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제5권, 왕국의 기반은 우연적인 것도, 별들의 위치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다(강의안6)
제 5 권
개요: 저자는 먼저 로마제국의 번영- 이미 앞에서 거짓 신들에게 돌릴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을 운명에 돌리려는 자들을 논박하기 위해 운명론을 다룬다. 그후 저자는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에는 모순이 없다고 증명한다. 그리고나서 고대 로마인들의 관습을 말하고 난 후, 로마가 그 영토를 넓히게 된 것은 비록 로마가 참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로마인 자신들의 덕과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리스도교인 황제의 참된 행복을 설명하고 있다.
1. 로마제국과 다른 모든 왕국의 기반은 우연적인 것도 아니고, 별들의 위치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윈인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어떤 이해가능한 질서에서 생겨나지 않은 그런 원인을 갖는 것들을 “우연”이라고 하고, 하나님이나 인간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어떤 종류의 필연에 의하여 발생되는 것들을 “운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견해나 판단에 따르면, 로마제국이 거대해진 원인은 우연적이지도 않고 운명적이지도 않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의 왕국은 하나님의 섭리로 세워졌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의지나 능력 자체를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에 이것을 운명에다가 돌린다면, 그로 하여금 자기 견해를 유지하게 하되 말을 바꾸어 하게 하라. 왜 그는 나중에 어떤 사람이 “운명”이란 무슨 뜻이냐고 질문할 때 할 말을 애초에 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운명”이라는 말을 일상적인 어법에 따라 들을 때면, 단지 어떤 사람이 탄생하거나 수태될 때 존재했던 별들의 특정 위치에서 생긴 영향력이라고 이해한다.
2. 쌍둥이의 건강상 차이점에 관하여
키케로는 유명한 의사인 히포크라테스가 어떤 형제의 경우에 동시에 병이 들었다가 각각 동시에 병세가 위기로 치달은 다음 진정된다면, 그들이 쌍둥이인지 의심했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말한다. 점성술에 깊이 빠진 스토아주의자인 포시도니우스는 그들이 동일한 성좌 아래에서 수태되고 태어났었다고 가정함으로써 그런 사건을 설명하곤 했다. 이런 문제에서는 의사의 추측이 훨씬 더 받아들여질 만하며, 훨씬 더 믿을 만하다.
천궁도에서 아무런 변화가 발생하지 않을 때 쌍둥이 형제가 연이어 출생한다면, 그 둘이 모든 점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해야 할 터이지만 어떤 쌍둥이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런 일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아이가 출생이 늦어져 천궁도에 변화가 생긴다면 부모가 달라야 할 터이지만, 쌍둥이의 경우에 이런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9. 키케로가 내린 정의와는 상반되게도 하나님의 예지능력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우리는 높고 진실된 하나님을 고백하기 위하여 그의 의지와 최고의 능력과 예지력을 고백하는 바이다. 미리 알고 계신 내용에 대해 결코 오류가 없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리라고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지의 작용에 의하여 하는 일이 자의적인 행동이라고 두려워하지도 말자. 키케로는 바로 이 점을 두려워하여 예지능력을 반대했다. 스토아주의자들 역시 모든 일이 운명에 따라 발생된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만사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키케로가 미래의 일들을 아는 데 대해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이었기에 그토록 저주스런 논의로써 그런 생각을 분쇄하려고 애를 썼던가? 그 이유는 의심할 바 없이 바로 이것이었다. 즉 모든 미래사가 알려졌더라면, 모든 일은 미리 알려진 대로 발생될 것이다. 만사가 이렇게 진행된다면, 하나님의 예지 속에서 그 질서가 결정된다. 만물의 질서가 결정되어 있다면, 만사는 운명에 의해 질서가 잡혀있다고 키케로는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우리 자신의 능력에는 아무것도 없게 되고, 의지의 자유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 점을 인정한다면,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이 파괴되고 만다고 그는 말한다. 법률이 제정되어도 소용없다. 비난이나 칭찬이나 질책이나 권고를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선인에게 상급을 주고, 악인에게 징벌을 내리더라도 전혀 정의롭지 않다.
그러므로 키케로는 위대하고 현명한 사람이자 인간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서 폭넓은 경험과 실천적인 기술을 가지고 자문하는 사람으로서, 미래사에 대한 예지를 확실하게 부인하기 위하여 둘 중에 의지의 자유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는 인간들을 자유롭게 만들고자 원했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신성을 모독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종교심을 가진 사람은 둘 다 선택하며, 둘 다 고백하며, 경건한 믿음에 의하여 둘 다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이런 불경건하며 신성모독적이고 무례한 주장에 대하여, 하나님이 만사가 발생되기 전에 그것을 아시기도 하며 우리 자신은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만 행해진다고 알고 느끼는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의지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만사가 운명에 따라 진행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는 어떤 일도 운명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확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의 수태나 출생 때 별들의 위치를 의미하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운명이라는 단어는, 점성술 자체가 기만이므로 아무 의미가 없음을 입증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가 지배하는 인과적인 질서를 부인하지도 않지만, 운명(fatum)이라는 단어를 파리(fari) 즉 “말하기”에서 파생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인과적인 질서를 “운명”이라고 지칭하지도 않는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61:11)라는 성경말씀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두 번 하신 말씀”이라는 표현은 “움직일 수 없게”, 즉 그는 모든 되어질 일들과 그분이 하실 모든 일들을 변경할 수 없게 알고 계신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모든 원인의 확정된 질서가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의지의 행사에 달려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는 인간 행동의 원인이기도 하므로, 우리의 의지 자체는 하나님에게 확실하며 그분의 예지에 의하여 포착되는 바로 그 원인의 질서에 포함되어 있다. 만물의 모든 원인을 미리 알고 계신 분은 분명히 그 원인들 중에 우리의 의지에 대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이 의도하고 예지하는 만큼의 능력만 가지고 있다. 미리 아시는 내용에 전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의 능력과 우리의 행하는 일을 예지한다. 우리 의지의 장래의 능력이 완전히 확정되고, 그 장래의 행적이 철저히 확인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10. 우리의 의지는 필연성에 의하여 통제되는가?
우리의 의지의 능력 안에 무엇이 있을 것인지 하나님이 예지한다고 하여, 우리의 의지 안에 어떤 것도 없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을 예지하는 분에게는 미리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의 의지 안에 무엇이 있는지 예지하는 분이 미리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비록 그가 예지한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무언가 미리 일고 있다면, 우리의 의지의 능력 안에는 무언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예지를 옹호하기 위하여 불경건하게도 그분이 미래사를 안다는 사실을 부인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 둘을 다 포용하고 있고, 그 둘을 다 믿음과 성실로 인정한다. 앞의 주장은 우리가 잘 믿기 위해서이고, 뒤의 주장은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잘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를 유지한다는 목적으로 결코 하나님이 예지력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의 도움으로 현재 자유로우며, 장래에도 자유로울 것이다.
결과적으로 법률을 제정하고 비난과 훈계와 칭찬과 질책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것들을 예지하고 있고, 그런 것들은 그분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예지한 만큼, 크게 소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예지하는 모든 것을 얻는데 기도가 유용하다. 그리고 선행에는 보상을 하고, 죄악에는 징벌을 가는 것이 정당하다. 어떤 사람이 범죄하리라고 하나님이 예지했기 때문에 그가 죄를 것은 아니다. 반대로 예지함에 오류가 없으신 그분이, 그 사람 자신이 범죄하리라고 미리 아셨기 때문에 범죄한 사람이 바로 그 당사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람이 죄를 짓기로 의도하지 않는다면, 범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죄짓 않기로 의도했었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실조차 예지했을 것이다.
11. 그 법으로 모든 것이 이해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에 관하여
가장 높고 진실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과 성령과 함께 셋으로 하나인 분이다. 그는 모든 영혼과 모든 육체의 조성자요, 창조자인 한 분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통하여 행복한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선물에 의하여 행복을 얻는다.
그분은 육체에 그 기원과 아름다움과 건강과 풍성한 번식력과 정렬된 지체와 각 부분의 건전한 조화를 부여하셨다. 그분은 비이성적인 영혼에는 기억, 감각, 식욕을 주셨지만, 이성적인 영혼에는 이에 덧붙여 정신과 지성과 의지를 주셨다. 그분은 하늘과 땅, 천사와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아주 작고 사소한 동물들의 내장이나 새의 깃털이나 식물의 작은 꽃잎이나 나무의 잎마저도 각 구성요소의 조화, 사실상 일종의 평화가 없이 버려두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이 인간의 왕국과 그 지배와 예속을, 당신이 섭리의 법칙 밖으로 내던졌다고 믿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이다.
14. 의인의 모든 영광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사람의 칭찬을 얻으려는 욕심이 근절되어야 함에 관하여
그러므로 이런 욕심에 굴복하는 것보다는 그에 저항하는 편이 더 낫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오점으로부터 더 순수하면 순수한 사람일수록, 더 하나님을 닮기 때문이다. 덕성에 있어서 상당한 진보를 이루고 있는 사람의 마음조차 그런 유혹으로부터 면제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악이 사람의 정신으로부터 철저히 근절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명예욕을 이겨내도록 하자.
거룩한 사도들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므로 배척당한다”는 키케로의 말대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배척당했던 곳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할 때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극도로 혐오시되던 곳에서도 심령의 의사이자 선한 스승인 분으로부터 들었던 말씀 즉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 혹은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3)는 말씀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그 은혜로 인해 그들을 그 당시의 모습으로 만들어준(고전15:10)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인도했던 사람들의 심령 속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밝힌 횃불, 다시 말하여 사람들을 사도들과 같이 만들 수 있었던 횃불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스승은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는 것이 좋지 않다고 가르치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6:1)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말씀하셨다.
15. 하나님이 로마인들의 덕성에 대하여 부여해 준 세상적인 보상에 관하여
만약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장 뛰어난 제국이라는 세상적인 영예를 부여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스스로의 선한 성질, 즉 그토록 큰 영예를 얻고자 추구했던 덕성에 대하여 아무런 보상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영예를 얻기 위하여 어떤 선행을 하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에 관하여 주님께서도 “진실로 너희이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아미 받았느니라“(마6:2)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공화국을 위하여 그들의 사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고, 국가 재정을 위하여 탐욕에 저항했으며, 국가적인 선을 위하여 사심없는 마음으로 처신했으며, 법을 어긴 죄를 범하지도 않았고, 어떤 육체적인 욕정에 탐닉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저희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라는 지고하고 참되신 하나님의 판결에 대하여 불평을 터뜨릴 이유가 하나도 없다.
16. 로마인들의 덕성으로 유용한 모범을 삼을 수 있는 천상의 도성의 거룩한 시민들이 받을 보상에 관하여
그러나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하나님의 도성을 위하여 심지어 현재에서도 비난을 감수하는 성도들이 받을 보상은 이와 아주 다르다. 그 도성은 영원하다. 그곳에서는 죽인 이가 없기 때문에, 태어나는 이도 없다. 그곳에는 여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참되고 완전한 행복이 있다. 우리는 순례길을 걸어갈 때에 그 아름다움을 사모하지만, 이미 그곳으로부터 믿음의 표적을 얻었다. 그곳에서는 해가 선인과 악인에게 떠오르지 않고, 의로운 해가 오직 선인만 보호한다.
그러므로 로마인들의 제국과 영광이 그토록 두드러지게 확장되었던 것은 로마 시민들에게 보상을 베풀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세상 나라의 시민들이 인간적인 영예를 얻기 위하여 그 나라를 그토록 사랑했다면, 영원한 도성의 시민들이 이곳에서 순례길을 가면서 로마인들의 모범을 부지런하고 냉정하게 숙고해 보고, 영생을 위하여 저 하늘 나라에 얼마나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지 알게끔 하려는 목적도 있는 것이다.
19. 진정한 명예심과 지배욕의 차이에 관하여
진정한 명예심과 지배욕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칭찬을 지나치게 기뻐하는 사람들은 지배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열망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의 칭찬에서조차 진정한 명예를 바라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좋게 판단하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비록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올바른 판단의 근거가 되는 많은 선한 도덕적 덕목들이 있다. 살루티우스가 말한 바, “올바른 방법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선한 도덕적인 덕목으로 명예와 권력과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명예욕은 갖고 있지 않으면서, 지배권과 권력을 얻고자 바라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주 흔히 그리고 매우 공개적인 범죄행위로써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 덕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명예를 경멸하는 것은 커다란 덕목이다. 왜냐하면 명예를 하찮게 여기는 행동은 사람들의 판단에는 드러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보시기 때문이다.
명예를 멸시하고 오직 지배만 탐하는 사람은 잔인함과 방탕함이라는 악덕에 있어서 짐승을 능가한다. 어떤 로마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배욕에만 사로잡혀 있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었다. 역사는 그런 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런 악덕의 정점 아니 사실상 정상에 다다른 첫 번째 인물은 네로 황제였다.
참으로 경건한 모든 사람들은 진정한 경건, 즉 참된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배 없이는 어느 누구도 참된 덕을 가질 수 없다는 것과, 인간의 칭찬의 노예가 참된 덕이 아니라는 데에 진정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불리는 영원한 도성의 시민이 아닌 사람이 그런 덕성을 갖지 않는 편보다 갖는 편이 지상의 도성에 더 유용하다.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참되게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사람들을 통치하는 기술을 갖추고 권력을 가지는 경우보다 인간사에 다행스런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현생에서 아무리 큰 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들의 소망과 믿음과 간구로 그것을 베푸신 것을 오직 그분의 은혜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거룩한 천사들의 완전한 의에는 스스로 얼마나 부족한지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이 없이 인간적인 명예의 노예에 불과한 그런 덕성은 아무리 칭찬받고 인정받는다고 할지라도 참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소망을 두고 있는 성도들이 가진 덕성의 미약한 첫머리와도 전혀 비교될 수 없다.
21. 로마 제국은, 그에게서 모든 능력이 나오며 그 섭리로 모든 일들이 통치되는 분에 의하여 부여되었다
우리는 왕국과 제국에 부여되는 권력의 원인을 오직 참된 하나님에게만 돌려야 한다. 그분은 하늘 왕국에서는 경건한 자들에게만 행복을 주시지만, 세상의 왕권은 결코 불의할 수 없는 기뻐하심에 따라 경건한 자들에게나 불경건한 자들에게나 주신다. 참된 한 분 하나님이자 정당한 판단과 도움 없이는 결코 사람들을 버리지 않는 그분은, 원하실 때, 그리고 원한 만큼의 크기로 로마인들에게 왕국을 부여했다. 한 분 하나님을 경배했던 히브리인들은 차치하고라도 아시리아인들과, 심지어 그들 자신의 책이 증언하기를 선신과 악신이라는 두 신만 숭배했던 페르시아인들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왕국을 부여받았다.
이 점은 국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개인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마리우스에게 권력을 주신 분은 또한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도 권력을 주었다. 아우구스투스에게 그것을 준 분은 네로에게 또한 그것을 주었다. 아주 관대한 황제들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 부자에게 그것을 준 분은 그것을 또한 잔인한 도미티아누스에게 주었다. 그리스도인인 콘스탄티누스에게 그것을 주신 분은 배교자인 율리아누스에게도 그것을 주었다. 분명히 이런 일들은 한 분 하나님에 의하여 그 기뻐하심에 따라 통치되고 인도되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동기가 숨겨져 있다고 하여, 그런 일들이 부당하단 말인가?