은 죄로 인해 왔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4-15).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고,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경의 원리이며, 절대 다수의 사람의 가르침을 지배하는 인기 있는 현대 철학과 완전히 배치된다.

 

3) 왜 그리스도인도 죽어야 하는가

내가 예수를 믿었다면 내 죄는 사해졌고, 나는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했는데 왜 그리스도인이 죽어야 하는 걸까? 많은 사람은 같은 논리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논증이 사이비종교들 뿐 아니라 오늘날 인기 있는 신유 운동의 기초를 이룬다. 그들은 마 8:17(53:4의 인용)를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질병을 담당하셨다고 한다. 속죄가 그런 식으로 죽음을 해결하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육체적 죽음에 대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 신자도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죽어야 한다. 우리는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 이는 몸이 죽음으로부터, 죄로부터,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그것들은 모두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도 질병과 죽음과 죄가 남아 있도록 기꺼이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셨더라면 우리를 즉시 완전하게 만드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망과 모든 질병을 즉시 없애 버리실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이에 대해 성경은 대단히 명확하게 가르친다. 자세한 설명 없이 속죄가 죄의 모든 결과를 해결했다고 말하는 것은 질병 및 죽음과 관련하여 속죄를 오해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경우는 즉시 그렇게 되었다. 궁극적으로는 모두에게 그렇게 될 것이다.

 

질병과 죽음은 성화 과정의 일부다

그리스도인들이 성화 과정의 일부로서 여전히 고난과 질병과 죽음을 겪도록 남겨졌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 12:3-13- 의 일부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시편 기자가 119편에서 말한 것처럼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71,67)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질병은 하나님의 징계 과정의 일부이다. 모든 병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 또한 죽음도 질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 중 하나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종종 그리스도인들에게 축복이 되어 왔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에 도취되어 하나님 및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고 타락하기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들이 아프거나 누군가가 죽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죽음을 상기함으로써 그들은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타락을 치유해 주셨다.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히 죽음에 종속되어 있지만, 죽음에 대한 견해는 불신자들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달라야 한다. 우리는 죽음에 당당히 맞서,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6,57).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과 그가 율법을 만족시키셨다는 것 때문에 사망의 쏘는 것이 제거되었음을 안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죽음이 유익이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안다.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은 일이나”(1:21-23)라고 말한다. 한편 계 14:13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4) 불멸성

성경은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명백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그러나 편견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성경이 인간의 영혼을 불멸의 존재로 간주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영혼의 불멸을 반대하는 논증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를 근거로 오직 하나님만이 불멸하신다고 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멸이라는 선물을 사람들에게 주기로 결정하신 일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무한하신 지혜로 불멸성이라는 선물을 인간의 영혼에 주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기로 하셨다.

 

구약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불멸하다는 암시와 가르침을 찾을 수 없다는 논증

전도서 저자는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9:4)라고 했다. 마치 죽음은 마지막이고 우리도 끝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논증에 대한 대답은 성경에는 일종의 점진적 계시가 나타나 있으며, 구약보다는 신약에 더 분명한 개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 보면 교리가 발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죽은 자들이 가는 스올이라는 장소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구약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 계속해서 살아간다고 가르친다.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누구나 스올-헬라어로는 하데스-로 내려간다. 성경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부활에 의해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다”(딤후1:10)라고 말한다.

 

구약의 몇몇 구절은 구체적으로 영혼의 불멸을 가르친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을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6:10-11)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7:15).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신다”(73:24).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구약 성경이 죽은 자의 영혼과 접촉하지 말라고 경고한다는 사실이다. 이 금지령은 소위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언급했다. 구약 성경에는 죽은 자의 영혼과 접촉하는 것과 강신술을 금지하는 많은 가르침이 있다. 이러한 금지 자체가 영혼의 불멸성을 지지하는 강력한 논증이다. 사람들의 영혼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 존속하지 않는다면 그런 금지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이미 언급했다. 변화산상에서 일어난 일에도 증거가 나타나 있다. 모세와 엘리야가 존재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22:32)고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하나님은 지금 그들의 하나님이시라고 논증하신 것이다. 16장의 부자와 나사로도 죽었지만 의식이 있고, 보고 있고, 근심한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죽음 이후에도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는 대단히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증거이다.

 

 

7 장 조건적 불멸설과 제2의 기회

 

1. 중간 상태의 교리

 

이생에서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우리는 어떠 상태로 있는 것일까? 그것을 중간상태의 교리라고 한다. 연옥에 대한 카톨릭의 가르침은 논하지 않겠다. 성경에는 그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이 추가한 교리들 중 하나이다.

 

2. 중간 상태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

 

1) 모호한 존재 상태로서의 중간 상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헌에는 영혼이 어떤 모호하고 불명확한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는 믿음이 나타나 있다. 성경적 가르침과는 전혀 관계 없는 개념이다.

 

2) 공통 장소로서의 스올

두 개의 구획이 존재한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품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받는 장소이다. 스올이라는 단어는 여러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단순히 무덤일 때도 있고,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문맥상 형벌의 장소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3) 영혼 수면설

죽을 때 수면상태로 들어가 무의식이 되며, 부활 때까지 이 상태로 있을 것이라고 한다.

성경적 근거로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고전15:51),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115:17)를 든다. 이것은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의식을 가진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하나의 구절만 떼어 내서 교리를 만들면 절대로 안 된다. 죽음 이후에 의식을 지닌 상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더 중요한 확증은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다.“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계시록 6장에도 핍박을 당해 죽은 자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서 종말이 임해 그들을 잔인하게 억압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신원하여 주시기를 간청하고 기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혼은 잠들어 있지 않다. 신자와 불신자 둘 다 의식이 있다. 신자는 말할 수 없는 복락과 기쁨을 누리고, 불신자는 고통의 상태에 있을 것이다.

 

4) 조건적 불멸설(멸절설)

불신자의 영혼은 완전히 멸망하여 존재가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사람들은 원래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죽어야 하지만, 부분적으로 불멸성의 선물로 해석되는 영생의 선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은 그 존재가 사라질 것이다. 일정 기간 살아서 고난과 형벌을 받은 후 마침내 멸망하여 영원토록, 그리고 완전히 존재가 사라진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가르침은 상식과 성경 모두에 반하는 옳지 않은 가르침이다. 창세기 첫 구절부터 시작해서 성경을 죽 살펴보면, 세상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즉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과 멸망을 겪게 된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는 인상은 절대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그 본능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소멸과 멸절을 믿는다면 많은 사람은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듯이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며, 영원무궁토록 계속될 고난과 형벌이 있다는 믿음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종 노릇한다.

 

25장은 말한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46). 성경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신자와 불신자의 운명을 대조하며, 그 때마다 정확히 똑같은 단어가 사용된다. 형벌도 영원하며 생명도 영원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멸망이 없다면 영원한 생명도 없으며, 신자들에게 약속된 모든 것은 잠시 동안만 지속되다가 끝나 버릴 것이다.

 

주님 자신이 영원한 형벌을 묘사하셨다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다. “꺼지지 않는 불”“구더기도 죽지 않고”(9:43-48). 벌을 받는 상태로 영원히 존재함을 시사한다.

 

조건적 불멸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와 같은 일을 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상상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기초해야 한다. 우리는 유한할 뿐 아니라 죄된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은 충분히 넓지도, 똑바르지도, 깨끗하지도, 순결하지도 않다.

3. 2의 기회

 

1) 2의 기회를 주장하는 근거

 

불신앙 가운데 죽은 자들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지리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주된 논증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들이 가진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고 마귀까지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데까지 발전한다.

 

주장의 근거는 벧전 3:18-20과 벧전 4:6이다.

(벧전 3:18-20)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2) 2의 기회에 대한 반론

 

성경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이 세상에서 결정된다고 말한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에게 일말의 희망도 제시되지 않는다.

주님 자신의 완벽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개의 구절만 가지고 교리와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벧전 3:18-20의 올바른 해석

 

이 본문에는 우리 주님이 죽으심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어떤 일을 하셨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육체 가운데 있던 우리 주님과 영적 상태에 있던 우리 주님 간의 차이이다. 이 땅에 계실 때 우리 주님은 육체 가운데 계셨다. 세상에 오시기 전과 세상을 떠나가신 후에는 영적인 상태로 계신다. 분명 이것이 본문의 가르침이다. 주님은 육체를 따라 죽으셨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받으셨으며, 영으로 거하시는 것은 살리심을 받은 후라는 말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도 베드로가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힘과 격려를 주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하고, 17절에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한다.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겠습니까?

베드로는 사실상 다음과 같은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있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보라. 사람들은 육체를 따라 예수를 죽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너희의 육체를 죽일 수 있을 뿐 영혼은 손대지 못한다.” 그것이 18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첫 번째 진술이다.

 

이어서 베드로는 우리 주님은 육체 가운데 행하셨던 일을 영으로 계신 지금도 여전히 행하고 계시다고 주장한다. 주님은 육체 가운데 계셨을 때 사람들을 도와 주셨으며, 격려하고 힘을 주셨다. 베드로는 주님은 여전히 그 일을 하고 계신다. 그렇다. 주님은 여전히 그 일을 하시고 계실 뿐 아니라, 이전에도 그 일을 하셨다. 심판이 인류에게 임하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던 또 한 번의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홍수 때였다. 홍수는 온 세상이 심판을 받고 최종적 분리가 일어났던 유일한 사건이었다.”

 

왜 사도 베드로가 노아 시대와 노아 방주를 준비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지 이제 아시겠는가? 그것은 고난이라는 문맥을 떠나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베드로는 말한다. “옛 일을 돌아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마치 육체로 거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전파하고 계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때에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홍수에 대해 경고하시기 위해 노아를 사용하여 방주를 만들게 하심으로써 120년에 걸쳐 계속해서 경고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부했다. 믿는 사람들, 즉 노아와 그의 가족 단 여덟 사람은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믿고 방주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은 구원 받았으며, 대홍수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베드로는 지금도 그와 똑같다.”고 말한다. “그 방주는 세례를 나타낸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육체 가운데 계시던 그리스도를 죽였던 것처럼 너희도 죽일 수 있을 것이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너희 영혼은 안전하다.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으며 너희는 그 분과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 계속 살아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그들이 너희 육체는 죽일지 모르지만, 방주(세례가 의미하는 것) 안에 있으면 너희 영혼은 완전히 안전하여, 사람들은 너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3:13)

 

이것이 본문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전체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극복하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홍수 전에 주님의 말에 귀 기울이고 홍수를 극복했던 노아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불같은 시련이 우리에게 닥칠지라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안전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비록 육체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영으로 살아계시며 지금도 다스리시는 만유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벧전 4:6의 올바른 해석

비슷한 논증이 설득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표면적으로는 죽음 이후에 복음 전파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들은 그 말을 복음이 죽은 자들에게도 다시 전파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려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누구에게든지 죽은 이후에 복음이 전파 되었다고 말할 내용이 전혀 없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복음이 특정한 사람들, 즉 지금은 죽었지만 복음이 전해질 당시에는 살아 있었던 어떤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둘은 전혀 다르다.

 

그들을 핍박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또다른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들 이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완전히 엉뚱한 이야기다. 말이 안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듣고 믿은 그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육체로는 심판-정죄-을 당했다. 하지만 괜찮다. 그들은 영으로는 살아 있다. 그러니 지금까지 죽어 간 너희의 사랑하는 자들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베드로의 논증은 계속 이어진다. “불신자들과 관계하지 말고 더 이상 그들처럼 살지 말라. 더 나아가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들이 너희 육체를 멸할 수는 있어도 영혼은 건드리지 못한다. 너희는 그들이 죽였으나 그 영혼은 건드리지 못한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다. 그들과 관계하지 말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너희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으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리스도 및 그리스도와 너희의 관계를 분명히 하라. 그러면 어느 누구도 너희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2의 기회에 대한 결론

두 본문에는 죽음과 음부 너머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또다른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 전파가 그토록 중대하고 긴급한 이유는 이생과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위 사람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기억하도록 하자.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의 영원한 복락과 기쁨 혹은 그들의 영원한 불행과 비참함이 이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을 믿느냐 거부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고후5;11). 주여 우리가 이 일을 하게 하소서.

 

8장 재림: 서론

 

1. 재림에 대해 고찰해야 하는 이유

 

1) 성경이 수없이 재림을 언급하고 있다

재림은 엄청나게 중요한 주제다.

- 성경의 30분의 1은 재림에 대한 언급이다.

- 초림에 대한 언급 1번에 재림에 대한 언급은 8번의 비율이다.

 

2) 주님 자신이 재림을 가르치셨다

24장과 25장은 이 교리만을 다룬다.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는 오직 이 주제를 위해서 쓰여졌다?

주님 자신이 재림을 강조하셨으며, 자주 언급하셨다.

24, 25, 13, 21.

 

알베르트 슈바이쳐-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 복음서는 재림에 대한 예수님의 묵시적 가르침을 끊임없이 강조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초에 유행한 신학적 분위기는 모더니즘 혹은 자유주의로서 예수역사적 예수바울의 그리스도로 대비시켜 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묵시적 요소들을 빼버렸다. 예수는 도덕과 윤리, 행동과 행위만 가르쳤다고 했다.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고 있다고 하면서 모든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들을 제거해 버렸다. 이에 대해 슈바이처는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이후 교회의 역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소위 역사적 예수를 뒤엎어 버렸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복음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3) 사도들도 재림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첫 장부터 이 주제를 만나게 된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질문에 답하였다(7).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서신서에서도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을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베드로는 벧후 3장에서 바울에 대해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주님의 날이 임함에 관하여 말하였으되라고 한다. 그들은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바울서신, 야고보서도 요한서신과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이 교리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서 순교자들과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을 격려해 주었다.

그것은 복된 소망이자 교회가 고대하는 것인 동시에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된다. 베드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 3:17).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1-12)

 

2. 재림의 교리가 소홀히 여겨지는 이유

1) 영적 무기력

우리는 삶과 환경에 희생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낙심시키고 우리 삶을 다른 일들로 가득 채워서, 이 복된 소망을 잊어버리게 하려 애쓰는 원수와 대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교리는 핍박과 환난의 때에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의 헛됨을 알게 될 때만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2) 재림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들

거짓 관점과 개념들 때문이다.

1, 재림- 죽음 가운데 데려가시기 위해 오시는 것(14:1-3)

2, 재림- 오순절날 교회 위에 그리고 교회 안에 임했을 때 일어난 일.(14:17-18)

주님이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오신 것으로 해석.

3,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 사건으로만 해석하는 것. 주님의 오심을 유대 민족의 국가가 멸망하는 것에 국한시킨다.

 

3) 그리스도인들의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

터무니 없는 가르침에 대한 소심함과 신중함.

수세기 동안 재림의 날자를 독단적으로 예언하곤 했다. 이런 가르침들의 별난 생각과 과장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재림의 교리를 전혀 고찰하지 않고 내버려 둠으로써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말하게 되었다.

 

이론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정통성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베드로의 말처럼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일이다(벧후 3:16).

 

3. 재림의 문제에 접근하는 바른 자세-균형

 

신중한 것이 옳은 일이기는 하지만, 신중함이 그 문제를 완전히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주제에 대해 균형 있게 읽는 것이 지혜롭다. 먼저 성경을 읽으라.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읽으라. 양쪽 입장 혹은 모든 입장의 글을 읽으라. 한쪽 입장의 글만을 읽는 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일이다.

 

똑같이 경건하고 똑같이 학구적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면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읽고 최선을 다해 검토해 보아야 한다. 경고- 이 교리에 관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 배타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거룩함에 관련된 운동을 조직하거나 재림과 관련된 운동을 조직하는 사람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다. 모든 교리는 결합되어야 한다. 한 가지만 전파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한다면 당신은 결국 균형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교회는 언제나 모든 교리를 전파해야 하며 특정한 교리들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4. 재림에 대한 서론적 접근

 

1) 재림과 연관해 사용한 용어들

묵시(apocalypse)- 계시, 수건을 벗기는 것, 벗겨진 수건의 개념

현현(epiphany)- 나타남 혹은 드러남

묵시는 우리 주님이 서 계시고 그 앞에 장막이 쳐 있다가 그 장막이 거두어져 우리가 주님을 보게 된다는 개념이다. 현현은 주님의 오심, 주님의 나타나심을 강조한다.

파루시아(parousia)- 임재. 주님이 그의 백성에게 다시 오셔서 임재하시는 것.

하나님의 날- 벧후 3:12, 주의 날- 살전 5:2, 벧후 3:10

주 예수의 날 혹은 그리스도의 날- 고전 3:13

이 용어들은 상호 교환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2) 재림이 일어나는 방식

 

1 인격적인 오심이다.

 

2 영적인 것일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 오신다.

영적인 오심- 오순절날 성령을 통해 오심,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시에 심판 가운데

주님의 오심”, 지금도 여전히 영적으로 오심, 부흥의 때에 특별한 방식으로 교회에

오심,

육체적 오심- 재림 교리. “이 후에 인자가 --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26:64).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0-11).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9:28)

초림과 재림은 둘 다 육체적인 것이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1:7)

 

3 재림은 가시적인 사건이다.

비밀스럽고 보이지 않는 사건으로서의 재림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다.

 

4 재림은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번개의 번쩍임에 비유(24:27). 도적이 밤에 오는 것에 비교(24:43).

5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이다.

영광 중에, 하늘 구름을 타고,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나팔 소리가 나매”(고전 15:52)

왕의 왕, 주의 주로 오실 것이다.

 

재림에 대한 연구는 우리를 경건으로 인도한다.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거룩한 삶을 촉진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3) 재림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당부의 말

그 연구가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든다면 당신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쭐하게 되고 지성과 열정이 자극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연구 방식이다.

그 연구가 당신으로 하여금 무릎 꿇고 에배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방식의 연구이다. 그 일을 해냈다는 자기 만족감을 불러 일으킨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연구방식이다. 이것은 지성만이 아니라 전인격을 위한 주제이다. 그것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진리에 올바른 방법으로 접근하게 되기를 빈다.

9장 재림의 시기: 징조들

 

1. 재림의 시기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

 

1) 재림의 시기에 대한 연구는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해야 한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라는 견지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하며, 그 관심을 통해 거룩해지고 그 위대한 날을 위해 준비되고자 하는 열망이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접근법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2) 재림의 날짜를 확정하려 시도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사용하셨던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갔다. 과거를 큰 교훈으로 삼아 주님을 더 잘 알고, 더 참되게 섬기며, 진리를 아는 지식을 향해 정직하게 힘쓰고자 하는 큰 소망을 가지고 이 주제에 접근하라.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구절

살전 5:1-2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강좌가 끝났을 때 처음보다 더 불확실해졌다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기뻐할 것이다.

재림의 시기를 확정하는 일에 집착한 나머지 영적인 삶이 메마르고 무미건조하게 된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2. 재림의 시기 연구에서 유념해야 할 원칙

 

1) “라는 용어를 사람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들은 재림이 그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의 세대에 일어날 일이라고 믿었을까요?

암시가 나타나 있긴 하지만 그들이 글로써 그렇게 가르친 구절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찾아보라. 표면적으로는 그런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나님 편에서 어떤 진술을 할 때에는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같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벧후 3:8)

 

2) 우리는 이미 말세에 살고 있다.

신약에서 사용되는 말세혹은 말일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우리 주님의 초림부터 시작해서 재림까지 이어지는 신약시대 전체를 말한다.

 

3) 예언적 원근법

구약의 예언들을 읽어보면 선지자들이 주님의 초림과 재림을 한 호흡으로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주의 깊게 확인해야 한다.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와 세상 끝의 심판 날에 대한 언급이 서로 중복되어 있다. 24장과 25장 혹은 마가복음 13장이나 누가복음 21장과 같은 본문을 읽을 때는 이 원리를 유념해야 한다.

 

3. 재림의 징조

 

성경은 주님이 오시기에 앞서 특별한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1) 이방인을 부르심

24:13-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13:10, 11:25“이방인의 충만한 수”)

 

2)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모여듦

-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이 일어날 것인가?

- 민족적 회심에 대한 논거들, 19:28, 21:24,

- 민족적회심에 대한 반론들-, 8:11-12, 21:28-32, 43. 22:1-14, 13:6-9.

 

벧전 2:9-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신 말씀(19:6)의 반복.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의 세 가지 해석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 선택받은 사람들의 전체 숫자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회복되는 것

선택받은 유대인의 총 수, 즉 구원받을 유대인의 총 수

 

 

 

 

 

 

 

 

 

 

 

 

 

 

 

 

 

 

 

 

 

 

10장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벧전 2:9<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신 말씀(19:6)의 반복.>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 “온 이스라엘은 교회가 아니다

 

9, 10, 11장에서 교회가 아닌 유대 민족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이 일어날 것인가

 

유대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을 것이며 특별한 지위에 놓이게 되어 종말에는 교회와 유대 민족이 있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일까?

구약의 예언들이 그것을 지지한다고 주장.

장차 도래할 위대한 축복의 날을 고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을 때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1) 이 해석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이 다른 방법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율법과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2) 민족적 회심에 대한 반론

신약 성경을 읽음으로써 구약만 읽었을 때는 오로지 유대인들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보이는 예언을 신약에서는 교회에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에서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2:16)

요엘 2장을 보면 유대 민족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베드로는 그것이 교회에 적용된다고 말했다. “이것이 그 성취이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그것은 성취의 시작이었으며 그 이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교회가 속해 있으며 재림으로 인도하고 있는 이 시대 전체에 대한 것이다.

 

- 구약의 예언들은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15:14-18, 아모스의 예언이 성취된 것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는 아모스가 말한 다윗의 장막이 다윗의 더 위대한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예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영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에스겔 40장에서 마지막 장까지의 예언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 전체를 다시 차지하고 예루살렘에는 실제로 성전이 다시 세워질 날이 온다고 믿어야 한다. 다시 번제와 속죄제가 드려져야 한다.

한 제사가 영 단번에 드려졌고 그것을 기념하는 떡과 포도주가 있는데도 다시 모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 주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이 유대인들이 거룩한 땅으로 회복될 것에 대해 말씀하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코 없다.

8:11-12,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사도 바울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다고 말한다.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바울은 더 이상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다고 말한다. 영단번에 끝났다.

2:14, 18,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하셨다.

 

- 11장의 가르침만으로도 입증할 수 있다.

바울의 전체 논증은 오직 하나의 뿌리만 존재하며 구약과 신약의 교회는 하나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지가 아니라 이 한 뿌리이다.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

이 본질적 하나됨과 연합, 그리고 연속성이다. 유대민족만의 특별한 위치는 불가능하다.

 

- 바울은 롬 11:25-26에서 연대기적 순서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연대기적 순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라는 말은 그런 식으로 , 그렇게 해서라는 의미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게 해서, 즉 그가 기술한 방법대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3. 로마서 1126절의 해석

 

성경의 난해한 구절을 다룰 때 언제나 좋은 원칙은 그 구절에 너무 집중하지 않는 것, 말하자면 현미경으로 들여보듯 뚫어지게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더 낳은 방법은 뒤로 물러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9장 첫 부분에서 시작한 주제를 11장 마지막까지 이어가고 있어요

1) 로마서 9-11장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남은 자, 즉 영적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9:6)

 

-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영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약속들은 문자적인 의미의 전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용된 일이 결코 없으며, 언제나 남은 자, 즉 외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 내적 할례를 받은 영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 항상 존재한다.

 

2) “온 이스라엘은 유대인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있다. “유대인의 충만한 수도 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 하나님이 유대인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 그들은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

 

3) 지금도 이스라엘을 민족적 의미로 이해하는 오류가 벌어지고 있다

육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 오신 그리스도를 거부함

 

4) 모든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갈라디아서 3장의 구절들

7-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민족적, 육체적 이스라엘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모든 믿음의 자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닌 모든 사람, 예수님께 속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구속을 받은 모든 사람이다.

 

5)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방법은 동일하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의 결론적인 해석은 하나님이 모든 시대의 믿는 유대인들 총원, 하나님이 미리 아신 그들은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인들과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종말이 되기 전에 유대인의 많은 수가 회심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특별한 지위를 지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다른 길은 없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 그것이 영원한 복음이며 다른 복음은 결코 없다. 8장을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성취되고 있다.

 

## 이하 21장까지의 요약은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참고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