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보스톤

[스크랩] 내 몫에 태인 십자가

강대식 2015. 4. 8. 14:59

 

 

 

 

 

 

 

 

 

 

 

 

 

 

 

내몫에 태인

      

 

 

 

 

 

 

 

 

십자가

                                       

 

 

 

 

 

 

Crook in the Lot

    

 

 

 

 

 

 

 

 

 

토마스 보스톤 지음/서문강 옮김

제임스 패커 서문

 

 

 

 

 

청교도 아카데미

 

 

 

 

 

교수 : 차 종 규

 

 

 

 

 

 

 

 

역자 서문

 

정말 이 책은 진리의 책이다. 하나님의 책이다. 성도들의 순례 길의 배낭에 꼭 넣고 다닐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제임스 패커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성도들의 순례 길에서 가져야 할 성경적인 견실한 지혜의 샘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는 책이다.

 

이 책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 각자의 몫에 함께 섞어 놓으신 바, ‘굽은 꼬챙이, 허리를 찌르는 가시, 신발 속에 들어 있어 걸을 때마다 발에 부딪혀 불편하게 하는 모래 알갱이, 몫에 태인 십자가, 허리에 얹혀 진 무거운 짐, 달고 다니는 육체의 질고, 우리 눈으로 보기에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산란하게 하는 섭리의 조처, 내 뜻과는 정반대로 일이 진행되어 겪는 낙담과 상심, 등 우리가 순례 길에서 겪게 되어 있는 고통과 환란의 진상을 사실적으로 상기시키고 아울러 성경적으로 분석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제목이 언뜻 우리에게 느끼게 할 수 있는 식으로 스토아 철학적인 체념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원대하신 구속적인 사랑과 한 치 오차 없이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섭리의 경륜과 은혜의 빛 속에 내 몫에 들어있는 굽은 꼬챙이 같은 것을 놓고 보아 신령한 이해를 가지도록 섬세한 영적 은사를 활용한다. 그래서 이 책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 자체를 강론한 것은 아니지만, 그 말씀의 기이한 한 주석(註釋)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반드시 성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그 완전하심과 그 뜻의 영화로움의 비중(比重) 높은 바다에서 쉼과 안전감을 가지고 수영을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1676년 영국 버위크셔(Berwickshire)의 던스(Duns)에서 태어나 173256세를 일기로 소천한 사람이다. 그는 소천하기 전 25년 동안 줄곧 스코틀랜드 변경 산지(山地)의 아주 작은 교구의 목사로서 봉직하였다. 56년간의 삶 중 45년을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으로 서기 위해 자기를 단련하기 위한 의식 있는 삶을 영위하였다. 그럼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셈하는 그리스도인의 계산은, ‘어디서섬기느냐가 아니라 어떤 품격의 섬김을 하나님께 드리느냐라는 신령한 원리의 진정성을 확정하였다.

 

보스톤을 가장 잘 기억하는 방식은, 그가 사랑과 신실함을 견지하며 자기 훈련에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의지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처음 사역지는 심프림(Simprim)이었는데(1699-1707), 거기서 떠나 25년간의 죽기까지의 줄기찬 사역을 위해서 에트릭(Ettrick)으로 갔다. 처음에 부임하였을 때에 성찬에 참여하는 지체가 60명이었던 회중이 24년 후인 1731년에는 성찬 참여 인원이 771명으로 늘어났다. 보스톤은 그의 회중에 대한 영적인 부담을 늘 느끼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강단에서나 집에서 부단하게 가르쳤다. 그의 이 신실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불우의 이 저작을 당대의 성도들만이 아니라 주님 오시기까지의 후대의 성도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허락하신 것이다.

 

 

서론

 

본서 내 몫에 태인 십자가는 보스톤이 자기 자서전에서 내 인생 중 신음하는 대목이라고 불렀던 그의 마지막 8년간의 삶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스코틀랜드교회(Church of Scotland)의 비 복음적인 지도력에 대항하여 싸워야했고, 자기 아내의 중풍을 동반한 우울증에 시달려야했다. 그런 와중에도 복음을 위한 계속되는 투쟁에 임해야했다. 더불어 그는 신장 결석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야했다. 그렇게 고통스런 8년을 지내고 나서야 그는 인생의 고통에 대해서, 또 글을 쓸 때 자기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며 말할 수 있었다.

 

이 책 전편에 그의 그런 의식이 진하게 배어 흐르고 있음을 이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금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업은 일곱 편의 설교로 마무리 되었다. 전도서713절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는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세 번의 설교를 하였고, 잠언1619절의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 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에 입각하여 한 번의 설교, 그 다음 베드로전서56절의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안에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는 말씀을 의지하여 행한 세 차례의 설교가 그것이다.

 

그는 성경의 빛과 무게를 그의 완벽한 명료함과 조합시킴으로 독자의 마음을 탐사한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거듭해서 특정한 문제들에 집중하게 만들고, 우리 존재의 표현보다 훨씬 깊은 곳으로 내려가 우리로 하여금 심오한 자책감으로 흔들리게 한다. 그 점은 조나단 에드워즈나 이 전의 많은 청교도들의 경우에서와 같이, 보스톤이 설교 문을 작성할 때 실제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다는 한 증거이기도 하다.

 

보스톤은 죽기 몇 해 전에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예수그리스도안에서 내 하나님을 찬미한다. 그분이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셨고 일찍 내 영혼을 다루셨다.(보스톤은 열한 살에 믿음을 갖게 되었는데, 1662년 영국교회로부터 추방당한 헨리 어스킨 목사의 설교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복음 사역자로 만드셨고,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를 분별하는 참된 통찰력을 내게 주셨다.

 

이 책의 교리체제는 학문적 특색을 지녔다기보다는 교리 학습적(catecheticnl) 특색을 지녔다. 다른 말로하면 이 책의 교리 구조는,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알려 하나님을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며, 경배하고, 섬기도록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진 진리 체계이다.

 

1.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주관자로서 인간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 까지 통제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항상 그분 안에 있다.

 

2. 인간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를 하나의 신으로 삼아 자기를 섬기며,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고 적대감을 가진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신 주님과 중보자시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어 지금 왕 노릇하고 계신데 복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값없이 주신다고 제안하신다.

4. 성령으로 거듭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만나 그 이후로부터 제자로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데, 그들은 지금 자기들 속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힘입는다.

 

5. 그리스도의 제자마다의 삶 속에는 꼬챙이와 같이 굽은 것들, 유쾌하지 않고 달갑지 않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사용하시어 우리를 시험하시고, 강화 시키시고, 바르게 고치시고, 교훈을 주시고,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을 더하여 회개와 거룩함을 증진시킨다.

 

6. 어떤 경우라도 우리 몫인 그 굽은 것들은 이 세상에서만 한정 된 것임을 아는 지식, 지금 현재 무겁게 짓누르는 그 특별한 고통 중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건져 주심을 아는 지식, - 그거야 말로 이렇게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징계를 감당할 때 그 믿음의 사람들을 지탱해 준다. 그 지식은 그들을 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는 견고한 확신을 견지하게 한다.

이상에서 말한 요점들이 보스톤이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하기 바라는 기본적인 진리이다. 보스톤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더 잘 파악하여 사람들이 잘 적용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돕는 것이 자기 역할이라고 여기고 있다. 교리 학습적 차원에서 보스톤의 설교를 들었던 당시의 회중들이 오늘날의 회중들보다 더 잘 배웠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교회와 가정에서 교리 학습을 시키는 일이 빠져버린 오늘날의 신앙교육을 생각하면 그의 설교들이 새로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보스톤이 이 설교 집을 쓴 목적을 위해서 본인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첫째, 보스톤은 이 책의 내용이 본래 자기 설교를 들었던 에트릭 교회 회중들에게나, 우리와 같은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해 주기를 바랐을까? 그는 어떤 목적으로 이 자료들을 선별하고 배치하였을까? 목회 적으로 그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보스톤이 희망하였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변은 사람들을 가르치려함이었다는 것이다. 목회 사역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첫째도 가르치고, 둘째도 가르치고, 셋째도 가르치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진정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며, 성경 자체가 바로 그 진리라는데 있다.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통해서 입증해 내려는 그의 기본적인 주장은 이러하다.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있어서 전적으로 필요한 것은 상황들을 바르게 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그의 관점은 지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서만 얻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러한 상황들을 바르게 나타내며, 그 상황들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사를 밝혀내고, 신적인 완전함에 합당한 의도를 각각의 경우들 속에서 찾게 하기 때문이다.”

 

그가 설교하는 그 방식은 마치 스위스나 캐나다 서부 지방의 철로가 높은 고원(高原)을 향하여 올라가도록 설계된 나선형 터널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 나선형 터널의 입구에 들어갔던 기차는 거의 직각에 가까운 각도로 위로 솟아오른다. 그와 유사하게 보스톤은 해석의 요점들을 약간 다른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새롭게 예정하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요점들은 우리가 읽을 때마다 그 이해의 부피를 더해주는 효력을 가진다.

 

그러나 보스톤이 항상 그것만을 목적하는 것은 아니다. 그 가르침은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지, 그 가르침의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른 모든 진정한 설교의 경우처럼 그의 목적은 듣는 사람들의 변화이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려는 것이 그의 영구적인 목적인데, 그 목적과 더불어 가지고 있는 분명한 의도는 사람들을 제자들로 훈련하는 것이다. 그의 책은 지면을 통한 또 하나의 설교이다. 만약 이 책이 여러분을 감동시키거나 변화 시키지 못한다면 분명 그는 그것은 하나의 실패로 여길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그것이 바로 토마스 보스톤의 몫에 있는 하나의 구부러진 꼬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점은 우리로 하여금 두 번째 질문에 이르게 한다. 이 책이 오늘날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제가 믿기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다. 고 한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현대인들이 듣기에 매우 어렵다고 느낄 메시지이다. 왜 그럴까? 심리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관찰하는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마음속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사상 노선과 소욕들, 가치관과 기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들이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오늘날 복음 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만연되어 있는 어떤 특별한 형태와 인식의 부조화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부인하라 하셨다. 그 말씀은, 곧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개인적인 소망과 꿈들을 하나님께 포기하라, 그 개인적인 소망이 이루어 진다해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라, 곧 우리 주님께서도 함께 그 대열에 끼셨던 바, 자기가 매달려 처형당할 십자가 틀을 형장까지 끌고 가게 되어 있었던 사형판결 받은 자들같이 망신을 당해 쫓겨날 기꺼운 의향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분명하고 진지한 우리 주님의 경고이다. 제자의 길은 올라가고 내려가는 기복이 있을 것이며 즐거움뿐만 아니라 고통의 쓴잔도 수반함을 경고 하셨다. 어떠한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1

인간의 고통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곧게 하겠느냐?”(7:13)

 

그리스도인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들을 바른 관점을 가지고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바른 관점은 지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그 괴롭게 하는 일들을 바르게 비추어 내어 그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합당한 의도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오직 말씀의 빛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눈살을 찌푸리며 푸대접을 하여 지혜로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압박을 가한다. 또 세상은 미소를 띠며 유혹하는 일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지게도 한다. 그러므로 세상 어떤 길로 나간다 할지라도 위험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모든 세상사의 시작보다 결말이 낫다고 솔로몬은 선언하는 것이다(7, 8). 그리고 솔로몬은 전체적인 입장에서 볼 때 고통당하는 시절에는 분노하는 것보다 겸손하고 인내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본문의 의도를 다음의 세 가지 명제(命題)에서 거론하려 한다.

 

. 그 사람의 몫에 어떠한 굽은 것이 들어있다 할지라도 그리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 보시기에 흠집 내는 것이 합당하다 여기셔서 그리 되게 하신 것이니, 어느 누구 도 자기 몫에 들어 있는 그 굽은 것을 능히 고치지 못할 것이다.

. 그 사람 몫에 들어 있는 그 굽은 것이 하나님의 행사요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라 생각 하 는 것이, 그런 굽은 것을 갖고서도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을 견지하게 유도하는 고유한 방 편일 것이다.

 

. 그 사람의 몫에 들어 있는 굽은 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그리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 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생각해 봐야한다. 첫째로 굽은 것 자체와, 둘째로 굽 게 하신 하나님의 행사이다.

 

우리의 몫에 들어 있는 굽은 것 자체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려면 다음의 몇 가지 요점들을 전제해야 한다.

 

1.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 각자에게 떨어지는 사건들은 과정이나 어떤 줄기가 있는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주권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떨어지도록 허용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몫이 되는 것이다.

 

2. 그 사건들과 과정이나 추이 속에서 어떤 사건들은 우리에게 십자가로 작용하고 어떤 사건들은 우리를 짓이겨 가루로 만든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몫 속에서 굽은 것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이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몫이나 우리의 조건 속에 받아들이기에 좋아 보이는 사건뿐만 아니라 십자가와 같은 사건들도 존재한다.

3. 사람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각자 그 몸에 뭔가 굽은 것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비교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조건을 둘러보고는 그것과는 거리가 먼 관점을 취하여, 누구나 원하는 대로 바르고 곧은 것밖에는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판단이다. 이 지상에서는 완전한 것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에 가기까지는 구부러진 것이 하나도 없이 완전한 몫을 받은 사람은 없다.

 

4. 각 사람의 몫에 들어있는 구부러진 것은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타락에서 기인된 일이다(5:12). 바로 그 사망아래에 각 사람의 몫에 들어있는 구부러진 것이 함축되어 있다. 죄가 사람들의 마음과 지성을 얼마나 심하게 굽어지게 하였던지 거룩한 율법에 대해서도 구부러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몫을 허락하시되, 그에 따라 정당하게 구부러지게 하셨다.

우리의 몫에 들어 있는 그 굽은 것은 네 가지의 굽은 성질을 갖고 있다.

 

비위에 거슬리는 성질

구부러진 것은 되잡기가 힘든 성향을 갖고 있다. 어떤 법칙에다 그 굽은 것을 갖다 대면 그것에 순응하지 않고 버팅긴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의 기쁨 속에서 정하신 영원한 경륜에 비추어 보면 그것이 정확하게 그 경륜과 부합될 것이다(1:11). 그러므로 지상에서 자기의 몫 속에 아무리 큰 굽은 것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늘에서 곧게 펴진다.

 

보기에 좋지 않는 성질

구부러진 것들은 눈에 보기에도 유쾌하지 않다. 사람의 몫에 들어있는 어떤 굽은 것도 즐거워 보이는 것이 없다. 슬퍼 보이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모양이다(12:11).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자기들 몫에 주어진 그 굽은 것만 염두에 두고 계속 그것만 지나치게 바라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부적합한 구조

솔로몬은 저는 자의 걸음이 불안하고 힘이 없어 보이는 원인을 관찰했다(26:7). 저는 자의 다리는 동일하지 않도다.” 자기 몫의 굽은 것 때문에 연단 받고 있는 사람 역시 그러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사도는 말한다.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2:13)

 

사람의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4:2). 그 사람의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이 그 사람의 심령을 헝클어지고 안달하게 만들고 그 부패 건성을 격발할 정도로 어찌나 강한 인상을 남기는지사단은 때를 놓치지 않고 그것을 이용하여 위험천만한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서 기민하게 움직인다. 시험 자는 그것을 가지고 가장 선한 사람들조차 부패가 내재(內在)해 있음을 놀랍게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겪는 환난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굽은 것이 그 주어진 몫의 네 부분으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타고 나면서부터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조성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되게 그들의 몫으로 정해 주신 것을 알았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전적으로 건전하고 온전하게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모태에서 조성 될 때에는 그 본래의 모습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나게 된다.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심각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유의 굽은 것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관찰될 수 있는 것으로서 매우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이다. 사실은 그 굽은 것들의 수가 그 보다 많아졌을 터인데도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주권적인 하나님의 자비심 때문이다.

 

평판

그 굽은 것이 사람의 존귀한 부분에 떨어질 수도 있다. 큰 자든 작은 자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마땅한 존귀함이다(벧전2:17).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본래적인 인성(人性)의 근저에는 존귀함이 존재한다. 그러나 주권적인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와 경륜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에게는 굽은 것이 바로 이 존귀한 부분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이 무시를 당하고 가볍게 취급된다. 그들은 이 세상을 지날 때마다 구름 아래를 지나는 것 같고, 좋지 않은 이름을 갖게 되고 평판이 없어진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경우를 시3111-13절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사망한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괴와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소명(召命)을 받은 부분에 그 굽은 것이 떨어 질 수가 있다.

 

인간관계들

다른 사람과 우리의 관계 부분에서도 굽은 것이 나타날 수 있다. 여러 인간관계들이 모여서 이루는 것이 사회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몫에 들어있는 굽은 것이 바로 그 부분에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사회 구성요소의 여러 관계들 속에서 가장 예리한 고통을 느끼는 일이 일어 날 수도 있다. 또한 굽은 것들은 가장 가까운 이들 때문에 받기도 한다. 욥의 몫에 그런 굽은 것이 있었다. 온당치 못하며 안존한 성품을 갖추지 못한 그 아내로 말미암아 그런 굽은 것을 만난다(19:17).

 

모든 환난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주권

 

.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사람의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은 하나님의 만드신 것임을 다음의 세 가지 방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떤 문제에 관한 것이든 일단 하나의 굽은 것으로 간주 되는 것이 그 사람의 몫 속에 들어 있으면 그것은 하나의 벌책 적(罰責 的), penal) ()이라는데 하등의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우리 주권적인 주님이시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하고 의롭게 그것을 부과하실 수 있기 때문에 분명히 그렇게 행하시고, 그 굽은 것을 만드실 분명한 권한을 주님께서 주장하신다.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성경적인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몫을 분정 하여 주시며, 그 몫에 속한 그 모든 부분들도 정하여 주신다는 것이 명백하다.

 

세상을 다스려 나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마치 건물을 세우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 들어있는 계획에 정확히 일치하게 세워 나가신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에 따라”(1:11) 그러므로 각 사람의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본원적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욥은 자신의 경우에서 이에 대한 본을 우리 앞에 경건하게 세워주고 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는 많이 있느니라.”(23:13,14)

고통을 부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

우리가 사람의 몫에 굽은 것을 지어 넣으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알 수 있기 위해서, 그 굽은 것들이 죄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순전히 죄악 때문에 주어진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죄와는 상관없이 순전하게 주어진 경우들이 있다. 순전히 그 사람의 몫 속에 고통이 있고 십자가의 찌르는 것과 무거운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더러움의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사로의 궁핍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라헬이 자식이 없었던 일이나 레아의 안력이 모자랐던 일이나,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사람의 눈멂이 그러한 경우이다(9:1).

 

욥에게 떨어진 몫은 마귀의 특별한 작용을 통해서 구부러졌다. 그러나 그 큰 죄악의 원조인 마귀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한계를 정하여 주신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1:12). 사단은 그 한계가 그어진 한도 내의 전체 영역을 두루 다니면서 그 경내에 있는 것에 모조리 손을 댄다. 자기가 보기에 자기의 몫을 위해서 그 한계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생각하여 그 한계를 넘어 한 발자국도 더 움직여 나가는 일은 더 할 수 없었다.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하게 하려는 사단의 계획에 맞추어 새로운 한계가 설정되어 욥의 몸속에 굽은 것이 최대한까지 허용되었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7)욥의 생명을 아끼는 이 한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사단이 자기 시도가 전혀 성공하지 못하였음을 발견한 이후에 대번에 욥을 해치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계획들은 결코 무산 될 수 없으며, 그의 모략이 설 것이기때문이다.(46:10) 그러니 죄악적인 굽은 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쪽으로 변환되며 결국 그의 백성들이 선을 이루는 쪽으로 나아간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이르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16: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참 믿음을 알아보는 시금석

그 사람의 상태가 은혜의 상태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시험대가 된다. 곧 그 사람이 진지한 그리스도인인지 외적인 그리스도인인지 나타내는 시금석이라는 말이다.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이란 하나의 계속되는 과정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그 사람은 그 같은 일을 겪으면서 거듭거듭 자신의 모습을 내 보이고 열어 보일 기회를 갖게 된다.

 

욥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러한 기초 위에서의 시험이었다. 욥이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 대해 증거 하셨던 것처럼 정직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종인지 아니면 사단이 욥을 쳐서 비아냥거려 말한 것처럼 물질만을 목적으로 하는 외식 자에 불가한지의 문제였다. 그 진상을 알아보려는 시금석이 욥에게 주어진 굽은 것 위에 놓여 진 것이다(1:8-10,2:3-6)

2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충실 하라는 격려의 말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마음을 떼고 저 다른 세상의 복락을 추구하는 의무에 충실 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듣는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들의 몫에 들어있는 굽은 것을 돌아볼 때마다 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진지한 자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한동안 돌아서는 일을 조롱하면서 들 나귀처럼 광야를 이리저리 뛰어 돌아다니다가 때가 되어 실족하여 넘어졌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이 만들어졌고, 그들의 발이 착고에 매이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탕자가 제 정신을 차리고 자기 아버지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15:17). 그들의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으로 말미암아 결국 세상에는 안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죄를 질책하심

죄에 대한 각성을 부주의하게 행하던 자가 갑작스럽게 다리를 저는 병에 걸리게 될 때, 그 사람은 걸음을 옮길 대마다 고통스러워 신경이 쓰여 지게 된다.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 낼 줄 알라”(32:23; 2:26)).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서 자기들의 몫에 떨어진 굽은 것 아래서 바로 그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한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42:21; 44:16).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옛날 지나간 날 속에 죄를 짓게 했던 그 잘못된 걸음이나 경로가 새롭게 기억나게 하거나, 말이나 행실 속에서 그 죄인이 어리석게 행한 일을 보여주는 표지가 그 앞에 항상 나타나 생각나게 하신다.

바르게 함

하나님께서는 굽은 것을 통해 우리를 죄에서 바르게 하거나, 죄 대문에 징벌을 받게 하신다. 그 사람의 몫에 태인 굽은 것 속에서 보다도 다음의 말씀이 더 확실하게 실증되는 것이 없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2:19).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어떤 사람의 죄를 눈감아 주실 수 있다. 그러나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의 몫 속에 넣어 주심으로써 그 죄에 대해 분노하셨다는 표를 찍어 주실 것이다. 다윗이 암몬 사람들의 칼을 통해 우리아를 죽이는 일은 금방 끝이 났다. 그러나 그 때문에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12:10).

 

죄를 미연에 미리 방지해 주는 효과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2:6). 마음에 어떤 악한 성향을 막으려고 그 사람의 굽은 것이 이미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특별하게 마음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넘어지게 하는 그런 악한 성향이 있을 때 그 기울어지게 하는 쪽에 가시 울타리나 벽 같은 역할을 하는 굽은 것이 그 사람의 몫 속에 들어있는 경우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몫을 굽게 만들어 사람으로 그 뼈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리하여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신다(33:17,18).

 

부패를 발견케 하는 효과

굽은 것은 또한 성도들이든 죄인들이든 사람들 속에 여전히 내재해 있는 부패를 발견하게 해 주는 방편이 된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얇은 막으로 덮여져 있어서 움직이기만 하면 금방 튀어오를 것 같은 부패의 성향이 있다. 그러나 어떤 성향들은 매우 깊이 내재해 있어서 관찰해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솥 밑에서 불이 타면 물방울이 계속 위로 솟아오르듯이, 그 사람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이 그러한 부패의 요소들을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올려 드러나게 만들어 버린다. 모세가 다툼의 물가에서 드러냈던 것이 그 한 예이다.

 

하나님의 은혜

또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있는 은혜의 행사를 위해서 그 굽은 것이 주어진다. 신자들은 그들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부패성으로 인해 영적 나태함과 게으름에 빠져 은혜가 활동을 못하게 할 수 있는 정지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은혜가 행사될 수 있도록 상관관계를 가져야 하는 일들이 있다. 인내와 오래 견디는 것과 같은 일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이 은혜의 행사를 위해 내적 부패함을 누르는 역할을 하며, 그 간헐적으로만 활동하는 은혜가 활발하게 작용하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하여 은혜가 작용하는 적당한 기회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벧전1:6,7). 사람의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이 믿음, 소망, 사랑, 자기 부인, 인내함과 다른 모든 은혜들에 속한 많은 행위들을 유발시킨다. 그것이 아니었으면 생성되지 못했을 하늘에 속한 마음의 사모함은 놀라운 탄식을 자아내게 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은혜에 있어서 탁월하였다. 그의 지각에 지시하는 여러 가지 소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순전한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큰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그 약속과 함께 그의 몫에 한 굽은 것을 넣어 주셨다. 그는 자기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모든 힘을 가지고 수고해야만 했다.

 

욥은 인내에 있어서 탁월하였다. 욥은 자기 몫에 있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만큼 그 인내로 많은 것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괜히 탁월한 은사를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저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각자에게 주신 그 탁월한 은사 전체를 용량껏 사용할 기회를 제공하실 것이다.

 

이 교리의 적용은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책망을 위해서 이 항목은 책망 받을 만한 세 종류의 사람들로 분류하여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육적이고 세상적인 사람의 경우이다. 그 사람은 자기들의 몫에 들어있는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는 외경심과 경외심을 전혀 갖지 아니한 사람이다. 사람의 몫에 태인 십자가 위에는 하나님의 선을 보여주는 표증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당한 관찰자는 지각한다. 그 표징이 외경스러운 생각을 촉발시키고, 그 촉발시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파멸의 전조이다.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 하시리로다.”(28:5).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깊은 죄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차적인 원인만을 골똘하게 생각하고 그들의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을 불행한 도구 이상으로는 바라보지 않는다.

 

그 마음이 흉흉한 바다 물결 같아서 이랬다저랬다 하며 안달하며 불평하며 복종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몫에 있는 그 십자가 아래 잠잠히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태도는 정말 죄악 적이고 위험스런 처사이다. 사도 유다는 사람들의 특성을 지적하면서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13). 다시 말하면 여전히 그들 자신의 몫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다. 바로 그 지적이 성령께서 그 유다서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의 요점이다.

 

우리와 상의하지 않고 우리를 지으시고 만드셨고 우리에게 물어 보지도 아니하시고 우리의 몫이 그렇게 되도록 허용하셨으니 마땅히 우리는 우리 몫에 있는 그 굽은 것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거만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일을 참아낼 수 없고 그가 행하신 일을 감내할 수 없다고 말하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한 정신을 품는 마음이야말로 얼마나 위험천만한가? 그러한 거만을 취하는 사람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일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9:4) 우리는 그의 의도에 맞추어 순응하는 것이 마땅하다.

 

위로를 위하여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환난 받는 자녀들에게 위로를 말한다. 여러분의 몫에 있는 십자가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다. 또 그것을 지으신 이가 여러분의 아버지이시므로 여러분을 향하여 그것을 허락하신 은총어린 계획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다면 그 굽은 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다. 믿는 자의 몫에 주어진 굽은 것이 아무리 큰 고통거리로 등장한다 할지라도 사실은 약속된 징계의 부분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자녀들에게 확보된 양육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 하리로다.”(89:30,32). 더 나아가 자기들 몫에 주어진 그 굽은 것 아래서 하나님께 피할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권면을 위하여 사람들의 몫에 주어진 그 굽은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니,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선이 있음을 바라보고 그 굽은 것에 대해서 화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못한다면 자신의 몫에 주어진 그 굽은 것 아래 복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복종일 수 없고 하나님께 열 납 될 만한 것이 되지 못할 것이고, 그 일에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론 :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은 피조물의 손에서 온 것이다. 그러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도 없다.’

해답 : 이미 말씀드린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람의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이 피조물의 손을 통해 온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대를 교정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의 손을 통해서 그러한 굽은 십자가를 받을 만한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그대는 하나님의 손에서 그것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 눈에 합당하다 여기시면 즉각적으로 그 도구를 사용하실 수 있다.

 

 

반론 : 그러나 내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은 그 일에 사용된 도구나 방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손쉽게 펴 질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방편들을 다루어 그 굽은 것을 만든 실수를 확증해 주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해답 : 그렇다면 그 굽은 것을 곧게 하시는 하나님의 때가 아직 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때가 되었다면 지금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서 있다 할지라도 발로 무너뜨릴 수 있는 모래방축처럼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이 감히 하나님의 의로운 처소로 높여 말할 수 있을까? 본문을 잘 살펴보고 본문이 의도하는 본래적인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그러한 질문을 던질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 핑계를 옆으로 밀어놓고, 하나님의 손이 자신의 몫 가운데 그 부분을 굽게 하셨고 계속 그 상태를 유지시키고 계심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불만스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그 조건에 순응함이 필요하다. 그 굽은 것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10:19)라고 고백하라.

 

여러분의 마음을 평안케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깊이 숙고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1. 먼저 하나님을 주권적인 주님이시오 내게 은택을 베푸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복종을 촉구한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의 몫에 넣어 놓으신 바로 그 굽은 것에 복종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우신 그 멍에 아래 유순히 순응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도 옳은 정신이다. 우리의 몫 전체를 구부러뜨리셨다고 하더라도 창조주인 하나님께 우리가 잘못했다고 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

 

2.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자기 몫에 한 가지 굽은 것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달라질 수 없는 조건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기 때문이다.(5:7) 그래서 하늘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기들의 몫에 한 굽은 것을 갖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세상에서 저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16:33)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것들을 방편으로 해서 그들에게 하늘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3. 어떤 방도로도 자기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에 순응하지 않으려하면, 그 몫에 있는 모든 것들의 조건을 지옥에 있는 것처럼 만든다. 풀무불 속에 있으면서도 그들의 더러운 찌끼는 소멸되지도 정화되지도 않는다. 지금 자기들의 몫에 있는 굽은 것에 복종할 수 없는 자들의 경우가 그와 같다.

 

4. 그 굽은 것에 복종하지 않으면 큰 손해를 당하기도 한다. 반면 그 몫에 있는 굽은 것을 바르게 잘 활용하면 최선의 유익을 가져다준다. 어떤 사람은 이제까지 평생 겪었던 시절 중에서 최선의 때를 그 굽은 것을 통해서 맞기도 한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119:67). 여러분의 몸속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을 통하여 고통을 느끼게 하여 이 세상에서 마음을 떼고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려하셨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항상 마음을 찌를 것이다.

.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에게 손상을 끼치는 것이 합당하다 여기시면 우리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을 우리 스스로는 결코 펴지 못할 것이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사 그 사람의 몫 속에 한 굽은 것을 넣어 주시고 그 사람의 몫에 손해를 보게 하신 일을 살펴 보려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어떠한 굽은 것이 있어야 할 것인지 결정하시는 권한을 스스로 가지고 계신다. 그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20:15). 그 굽은 것이 어떠한 것일지, 아니면 우리가 특별하게 어떠한 짐을 지게 될는지 우리 마음대로 고르라고 내 버려두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의지와 성향을 보시고 감찰하신다. 그것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것이 하나님과 어떤 특별한 점에서 이적되어 있는지, 따라서 특별하게 어디를 구부러뜨려야할 필요가 있는지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경우대로 그 일을 하셨다.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10:2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나 당신의 손의 행사로 말미암아 바로 그 부분을 구부러뜨리시는 것이다.

 

두 번째. 우리는 사람들의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을 고치거나 펴려는 시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 몫에 있는 그 굽은 것 아래에서 어떤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그 사람 편에서 감당하기 힘든 멍에이다. 그의 마음이 유순해 지고 거기에 순응하기 까지는 말이다.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돌아오겠나이다.”(31:18).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몫에 그러한 굽은 것을 주심으로 멍에를 씌우신 것은 그 사람 마음의 무게를 부수어뜨리기 위함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몫의 십자가를 참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3:27).

 

세 번째.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을 고치거나 바로 펴지 못한다고 이해해야 하는가? 마치 그 경우가 절대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지는 말아야 한다. 또한 그 몫에 있는 굽은 것을 치료할 방도가 전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지도 말아야한다. 그처럼 절망적인 경우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18:14).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그 굽은 것을 결코 펴지 못할 것이다.

 

네 번째 . 우리는 이제 그 요점의 몇 가지 이치를 제시하려한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존재임을 알아야한다.(17:28). 빛은 항상 태양에 의존되어 있거나 그림자는 항상 몸을 따라다니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크고 작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한가할 수 없다.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46:10). 그러므로 우리는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에 순응하고 복종할 필요가 있다. 그 굽은 것을 곧게 펴는 한 가지 유일한 효과적인 방식은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굽은 것들을 펴시는 일에 관여하시기를 좋아하시고, 우리에게 굽은 것을 가지고 당신에게 나오라고 촉구하신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50:15).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그 굽은 것들을 지으신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되, 그 일로 하나님 자신을 부르게 하시며, 바로 그 굽은 것들을 펴시는 일을 통해서 당신의 능력과 선하심을 나타내려하신다(5:1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자녀들의 몫에 주목할 만한 굽은 것들을 만드시기도 하고 고치시기도 함으로 그들에 대한 그 은총을 특이하게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다(12:6). 그러나 그들의 몫에 태인 그 굽은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그 굽은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탄원함으로써 가장 부요한 체험들을 하게 하는 길을 열어 준다.

 

반론 : 우리가 보기에 우리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은 결코 고쳐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은 소망이 없는 일이다.

해답 : 위의 말은 신앙 없이 성급하게 서두르는 사람의 말에 불과하다. 믿음과 인내로 그런 말을 고쳐야한다(116:11,12). 아브라함은 자기의 굽은 것에 대하여 절망을 토로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굽은 것을 고치기 위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4:19,20).

 

반론 : 그 문제를 통해서 거듭거듭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해답 : 더디다고 해서 그것이 하늘의 법정에서 그 송사건이 부정당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간구하는 자의 믿음과 인내를 연단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끝까지 견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결국에는 응답 받을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으로 그 굽은 것을 펴실 마음을 정하시면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 거론하도록 하실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그 굽은 것이 결코 제거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 가기까지 응답되지 않을 기도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7:24). 그런 많은 기도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즉시 응답될 것이다.

 

 

자기 몫에 들어있는 굽은 것을 제거해 주십사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문제를 바르게 하는 방안들

1.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36:37). 믿음으로 기도하되, 예수님 때문에 결국 응답을 얻을 것이고, 우리 자신에게 그것이 선한 일이라면 이 세상에서도 응답을 받을 것임을 믿어라. 그리고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면 오는 세상에서는 반드시 응답 받을 것임을 확신하라(21:22).

 

2. 주권적인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에게 씌워주신 멍에처럼 그 아래 겸손히 복종하라. 내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7:9).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정죄하시는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의로우심을 인정하라. 그 하나님이 때리시는 매에 입 맞추고 유순하게 그 아래 순응하라. 이것이 바로 그 굽은 것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가장 선한 방식이요, 그 길에서 결말을 얻게 될 것이다(4:10).

 

3. 그 다음 굽은 것을 만드신 손이 그 굽은 것을 펴시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라(27:14). 그 일을 소망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포기하지 말라. 왜냐하면 여러분이 원하는 시간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함이라”(1:4).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60:22). 하나님을 기다리면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49:23)

권면 : 어떤 굽은 것이 있는데, 그 굽은 것이 제거되기 위해서 정한 순서를 따라 간구하여도 이 세상에서 그 굽은 것이 펴지거나 제거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끊임 없이 기도하라. 그 굽은 것 아래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라. 하나님께서 그 굽은 것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제거되지 않게 하셨다면 그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틀림없이 그것을 감당해 내도록 균형을 이루어 주실 것이고, 그 굽은 것으로 인한 고통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항상 견지하고 있어야 할 상황이 다섯 가지가 있다.

 

1. 여러분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은 그것을 만든 요인이 그 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그분께 피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의 오른 손을 하나님께 뻗치고, 그 빈자리에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라. 그러면 우리 속에 하나님이 넣으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손해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2. 여러분의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을 말라버리게 항상 흘러 왔고 또 흐를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넘쳐흐르는 물줄기를 찾으라.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이다.

 

3.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이 가져다주는 신령한 열매들을 구하라(12:11). 몫에 있는 굽은 것이 있을 때 지상에 속한 위로는 그로 말미암아 낮아지지만 신령한 성취를 위해서 우리 자신의 생각을 더 높은 데 두어야 한다.

 

4. 그 굽은 것의 십자가 아래 참는 은혜를 구하라. 새 힘과 능력을 받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사람이 연약하여 가벼운 짐을 지고 있는 것과 무게상 같다.

 

5. 우리가 저 세상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과 영광의 무거움 때문이라는 것을 항상 주목하라.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7,18). 영원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몫에 있는 십자가가 무엇이라 할지라도 그 십자가를 능히 견뎌내게 하는 은혜로 균형을 이룰 것이다.

 

인내

우리는 참아 인내하되, 성을 내거나 조급해 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일 없이 인내해야 한다(5:7; 37:7). 우리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으로 말미암아 피조물 속에서 가지는 위로를 상실했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이라는 소유는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21:19)

불굴의 결의

그리스도인의 불굴의 결심으로 낙담에서 벗어나라.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12:5) 우리의 행복은 어떤 세상적인 위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이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17:9).

 

유익하게 활용하라.

우리는 우리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을 유익하게 참아내야 한다. 그로 말미암은 어떤 이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5:3-5).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그 굽은 것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더 건강해지지 않는 다면 그 굽은 것의 쓴 것을 참아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 권면을 강화시키기 위한 동기들

 

1. 하나님께서 그 굽은 것을 그 사람의 몫에 계속 있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 여기시는 기한 동안에는 그것을 곧게 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그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23:13,14).

 

2. 그 굽은 것을 엉거주춤하게 감당하면 할수록 그 굽은 것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고통의 무게가 주목할 만하게 심화 될 것이다. 우리에게 메어진 멍에로 하여금 우리의 목에 쓰라린 상처를 남기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그 멍에를 벗어버리려고 마구 움직여 그 멍에가 도리어 우리 목에 상처를 내게 하는 것이 아닌가?(31:18).

 

3. 여러분의 몫에 있는 그 굽은 것은 그것을 방편으로 여러분이 의지하는 하나님 아닌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특별한 시련이다(벧전1:6,7). 그것은 하나님의 불이되어, 그 사람이 어떤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가짜 그리스도인인지 검정해 내는 하늘의 시금석으로 사용하신다.

 

질문 : 그렇다면 그러한 마음가짐이 우리의 믿음의 필수적인 선결 조건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디서 얻어야 하는가? 신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해 낼 수 있을까?

해답 : 아니다. 그런 일은 필연적으로 믿는 일과 어우러져 함께 가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동일한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례 : 안타깝게도 나는 바로 그 요점에서 그분께 자신의 몫을 자유롭게 복종 시킬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답변 : 그러한 복종이 어떤 사람에게도 갈등 없이 수행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은혜에 속한 새 사람은 그 요점에 복종하려할 때 옛사람이 여전히 반역을 꾀하고 나올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5:17).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건대 그 요점에 자신을 복종시키길 진실로 원하면서 그것을 목표로 훈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자신에게 주어진 그 굽은 것을 대항하되 은혜롭지 못한 방식으로 대항하는데서 돌아서서 자신의 마음으로 복종케 하려고 힘을 쓰라. 약속을 믿고 그 일을 위한 방편을 사용하라.

 

그 굽은 것에 순응하지 못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순응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증거를 댈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속에는 계속적인 굽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태에 복종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2:8).

 

4. 그 굽은 것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시련은 이 지상에서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고전7:29-31).

그 일이 아무리 지독한 고통을 준다 할지라도 아주 길게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한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세상에서 평안을 얻지 못할지라도 죽을 때 그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해 질 것이다.

 

5. 만일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로 그 굽은 것을 참아내기에 합당하게 자신을 높여 세우려 든다면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쉽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도 감당하지 못할 굽은 것은 허락하지 않으신다(11:30). 왜냐하면 약속의 말씀 속에 그러한 효과를 가져 오는 능력이 확보되어 있기 때문이다(고후3:5, 4:13).

 

6. 만일 여기 지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의 십자가 아래에서 그리스도인다운 태도로 처신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수고로 말미암아 은혜의 충만한 상급을 얻을 것이다(딤후2:12, 고전15:58). 하늘은 그 굽은 것의 시련을 통해 검증된 자들을 받아들이는 장소이다.

 

 

. 우리가 그렇게 되는데 도움이 되는 방안을 소개해 보겠다.

 

자기 몫에 있는 굽은 것 아래에서 바르게 처신하는 온당한 방편은 자신의 몫에 주어진 그 굽은 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생각하는 것이다.

1. 그 굽은 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굽은 것의 샘의 근원을 살펴보자(25:22).우리가 피할 수 없는 그 굽은 것을 주목할 뿐만 아니라 그 굽은 것의 샘 근원이 어딘지를 숙고하고 조사하라고 말이다. 분명히 그 굽은 것은 저절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어느 손인가가 심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5:6). 그 굽은 것을 하나님의 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지혜로운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굽은 것을 바르게 다루는 일이 되고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바른 개념으로 보게 만드는 일인 동시에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이다.”(삼상3:18).

2. 그렇다면 그 굽은 것이 바른 처신을 하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정당한 방편이 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 굽은 것 자체가 충분하거나, 그 자체가 그러한 효과를 산출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믿음, 복음의 신앙으로 활용할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기 몫에 지웠다고 억울하게 생각하는 죄인의 태도는 결단코 그 굽은 것 아래서 바르게 처신하게 하는 방식이 결코 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여길 때에만, 자기 하나님께서 주신 그 굽은 것이 바람직한 성품과 행실을 나타내는데 쓰이는 정당한 방편이 될 것이란 뜻이다.

 

 

 

 

 

 

 

 

3

환난을 통해서 그 백성들을 복 주시는 하나님

 

부패한 본성을 가진 타락한 사람에게 무죄 상태에 있었던 아담과 똑 같은 방식으로 이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합당한 생각일까? 그것은 마치 거지에게 부자와 같은 수준으로 일하라 요구하는 것이나, 다리를 저는 사람들에게 다리가 멀쩡한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무죄한 아담은 은혜로운 수완들을 대단히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도덕적인 생각들의 힘을 통해서 의무를 바르게 수행하도록 자신을 몰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러한 것이 어디 있을까?(고후3:5).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은 영혼이 도덕적 생각을 통해서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무슨 능력이 있어 우리 같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성경은 이 항목에 대해서 매우 분명히 말한다. 믿음만이 그러한 능력을 분명히 보여준다(11). 그리고 그리스도께 연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보여준다. 나를 떠나서는-다시 말하면 나로부터 분리된다면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15:5). 도덕적인 요소들을 모두 다 총 동원하여 숙고한다 할지라도 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몫에 주어진 그 굽은 것 아래서 바르게 처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영혼에서 우러나는 겸비함과 자기 부인과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자기를 맡기는 일이 그 처신에 들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처신은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사랑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제 일로 높이는 것을 제일 되는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그 처신 역시도 결코 온전할 수가 없다.

 

반론 : 그러면 그러한 사고의 개발이 가능한 사람들은 성도들뿐이란 말인가?

답변 : 정말 그렇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을 위한 모든 도덕적인 사고들에 대해서 그러하다.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믿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굽은 것 아래서 바르게 행동하도록 인도해 주는 하나의 정당한 방편임을 확증할 것이다.

다음의 네 가지를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자기에게 주어진 그 굽은 것들만 쳐다보는데서 마음을 전환하는 것이 자신에게 큰 유익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계속 그 굽은 것을 주목하고 있으면 우리의 부패 성향을 더 자극할 뿐이다. 굽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고정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소욕과, 우리의 만족감을 좌절시키고, 그 굽은 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작용시키는 도구들을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선을 그 굽은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행사에다 두면 생각을 전환하게 되고 오히려 치료의 처방으로 작용할 것이다(삼하6:9,10).

 

2. 그리고 그런 방식은 선한 효과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자연히 도덕적 경향을 갖게 된다. 비록 우리의 처방이 단순한 이성의 힘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본능적인 활동으로써가 아니라 합리적인 방식으로 그 처방이 수행 되는 것이다(5:15).

 

3. 그것은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약속을 갖고 있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3:6). 어떤 것이든 그 목적에 부합한 방편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이러한 믿음 없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무슨 피조물이든지 사용하는 것은 그 피조물을 하나의 신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어떤 피조물이든지 하나님을 의존하여 사용하여야 한다(딤전4:4,5).

 

4. 성령께서 바로 그런 생각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성령께서 그것을 믿고 그것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서 일하신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친히 지정하신 방편이기 때문이다.

 

적용 : 이 방안을 여러분의 몫에 있는 굽은 것 속에서 바르게 처신하는 지침서로 삼으라.

그 굽은 것이 효력을 발하도록 활용하는 일을 돕기 위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로 생각하라. 이것이 그 굽은 것과 복음의 은혜를 섞는 방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굽은 것을 참아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22:1)

 

2.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어떤 관계들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유념하면서 생각을 확장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를 숙고하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결코 악한 것을 행하지 않으심을 생각하라. 그 자비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바라본다면 우리가 잠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그 굽은 것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3. 그 굽은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이며, 우리 속에 있는 부패성과 죄를 알도록 하는 얼마나 놀라운 깨우침인지를 생각하라. 또한 그 굽은 것은 여러분의 상태와 여러분이 받은 은혜들과 부패를 드러냄으로써 여러분 자신을 검정해 보도록 하는 하나님의 행사임을 기억하라. 또한 세상으로부터 여러분을 점점 멀어지게 하고 하늘에 합당한 사람들로 만들게 하기위해서 여러분을 가난하게 하시는 행사임을 기억하라.

 

4. 굽은 것을 생각하는 모든 방식 속에서 다음과 같은 자세를 취하라. 그러한 생각들이 효력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바라고 우러러보라(고전3:6). 자기들 몫에 주어진 그 굽은 것에 마음을 순응시키는 것이 그 굽은 것을 제거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보다 낫다고 믿는 자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유익하게 이끌어 가는 아주 좋은 길에 들어 서 있게 된 셈이다.

 

겸손

앞의 말씀 속에는 하나의 비교가 주어져 있다. 교만한 자들은 항상 높이 오르고 위로 향하여 치솟으려고 한다. 겸손한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땅위에서 기는 것으로도 만족하게 여긴다. 한편은 환난을 당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거만한 사람들이 있다.

 

양편의 사람들이 어떠한 요점에서 다른가, 환난을 당하여 낮은 자들은 때론 그 조건이 변하여 높은 자리에 올림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한나나 욥과 같이 탈취 물을 나누는 자리에 있을 수 있다. 거만한 사람들이 내려뜨림을 당하고 부수어 질 수도 있다. 문제의 요점은 낮은 자들과 함께 높이 올려 짐을 받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거만한 자들과 함께 내려 던짐을 받는 것이 나은가 하는 것이다.

 

교리 : 낮은데 처하여 고통을 받고 있어 마음을 자기들의 몫에 부합하게 낮추는 세대가 있다. 그 방면에 있어서 그들의 경우가, 자기들의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마음에 따라서 모든 것을 행해 나가려는 거만한 자들의 경우보다 낫다.

 

마음을 낮추는 자의 조건

우리는 낮은데 처하여 고통을 받으며 자기들의 몫에 마음을 순응시키는 세대를 생각해 볼 것이다. 첫째. 그들에 관한 보편적인 요점들 중 몇 가지를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할지라도 세상에는 그러한 세대가 존재하고 있다. 성경은 곳곳에서 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시편912, 1012, 53, 620의 말씀이 그러하다. 우리는 어디서 그들을 찾아 볼 수 있을까? 하늘에서는 결코 아니다. 하늘에는 고통당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지옥에는 낮은 마음을 품거나 겸손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시련의 상태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그들을 찾을 수 있음에 틀림없다.

 

2.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하나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본받는 세대의 머리가 되셨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바로 이 방면, 고난과 거룩 속에 드리워져 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그런 사람들이 매우 드문 것은 틀림없다. 눈이 심히 높으며 그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30:13). 겸손한 사람들과는 아주 정 반대의 사람들이다. 그러한 무리들이 세상에서는 단연코 큰 집단을 이루고 있다.

 

4. 거만한 사람들이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보다 수에 있어서는 더 많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그 어느 것도 사람의 마음을 그 본성적인 교만에서 내려오게 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고후10:4,5).

 

5.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특성을 특별하게 드러내는 어떤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누구나 환난을 통과 해야만 한다(14:22). 그리스도의 모든 재자들은 그 환난에 순응하게 된다(14:26).

 

겸비한 영혼의 자세를 가지며, 그 방향으로 직관적인 목적을 세우고 마음을 기울이게 되면, 그 사람은 하늘에서 그 심령에 걸 맞는 매우 은혜로운 덕을 입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온전하게 교만을 빼버리고 어느 때든지 자기들에게 주어진 역경에 대해 불만스러운 마음을 완전하게 씻어낸 세대를 찾으려 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특성을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사항,

그들의 몸속에서 당하는 환난이 교만하고 번성한 세대보다 더 낫게 여겨야할 겸비한 세대는 환난을 받는 사람들의 세대이다.

 

1. 때로 그들에게 부딪쳐 오는 환난이 있다(73:14). 그 때 하나님께서는 학교장이 그 선생들을 둘러보듯, 의사가 환자를 찾아오듯이 자주 찾아오신다. 사실 그 때로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권속이 된 것이다(120:1-3).

 

2.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주위에 걸어둔 특별한 환난의 멍에가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 특별한 시련거리요 그들의 몫에 주어진 굽은 것이다. 그 멍에는 그들의 부단한 연단을 위해서 그들의 어깨에 항상 메어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천성적으로 높은 자리에서 끌어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진지하게 자신들을 작은 자로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높고 영화롭게 생각한다(145:3).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가르침을 받는다. 그들은 공의가 허락하는 한에서 다른 사람들을 좋게 생각한다(2:3). 다른 이들의 허물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자기들도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탁월함을 인정하고 가능한 그 높은 사람들을 높이 평가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상태 속으로 깊이 잠입해 들어간다(131:1,2).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람을 높이 든다. 겸손은 사람을 제자리로 끌어 내리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발아래 엎드리며, 땅에서도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게 한다.

 

자기 몫에 있는 굽은 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

 

자기 몫에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심령

그들의 몫은 낮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심령은 그 자기 몫에 합당하게 순응시킨 겸비한 마음을 가지되 은혜로 말미암아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1. 그들은 자기 몫에 들어 있는 굽은 것에 순응하는 것을 의로운 것으로 여긴다. 내가 주께 범죄 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7:9). 우리의 몫에 맞게 우리의 마음을 맞춰 낮추는 것이 또한 옳은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옳으심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들이 정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긴다.

 

2. 그들은 자기 몫에 있는 굽은 것 아래서 유순하게 행하며 참을 수 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 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 지로다”(3:25-29).

3. 그들은 자기 몫에 주어진 그 굽은 것 속에서 만족함을 얻는다. 그래서 외적인 조건 말고 다른 영역에서 자기들의 요구를 끌어낸다. 마치 그 사람은 버팀목 구실을 할 수 없는 기둥을 빼어도 견고히 서 있는 집과 같다(3:17,18). 다윗이 곤고한 날에 그러하였다(삼상30:6).

 

4.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그 몫 속에서 만족을 얻는다. 그것이 자기들에게는 합당하고 선한 것으로 여긴다(38:9, 고후12:10). 겸비한 영혼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그 고통스러운 몫이 영적인 약이고 필요하며 합당하고 자기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낮고 고통스러운 몫 속에서 거룩한 만족을 누리게 된다.

 

5. 그런 심령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 몫에 주어진 그 고통 속에서 안식한다. 자신들을 그리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그곳에서 그들을 인도해 내시기까지 그 고통의 몫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오히려 소원하는 것이다(28:16). 겸비한 영혼은 그 고통케 하는 몫에서 너무 금방 빠져나오게 될까봐 두려워 할 것이다. 오히려 이런 것은 믿음과 소망과 인내와 참아 냄을 요구한다(삼하15:25,26).

거만한 죄인

우리는 이제 자기 뜻을 내세우며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행하는 거만한 사람들의 세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1.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피조 계에 혼란과 허망이 들어와, 세상을 아무것도 거침없이 지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기들을 어지럽게 하는 것들을 만나기 마련이다(1:14). 죄는 낙원 같은 세상을 잡목이 얽혀있는 숲으로 만들었다.

 

2. 사람들의 마음의 교만은 그들로 하여금 여러 거치는 십자가들에 노출하게 만든다. 거만한 마음 그 자체가 하나의 고통의 십자가이다. 마음이 겸손한 영혼은 결코 고통 받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고통 받는다(5:13). 마음이 거만한 자들처럼 여러 고통을 주는 십자가에 노출 당한 사람들도 없다.

 

철저하게 낮아지게 하는 일을 통해서도 결코 제압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방도로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워주신 멍에를 참아낼 수가 없다. 우리는 여기서 교만한 세대의 경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 그들은 자신들을 과대평가한다. 그래서 멍에 아래 굽히지 않는다. 도리어 멍에를 그들 아래 내동댕이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이다(5:2).

 

2. 교만한 사람들은 결코 기죽지 아니하는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있다. 자신들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데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5:2). 하늘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 중 어느 것이 이기느냐의 문제이다. 우리의 뜻은 부패하고 하나님의 뜻은 거룩하다.

 

3. 그들은 자기 의지와 한 패가 되는, 제어당하지 않는 한 떼의 정욕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말한다. ‘죄의 의지는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7:8,9). 그래서 전쟁이 시작되면 그 사람의 안과 밖이 다 전쟁마당이 되는 것이다(4:1). 십자가에 순응할 수 없고 또는 제어당하는 일을 참아내지 못하는 교만한 마음과 의지는 그 십자가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그 십자가를 부수려고 기를 쓰고 싸운다.

 

교만의 영적 결과들

 

1. 거룩한 섭리가 사람이 제압당하지 않는 자기 의지에 굴복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섭리가 자기 원하는 대로 진행되어 나가기를 바란다(6:3). 교만은 사람의 목에 고삐를 맨다.

 

2.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체의 욕심이 그 힘과 세력을 상실하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있다.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78:30). 하나님께서는 때로 당신의 언약의 방식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그 원하는 뜻대로 하게 허락하시고, 그들의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하신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그 사람들이 원하는 그 일을 위한 욕심을 죽이신다.

 

3. 십자가를 제거하고 멍에를 뿌리친 경우이다(78:29). 그들은 자기들의 몫에 무엇이 주어져 있는지 전혀 생각할 수 없다.

 

4.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수행하면 즐거워한다. 탈취 물을 나누는 자가 즐거워하듯이 말이다(왕상21:18,19). 그래서 고통당함으로 겸비해진 세대의 경우와 번성함으로 거만한 세대를 그런 식으로 진술한 것이다.

 

겸손의 열매들

1. 겸손이 교만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은, 어떤 경우에서도 겸손의 이점이 무색해 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환난이 겸손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도록 하고, 반면에 세상에 있는 모든 번영을 교만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도록 해보라. 그런 경우라도 겸손이 더 낫다.

 

반면에 교만은 마귀의 형상 자체이다(딤전3:6). 우리는 우리 심령의 맨 꼭대기에서 우리 자신을 평가할 것인가? 사단은 그 지점에서 우리를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릴 것이다. 사단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피조물 가운데 가장 거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토록 자기에게 주어진 몫에 불만을 느끼고 전투를 벌일 것이다. 바로 이 경우에도 사단은 결코 안식을 찾지 못한다.

 

심령의 겸손과 낮나짐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통하고 교제하기에 합당한 자로 구비시켜 준다. 교만은 하나님을 우리의 원수로 만든다(벧전5:5). 겸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리요, 죄는 마귀를 기쁘게 하는 죄악이다(57:15; 딤전3: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요구하신다. 특별히 환난가운데서 말이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벧전5:5,6).

겸비한 세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교만한 바리새인은 물리치셨다.

 

자기들의 고통스러운 몫에 순응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은 마음의 평정과 고요함을 많이 가지고 있다. 반면에 자기들의 몫에 불만을 항상 느낄 수밖에 없는 그 교만한 사람들은 불안과 고통과 혼란스러움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여기서 먼저 전자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마음에 고요함과 내면적 평안은 겸손함에 따른 복락이다. 생명의 위안이 바로 거기에 달려있다. 이것 없이는 그 어느 것도 삶을 행복하게 할 것이 없다(5:6). 이 마음의 평정만 유지되면 어느 것도 그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없다(16:33). 이 마음의 평정이 하나님 안에서 안전하게 지켜짐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고통에 대하여 단호하고 무시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질 수 있다(46:2,3). 마치 노도 하는 파도 가운데서 배를 타고 가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심정이다.

 

이제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몫을 생각하면서 교만한 사람들이 당하는 마음의 불안이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보자. 하만이 모르드개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모략을 꾸미고 왕의 허가를 얻기 전에 하만의 마음의 불안이 어떠했겠는가? 설령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고통을 상쇄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시편7830, 31에도 그 경우를 보여준다.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식물이 아직 그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저희를 대하여 노를 발하사 저희 중 살진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자기들의 고통스러운 몫에 마음을 순응시킨 사람들은, 교만으로 자기들의 몫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이득을 얻는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16:32). 다음을 생각해 보면 그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후자는 외적인 조건을 더 낫게 할 뿐이다. 그러나 전자는 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든다. 생명이 식물보다 더 귀하다. 두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은 더러운 침상에서 아주 멋진 침상으로 옮겨졌다. 물론 병은 여전히 그 사람에게 머물러 있다. 또 한 사람은 딱딱한 침상에 있기는 하다. 그런데 병이 물러났다. 후자의 경우가 전자보다 낫다. 그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두 사람이 판단을 받게 될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한 경우는 자기에게 주어진 몫에 심령을 순응시킴으로써 자기가 행한 선한 행실의 총액을 증가시켰음이 드러날 것이다. 또 다른 유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몫에 불만을 가짐으로 그들의 악행의 총합을 증가시켰음이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과 상관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이 악하든 선하든 하나의 행실로 보여 계산되는 것이다(2:16).

 

고통에 수반된 아픔을 느끼게 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잘 관리하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여러 은혜들을 작용하게 할 것이다. 이 말은 굽은 것이 오히려 고통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을 은혜를 작용시킨다는 말이다. 반면에 자기에게 주어진 몫에 대해서 교만한 마음을 드러내거나, 그 몫을 자신의 마음에 맞게 맞추려는 불손한 시도를 한다면 그 일이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로 치부된다.

 

적용을 위한 정보

1.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 뜻을 성취하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지 못한다.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에 강퍅한 대로 버려두어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81:11,12).

 

2. 낮은 몫을 부여받아 고통스런 십자가를 지고 있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사람이라기보다는 이익을 본 사람이다. 하나님의 틀림없는 말씀의 빛에 사물들을 비추어 생각하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자기들의 마음에 맞게 진행되었을 때 보다 더 나은 상황에 자신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굽은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계속해서 싸우는 사람은 진노 받은 그릇이요, 멸망받기에 합당하게 예비 된 자들이다(78:25,31).

 

3.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를 이겨내야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그 섭리를 거스려 싸우느니 그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 낫다. 주권적인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마땅한 의무이며 우리의 최대의 관심거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 길을 취하면 우리는 가장 영예롭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외적인 조건을 높이는 것보다 우리의 심령을 낮추기 위해서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권면을 위한 적용

세상에서 살 때 자기의 몫에 들어있는 여러 십자가들을 만나면, 그 십자가를 제거하려 하기보다는 자기 심령을 낮추고 거기에 순응하려는 마음의 소원을 가지라.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의지해서 자기의 고통스런 십자가를 제거하기 위한 모든 합법적인 방편들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몫에 들어있는 그 굽은 것을 펴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심령을 숙이고 거기에 겸손히 순응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라는 말이다.

 

동기

심령을 겸비케 하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스런 십자가가 들어있는 몫을 감당하는데 아주 능한 효과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제거하는 일은 교만한 심령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심령을 겸비케 하는 것은 때에 맞게 그 십자가의 무게를 가볍게 하여 능히 지고가게 할 것이다(11:30). 그래서 때가 되면 그 십자가를 온전히 벗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방안을 알려주는 적용

복음을 온전히 신뢰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삼고 여러분의 영원한 구원을 향하여 시선을 들자. 그러면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비케 될 것이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벧전5:6).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

 

 

 

 

 

 

 

 

 

 

4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이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

 

베드로 전서 56절의 말씀은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의 도리에 대해 숙고함으로 나온 권면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먼저 말씀이 주어진 사람들의 상태를 주목해 보자. 그들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낮추셨다. 세상에서 그들의 처지를 낮추셨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의 삶을 시련의 상태로 만드셨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하신 손으로 사람들이 서로 복종 관계에 있게 하셨다. 가장 높은 자라도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을 의존해야 한다. 사람들이 서로 의존하게 만드신 것이다. 도리란 주님께서 우리를 처하게 한 낮은 처지에 순응하여 우리의 심령을 겸비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 마땅한 도리를 대하는 마땅한 방식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환난이나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그 자리를 조용하게 지키지 못하고, 자기들 위에 드리워 있는 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거스르고 치받고 있는 사람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한다. 그 사람의 거스름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하신 손은 그들을 내동댕이치시고, 때로는 그 전보다 더 아래로 내던져 버리신다. 그러니 이것을 주목한다면 우리는 자신들을 겸비하게 복종시켜야 한다.

 

이 방식을 행할 때 가져오는 결과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여러분을 높이실 수 있다. 야고보서410과 견주어 보라. 여기서 행복한 사건, 심령을 겸손케 함으로 확실하게 있게 될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행복한 사건을 만난다. 그러니 심령을 겸손하게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높은 자리로 들리거나 올려지는 일을 가져오게 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도록 자신을 낮추라는 것이다. 곧 자기에게 주어진 낮은 몫에 부합하게 되면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반론 : 만일 우리가 심령을 낮추면 우리는 항상 사람들의 발밑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우리를 밟을 것이다.

답변 : 아니다. 심령의 교만을 다스리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발밑에 영원히 있게 될 것이다.(66:24). 그러나 심령을 낮추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의 발아래서 여러분을 끌어낼 것이다.

 

반론 : 만일 자신을 높이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높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돌보고 우리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

답변 : 그런 반론은 그릇된 것이다. 자신의 심령의 영역에서 자신을 겸비케 하시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몫의 방면에서 여러분들을 높이실 것이다. 심령을 겸비케 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요, 우리를 높여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반론 : 만일 우리의 심령을 떨어뜨린다면 다시는 높이 올라가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답변 : 그러한 반론은 너무나 그릇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사람들을 세워 주실 뿐 아니라 높은 데로 들어 올리실 것이다. 겸손한 자들은 그들이 낮아진 만큼 결국 높아질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때가 되면, 또는 그 적당한 때가 이를 것이란 말씀이다. 솔로몬은 이렇게 관찰했다. 만사에 최선의 때가 있으며,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위해서 기다릴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3:1-8).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

 

교리 : 자신을 낮게 하는 처지 속에서 마음의 성향은 심령을 마땅하게 순응시켜 낮추는 쪽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우리를 그러한 환경 속에 놓으신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게 말이다. 이런 일에 있어서 어떤 것들을 인정해야 하는지 숙고해 보자.

 

1.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겸비케 하는 처지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17:24).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교만의 뿌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겸비케 하는 환경 속에 이끌어 들이시되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그리하시는 것이다.

 

2. 이러한 처지들은 하나의 무게로 마음을 짓눌러 시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이 그 짐을 못 이겨 구부러지는 성향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107:12).

 

3. 사람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처지를 만나면 그것을 대적하여 일어나 싸우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을 꼭 붙잡아 이끄시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도 뿌리치려한다.

 

4.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머리를 쳐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낮추는 것이다(4:10). 여기에서 그 사람이 하늘에 합당한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나타나는 것이다.

 

5. 자신을 낮추는 환경 속에 있다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을 주목하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 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 지니라”(6:9).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신 그 겸비케 하는 생활은 무엇인가? 앞에서 생각해 본 하나님의 섭리로 그 사람의 몫에 주어진 그 굽은 것에 관하여 배운 것을 생각해 보라.

 

겸비케 하는 상황

 

1. 불완전의 처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의 모자람과 불완전이 있는 처지들로 들어가게 하셨다(3:12).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모자람과 불완전함 때문에 성가심을 겪지 않아도 될 만한 경우는 하나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천성적으로 도덕적 불완전이 가득 쌓여 있다.

 

2. 불완전한 인간관계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관계들을 통해서 다른 자들이 그들 위에 서서 주관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와 명예에 어떠한 존중심을 가져야 할지 발견하게 하신다. 지배권 또는 우월성은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비추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한 부분이다(고전11:7).

 

3. 어긋나는 상황들 우리에게 주어지는 조건이 우리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직접적으로 방해하는 성향을 가지는 경우를 뜻한다. 우리의 주님께서 낮아지신 상태 중 일부가 그런 것이었다. 사도는 그러한 일이 우리 자신의 몫도 될 것을 상정한다(12:3). 하늘에는 완전한 조화가 있다. 서로 어긋나 충돌하는 일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자들은 상급을 받고 높아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상에서 시련과 겸비케 하는 낮아지는 상태에 처하여있다. 설령 높은 지위에 처해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뜻과 어긋나는 이 충돌을 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충돌이 의로운 것이든 불의한 것이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처지들로 사람들을 연단하사 겸비케 하시고, 자기 자신의 뜻에 밀착되어 있는데서 떨어지게 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하도록 가르치신다. 이러한 용도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통해서 일하신다.

 

4. 괴로움에 대하여 겸손한 자와 함께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 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16:19). 번영은 죄인들의 마음을 교만으로 부풀어 오르게 한다. 왜냐하면 높은 지위와 번영을 함께 누리는 몫을 받은 사람이 마음을 낮은데 처하게 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괴로움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먼지 가운데 않도록 부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끌어내리시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괴로움 가운데서 심령을 낮추지 않는 것은 자신을 곧추세우려는 시도이다. 그러한 일을 계속한다면 급기야는 주님의 노를 격동시켜 우리를 산산조각 내게 하시는 셈이 된다(24:13).

 

5. 죄에 대하여 죄를 벌하심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죄에 유혹당할 수 있다(30:19). 세상에 있는 모든 죄는 아담이 지은 첫 번째 죄에 대한 형벌이다. 사람은 고의적으로 첫 번째 거짓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성을 보고도 겸비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대적하여 자신을 곧추세우는 것이며, 우리가 죄악 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것을 정당화 시키려는 악한 소행이다.

 

하나님의 손아래 우리 인격을 겸비케 함

 

사람을 낮추는 여러 가지 조건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우리 인격을 겸비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우리에게 주어진바 우리를 낮추게 하는 그 조건 속에서 우리가 목표해야 할 큰 일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주목하는 것 인과(因果)의 방식이든 허용의 방식이든 간에, 우리에게 관련된 모든 일을 불러오게 하신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주목하는 일이다.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삼상3:18).

 

2.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신이 무가치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식 우리를 다루시는 능하신 손의 무한하신 엄위를 우러러보면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말해야 마땅하다(18:27).

 

3. 우리 자신이 죄를 지었고 쓸모없다는 의식 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내리 누르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죄인들이 그 능하신 손아래서 우리의 죄악성을 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거만하게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성을 간과한 때문이다.

 

4. 하나님의 손아래 조용히 복종하는 것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에 대해서 이렇게 도전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 하느뇨”(9:20).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생각하자마자 시편기자는 낮아지고 외경스러운 마음으로 복종하며 가장 심오한 침묵을 그 앞에 지켰다(39:9). 욥도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5. 우리를 책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 속에서도 우리를 향하여 베푸시는 그 자비하심을 높이 들어 말함 그가 우리를 낮추셨는가? 만일 우리가 마땅하게 낮추어짐을 당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이상 낮추지 아니하신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9:13).

 

6.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길들과 뜻이 측량할 수 없음에 대하여 거룩하고 잠잠한 모습으로 감격해 함 마음의 교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리 높게 생각한다 해도 지나치다고 여기지 않는다. 심령의 겸비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통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들을 외경스럽고 존귀하게 여기게 한다.

 

7. 다른 사람에 비해 우리에게 주어진 더 좋은 존귀한 것 모두를 주님 앞에서 내려놓는 일 교만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실제 어떤 탁월함과 존귀함을, 더 부풀려 생각하게 만들고 상상으로도 그렇게 자신이 탁월하고 존귀하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심령의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탁월함과 존귀함을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

 

8. 우리에게 주어진 처지가 요구하는 가장 작은 직책과 일에도 기꺼이 순응할 준비를 함

이에 대해서 우리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본받아야 할 한 본을 보여주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적용 : 자신을 겸비케 하는 모든 처지에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자신의 심령을 겸비케 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먹도록 힘쓰라. 자신을 겸비케 하는 모든 처지를 유의 깊게 주목하고 그것들 중 하나도 그냥 지나쳐 버리지 말라. 여러분의 죄악성을 또한 잊지 말라. 그런 모든 것들을 자세히 유의하여 보고, 그것들 속에서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자취가 어떠한지 그 흐름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자신을 알게 되고, 방황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진정한 상태와 처지를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동기

1. 하나님은 확실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겸비케 하시려고 일을 하신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 아무리 높은 위치로 들어 올려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에게도 겸손을 위한 어떤 표를 달아 주셨다. 그들이 그 표를 눈치 채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말이다(40:6)

 

2. 우리의 심령의 겸손은 그 일에 우리 자신을 적용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 방향으로 우리에게 일하고 계시면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그 방향으로 일해야 한다. 우리들이 감동을 받는 대로 자신들을 움직이는 것이다(2:12,13).

 

3.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거스르는 것이다(7:51). 자신의 조건을 억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을 하게 되면 더욱 나쁜 것이다.

 

우리 자신을 낮추기 위한 시기

 

1. 이 때는 겸비함의 때이다. 심령을 낮추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다(벧전3:4).마음의 교만을 특별하게 싫어하시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겸손을 특별히 좋아하신다(벧전5:5). 본성의 부패로 말미암아 높아진 죄인들의 마음을 겸비케 하고 낮추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의 위대한 목적이다. 이생 전체는 그 겸손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있었던 40년 동안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8:2).

 

2. 여러분을 겸비케 하는 환경들을 유익하게 만드는 방식이 여기 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환경들을 손실로 여기지 말고 그것들을 통해서 유익을 얻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119:71).

 

3. 우리가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 노력하는 동안 함께 일하는 능한 손이 있다. 능하신 하나님의 손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반드시 전능하신 손아래 엎드려져야 한다. 전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누르시는 의도가 우리를 낮추려는데 있으니 우리가 그 손앞에서 뻣뻣하게 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워 그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게 엎드려지는 자들이 아무리 낮아진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4:10). 겸손한 자들이여 너희가 아무리 낮아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높이시리라

 

 

 

 

 

 

 

 

 

 

5

겸손에 이르기 위한 방안들

보편적인 방안들

1.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조처를 통해서 어떤 영적인 유익이든지 얻으려는 마음의 목적을 세우기 바란다(6:9). 일단 마음을 그런 방향으로 돌리지 않으면 겸손하게 되는 일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14:9).

 

2. 모두가 먼저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집중시킴으로써 자신의 영원한 구원의 문제를 정립하며, 복음이 제시하는 바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여러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라(2:19, 8:10).

 

3. 영혼을 겸비케 하는 방편들을 약속의 믿음 안에서 사용하라(28:7). 모세는 약속을 믿음으로 반석을 쳐서 물이 솟구쳐 오르게 하였다.

 

특별한 방안들

1. 어떠한 처지 속에서라도 여러분이 저절로 겸손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그것이 진리이다.

 

2. 하나님의 무한하신 광대하심에 대한 생각들을 더 많이 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하심을 생각하여 그러한 외경심 속에서 가장 깊은 겸손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6:3-5).

 

3.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들을 인정하도록 자신을 조용하게 설득하라. 우리가 훤히 들여다 볼 것 같은 하나님의 섭리의 조처들 속에서마저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는 어떤 신비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4. 여러분 자신의 죄악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라.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0:4). 그들의 눈이 감겨져있어 죄를 보지 못할 때에는 마음은 교만하여 들뜬다.

 

5. 여러분 자신을 겸비케 하는 모든 조건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라. 그것이 진리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벧전1:6). 하나님께서는 불필요한 시련이나 고통을 우리에게 부과하지 아니하신다.

 

6. 여러분을 겸비케 하는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섭리 적으로 의도하신 자비하신 뜻을 굳게 믿으라. 그러한 처지를 통해서 마음을 여는 열쇠로 그 같은 환경을 사용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다(3:19). 우리를 낮추시는 환경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질문 : 그러한 처지 속에 하나님의 자비하신 의도가 있음을 알기만 한다면 기꺼이 그것을 감내해 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처지 속에 나를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의도가 있을까 두려워한다.

답변 : 하나님의 어떤 말씀. 또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부터 온 어떤 깨달음이 그대로 하여금 그런 두려움을 가질 근거를 마련하였는가? 그런 두려움을 가질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다. 그 검은 불신앙 속에 있는 지옥의 경향성이 아니면 무엇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겠는가?(55:1, 요일5:10,11). 복음은 인류 죄인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선의 호읍이다(2:11, 3:3,4. 3:17).

 

7. 이 세상은 하늘을 준비하기 위한 시련의 때임을 스스로에게 인식시키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1:12). 사람에게 부여될 수 있는 존귀한 직무나 유익하게 하는 소임이 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시련을 무릅써야 한다.

 

신자의 장래의 영광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하늘을 위해서 연단 받는 것이 그 연단의 소망을 얻을 후보자로 서 있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아니겠는가? 그 속에 명예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5:11). 그 속에 아름다운 전망이 있다. 여러분을 낮추는 환경의 시련 속에서 어리석은 자로 끝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풀무 불을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하여지지 아니하나니 사람들이 그들을 내어버린 은이라 칭하게 될 것은 나 여호와가 그들을 버렸음이니라”(6:29,30).

 

8. 우리를 낮추는 처지로 말미암아 주께서 하늘을 위하여 우리를 예비하시는 방식을 여러분 자신에게 인식시키라.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 고후5:5). 영광을 받기로 되어있는 존귀한 그릇들은 그들을 낮추는 처지로 말미암아 예비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두 하늘, 곧 이 지상에서의 하늘과 내세에서 맞이하는 하늘이 아니면 아무것도 여러분을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위해서 한 하늘을 확보해 놓으셨다. 거기서 성도들은 자기들이 원하고 바라고 뜻하든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거기에는 그들을 내리 누르는 무거운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생에서 낮아지게 하는 처지와 맞추어 겸비케 되지 않고서는 하늘을 소유할 수 없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후5:5).

하늘

그러나 겸비케 되지 않으면 신구약 성경에서 묘사된 그 하늘을 감당할 수 없다.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아니했는데 어디에서 여러분의 승리를 얻겠는가? 복종의 수고가 없는데 어떻게 여러분에게 안식이 주어질 수 있겠는가?

 

성도들의 하늘

성도들의 하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7:14).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거기 하늘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 대한 문제의 해답이다. 그들은 자신을 낮추는 처지를 통해서 먼지에까지 낮아졌던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은 먼지로부터 일어나서 보좌 앞에 이르렀다. 그들과 함께 아래로 내려뜨림을 생각할 수 없는 여러분이 어떻게 높이 들려 올려 질 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하늘

그리스도의 하늘에 대해 생각해 보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우리 앞서 가신분이 당신의 길을 어떻게 닦으셨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4:26).

 

9. 결국 여러분이 고대하는 그 소망들이 이 세상에서 오리라는 생각을 끊어야 한다. 그런 일은 오는 세상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라. 여기 지상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처럼 하늘에서 얻을 안식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비하게 되어야 한다. 저 세상에서의 행복을 더 굳게 잡으면 잡을수록 여기 이 지상에서 여러분을 낮추는 그 처지에 자신을 순응시키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10.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모든 직무를 활용하여 자신을 낮추는 처지 속에서 겸손해지라. 그것만이 진정한 겸손이다.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12:10).그러한 겸손을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뢰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 되셔서 여러분을 위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라. 여러분은 죄책감으로 충만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깨에 박힌 가시 같아서 그 위에 짐을 올려놓으면 찌르는 큰 아픔을 겪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양심을 깨끗하게 할 것이고, 그 가시를 빼내고 평안을 줄 것이다(33:24).

 

여러분을 가르치시는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우리를 낮추는 그 겸비케 하는 처지를 바르게 분별하도록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우리에게는 있다. 실로 그리스도와 그 말씀의 빛과 성령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의무뿐 아니라 우리 십자가와 그 시련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25:9,10).

 

여러분의 임금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여러분은 비천하게 만드는 환경 속에서마저 뻣뻣한 심령을 가지고 자신을 굽히는 것을 게을리 한다. 모세로부터 교훈을 얻으라.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24:9).

 

자신을 낮추는 일은 여러분의 손을 가득 채우는 일이 될 것임을 기억하라. 여러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그러하다. 그리고 죽기 전에는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하라. 하늘에 가야만 자유 함을 얻을 수 있다. 여러분의 불완전함과 여러분의 여러 관계들과 어긋 남들과 고통들과 불확실성과 죄악성 등 여러분을 겸비케 하는 조건들이 여기 지상들에 있는 동안 우리에게 하나의 연습 소재를 제공할 것이다.

 

환난 당한 자들을 위한 복의 약속

교리: 하나님의 능하신 손 하래서 자신을 겸비케 하는 사람은 반드시 높이 들려 올려지는 때를 맞게 된다.

 

1. 이 들려 올려 짐을 누리게 될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내려뜨림을 당하는 아픔을 지불해야 한다(7:14).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16:33). 이 들려 높여지는 영광은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누릴 수 없다.

 

2.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의해서 내던져짐을 당하였으면 그 손아래서 가만히 고요하게 누워있는 법을 배워야한다. 바로 그 손이 우리를 일으키시기까지 말이다. 높여 주신다는 이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싶으면 그것을 배워야 한다(3:27).

 

3. 비천한 처지에서 결코 겸비해지지 않는 사람들은 결단코 이 약속의 방식으로 높이 들려 올려지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73:18). 비천한 처지에서 자신을 낮춰 겸손하지 않을 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집이 계속 자기들을 비참에 머물게 하여 치료책이 없는 상태로 항상 묶어 놓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4. 자신을 낮추는 그러한 처지 속에서 심령을 겸손케 하면 어느 때엔가 반드시 그 처지에서 들어 올려지는 일을 맞게 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8:14).

 

5. 겸비케 하는 처지에서 자신을 겸손케 하는 자들을 들어 올리시는 하나님의 정한 때가 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2:3). 범사에 때가 있듯이, 겸손한 자가 높아지는 때가 있다(3:3).

 

6. 자신을 겸비케 낮추면 금방 자신이 높여지는 때가 이어진다고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한다. 고요하게 그 정한 때를 기다리며 누워 있어야 한다. 사람을 겸손하게 하는 일은 긴 작업이다.

 

7.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정한 때가 바로 마땅한 때요 그 일을 위해서 가장 적합한 때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6:9). 그 때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이기 때문이다.

 

8. 겸손한 자가 높이 들려지는 일은 정한 마땅한 때가 되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다(2:3). 시간은 머뭇거리지 않는다. 정한 때는 확실히 오고 있다. 여러분 자신을 낮추는 처지가 아무리 심하고 심지어 너무나 소망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겸비한 처지로부터 들려 올려지는 일이 반드시 있게 될 것이다.

부분적으로 높이심에 대하여

아무 때에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위안과 쉼을 얻거나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하는 일이 항상 우리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무거움에 처해 있을 필요가 있을 때가 언제인지를 아신다(벧전1:6). 또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실 필요가 있을 때가 언제인지를 아신다(107:12). 마치 의사가 고약을 붙이고 있을 기간을 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전체적으로 높이 들려지는 최선의 때에 관하여

우리가 진 짐 때문에 지독하게 눌릴 때에 이러한 생각을 하기 쉽다. ‘어서 지나가거라. 그 모든 짐을 벗어 버리게 될 때여. 오거라.’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 되었구나”(7:2,3).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1:24,25). 욥과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모두 잠시 우리의 짐 때문에 시련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합당할 수 있다. 겸손한 자들을 위해서 그런 식으로 높이 들려지는 일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보장 되는 것이다.

 

 

 

 

 

 

 

 

 

 

 

 

 

 

 

 

 

 

 

 

 

 

 

 

 

 

 

 

6

환난 중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높이 드시는 하나님

 

여러분이 궁핍해 졌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분명히 때가 되면 반드시 부요해 질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거나, 심한 질병에 걸렸을 때 그 병으로 죽지 않고 확실히 회복될 것이라고 확신을 준다 하자. 그러면 그 말이 여러분의 궁핍과 질병을 더 참아낼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계속 가난 속에 있고 결코 부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계속 병을 앓다가 그 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천케 하는 처지 속에서도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는 주님의 말씀으로 확신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 쉼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는 일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다음 사항을 숙고해 보면 그 점을 확신 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성품을 유의 깊게 숙고하면 그 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 하시도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 하시리로다”(103:8,9). 하나님의 성품 속에서 그 점을 보장하는 세 가지 요점을 주목할 수 있다.

무한하신 능력이다. 아무리 낮은 처지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처지에서 그들을 올리실 수 있다.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18:14).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처지를 바꾸시지 못할 정도의 상태로 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2. 하나님은 끝없는 선하심 때문에 우리를 돕는 데로 기울어지신다. 하나님은 그 성품상 선하시고 은혜로우시다.(34:6,7). 사람은 의지가 있으나 능력이 없을 수 있고, 능력은 있으나 의지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선하심과 무한하신 능력을 함께 가지고 계시므로 적당한 때에 겸비케 된 자들을 확실하게 들어 올리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지혜로 말미암아 그 어떤 것도 헛되게 행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어느 사람도 그 비천한 처지에 쓸데없이 그냥 머물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그 섭리의 경륜들에 비춰서 생각해 보라. 특히 사람이신 그리스도, 하나님 섭리의 가장 고상하고 존귀한 목적이시오 천개의 세계보다 더 존귀하신 분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경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2:9). 그 섭리가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사막의 먼지로 끌어 내리셨다. 33년의 고난의 길속에 말이다(12:2).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경륜은 바로 그러한 양식을 따른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의 아들의 경우에 그 방식을 너무나 기뻐하신 나머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물려받은 모든 후사들의 경우에도 다시 그 방식을 따라 쓰기로 작정하신 것이다(8:29).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높이 들려질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표증이다. 그의 낮아지심은 여러분의 높이심을 위해 치르신 대가였고,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여러분의 높아지심을 위해 필요한 대가가 완전히 지불되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이다. 모든 세대 가운데 있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주목해 보라. 주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고수하신 경로가 그러하였다(129:1-4).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염려를 불식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낮은 자리에 처한 성도가 높임을 받을 것임을 보증하고 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119:19,50).

다음의 요점들을 숙고해 보라.

 

1. 말씀의 교리들을 숙고해 보라. 그 교리들은 그 높아질 때를 위한 믿음과 소망을 가르친다. 성경 전체의 흐름은 빛을 겸비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확신을 내버리려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소망을 견지하는데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선한 이유 때문에 그 확신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임을 확증해 준다.

 

2. 말씀의 약속들을 숙고해 보라. 그 말씀을 통해서 비천한 처지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가지는 자들이 반드시 높여지게 될 장소가 하늘임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23:12). 그들이 높이 드려지기 위해서는 기나긴 준비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그들은 높여진다.

 

3. 말씀의 실례들이 그 교리와 약속들의 진실성을 충분하게 확증하고 있다.(15:4). 그래서 교리들과 약속들을 통해서 우리가 높이 들려질 것이라는 소망이 우리의 믿음에 기반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 때문에 틀림없이 들려 올려 질 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욥과 다윗과 바울의 경우에서 그 점을 명백하게 볼 수 있다.

 

4.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를 생각해 보라. 그 기도와 함께 비천한 처지에서 겸손해진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와 부르짖음을 생각해 보라. 교만한 자들은 부르짖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겸손해진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분명히 하나님께 울부짖을 것이다(42:7,8).

 

그리스도께서는 비천한 처지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중보 기도에 정말 열심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상황과 처지를 정말 딱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63:9). 예수님의 중보 기도는 항상 효력이 있다. 항상 내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11:42).

 

이제 보다 더 특별한 관점으로 나아가 보려한다. 그 높여 주심은 사람의 눈에 보기에 평등한 것은 아니다. 이 높여 주심은 하나님 자녀 각 경우마다 똑 같이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이런 비천한 처지로 들어가게 하시고, 거기서 계속 머물러 있게 하시다가 죽음을 맞게 하시기도 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똑같은 처지에 있더라도 금방 높여 주실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악재를 받기도 한다(2:15).

 

반론 : 경우가 그렇다면 높여진다는 약속의 결실의 열매는 무엇이란 말인가? 무거운 압박을 받다가 무덤으로 가버린다면 그 높여지는 것은 어디에서 이루어진단 말인가?

답변 : 이생이 끝난 후 그 이상의 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반론을 제기할 만한하다. 그러나 또 다른 저 세상의 생이 있으니 그런 반론을 제기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저 세상의 삶속에서 그 약속이 겸손한 자들에게 완전하게 성취 될 것이다. 나사로의 경우처럼 말이다(16:22).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나타내는 위대한 조약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삶에 걸려 있는 것이다(11:13).

 

질문 :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경우에 처해 있을 때 높여 주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일을 포기 할 수는 없나요?

답변 : 우리는 언제 우리가 높아질지 절대 알 수가 없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눈에 보기에 모든 소망을 다 앗아 간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도 그러하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욥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의 시간 세계 속에서 그 사람을 높여주실 뜻을 가지시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들에서는 높여 주시는 일이 이 세상에서도 일어난다.

 

어떤 사람들은 그 비천한 처지에서 오랫동안, 그 정도가 아주 지독하고 절망스럽게 지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후에 높여지는 일들이 일어나 그들이 처했던 그 비천한 처지의 기간이나 정도들보다 훨씬 더 오래 그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때로 이런 일은 젊었을 때 멍에를 메고 참았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어난다. 요셉과 다윗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사람을 더 특별하게 쓰실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반론 : 그러나 사람들이 시간 세계 속에서 높여짐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는 세계 속에서 높여지는 표준은 전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시간 세계 속에서 높여지는 일이 오는 세계 속에서도 높여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증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답변 : 약속들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그 높여짐은 분명히 내세에서 만나는 완전한 높여짐에 대한 표증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저 세상에서의 삶은 약속들이 성취되는 바로 그 적당한 때이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질문 : 그러나 그 높여짐의 약속의 방식을 통해서 온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답변 : 약속의 방식으로 오는 높여짐은 비천한 처지와 이어지는 낮은 길을 통해서 온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해서 믿음의 고가 도로 안에서, 약속을 믿는 것을 통해서, 기다리는 소망과 계속 참고 인내하는 긴 경로를 통해서 온다는 말씀이다(5:7). 겸손은 약속 성취를 예비하며, 믿음은 그 약속의 젖가슴에서 젖을 빨아 먹는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겸손한 자를 높여 주실 것이라는 이 약속을 통해서 그들이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그들은 자기들을 겸비하게 했던 처지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잠시 그들을 연단하시고 겸비케 하시려고 그 마음을 낮추셨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짐을 벗기시고 그들을 오랫동안 짓눌렀던 무거운 짐을 제하시고, 오랫동안 구부려졌던 허리를 펴게 하실 것이다. 아니면 그 짐을 능히 감당할 힘을 주시는 방식을 취하시기도 하신다. 짐은 여전히 그 어깨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짐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하여 괴롭지 않게 되는 경우이다.

 

2. 그들의 비천한 처지에서 드린 기도가 응답되는 위로가 있는 정경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드린 기도가 오랫동안 응답받지 못함으로 자기들의 기도가 하늘에서 열 납 되지 않거나, 귀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정이 전혀 송사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9:16,17).

 

3. 저희의 기도가 응답되되 흡족하게 응답 되는 경우이다. 그래서 저희는 그 일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두 배로 더 존중하게 될 것이다(삼상2:1). 그들은 자기들이 높여짐을 받는 것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한 표증이라고 생각한다.

 

4. 우리를 겸손케 하는 상황의 모든 단계들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조처에 대하여 완전한 만족함에 이르게 된다. 높여주시는 일을 지체한다 할지라도 그 섭리를 만족해하는 것이다. 그 전에는 그 상황이 너무나 당혹스럽게 여겨졌다 할지라도 말이다(15:3).

 

5. 높여 주심에 대한 기대를 저버렸을 바로 그 때에 유익과 함께 그 높여 주시는 은택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조항을 이루어 주실 때 본전과 함께 이자도 같이 넣어 주신다. 일반적 섭리의 열매들은 금방 잊고 금방 썩는다. 그러나 약속의 열매는 익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그 열매는 오랫동안 달다.

 

6. 우리를 겸비케 하는 어두운 상황의 때에 우리를 찔러대던 원수들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높여 주심을 받을 그 때에는 흩어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앞에 두고 있을 때에 그 뒤로 바로의 군대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홍해를 지난 다음에는 바로의 군대가 해변 가에서 죽은 시체로 남았다(14:30).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높여주시는 적당한 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 약속이 성취될 때에는 바로 그 때가 약속의 성취를 위해 가장 적당한 때라는 것이 드러나는 때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그것을 분변하고 그 일을 해야 할 때 하는 것이 지혜의 큰 부분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실수로 말미암아 때를 놓칠 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 할 수 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 하시도다.”(32:4)

 

사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상황들이 발생하여, 그 일을 위하여 마땅한 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높여 주시는 적당한 때로 여겨지는 경우들이 여러 차례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의 때는 준비되어 있느니라.”(7:6). 그 상황이 너무나도 절망적이고 그 길목에 난제들이 산더미처럼 막고 서 있다 할지라도 정한 때가 되면 그 모든 것을 물리치시고 높여 주실 것이다(2:3).

 

죽은 것처럼 고요하다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돌풍 속에서 그 한 비유를 얻을 수 있다. 겸손한 사람을 높여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비천케 하는 상황들을 극도의 절망의 시점까지 몰아가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살아계실 때 취하셨던 동일한 과정을 고수하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교회와 각 개인 신자를 향한 섭리의 모든 경륜 속에서 그 사랑하시는 아들의 본을 답습하게 하시는 것이다(8:29). 그리스도께서는 내내 슬픔의 사람이셨다. 때가 진행됨에 따라 눈물이 더 흘러 내렸고 급기야는 죽음의 잔을 무릅쓰게 되었다. 그런 다음에 장사지낸바 되었고, 그 무덤 문을 돌로 인봉(印封)하여 막아 놓기까지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서 목표하시는 또 다른 목적을 믿는 자로 하여금 자신을 비우고 모든 만들어진 기초들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신뢰하고 그 안에서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후2:9).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믿음의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온전한 높여 주심을 바란다면 어떤 방도를 통해서든지 바른 준비를 하 도록 하는 그 연단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연단 없이 높임을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연단을 감내해 내지 못한 섞인 은같이 그들을 버리신다.

 

이 바른 준비는 바른 겸손을 내용으로 한다(10:17).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욥의 경우를 보면서 오랫동안 그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그 심령이 속에서 매우 낮아지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더 낮은 겸손함을 위해서 욥 자신과 직접 말씀 하실 필요성이 있음을 아셨다(38:1). 결국 겸비함 속에서 욥은 먼지 속에 눕게 되었다(42:5,6). 높임 받기 위해서 욥은 마지막 까지 내려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겪은 후에야 예비 된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겸손을 위한 6가지 요건

1. 자신이 높여 지기에는 너무나도 죄악 적이고 무가치하다는 의식을 깊이 가져야 한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0:4). 우리도 이런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비천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알기로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정의와 공평성을 인하여 하나님의 명예를 옹호하기보다는, 비천한 처지 때문에 자신의 명예가 훼손당하지 않게 구실을 대는데 훨씬 더 익숙하다. 세상은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일수록 가장 큰 죄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3:4).

 

2. 높여 주시는 때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실 때까지 상당한 시간의 공백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경우라면, 그 점에 대해서 너무나 낙담하지 말라. 약속을 자신들에게 적용하느라고 지나치게 거칠게 구는 실수를 했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 실수를 나중에 회개하였고 그 실수의 어리석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야 될 문제로 알았다. 그런 다음에야 약속이 그 정한 때에 성취되었다.

 

3. 그 약속이 성취되는 방식과 경로에 대한 것도 온전히 주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 약속 성취의 방식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 약속 성취의 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을 하려고 덤빈다. 방식과 방편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한계는 매우 좁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밖에 알지 못하는 구원의 방도에 있어서 수많은 방식을 알고 계신다.

 

4. 주님께서 높여 주시는 정도에 대해서도 온전히 주님께 맡겨야 한다. 아니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높여 주시는 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까지도 말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아주 쇠약하도록 내 버려두실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서둔다 할지라도 말이다.

 

5. 높임의 정도를 주님께 맡겼다면 우리가 할 일은 기다리면서 계속 기도하는 것이다(6:18).

자기들을 겸비케 하는 그 처지가 너무 오래도록 계속 되었기 때문에 기다리고 기뻐하는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은 마음의 교만이요 불복하지 않는 심령의 자세이다(왕하6:33). 그러나 그 높임 받기 전에 먼저 심령의 겸손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기도하고 기다리며 의지에 차서 계속 매달릴 것이다.

6. 연단을 잘못 관리함을 생각하고 애통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사람을 높여 주시기 위해서 하시는 정당한 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겸비케 하시는 경우에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연단의 고통스러운 국면 이상으로 시선을 옮겨 자신이 어떤 행실을 했는가를 눈여겨보게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를 정하심

모든 성도의 경우마다 그 높여 주시는 적당한 때로 정할 시점이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다만 다음과 같이 일반적으로 말 할 수 있다.

 

1.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우리의 일이 다 끝났을 그 때가 바로 정한 때이다. 그 일이 이루기까지 우리는 일종의 불멸의 존재로 이 지상에 거한다(9:4, 11:9) 그 일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을 함 : 하나님의 영예와 우리 동료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서 위대하신 구주께서 하라고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하는 것이다(9:10). 비천한 처지에서라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야 한다. 그것은 고난의 일이다. 신비로운 몸(그리스도의 교회)을 위해서 할당된 어떤 고난의 몫이다. 우리에게 할당된 그 몫을 다 이루기까지 그 높여 주시는 때는 오지 않는다.

 

2. 그 높여 주시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때 정말 정확한 때에 일어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잘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하늘이 지상보다 항상 좋고, 절대적으로 말해서 땅에 있는 것보다 하늘에 있는 것이 나은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명예와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 하늘에 있는 것보다 땅에 있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는 것이다(1:24).

 

적용

하늘에서는 결국 높여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확신시켜라. 이 지상에서는 아닐지라도 하늘에서는 확실하게 높여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여러분 몫에 들어있는 굽은 것(the Crook in the)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들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낮은 몫으로 만족하며 심령의 겸손함을 가지는 것이, 높은 몫을 가지고 심령이 교만한 것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것을 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교만한 자들이 아무리 높은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결국 그들을 산산조각 내실 것이며, 겸손한 자들을 아무리 낮은 처지에 계속 처하여 있었다 할지라도 틀림없이 그들을 개선가를 부르도록 높여 주실 것임을 스스로에게 확신시켜야만 할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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