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성령세례, 1장~6장 요약(강의안)
로이드 존스, 「성령세례」, 정원태역, CLC, 1986
1장부터 6장까지의 요약입니다.
나머지는 홍정식목사가 역편한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과 내용이 중복되어
생략했습니다.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 두 장은 PDF 자료밖에 없어 그대로 올립니다.
제 1 장 성령의 세례와 중생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무엇인가를 받는 사람이고 계속해 받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다 긍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참되게 세례를 받을 때에 우리는 크고도 넘치게 그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요한의 세례와 주님의 세례는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요, 그리스도의 초보(히6:1)에 만족하는 것과 더 완전한 것에 나아가는 것의 차이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최대의 위험은 성경을 그들의 체험의 빛에 따라서 이해하려는 위험이다.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의 빛에 의하여 우리의 체험을 조사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과 경험과의 관계에서 첫 번째 위험은, 성경을 넘어가거나 혹은 성경에 배치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거짓 사도들이다. 주관적 체험을 성경위에 놓는 것이다. 광신주의이다.
또 다른 위험은, 전통이나 교회의 가르침을 성경 위에 놓는 일이다. 로마 천주교 이단이 이런 일을 해오고 있다. 성경에 제시된 것보다 더 낮은 수준에 아주 만족하고 있는 위험이다. 열심과 광신주의를 두려워한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를 다 경계해야 한다.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판단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명백한 단계와 계단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이들, 젊은 자들, 노인, 은혜와 주를 아는 가운데서 자라 가는 것 등등의 표현이 있다. 요한은 세례 요한을 포함한 옛 시대와 새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성령의 세례라고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원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고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역을 떠나서는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 8:7에서 자연인과 신령한 사람과의 위대한 구분선을 긋고 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사람이며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믿게 되는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0,12)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셨고 우리 안에 비추시고 지식과 이해력, 곧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믿을 수가 없다. 모든 신자 안에는 성령께서 필연적으로 내주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전체 성경의 기본적 진술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새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이다. 그는 성령으로 난 사람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중생은 성령의 은밀한 사역이다. 그것은 체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은밀한 사역이다. 사람은 그에게 그 일이 발생했을 때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이고 성령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성령으로 세례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저는 주장하고자 한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성령의 세례란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행해지는 어떤 것이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특수하게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이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고전12:13)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즉 구약성경의 성도들과 함께 후사가 된 시민이 되었다고 한다. 신구약 성경에 구원의 길은 오직 한 길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안에서 뿐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분에 대한 증거를 믿었다.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주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고 하셨다. 비록 세례 요한이 선지자들 중의 최종 선지자요, 하나님의 자녀이며, 특이한 하나님의 종이며, 그리스도인같이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은총들을 향유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9). 이런 방식으로는 성령이 주어진 것은 오순절날이었다. 사도들은 오순절 이전에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도 주님은 제자들과 세상을 분명하게 구분지었다. 부활하신 후에도 요한복음 20장에서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하셨다. 그렇지만 아직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는 못했다.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오순절날이었다.
사도행전 8장에서도 빌립에 의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하니 성령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로 믿는 참된 신자들이었고 그래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는 못했다. 이 진리는 너무 중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편견이나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고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울의 경우도 예수님을 보았고 믿었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안수하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였을 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 받기 전에도 성령을 받을 수 있다. 물 세례와는 무관하게 성령의 세례가 있을 수 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너희가 믿을 때(흠정역은 ”믿음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한다. 이것은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 가정은 성령의 세례가 그들이 믿을 때에 거의 동시에 임했다.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고도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확증된 진리임이 분명 확실하다.
행 19:4,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그들은 참 신자,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러나 19:6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한다. 여기에서도 참 신자이면서도 아직 성령으로 세례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대적인 증거가 있다.
중요한 요점은 믿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선이 있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1:13-14에 나오는 마지막 증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믿은 후에:흠정역)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신자만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며,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 “믿어 -- 인치심을 받았으니--.”
여전히 똑같은 순서이다.. 믿는 일이 먼저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세례받는 일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같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양자는 분명하게 구별되고 분리된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날 때 필연적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분명하고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을 피상적으로 스쳐가기 때문이다.
제 2 장 성령세례에 의한 확신
요한복음 서두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상과 모형을 제시해 주며, 또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성령세례에 대한 교리를 이해해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며 핵심이 되는 것이 없다고 분명히 해준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 구원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점에서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교회는 죄와 치욕의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한 불경과 증오 그리고 적대감에 대해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 유일한 소망, 현 시대의 가장 긴박한 요구는,
교회의 부흥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개인 신앙의 부흥을 의미한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나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구약과 신약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 태어난 사람으로 성경은 그 사람 안에서 중생의 사역을 이루신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면,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세례 받은 자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중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 즉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본질적 특징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성경의 어느 한 부분도 어느 다른 부분과 대치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오직 옳은 견해는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의 양자를 다 취하는 것이다. 성경 어느 한 부분의 뜻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성경의 다른 부분을 희생시키는 것은 고등비평적 태도이다. 성경의 어떤 가르침도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예외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그릇된 것이다. 우리가 읽는 모든 성경은 우리 자신들에 적용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개인과 또 기독교회에 기대해야 하는 모형, 즉 표준이나 규범의 일종이다.
기독교의 부흥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부흥을 정의하는 최선의 것은 교회가 사도행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즉 일종의 오순절의 재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성령이 교회 위에 다시금 부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하고 필수적인 교리의 부분이다. 사도행전 2장이나 그 외의 다른 어디서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이 기쁨과 행복 그리고 확신 및 신뢰에 차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교회사에 있어서 종교개혁과 부흥 등의 모든 위대한 시대의 특징이었다.
여러분 모두는 그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 속에 아바 아버지라고 외치는 본질적 외침을 소유했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또 그리스도와 더불어 기업에 참여한 것을 어떤 의심이나 반박 또는 불안이나 망설임 없이 믿고 있는가? 여러분은 충만한 확신으로 즐거워하는가?
믿음을 얻는 것과 믿음의 완전한 확신을 혼동시키는 것은 잘못된 일이고 위험한 일이다. 신약의 서신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그들 위에 부으심으로 기독교회를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는 성령세례를 받은 교회이다. 그리고 신약의 모든 교훈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와 같아야 한다.
여러분은 신약의 서신서들이 신자들에게 성령세례를 구하라고 권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데 왜 그런가? 그들은 이미 그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는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무시하고서 우리 주님의 교훈과 신약 서신서들의 교훈에서만 여러분의 가르침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위험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을 재삼 강조한다. 제가 주장하고 있는 강조점은 신약의 가르침에 따른 것으로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계속 교회의 역사가 중생과 성령세례와의 사이에 구별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중생과 성령세례 사이의 이 중대한 구별에 대하여 최종적인 증거는 주님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가 모든 의를 완성하시려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1-22).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을 입어”(눅 4:1)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성령에게 이끌리셨다”.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14절).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눅 4:17~18,21).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이 인치신 자니라”(요 3:24). 성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인치셨는데, 요단 강에서 예수님 위에 성령을 보내실 때 하나님은 그를 인치셨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무엇 때문인가? 여기에 바로 결정적 요점이 있다. 거기에서 주님은 그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는 인간으로 사셨으며 목수로 일하셨지마는, 이제 서른의 나이에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여기에 이러한 교훈이 있다. 비록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이 되셨으며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사셨기 때문에, 그의 완전함 속에 성령 받으시길 원하셨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주셨다. 성령이 그의 위에 임하셨다. 그때에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권능으로 나가셔서 전파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는 말씀하셨다. “나는 전파하기 위하여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성령의 능력을 부여받지 않고서는 구원의 복음에 대하여 증인이나 전파자나 증언자로서 활동하시지 않으셨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령세례의 목적을 보이고자 한다.
우리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비록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할지라도 인간의 형체를 지닌 즉 종의 형상을 지닌 메시야로서 그의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하여서 성령의 세례를 필요로 하셨으며, 성령이 그 위에 임하셨는데, 이것은 마치 제자들과 다락방의 120명, 그리고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 위에 임하신 것과 같으며, 부활의 모든 때에 신도들 위에 임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그는 메시야적 사역을 완수하셨으며, 성령의 권능으로 말씀하시고 사셨으며, 무한한 성령의 능력으로 죽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
여러분은 다시 태어나는 즉 신적 본질에 동참하는 중생과, 성령세례와의 사이에 본질적 구별을 확고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난관에 빠지게 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 주님께 일어난 사실을 납득이 가도록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제 4 장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 로이드 존스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서도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될 수 있다.
성령세례란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다.
그것은 오직 주님께 속한 행동이다. 즉 “그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가 근본 주제이다.
그분의 행동이며 그분의 특권이다.
사용된 용어들은 “부음을 받았다”, “그들이 충만해졌다”, “그들 위에 임했다”이다.
여기 이 사람들은 받는 사람들이다.
성령세례는 교회 역사상 모든 위대한 부흥들의 원동력이 되었다.
성령세례와 부흥과의 사이에 있어서 차이점은 단순히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수효의 차이이다.
부흥은 큰 무리가 동시에 성령에 의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다.
기독교의 모든 부흥은 오순절의 재현이다.
성령세례와 엡 5:18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다르다.
물론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하고 있다.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하는 그 사실이
반드시 그의 성품에서 도덕적 우수성을 보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는 있지만 성령의 열매를 보여줄 수는 없다.
회심의 순간에 즉시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매는 성장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화이고 매우 다른 것이다.
성령세례의 첫 번째 결과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우리 위에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에 대한 체험적 증거이다.
반면에 성령의 열매는 성장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간접적이고 계속적이며 정기적인 사역의 결과이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는 우리 안에서 생기게 된다.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으로 엡 5:18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엡 5:18은 권고이고 명령이다.
우리는 성령을 “슬퍼하게 하거나”, “소멸하거나”, “성령을 거스릴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세례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억제하지 못한다.
성령세례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발생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그것을 행하시는 분은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때에 그 자신의 방식에 따라 행한다.
엡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라고 한다.
고전 14장,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신령한 영적 능력과 더불어 공존한다.
사도는 말한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엡 5:18에서 사도는 성화에 대하여 말한다. 성령의 일반사역이고 내적사역이다.
성령 세례는 예외적이며 직접적인 범주에 속한다. 부어주시고 성령으로 흠뻑 젖게 한다.
제 6 장 기쁨, 사랑, 그리고 이해
- 성령세례 체험의 기록들
성령세례는 사도들이나 특출한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전세기를 걸쳐 평범한 사람들이 체험한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는 말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에게”라고. 그러나 지금은 20세기이므로 이런 종류의 일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하는 아주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바로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서나 수여받을 수 있는 것으로 이에 대한 제한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이 영광스럽고도 놀라운 체험의 또다른 국면들과 현시들을 고찰해 보자. “구주를 생각만 해도 좋거든” 이 찬송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노래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태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기쁨과 감사의 요소. 사도행전 2장,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바로 이것이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로 오직 이러한 기쁨과 환희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었는가?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로마서 5장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1-5).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과 확신의 필연적인 결과는 우리가 이 큰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요한 일서 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성령세례에는 예외적인 기쁨과 환희가 있다. 모든 부흥의 시대마다 주요한 특징으로서 언제나 기쁨과 찬양의 영이 있었다. 부흥의 첫 번째 결과는 항상 사람들을 낮추며 그들을 책하고 그들을 영혼의 고통 속에 집어 넣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그 깊은 심연으로부터 높은 곳으로 들려 올려져 기쁨과 환희가 이전의 처참과 무가치와 비난의 감정에 부합하게 한다.
저는 세상이 기독교의 모든 조직화된 노력들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세상이 주의를 기울이게 될 오직 단 한 가지의 사실은 이 환희의 정신으로 가득찬 일단의 사람들에게서 이다. 바로 이 방법에 의해서 기독교가 고대세계를 정복했다. 설사 그들을 감옥에 넣거나 심지어 그들을 죽게 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이를 문제삼지 않고 계속 기뻐하며 환난 중에도 기뻐했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이 가르침을 이해하고 이것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올리버 크롬웰의 전속목사였던 존 호우 목사는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성경 여백에 이렇게 써있었다.
“1689년 12울 26일, 이후 나는 오랫 동안 신앙의 목표들에 대한 확고하고 의심없는 동의 이외에도 그것들에 대한 생생하고 향기로운 맛과 흥미가 필요하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왔다. 그리고 더 강한 힘과 더욱 왕성한 활기가 내 심령의 가장 깊숙한 곳을 관통하며 거기에다 깊이 뿌리를 내리고 고정됨으로써 나의 생활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에 나는 설교 도중에 고린도후서 1:12,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는 말씀이 크게 부딪쳐 왔다. 바로 오늘 아침에 나는 가장 매력적이며 상쾌한 꿈에서 깨었다.
하나님의 높은 보좌에서 흘러 나오는 놀랍고도 풍성한 천국의 광선이 나의 열려지고 넓혀진 가슴에 밀려오는 듯하였다. 같은 종류의 것을 1704년 10월 22일에 하나님의 감탄할 만한 관대하심과 성령의 가장 기뻐하시는 위로의 감화를 통해서 민감하게 느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심령 가운데 풍부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신 기쁨으로 인하여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두드러지게 그의 복된 성령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위대한 천재들 중의 한 사람인 블레스 파스칼(17세기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종이쪽지에 그가 무엇인가 써 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의 셔츠 안쪽에 꿰매여 붙여놓은 것이었는데, 그가 했던 주목할 만한 체험을 묘사해 놓은 호신패였다.
1654년 은혜의 날: 밤 약 10시 30분부터 자정이 지난 약 30분까지, “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러나 철학자들이나 현인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안전, 안전, 감동,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당신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는 오직 복음 안에서 가르쳐주신 길에서만 발견되어집니다. 인간 영혼의 위대함. 오, 의로우신 아버지시여 세상이 당신을 알지 못하였나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아옵나이다. 기쁨, 기쁨, 기쁨, 환희의 눈물. 내가 당신으로부터 떠나서 있었나이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나를 용서하셨나이까? 내가 당신에게서 영원히 떠나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그들이 당신께서 홀로 참 하나님이 되시며 당신께서 보내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나는 스스로 그 분에게서 떠나 있었습니다. 나는 도망치고 부인했으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결코 내가 그 분에게서 떠나지 않게 하소서. 그 분께서 나를 주장하십니다. 오직 복음에서 가르치신 길 대로만. 유쾌한 전적 포기.
그때부터 그는 세상과 그의 모든 수학적 추구를 버리고 뽀로로얄에 있는 당시 쟌센파라고 하는 종교단체에 가입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아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서한집>과 <명상록>을 썼다. 그는 위대한 철학자요 과학자였으나 그가 참으로 지식과 이해에 도달한 것은 바로 이 한 체험에서였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사랑이 자라나고 있는 것과 그 분에 대해서 더욱 알고 싶어하는 소망과 심지어 그와더불어 함께 있고 싶어하는 소망을 깨닫고 있는가? 이것이 성경에서 증명되고 전세기를 걸쳐 성인들이 증거하는 일이다. 저는 이것을 여러분에게 과제로 남겨 놓겠다. 여러분은 기독교의 진리를 알며 또 기독교의 교리를 알고 계시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목적을 확실히 알며 이해하고 계시는가? 이것의 정도(正道)가 바로 성령세례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것보다 더 큰 빛과 지식과 교훈을 주며 우리가 증인이 되도록 그렇게 하신다.
존 플라벨은 우물가에 앉아서 놀라운 체험을 하였다. “수년 후 그는 그가 읽은 모든 책과 그것에 대해 즐겨 이야기 했던 것 보다도 그것에 의해서 더욱 더 하늘나라의 생활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죽기 조금 전에 그가 더 이상 쓰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압도적이며 직접적인 체험을 했다. 그가 그의 위대한 <신학대전>을 완성하라는 그의 친구의 독촉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이 내게 나타나 내가 썼던 그 모든 것이 밀짚처럼 보여서 지금 나는 나의 삶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다.”
그 분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며 절대적인 확실성과 빛과 지식과 진리 그 자체이시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빛과 지식과 이해이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