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제3권, 1장-11장(강의안)

강대식 2015. 2. 11. 17:41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3 권 새 사람

 

 

1 장 서론적 분해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로마서가 처음 쓰여졌을 때, 장들로 나눠진 것이 아니고 16세기경에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나뉘었다. 어떤 이들은 새 대목의 시작으로 6-8장을 성화로 분해한다. 사실상 바울은 5장에서부터 구원의 확신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8장 마지막까지 그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5장의 주제를 끝내지 않았지만, 극히 중요한 질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잠깐 진로를 바꾸고 있다. 5장 끝(20-21)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함이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라고 진술하였다. 그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한번 명백히 한 것이다.

5:20, 21절의 진술은 두가지 난제를 야기시킨다. 첫째, 무율법주의로 인도하기 쉬운 교훈이 아닌가? 둘째, 율법은 이제 전혀 가치없고 쓸모없지 않은가? 6장은 첫 번째 문제를 다루고 7장은 두 번째 문제를 다루고 있다.

 

6장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1-14: 율법페기론(무율법주의, 반율법주의)의 위험 문제 전체를 교리적으로 다루고 있다.

1-2, 문제를 제기하고 보편적인 답을 하고 있다.

3-11, 보다 상세한 답변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12-14, 이상의 모든 것을 비추어서 우리에게 객관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

2) 15-23: 실제적, 경험적인 차원에서 그것이 어리석고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어느 부분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체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전체의 개념에 상응하지 않게 부분을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현명한 교사는 언제나 난제들을 예견한다. 믿음으로 구원얻는 복음을 설교하면 언제나 그 복음에 반대하여 이러한 도전이 있을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복음설교에 대한 아주 훌륭한 시금석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설교를 하면 이런 질문이 필요 없을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는 잘못 이해될 수도 있다. “무엇을 행하든 문제될 것이 없고 원하는 대로 죄를 지으라는 식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설교가 그런 오해와 도전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참으로 설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카톨릭에 이런 반기를 든 적이 없다. 그러나 루터, 휫필드는 율법폐기론자요, 이단이라고 공격을 받았다. 형식적이고 죽은 기독교(그런 것이 존재한다면)는 언제나 그런 식의 도전을 해왔다.

 

그럴 수 없느니라” -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어의 뜻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그런 문제를 들고 나서는 것은 이신칭의에 관하여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완전히 실패하였음을 보여주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바울이 1-5장에서 말한 모든 것을 파악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은혜의 임무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 죄에 거하도록 허용하는 것인가? 아니다. 은혜는 우리들을 죄의 문제와 왕노릇 아래에서 건져 내어 은혜의 왕노릇 아래로 옮겨준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말하고 있다. 2, 6-8, 10-11절에서 비슷한 형태로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진술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

 

6장을 접근해야 하는 문맥과 구조와 방식을 살펴보았다. 이제 강해의 초두에 6:2의 의미를 마음속에서 분명히 해야 한다. 이 교리의 의미를 다루게 될 때 본문을 명심해 두는 것이 얼마나 중차대한가를 알게 될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died to sin)” - 바울은 부정과거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헬라어 원어의 부정과거형 동사는 한번 일어나서 다시는 변개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것은 죄에 대하여 죽어 있는또는 죄에 대하여(이제 금방) 죽었던것도 아니다. 흠정역은 죄에 대하여 죽어 있는(are dead to sin)"이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번역을 한다면 어느 기간에 걸쳐 계속되어지는 하나의 과정이 있음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이 이제 막 끝나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 역사의 어느 특수한 시점에서 일어난 한 행동, 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6, 7, 8, 10, 11절에서 그것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그 모든 경우에서 바울은 같은 동사형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여기에 너희에게 영원하며 단번에 일어난 일이 있노라고 한다. 이 일은 우리가 아담 안에있는 것을 중단하고 그리스도 안에있기 시작할 때에 일어난 것이다.

 

2 장 우리의 신분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2절에서 바울이 1절의 질문에 대하여 사실상 완벽한 대답을 주고 있다고 본다. 2절의 진술은 사도의 근본적인 전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로마서에 나오는 기독교 교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진술 중 하나이다. 11절에 이르기까지 매절에서 여러 모양으로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2,4,5,6,8,11)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사도의 구원교리 전체를 완전히 이해하는 열쇠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우리’ - ‘우리라는 말을 맨 앞에 놓았다. “우리의 됨됨이-그러한 존재가 된-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거한다는 것이 어떻게 있을 법하다고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강조로서 우리의 특수한 지위, 현재 우리가 처한 우리의 존재 등에 주어지고 있다. 1절의 질문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은 칭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진정한 고민은, 자신들의 누구이며 자신들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같이 더 이상 죄에 거하겠는가?

 

죄에 대하여 죽은’ - 바울은 부정과거 동사를 사용한다. 부정과거 동사는 언제나 일단 일어나고 다시는 변개될 수 없는 한 사건이나 행동을 지시하는 것이다. 사도는 사건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지도, 현재 위치와 상태를 묘사하고 있지도 않는다. 그는 우리 자신의 과거 체험에 있어서 어떠한 사실과 행동으로써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6,7,8,10,11절에서 정확히 같은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중대하다.

- 잘못된 해석들)

1) ‘완전주의자들은 자기들은 죄에 대해서 완전히 끊었으며 죄의 영향과 죄의 세력과 죄를 사랑하는 것에서 완전히 죽어 있다고 가르친다. 만일 그것이 진리라면, 바울이 11, 12, 13절의 계속적인 강해와 호소와 권면을 결코 쓰지 않았을 것이다.

2)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의미이다. 바울은 해야 한다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사실이 되어버린 어떤 것을 일러 주고 있는 것이다.

3) “죄에 대하여 점점 죽어가고 있는우리가 어찌하여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점점 더 죽어가고 있지 않고,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4) 찰스 핫지의 진술 죄와 관계를 끊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

핫지는 라는 말에 강조할 만큼 하지 않고 있다고 느낀다. 우리의 지위의 독특성을 충분하게 강조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우리에 일단 일어난 어떤 일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죄와 관계를 끊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핫지는 우리가 죄와 관계를 끊었다고 말함으로써 족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강조점을 온통 우리에게 두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사도는 우리에게 되어진 일, 우리의 신분과 상태에 대하여 강조점을 두고 있다.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되어진 것에 대하여, 5:12-21까지 말한 저 위대한 것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찰스 핫지는 반율법주의라는 추궁을 당할까봐 두려워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구절을 반율법주의라는 누명을 받을 정도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을 바르게 파헤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5) 로버트 할데인의 진술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죄책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그는 죄책에만 국한시켜 해석하고 있고 죄의 세력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사도는 죄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말하고 죄책에 대해서만 죽었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5:21에 대답이 주어져 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그리스도인은 죄책뿐 아니라 죄의 왕노릇에 대하여 죽었다.

 

- 사도는 죄의 왕노릇과 은혜의 왕노릇을 서로 대조시켜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있어서 죄의 왕노릇을 종결지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너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면, 너희는 은혜의 왕노릇 아래 있다. 이것이 6장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의 왕노릇은 죄의 법, 죄의 권세, 죄의 체계를 의미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 그와 같이 은혜의 왕노릇도 은혜의 세력과 은혜의 영향, 은혜의 힘, 은혜의 권능, 은혜의 원동력을 의미한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죄의 왕노릇에 대하여 죽되 완전히 죽었다는 것이다. 죄의 영토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2절에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질문1) 아직도 죄를 짓고 있고 죄의 세력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 즉 죄의 왕노릇과 은혜의 왕노릇 아래에 있다고 의문을 제시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모두일 수는 없으며, 양다리를 걸칠 수 없다. 우리는 영단번에 그 위치에서 벗어났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으니”(1:13) 옮겨졌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고 지금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권속으로 신분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아담 안에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쳤다은혜의 통치는 무한정하게 더욱 권능이 있으며,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이 절대적으로 확실함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사도는 구원의 확실성을 나타내고 싶어 견딜 수 없어서 1절의 질문을 한 것이다. 은혜의 목표는 죄와 죄에 속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파괴시키는 권세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그런 상상은 불가능한 것이다. 사도는 아담과 죄와 죄의 통치에 대하여 죽은 우리인데 어떻게 거기서 더 살겠느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살다계속 거주한다는 말로 삶의 주요 경향(절대적 완전이 아닌)을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안에 산다는 사실이 불가능한 것은 그 사람이 은혜의 권능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은혜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쳤나니사도는 단순히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도, 우리가 죄에 계속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하지도 않는다. 사도는 죄의 체계와 죄의 궁극적인 세력에서 계속 살 수 없고 살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질문2) 어째서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가?

바울은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의 나라와 영토와 체계와 왕노릇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주어진 지위 안에 들어 있는 것과 그 지위 안에 있는 것을 깨닫는 것에는 전혀 차이가 있다. 옛날 해방된 미국의 오래된 노예처럼, 사실상 지위에 있어서 완전히 해방이 되었는데도 느낌으로는 노예일 수 있다. 옛 습관과 옛 영향으로 인하여 해방된 노예들이 빠졌던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잊는 경향이 있고, 마귀의 말을 듣고 주문에 걸릴 수가 많다. 우리는 저항하고 대적해야 한다(4:7). 6장에서 사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그것은 체험의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사실로 진리이다.

바울은 4장 끝에서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것과 아브라함이 행한 바대로 행할 것을 권고 했다. 아브라함의 나이 99, 사라의 나이 90세 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브라함은 의심치 않고 오히려 믿음이 더 강하여졌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믿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여러분의 체험이 어떠하든 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믿음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일진대 더 이상 죄의 왕노릇과 통치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쳤나니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행한 바대로 죄에 빠진다면, 그것은 내가 누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은혜의 통치와 왕노릇 아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에 더 이상 계속 살 수도 살지도 않을 것이다.

 

3 장 그리스도와의 연합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6:3)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진리가 되는가? 바울의 대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이다. 이 교리는 특별히 3-11절에서 상세하게 풀어 설명한다. 그 교리는 기독교 진리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극적이고, 가장 위안을 주는 것 중 하나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세례받은’ - 첫째, 성례주의자적 해석으로 세례를 받아야 중생한다고 가르치는 교리로 카톨릭에 의하여 가르쳐지는 교리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세례 행위 자체내에 수세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연합시킨다고 한다. 그것은 마차 뒤에 말을 갖다 놓은 격이다. 신약은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중생하였다는 증거가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에디오피아의 내시나 고넬료의 경우, 또한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경우 세례를 베푼 것은 믿었기 때문이다. 성례주의자들은 은혜가 물 속에서 전달된다고 믿고, 떡이 은혜를 날라다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발전하여 사제주의와 교회를 추켜세워 신자를 지배하는 폭군으로 되어진다. 교회나 또한 사제에 의한 어떤 행동도 생명을 줄 수 없고 이 연합을 산출할 수 없다. 신약에 의하면 세례는 생명과 연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을 인치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둘째, 세례는 세례적인 서약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신부나 목사가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을 선언하고 죄를 뉘우쳐 새 삶의 길을 서약하면,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세례에 있어서 진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내가 신자로서 행하는 어떤 일이 아니라, 나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고 연결시킨 나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영향권 내로 세례 받았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고전 10:1-2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그러나 로마서 6장의 전체 문맥이 그 설명을 전혀 불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가르치는 바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향 아래나 그의 영향권에 속하였다는 것을 훨씬 상회하는 교훈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다. 우리가 이담 안에 있었던 것 같이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있다. 영향의 차원에서만 아니라 연합, 영적인 연합의 차원에서이다.

 

넷째, 세례의 의미는 구원하는 효과를 믿는 우리의 믿음의 표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세례는 우리가 그것을 믿고 인정한다는 선언만이 아니다. 그것을 훨씬 넘어서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까지 가는 것이다. 4절은 분명하게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라고 말하고, 5절은 훨씬 더 노골적으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그것은 접붙임이요, 연합이다.

 

다섯째, 세례란 우리와 그리스도가 죽음과 장사, 부활에서 연합된 것을 상징적,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세례를 단지 상징적, 회화적인 표라고 하지 않는다. 바울은 세례로 말미암아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말하고, 이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났다고 말한다. 어떻든 간에 그것은 물 세례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 여기 구절 가운데서는 물세례를 전혀 의중에 두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고 사도가 말한 것은 성령에 의한 세례이다. 본문 5절의 본받아’-연합하여, 동일체가 되어- 라는 표현이 여기서 쓰인 세례라는 말의 의미이다. 갈라디아서 2:20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동일한 교리를 대하게 되는데, 세례는 언급되지 않는다. 물세례가 연합을 이루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고, 그 접붙일 때 성령에 의해서 수행되는 세례이다. 어떤 의미에서 구원 중 가장 영광스러운 국면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이 로마서 6장을 읽을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세례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인가? 세례의 양태와 형식에 미리 사로 잡혀서 이 위대한 진리를 몰라본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사도가 여기서 펼쳐 나가고 있는 영광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영광들은 무엇인가?

첫째,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지식임을 단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는 사실상 내가 너희에게 말할 필요가 있으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교리를 높은 수준의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교리라고 여겨지고 있다는 것은 불쌍한 일이다. 그는 많은 기간 동안 체류하지 않았던 지적으로 빈약하고 미개한 생활을 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도 이 교리를 가르쳤다.(2:20) 우리가 구원에 있어서 용서 받고 의롭다함 만을 받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를 나타내지 않으면 진정한 복음전도를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구원에 관한 영광스러운 사실은 내가 아담에게서 건짐을 받고 그와의 관계를 끊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나에게 오는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와 연합 때문이다. 이것을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둘째, “우리”,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중생케 하시는 성령은, 동시에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영이시다. 우리가 결코 이 구절들을 체험의 차원에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는 우리에게 일어나고 사실로 된 일을 다루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여러분의 체험이 어떠하든지, 느낌이 어떠하든지 간에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안에서 충만해 있고, 그리스도는 지금 여러분의 의와 지혜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시는 것이다. 여러분의 최종적인 완전한 구속의 보증은 바로 그것이다. ‘티나 주름잡힌 것 등 그러한 모든 것에서구원받을 것을 보증하는 것도 그것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살으심 안에 있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가 우리 모두라는 말을 강조하느라고 애를 썼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그리스도 전체에게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4 장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함축하는 것들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3-4)

 

바울은 성화를 강론하는 것이 아니고, 이신칭의의 교리와 구원의 최종성과 확실성을 반대하여 일어난 도전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은 그에게 연합되었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그에게 일어난 일들에 동참자가 되었다.

첫 번째 결과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서 함께 연합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강조점이 그의 죽으심에 있고, 그는 우리가 그 죽으심으로부터 덕을 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있어서 함께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그와 함께 죽은 것이다. 그가 행하신 것을 우리도 행한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이거나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되어진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인 것과 똑같이 주님과 함께 우리가 죽은 것도 진리이다. 그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그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다.

 

2:20에서 칭의 외에는 아무것도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도 대중적인 가르침은 이 구절은 성화와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성화의 일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라고 강권한다. 사도의 진술은 그러한 성화와는 하등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고 칭의의 국면을 다루고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의 첫 단계이다. 10절에서 그 점을 노골적으로 진술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으심이니그가 죽으셨을 때, 그는 죄와의 관계를 종결지으신 것이다. 또한 우리도 역시 죄와의 관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결과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사지냄에서 연합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4) 장사지냄이 죽음의 최종적인 증거로, 그것은 완벽한 죽음을 강조한다. 장사는 이생과 이 세상에 대한 관계가 종결되었음을 선언하는 선언장이다. 우리 주님께서 장사되었을 때, 율법아래 속하고 죄의 체계와 권세 안에 들어오셨던 삶의 관계가 종결되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이 자원하여 고의적으로 가지셨던 죄의 통치와 죄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신 젓이다.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죄의 왕노릇과 체제로부터 장사되었다.

 

세 번째 결과는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장사지냄에서와 또한 그의 부활하심에서도 그와 함께 연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아버지의 영광이란 아버지의 권능을 의미한다. 우리가 맨 먼저 붙잡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원한 영광의 권능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이 권능과 왕노릇에 의하여 붙잡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죄와 사망은 있는 힘을 다하여 그를 붙잡아 매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망이 그를 붙잡아 맬 수 없는 것은 그는 사람이 아니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죄와 그 통치를 완벽하게 이기셨다는 궁극적인 증거이며, 죄에 대한 관계를 청산하셨다는 궁극적인 증거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음 전에 처하여 있던 모든 것이 끝났음을 선포한다. 그것은 영원히 끝난 것이다. 부활로 말미암아 그는 더 이상 율법 아래있지 않고, ‘죄와 사망의 법과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 요 17:5에 기록된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네 번째 결과는 우리가 이 순간에 새 생명과 새 체제 안에 있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그는 자기의 부활의 결과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세례 받았으며 연합되었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우리에게도 같은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이것이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은혜의 왕노릇에 들어간 것이다.우리는 은혜의 영토와 체제와 통치 안에 있다.

이것은 내가 기대하고 갈망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도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새 체제 안에 있어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삶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이방인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있지 않다. 죄의 왕노릇 아래에도 있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보좌에 앉은 바 되었다”(2:6)

 

믿는 우리를 향한이 지극히 큰 능력과 이미 우리 안에서 역사한 부활의 능력으로 폐해진 죄의 통치와 왕노릇이 다시 우리를 사로 잡을 수가 결코 없다. ‘악한 자’, 마귀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한다.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1:6) 그것은 영원토록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죄의 삶을 살게끔 허락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로 들어 간 것이다.

 

 

5 장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음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우리가 알거니와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서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5-6)

 

우리가 지금까지 도달한 사도의 논증의 요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적극적으로 세 체제 안에 있는 우리는 죄에 더 거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가 5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재 진술하고 있다. 우리는 그와 함께 세례를 받았고 그로 인해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말하는 사도의 목적은 1절에서 언급한 거짓된 반론에 대답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 의문이나 의심의 의미가 아니라 때문에라는 뜻이다.

연합하다’ - ‘함께 자라다연합된 성장으로 하나 된, 분명하고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연합을 표현한다.

본받음’ - 우리의 죽음과 부활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사도는 본받아라는 말을 사용하여 구별을 나타낸다. 8:3에서 주님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고 말하며, 같은 구별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다. 영적인 의미에서 그와 함께 죽었으며, 영적인 관계 때문에 그의 실제적인 죽음이 가져온 결과와 귀추가 우리에게 미쳤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우리는 부활의 결과와 모든 덕을 전부 가지고 있다.

되리라’ - 우리의 미래의 육체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바울은 은혜를 더하려고 이 세상에서 죄에 더 이상 거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이 현재 삶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부활을 본받아’ - 4절에서 말한 새 생명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11절에서 권면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인 것이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리고 새 생명의 영역과 구원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생명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그와 함께 부활하였다.

 

우리의 이 세상의 삶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서만 있으나, 그가 영화롭게 된 것과 같이 우리의 몸도 영화롭게 되는 날이 이르게 될 것이다(3:20). 사도의 이 진술이 그것까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도의 커다란 관심은 은혜의 승리(완전한 승리)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가 반복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그것을 포착하는 데 너무 더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승리자이다. 그를 바라보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 여러분은 그 안에 있으니 여러분은 이미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머지않아 완전하게 구원받을 것이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다고 하는 생각보다 더 우습고 괴이한 것이 없다고 하는 이유가 이 점에서 비추어서 보기 때문이다.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왕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못 박힌’ -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이다.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이미 못 박혀 끝난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어떤 것,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어야 할 어떤 것을 연상케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체험적인 지식이 아니요, 성경에서 밝혀진 지식이요, 믿음의 지식이다. 믿음이 있으면 확신하고 있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하는 요점이며, 구원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옛 사람’ - 그것은 육체적 본성과 육체적인 모든 기질을 의미하지 않으며, 중생 이전에 있었던 도덕적인 존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옛 사람은 아담 안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전에 있었던 사람이요, 지금은 아니다. 우리 주님은 그 옛 사람을 입으시고 오셔서 나를 그것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그것을 벗으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은 끝났으며, 성취한 죽음이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새 사람을 입으라”(4:22-24),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3:9-10),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5:24) 옛 사람이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바 되었다고 한다. 옛 사람의 내가 아담 안에 있었던 나의 옛 존재, 정죄 아래 태어낫고, 아담과 함께 죄를 지었고, 죄의 결과들을 함께 거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옛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옛 사람을 벗으라는 사도의 말은 만일 너희가 옛 사람이 죽었으면 그 옛 사람처럼 살지 말라. 그러니 그것을 벗어버리고 옛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계속 믿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가장 위안을 주고 가장 큰 확신을 주는 영광스러운 국면의 하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부름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마귀로 하여금 우리를 속이고 미혹시키게 하는 것이다. 옛 사람이 아직 존재하는 것처럼 사는 것을 중단하는 유일한 길은 옛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화 방식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할 대로 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머리를 들고 죄와 사단에게 도전할 수 있을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롬 4:16-21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어려움을 알고 있었고 체험적으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그는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예를 들고 있다. 여러분과 나는 이 진술에 대하여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의 느낌이 무엇이든지 간에, 환경이 어떠하든지 믿음은 그 약속을 알고 붙잡고 믿는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영광스러운 체험이 따라 온다.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약속 위에 발을 올려 놓고 서라. 그 약속은 진리이다.

 

 

6 장 자유함을 입음

 

“(6)우리가 알거니와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6:6-7)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죄의 몸이 멸하여’(멸하기 위하여), ‘죄의 몸이 효력을 잃고, 꼼짝 못하게 하고 무능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뜻으로 활동을 정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죄의 몸’ - 어떤 주석가는 옛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갑자기 새 낱말 죄의 몸을 등장시킨다. 다른 주석가들은 죄의 덩어리를 표현하는 형용적인 용어라고 생각한다.

 

은 사실 그대로의 을 의미한다. 12절은 11절의 교리를 적용하여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절에서는 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7:16에서 시작되는 말씀이 23절에서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절에서는 이라는 말의 아주 결정적인 용례들을 보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8:10에서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몸과 영을 대조하고 있다. 8:23에서는 우리 몸의 최종적인 구속을 말하고 있다.

 

죄의 몸은 죄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육체인 몸을 의미한다. 현재 육체적인 상태에 있는 우리 안에 거하는 죄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인격으로서의 나 자신나의 몸과는 구별해야 한다. ‘죄의 몸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 죄가 여전히 왕노릇하며 다스리지만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지는 않고 단지 나의 몸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아담(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죄는 그를 지배하는 완전한 지배력을 얻었다. 죄는 인간의 생명을 지배했다. ‘아담 안에있는 사람은 죄가 다스리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죽었으며 그것과 단절했으며 죄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스스로 하나의 영적 존재로서 철저하게 영원히 죄의 영향권 밖에 있다. 영혼으로서의 나, 인격으로서의 나는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몸은 아직 죄와 타락의 영향에서 구출되지 않았다. 몸은 본능과 성향 등을 가지고 있지만, 몸 그 자체는 죄가 없다.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에게 와서 자연적인 본능과 몸의 여러 가지 강한 욕구와 충동과 힘을 따라서 시험한다. 죄는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있는 자에게도 몸에게 그 세력을 행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8:23)고 하였던 것이다.

 

구원의 목표는 무엇인가?

우리로부터 죄와 그 효력에서 완전하게 제거시키는 것이다. 아담이 죄가 없었을 때는 자기 몸의 본능을 정상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죄와 반역의 결과로 그는 균형을 잃고, 몸은 폭군노릇을 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마음도 몸도 죄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죄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도, 아담의 타락 전,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동안의 그 몸 상태에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으며 하늘 보좌에 그와 함께 앉힌 바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몸도 죄가 왕노릇하고 통치하는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한다. 아직은 아니지만 그날은 오고야 만다. 현재 우리 몸에 미치는 죄의 악한 영향도 감소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6:6에서 내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것은 죄가 아직 지배하는 몸에서까지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은혜와 구원의 전체 목적은 최종적으로 몸에게까지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누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자고 추정할 수 있겠는가?

 

둘째,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이것은 그러하니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자기 몸을 죄가 다스리게 허용하고 있다. ‘옛 사람죄의 몸사이의 구별이 명확하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니 옛 사람을 반대하여야 한다고 한다. 엄청난 넌센스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지낸 바 되어 무덤에 묻혔다.

 

만일 여러분이 이 점에 대하여 명확하지 못하고 옛 사람을 죽이려고 아직도 애쓰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노예의 굴레 아래 있는 것이며, 여러분은 불안할 것이다. 구원받고 풀려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죄에 대하여 영단번에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옛 사람은 옛 본성, 부패한 본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옛 본성이 의미하는 것은 죄의 몸이다. 옛 사람은 아담적 본질이요, 옛 인간이다. 육신은 죄의 몸이요, 죄가 아직도 폭군노릇을 하고 있고, 아직도 죄가 남아 있는 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육신 안에 있는 죄를 다루는 방식은 지금이라도 여러분 자신에 관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몸까지도 완전히 해방될 영화의 영광스런 진리를 기대하기

 

7 장 죄에서 벗어남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6:7)

 

이는’(왜냐하면)이란 말은 6절과 연결되어 있어 6절과 함께 읽어야 한다. 사도는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한다. 그러나 엡 4:22-24에서는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권면을 받게 된다. 사도 바울은 자가당착에 빠진 것인가? 그는 이미 영단번에 죽어 사라져 버린 것을 벗어버리라고 권면할 수 없는 것이다.

6:6과 엡 4:22-24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4:22-24에서는 옛 사람의 특징이 되는 언행과 행동양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너희는 마치 옛 사람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처럼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6:6은 옛 사람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옛 사람옛 본성’(죄의 몸)의 차이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신(자아)이 여러분의 본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사도의 논증을 따라갈 수 없다. 가장 위대한 진리는 내 옛 자아가 사라졌으며, 나는 새로운 자아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때 만이 나의 옛 본성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즉 내가 새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내 죽을 몸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 옛 본성을 다루기에 더 좋은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다. 죄는 더 이상 내 안에 있지 않고 내 지체 속에만 있다. 얼마나 자유를 주는 말인가!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구원방식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빠질 때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일 수 있을까?”라고 한다. 사도는 여기서 못 박아 말하고 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죄를 지을 때마다 구원의 문제를 들먹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노라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면 어째서 죄를 짓는 것인가? 죄가 내 지체 속에 있으며, ‘죄의 몸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죄의 몸을 나에게서 제거시킬 구원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지를 의심하는 것은 영원히 사라진 옛 사람을 다시 불러오는 것에 불과하다.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사도는 다시 전체 신분을 요약하고 있다.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그들은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번역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는 의롭다 함을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시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우리들이다. 사도가 여기서 진술하는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났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 해석은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된다. 그것은 이신칭의 교리를 심각하게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해석이다. 칭의는 연합에 앞서서 오는 것이지 연합되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아니다. 사도가 이 6장에서 칭의를 다루고 있지 않다.

 

이는 죽은 자가-’ - 의도적으로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죽을 때, 그는 죄에서 벗어나 방면되며, 죄에 관한 한 절대적으로 자유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 그는 죄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사도는 다만 보편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너희가 알거니와-- 이는이것은 첫 눈에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다. 죽은 사람은 자기의 체제를 바꾼 사람이요, 죄에 관한 한 모든 체제와 통치와 죄의 법칙에서 벗어난 것이다. 죽은 자는 자유롭다.

 

그러므로 6, 7절을 다음과 같이 함께 놓을 수 있다.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은 모든 방면에서 죄에서 종노릇하는 데서 벗어나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죽은 사람마다 죄의 권능과 죄의 왕노릇과 죄의 노예제도와 죄의 폭군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2)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 18, 20, 21절에는 자유하다’,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왜 같은 어휘를 쓰지 않았는가? 여기서는 법적 체계, 하나의 나라로서의 죄를 다루고 있어 법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18,20,22절에서는 다른 차원에서 그는 노예제도, 노예주를 생각하고 노예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흐름에 맞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벧전 4:1-2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이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함이라”(죄를 그쳤다-죽었다는 의미) 이 두 구절은 로마서 6장의 대목과 정확히 병행하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우리 주님께서 육체의 고난을 우리를 위하여 받았다. 또한 죄를 그쳤다고 표현하여 여러분을 위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 더 이상 죄의 지배나 죄의 통치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이다.

 

바울과 베드로는 모두 다 같은 일,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단번에 하나의 존재, 하나의 영혼과 전인으로서 죄와 관계를 끊었다는 것이다. 결코 의롭다함을 받은 것과 죄사함을 받은 것, 종국적으로 영광 중에 거하게 될 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나는 비록 여기 몸 안에 있지만, 죄가 몸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죄에 떨어지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나는 구원받은 것이다.

 

영혼의 침체를 극복하고 실패를 극복하는 길은 여러분이 죄를 짓거나 말거나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또한 죄가 한 인격(신분)으로서의 여러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깨닫는 것이다. 죄는 다만 여러분의 몸에 남아있다. 그 몸도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완전히 해방될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것은 나에게 말하여 준다. ‘나는 한 사람, 한 존재, 한 인격으로서 한 전인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나는 이미 죄의 지배와 왕노릇과 죄의 통치와 관계를 끊었다.’ 죽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 “죄에서 벗어나 자유케 된다.”

 

 

8 장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8)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 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6:8-10)

 

6,7절은 5절 상반부에 대한 해설이요, 8-10절은 5절 하반부인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는 말씀에 대한 해석이다. 상반부는 소극적이지만 후반부는 적극적인 측면으로 죽음은 소극적이요 부활은 적극적이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어 죄의 영역에서 나와서, 또 다른 영역으로 옮겨졌다.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 - ‘믿는다확신하다는 의미이다. 바울 서신에는 확신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이 지점에서 미래시제를 사용함으로 장래 몸의 부활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지근 현재 우리에게 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더 이상 죄의 영역에 거하지 않는 것이고,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았다는 것도 현재 우리의 것이다.

4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여기 이 세상에서의 삶 가운데서 이다. 11절의 권면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미래가 아니고 지금, 이것이 전체의 요점이다.

 

바울은 어째서 되리라고 말하는가?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에서 연합되어 있다는 입장에서 우리의 지위를 바라보고 있음과 동시에 그 죽음 너머로 필연적으로 따라올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7절의 죽음 지점에서 볼 때, 부활은 미래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으면 필연적으로 그와 함께 부활하며, 부활했음을 안다는 의미인 것이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2:1)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것을 행하셨으며 -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2:5-6) 지금 현재 우리에게 되어진 것을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19-20)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새롭고 부활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것이 8절의 전제이다. 이 점에 대하여 분명해야 하며,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체험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사셨으며’ -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만족하셨다는 적극적인 증거이다. 부활은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이 세상에 보낸 사명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전 우주에 선포하심이요 공포하심이다. 바울은 다시 죽지 아니 하시고라고 말하며 그것은 영단번에 행하셨으므로 부활은 목적이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 더욱 강하게 진술한다. 죄는 죽음을 산출하는 대리인이다. 율법은 죄에 대한 형벌로 죽음을 선포한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음은 건드릴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율법과 율법의 지배 아래로 들어오셨다. 이제 부활로 율법이 만족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가 율법을 마치셨기 때문에 사망이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부활을 통하여 최후의 원수까지 정복하셨다.(고전15)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망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죽음을 청산하셨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죄를 위하여 죽으심이 아니고, 죄의 권능에 대하여 죽으심도 아닌 죄에 대하여 죽으심이다. 죄의 저주에 대하여 죽었을 뿐 아니라 죄의 모든 체제와 왕노릇하는 데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 ‘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다’(7)와 같은 것이다.

 

더 나아가 영단번에반복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영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7:27)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영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9“12)

그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14)

 

사도가 6장에서 하고 있는 일은 8절에서 위대한 선포를 하고 9절에서 그것을 과시하여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10절에서 그것에 온전한 설명을 가하고 있다. 우리가 도달할 지점은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의 최종성을 보여주고 있는 지점이다.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은 알수 있겠는가? 그는 그 대답으로, 그가 죄에 대하여 죽었을 때, 그는 그것을 영단번에 행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결코 그가 다시 그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매일 반복하였고,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 차례씩 같은 일을 행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영단번에 이루셨다.

이와 같은 나는 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 하시고 사망이 가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아는 것이다. 

 

 

9 장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

 

“(10)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6:10-11)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 이 구절은 10절 상반절의 진술에 대한 하나의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우리 주님은 짧은 기간 동안 영광의 체제에서 죄와 사망의 체제로 들어오셨다. 그는 슬픔을 아는 슬픔의 사람이셨다.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십자가상의 예수님과 그 위에서의 부르짖음을 들어보라. 그 비통의 때에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사실상 분리된 상태에 있었다. 하나님의 체제와 아버지와의 교제로부터 완전히 짤려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사도는 더 이상 그 조건에 계시지 않다고 말한다. 그 죽으심이 그 일을 이루셨고, 그가 전에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가지고 계셨던 지위로 되돌아가신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영광과 엄위의 영역에 있다. 영원히 그가 전에 아버지와 나누었던 영광을 누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다시 오실 때, 그는 영광 중에 오실 것이고, 구름을 타시고 자기의 거룩한 천사들에 둘러싸여 오실 것이다. 영원한 왕으로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이것이 10절의 가르침이다.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이 구절은 전환점으로 이 구절에 이르기까지 교리로 이루어져 있다. 교리에 분명하지 못하면 적용, 실천, 윤리, 행동, 체험 등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없다.

명심해야 할 세 가지 원리는 첫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은 이 국면에서 우리들에게도 진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또한그리스도에게 사실인 것은 우리에게도 사실이다.

둘째, 우리의 체험과 별개로 전적으로 비체험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라는 말 자체가 그 점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요한 문제는 진리를 깨닫기 전에 성급하게 체험으로 돌진한다는 것이다. 체험은 교리의 이해, 진리의 이해로부터 연유되는 것이다.

셋째, 이 구절이 거룩한 삶과 성화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을 거룩한 삶과 성화로 유도할 진리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다’ - ‘-로 생각하라’, ‘미루어 생각하라라는 뜻이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인정하노라인정한다는 말과 정확히 같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쿠에니즘(자기 최면)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말씀을 완전히 우습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자신을 설득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결론이요, 추론이요, 하나님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것은 사도가 설명하여 나온 진리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아브라함(99)과 사라(90)에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아들을 낳으리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것은 일종의 에쿠니즘의 일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정직성에 기초한 논리이다.

너희 자신’ - 본질적인 인격을 의미한다. ‘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별된 인격, 구별되고 다른 사람으로 만든 인격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말미암아’(흠정역)가 아닌 안에서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 때문에 용서받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말하고 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 - 실제적으로 결론지어야 하고 여겨야 하고 항상 내 안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에 속하여죽은 것이 아닌 죄에 대하여죽은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도 대하여이다.

잘못된 해석)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의무라고 말하지 않는다.

둘째, 죄에 대하여 죽으라는 명령도 아니요,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아니다.

셋째, 안에 있는 하나의 세력으로서의 죄가 죽었다고 여기라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죄와 완전히 관계를 끊었다고 하는 의미도 아니다.

넷째, 죄가 죽었다든지 죄가 우리 밖으로 근절 당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죄는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고, 우리의 체질 밖으로 뿌리 뽑혀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몸과 육신 안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다섯째, 사도는 죄에 대하여 승리를 얻는 동안만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해석으로 그들은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정말 죽어 있는 것으로 여기라. 그렇게 하는 한 승리를 얻게 될 것이고, 승리를 얻는 동안은 죄는 실로 여러분이 관심을 두는 정도까지 죽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여섯째, 죄에 대하여 죽게 만드는 것은 이 사실을 나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만일 네가 여기는 일을 계속하면, 죄에 대하여 정말로 죽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사도는 실제적으로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그 진정한 의미는 이 말씀은 권면이다. 우리가 그러하기를 바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진리인 것으로 여기라고 하지 않고, 사실상 우리에게 진리인 것을 가지고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라고 한다. 사도는 주 예수 자신에게 진리인 것을 우리에게 상세히 말해 주려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에게 진리인 것이 우리에게도 진리라고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그러기를 바라는 것을 여기는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의 사실인 것을 그렇게 여겨야한다. 그 사실이란,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연합되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율법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이 아니고 나의 여김은 그것을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어떤 일을 체험적으로 성취하리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있는 영역에 관하여 깨달으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과 나는 이 사실을 우리에 관한 진리로 깨닫고, 여기고, 그것을 내 앞에 끊임없이 견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영역 가운데서 살지 않고 다른 영역에 속하여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이다이것은 나의 체험이 아니라 나의 서 있는 위치요, 나의 지위요 나의 신분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삶이것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체제이다.

 

 

10 장 죄의 왕노릇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죽음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6:11)

 

우리의 해석을 지배하여야 할 보편적인 원리

첫째,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둘째, 이 구절이 체험적인 진술이나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식을 어떻게 제거할까 하는 문제부터 생각하지 말라.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하나도 없으며 죄의식을 느낀 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에 관하여 어떤 일을 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이미 죄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을 깨달으라는 권면이다. 우리가 이미 완전히 새로운 신분과 죄에 관하여 새로운 위치에 서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위를 체험하지않고, 그것에 관하여 듣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했던 대로 해야 한다. 우리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믿고 그것에 복종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여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죽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면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것의 의미는 첫째, 먼저 우리가 죄와 사망의 체제와 왕노릇에 대하여 영원히 죽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에 대하여 관계를 끊었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 영단번에 그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믿고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다시 죄와 사망의 체제와 굴레에 결코 사로 잡히지 않을 것이다.

 

셋째,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망이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듯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진리라고 말해야 한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4,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

여기에 주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죽지 아니하리라는 진술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야 한다. 이 모든 구절이 바울이 여기서 사망이 다시 그리스도인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진술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죽음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망이 더 이상 우리 위에 주도권도 법적인 효력도 가지지 못한다. 사망은 모든 믿지 않는 이들을 지배하여 왔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것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주 예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가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났을 때 가지고 있었던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아직도 몸 속에서 죄와 접촉하고 살고 있지만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위치에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있지도 않다. 우리의 주님께서 율법을 마치셨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율법을 마쳤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 은혜에서 떨어지는 일 같은 일은 결코 없다.

 

심지어 사망까지도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이 되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늙고 쇠약하고 정신이 흐려질까 두려워한다. 또는 그런 가운데서 자신이 믿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독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성도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전에 하던 방식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이 부패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몸의 기능과 힘이 와해될 수 는 있지만, 사망은 그리스도인을 주장하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 “나는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이 말씀을 믿어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사망은 실로 하나의 유익이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리라”(1:21) 죽는 것이 유익하면, 죽음은 그에 대하여 어떤 지배도 가질 수 없으며 그는 죽음의 면전에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사망이 그를 그리스도의 존전으로 즉각 인도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에 대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우리 자신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야하는 것들이다. 우리에 관한 한 사망은 실로 상상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유익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러 저러한 모양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와 죄, 우리와 사망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 실천적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요한일서 3:9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죄의 노예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죄짓는 것은 노예로서 죄짓는 것이 아니고, 그릇된 것을 하기로 선택하는 자유인으로서 죄를 짓는 것이다. 비그리스도인은 노예로서 포로로 잡혀서 죄짓는 것이다. 그들은 사단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선택권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영토에서 죄짓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나는 죄를 지었으니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넘어질 수 있으나 결코 다시 노예 신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남북전쟁이 끝난 후 늙은 노예들은 자기들이 해방되었다는 것을 잊고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습관대로 행동하였다. 자신들을 노예로 생각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했다. 이 모든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자신에 관하여 진리인 것을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다.

 

어떠한 것도 아무도 심지어 마귀까지도 그리스도인을 노예를 삼아 죄짓게 할 수 없다. 이것은 진리이다. 여러분이 그것을 인식함에 따라서 체험 속에서 점점 사실이 되어가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멈추어질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도전할 수 있다.

 

 

11 장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6:11)

 

우리가 죄에 대하여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꼭 붙잡아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적극적인 진리인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고 하는 것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이 우리에게도 그러하다는 점을 명심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체험적인 진술이 아니고 (체험으로 인도하지만), 우리가 믿는 바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이제 우리 자신을 이와 같이--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으로 여겨야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전적으로 새로운 영역과 새로운 체제 속으로 살리심을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는 바”(2:6) 되었다. 은혜의 왕노릇이 작용하는 체제에 있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을 위한 간구에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들이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기도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 -

첫째,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라”(6:4)

우리가 어떻게 새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는가? 우리가 그 영광스런 능력으로 죄의 무덤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을 부단히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에 들어섰음을 음미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지위에 있다. 그는 우리에게 문을 열어 놓았다. 우리는 그의 자녀요, 그의 사랑을 받는 자요, 그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신다.(17:23)

 

둘째, 우리 앞에는 이제 하나님의 모든 축복에 대한 문이 열려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 본문 6:115:2에 대한 일종의 해석이다. 모든 하나님의 축복에 대하여 개방되어진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죄인들이 알지 못하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 ‘지극히 크고 값진 약속들과 같은 영적 축복들에 대하여 열려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과, 창세 전부터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위대한 계획 속에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하신 목적이다. 죄 가운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반대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산다는 것은 내가 그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이 목적에 대하여 산다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획과 목적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더욱더 이 목적이 우리 안에서 역사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우리 안에 역사되고 있는가?

첫 번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연합되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 안에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우리는 그에게 접붙여졌으며 그로부터 생명과 권능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4:13)는 것이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 주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6:35)라고 하셨다. 허드슨 테일러에게는 결코-아니라는 말이 자신에게 가장 많은 해방을 주는 말이었다. 결코 굶주림도, 결코 목마름도 없을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그의 계획을 내 안에서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우리 속에 두시고, 이 모든 일을 성령을 통하여 하신다.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망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2-13) 그는 의지를 지배하시고 우리를 자극하고 마음에 여러 가지 일을 생각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모든 신자의 삶에는 그런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실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것과 같은 능력이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순간 이 능력에 대하여 살게 되고, 그것은 거룩함을 내기 위하여 의도되고, 주 앞에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기 위하여 의도된 능력이다.

그 목적이 이루어짐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함이라”(1:6)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으니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그것을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간에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다. 그래서 바울이 그러므로 너희도 자신을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의 지위이며, 여러분의 신분이요,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이요, 그것이 여러분의 관계이다.

 

이 교리가 나에게 무슨 도움을 주는가?

첫 번째 효과는 다시 죄에 빠지게 될 때, 내가 그리스도인인지를 자문하지 않을 것이다. 마귀의 속삭임을 믿고 하나님과 의 관계가 깨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다시 죄와 정죄아래 들어간 것처럼 용서와 사죄를 빌게 된다. 그리고 구원을 의심하게 된다.

 

두 번째 효과는 만일 이 구절을 이해하고 이 진술 속에 함축하고 있는 주장을 이해하면, 죄에 대한 관계와 하나님께 대한 두 관계를 바르게 보게 될 것이고 바른 입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감정이 어떠하든 자신에게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따라 행동하라고 하라.

 

세 번째, 효과는 이것을 깨닫게 되면 죄의 가공할 권능 때문에 느끼고 알았던 옛 절망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결코 넘어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다시 죄를 짓고는 절망하게된다. 그런 절망감을 제지하는 유일한 길은 로마서 6장 특히 이 11절의 가르침인줄 안다. 저는 이 6장은 전체 그리스도인 삶 가운데서 가장 해방감을 주는 체험의 장이었다.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내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이 되기까지 죄의 남은 흔적과 모든 자취에서 나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이다. 마귀의 권능이 더 크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으러 두루 다닌다 할지라도 나는 말할 수 있다.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12:11)

 

네 번째, 이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은 기쁨과 소망감을 안겨 준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지위를 깨닫게 될 때 그리고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때, ‘주의 기쁨이 오게 된다. 우리가 비참해지고 불행하며 비관적이며 음울할 때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울 아무런 조건이 되지 않는다. 주를 기뻐하는 것이 여러분의 힘이다. 여기에 그 기쁨이 이르는 길이 있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사는 것이 내게 해당된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이 능력이 공급줄을 통해서 나에게 온다는 것을 깨닫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더욱 더 강한 힘으로 변할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다섯 번째, 현재 나와 이 세상이 어떻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표는 확실하고 명백하다는 것을 안다. 아무것도 그것을 정지시킬 수 없다. 이것이 로마서의 대 메시지이며, 성경전체의 메시지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지하고 연약하여 넘어질 것 같다 하여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신부되는 교회를 위해서 죽었다. 그리고 교회를 흠 없고 점 없고 주름잡힌 것이나 그런 것들이 없이하나님께 소개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에게 조심할 것을 경고한다. 여러분이 죄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마다 징계하나니라는 말씀을 그대로 적용당할 것을 준비하라. 죄에서 계속 거하는 일을 허락지 않을 것이요 거기서 잡아 끌어 올릴 것이다. 질병으로 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아 갈 수도 있다. 또한 사업을 무너뜨리실지 모르고, 여러분의 어떤 밝은 전망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여러분을 먼지처럼 만들 수도 있다.

여러분은 실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았다. 그것을 깨닫고 자신 앞에 그것을 항상 놓고 잊지 않기만 하면, 앞으로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 요한과 같이 장래를 바라보면서 그 안에 소망을 가지는 자마다 그가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게 하라는 말을 여러분도 하게 할 것이다. 여러분은 점점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다.

 

- 청교도 아카데미, 김영희 교수의 강의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